의천(義天)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055~1101) 고려의 승려로 천태종 중흥의 시조. 자는 의천. 이름은 煦. 시호는 大覺國師, 문종의 넷째 아들. 어머니는 仁睿太后. 문종 19년(1065) 王師 爛圓에 의하여 승려가 되어 靈通寺에 있었고, 13세에 祐世(廣知開宗弘眞祐世)의 호를 받고 僧統이 되었다. 선종 1년(1084) 송나라의 淨源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求法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누누이 말리므로 남루한 옷차림으로 몰래 제자 壽介만 데리고 1085년 송나라로 떠나매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樂眞 · 慧宣 · 道隣 등을 수행케 했다. 송나라 哲宗帝가 영접하여 啓聖寺에 있게 하고, 화엄법사 有誠으로 하여금 상종케 하여, 賢首 · 천태 양교의 判敎同異 · 幽妙의 뜻을 문답하였다. 또 相國寺의 圓炤선사와 興國寺 西天의 三藏 天吉詳을 찾아보고 主客員外郞 楊傑을 대동하고 송나라 서울을 출발, 金山의 佛印선사 了元에게 들려, 杭州의 源公법사를 찾아 慧因에게 華嚴疏鈔의 의심되던 것을 물었다. 그때 선종의 귀국을 청하매 慈辯대사에게 천태종의 경론을 듣고, 천태산 智者대사의 부도에 예배, 발원문을 지어 천태종을 본국에 중흥할 것을 맹세했다. 또 靈芒의 大智대사에게 戒法을 받는 등 고승 50여 명을 만나 法要를 문답하였다. 1086년(선종 3)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고 환국하여 釋典과 경서 1천 권을 바쳤으며, 흥왕사에 있으면서 그 곳에 敎藏都監을 두게 하고 요나라·송나라·일본에서 경서를 구입, 고서를 수집하여 속장경 4,740여 권을 간행하였다.
1094년(선종 11) 洪圓寺에 주지로 있었고, 그후 해인사 · 흥왕사에 있다가 국청사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하고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하였다. 숙종 때 鑄錢論을 주장하여 사회 경제면에도 많이 공헌한 바 있고, 1098년(숙종 3) 왕자 澄儼이 승려가 되자 그 스승이 되었다. 숙종 6년(1101) 國師로서 總持寺에서 입적하다. 五冠山 영통사 동쪽에서 장례를 지내다. 金富軾의 銘文으로 된 비가 세워지고, 또 남숭산 선봉사에도 林存의 명문으로 해통천태시조대각국사비가 세워졌다. 西湖의 승려 혜소는 국사의 고제로서 후에 行錄 10권을 선집하였다. 태백산인 용응은 국사의 適嗣로 法海의 龍門이라 호하였다. 저서로는 圓宗文類, 釋苑詞林, 海東有本見行錄, 成唯識論單科, 天台四敎儀註, 義天目錄 등이 있다.
참고
천태종(天台宗) : 또는 天台法華宗 ∙ 天台法華圓宗 ∙ 台宗 ∙ 台家라고도 함. 중국 隋나라 때 천태산에서 天台 智顗를 開祖로 하여 창립한 대승불교의 한 파. 법화경을 근본경전으로 하며 禪定과 지혜의 調和를 宗義로 함. 智顗는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여 조직적으로 불교를 통일하고, 적극적으로 諸法實相論을 주창하며 심오한 불교학의 체계를 세워「法華文句」∙「法華玄義」∙「摩訶止觀」등 三大部를 지어서 한 宗을 이룩하였다. 그 뒤에 章安 ∙ 智威 ∙ 慧威 ∙ 玄朗 ∙ 湛然 등이 계승하고, 荊溪 湛然은 三大部의 주석을 지어 그 때에 융성하던 법상종 ∙ 화엄종 ∙ 선종 등에 맞서 천태종의 眞面目을 크게 선양하였다. 그 뒤에 道邃 ∙ 廣修 ∙ 物外 ∙ 元琇 ∙ 淸竦 ∙ 義寂 등이 전해오다가, 五代의 전란에 宗典이 흩어지고, 思潮가 떨치지 못하였다. 