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隨眠)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범어 anusaya의 번역.
① 煩惱의 별명. 번뇌는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어서 身心을 잠들게 한다. 그 활동하는 상태는 아주 미세하여 알기 어려우며 또 對境이나 相應心 · 心所와 서로 영향을 가지고 더욱 강하게 된다(隨增). 사람을 번뇌로 묶어 버리므로(隨縛) 隨眠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貪 · 瞋 · 慢 · 無明(癡) · 見(惡見) · 疑의 여섯 가지가 있어 6隨眠(六根本煩惱)이라 한다. 이 중에서 貪을 欲貪과 有貪으로 나눠 7隨眠이라고도 한다. 見을 五見으로 나눠 10隨眠이라 한다. 이것을 다시 세분하여 九十八隨眠이라고 한다.
② 唯識宗에선 번뇌를 곧 隨眠이라고 하지 않고 이것을 번뇌의 習氣 곧 種子를 가리켜서 번뇌의 종자가 우리의 아뢰야식에 가만히 들어와서 잠재하고 있다 한다. 經部에서도 번뇌가 생겨 활동하는 자리를 纏이라 하고 이에 대해 번뇌가 숨어서 잠자고 있는 상태에 있는 종자를 隨眠이라고 한다.
참고
번뇌(煩惱) : 범어 klesa의 번역. 吉隷捨로 음역하고, 惑이라고도 번역한다. 중생의 몸이나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고 어지럽히고 미혹하게 하여 더럽히게 하는 정신작용의 총칭. 그 성질은 不善 및 有覆無記이다. 중생은 번뇌에 의해서 업을 일으키고, 괴로움의 報를 받아 미혹의 세계(生死)에 매어 있게 된다. 이것을 惑業苦의 三道라 한다. 그래서 불교는 번뇌를 끊고 열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번뇌는 그 작용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을 갖는다. 隨眠·惑(이치에 어둡고 現象의 세계에 대해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것)·染·漏·結使·結·縛·纒·軛·暴流·取·蓋·繫·使·垢·株杌·燒害·箭·稠林(번뇌의 수가 많은 것을 무성한 삼림에 비유한 것)·塵勞·塵垢·客塵·諍根(다툼의 근본)이라고도 하고, 또 번뇌의 體 그것을 正使(다만 使라고도 한다), 體를 멸해도 역시 남아있는 관습의 기운을 習氣라고 한다. 모든 번뇌는 因力(아직 번뇌가 끊기지 않은 것)·境界力(욕심 등에 순응하는 대상이 나타나는 것)·加行力(대상에 대해서 非理· 作意를 일으키는 것)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俱舍論 卷二十〕혹은 境界力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도 있다고도 한다.〔入阿毘達磨論 卷上〕
구사종이나 유식종에서는 번뇌를 근본번뇌와 枝末번뇌의 두 번뇌로 나눈다.
근본번뇌라 함은 번뇌의 體 그것으로서,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는 번뇌로, 本惑·根本惑 혹은 다만 번뇌라고도 부르며, 有部에서는 隨眠이라고도 한다. 단 經部에서는 隨眠을 번뇌의 종자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서 번뇌의 現行(현재에 일어나서 활동하는 것)을 纒(전)이라 한다. 유식종에서도 隨眠이란 번뇌의 종자를 가리킨다고 말하며, 근본번뇌에 貪·瞋·癡·慢·疑·見(惡見)의 六번뇌(六隨眠)가 있는데, 見을 有身見·邊執見·邪見·見取見·戒禁取見의 五見으로 나누어 貪 등의 다섯과 합해서 十번뇌(십隨眠, 十使)라고 한다. 이 가운데 貪 등의 다섯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그 작용이 느리고 둔하기 때문에 五鈍使(五惑), 五見은 推察尋求하는 성질이 있고 그 작용이 빠르고 날카롭기 때문에 五利使라고 한다. 또 六隨眠 가운데 貪을 欲界의 탐과 上二界(색계·무색계)의 貪으로 나누어 이것을 각각 欲貪·有貪이라고 하며 합하여 七隨眠(七使)이라 하고, 혹은 十隨眠 중에 貪을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로 나누어 欲貪·色貪·無色貪으로 하고 十二隨眠(十二使)이라고도 한다. 유식종에서는 십종의 근본번뇌 가운데 제七識과 상응하여 항상 일어나는 我癡(無我의 이치에 미혹하여 나의 相에 어두운 번뇌로 無明을 말함)·我見(我執을 말하며 有身見의 일부)·我慢(나를 집착하고 나를 믿고 우쭐하는 거만)·我愛(나를 집착하여 나에 탐착하는 것)의 넷을 四煩惱(四根本煩惱, 四惑)라고 한다. 또 탐·진·치는 모든 악을 낳게 하는 근본(즉 因)이며, 대표적인 번뇌이기 때문에, 三不善根·三毒·三垢·三縛 등이라고 한다.
지말번뇌라 함은 근본번뇌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종속적인 번뇌로, 隨惑·枝末惑·隨煩惱라고도 한다. 단 수번뇌란 말은「心王에 붙어다니는 번뇌」란 뜻으로 풀어 근본번뇌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다. 지말번뇌에는, 구사종에서는 放逸·懈怠·不信·惛沈·掉擧·無慚·無愧·忿·覆·慳·嫉·惱·害·恨·諂·誑·憍·睡眠·惡作의 十九를 말하며, 유식종에서는 睡眠·惡作을 버리고 失念·散亂·不正知를 더하여 二十으로 하기도 한다.
業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惑을 發業의 惑(주로 다음에 말하는 分別起의 혹으로 특히 제六意識相應의 無明이 그것이다)이라고 하고 이에 대해서 迷界의 중생을 윤택하게 하고 삼계의 중생을 받게 하는 혹을 潤生의 혹(다음에 말하는 俱生起의 번뇌로 특히 제六意識相應의 貪을 主로 한다)이라고 한다. 또 어떻게 해서 번뇌가 일어나는가 하는 점에서 나누면, 二障 공히 각기 분별기와 구생기가 있다. 邪師·邪敎·邪思惟 등 밖으로부터의 緣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을 분별기의 혹이라고 하며, 태어나면서부터 자연히 일어나는 본능적인 것을 구생기의 혹이라고 한다. 십근본번뇌중에서, 의심과 邪見과 見取見과 戒禁取見과의 四는 분별기뿐이며, 다른 六과 二十隨惑은 양쪽에 모두 공통한다.
번뇌를 여의는 것을 離垢, 번뇌가 없는 것을 無垢, 번뇌가 다한 것을 漏盡이라고 한다. 아라한을 漏盡比丘, 또 漏盡하여 마음에 진리를 了解하는 것을 盡漏意解라고 한다.
대경(對境) : 경(境)→六根·六識의 대상. 六根이 이것을 상대하여 六識을 일으킨다. 인간의 마음이 이 대상을 상대하여 마음이 더럽혀지기 때문에 塵이라고도 한다. 또, 眼根 · 眼識의 對境을 色境이라고 하고, 耳根 · 耳識의 對境을 聲境이라고 하며, 똑같이 鼻 · 舌 · 身 · 意에 대해서 각기 香 · 味 · 觸 · 法의 境이 있으므로 이것을 합하여 六境 또는 六塵이라고 한다. 단, 意根 · 意識의 對境은 六根 전체에 관련한다. 六根과 六境을 十二處라고 하며 그중, 六根은 主觀에 속하기 때문에 六內處, 六境은 客觀에 속하기 때문에 六外處라고 한다. 六根 · 六境 · 六識을 합하여 十八界라고 한다.