義寂은 그 宗典을 고려와 일본에 전하여 다시 宗義의 연구가 성행하였고, 송나라 때에는 山家 ∙ 山外의 두 파로 대립하게 되었다. 山家派는 四明知禮가 으뜸이었는데 그의 학풍은 천태종의 근본 사상인 物 ∙ 心을 같이 취급하는 사상을 굳게 지키고, 또 현재의 자기를 여의지 않고 전체를 해결하는데 치중하였다. 그리고 源淸 ∙ 宗昱 ∙ 智圓 ∙ 從義 ∙ 仁岳 등이 영도한 山外派의 학풍은 緣起論에 반하여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데 있었다. 중국에서는 明나라 때의 智旭이 종풍을 빛낸 것이 끝이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玄光 ∙ 法融, 고구려의 波若, 고려의 諦觀 등이 천태종을 깊이 연구하였다. 또 義天은 송나라에 유학하여 宗旨를 배워 돌아온 후 개성에 국청사를 짓고, 천태종을 설립하였다. 그 門下에는 德麟 ∙ 翼宗 ∙ 景蘭 ∙ 連妙 등이 있었다. 천태종은 법화경 ∙ 대열반경 ∙ 대품반야경 ∙ 화엄경 ∙ 금광명경 ∙ 유마경 ∙ 지도론 ∙ 중론 ∙ 법화론 등을 所依의 경전으로 삼고, 實相論의 극치를 주장하였다.
대각국사(大覺國師) : 고려 승려. 우리 나라 천태종의 중흥조 義天(1055~1101)의 시호.
시호(諡號) : 學德이 높은 고승에게 국왕이 주는 死後의 嘉號.
승통(僧統) : 僧官의 이름. 僧史略中에 의하면, 姚秦이 처음 승관을 두어 正이라 하고, 魏나라는 이를 고쳐 統이라 하여 沙門統·僧統·沙門都統의 세 이름을 두다. 皇始 때(396~398)에는 法果가 처음으로 사문통에 취임하고, 文成帝 때(452~465)에 계빈국 사문 5인을 승통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효문제 때에 曇曜가 처음으로 沙門都統에 취임하고, 뒤에 수나라 때에는 大統이란 이름이 생겨, 曇延이 이에 취임함.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 말기까지 큰 절마다 승통이 있어 자기 관할의 승려 행정을 맡아 처리하였다.
교장도감(敎藏都監) : 고려 宣宗 때 대각국사의 청으로 흥왕사 안에 설치했던 기관 이름. 이곳에서 국내의 불교주석서는 물론 宋·遼·일본 등지에서 널리 수집한 불교주석서 1,085부 4,757권을 간행할 계획을 세워 진행하던 중에 대각국사의 入寂으로 중단되었다. 교장도감에서 간행된 續藏經은 불교사에 길이 남을 문헌보전 사업이었다. 그때 출판된 <涅槃經疏> 등 수십종이 이조 세조 때 설치된 간경도감에서 판각·간행되었으나 지금은 극히 적은 수가 전해지고 있다.
속장경(續藏經) : 대장경을 결집할 때 빠진 것을 모아 간행한 경전. 고려의 대각국사 義天이 송나라 · 契丹 · 일본 등지에서 경전과 佛書를 구하여 흥왕사에 敎藏都監을 두고 숙종 1(1096)년에 완성하여 대구 符仁寺에 두었으나, 고려말 몽고군의 침입 때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은 그 목록만이 남아 있음.
국사(國師) : ① 德行이 높은 승려에게 주던 칭호의 하나. 고려 광종이 惠居대사에게 국사의 칭호를 내린 것이 그 시초였다. 王師가 국왕의 스승의 지위인데 비해 국사는 국가의 師表로서 왕사보다도 높은 최고의 僧職이었다. 광종 25(974)년 혜거국사가 入寂하자 坦文이 다시 국사가 되었는데 이 제도는 고려시대와 이조 초기까지 줄곧 행하여지다가 排佛 정책을 쓰면서 폐지되었다. 중국에서는 北齊의 天保 1(550)년에 法常이 제왕의 국사가 된 것이 그 시초. ② 6조 혜능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제자 慧忠국사를 말함.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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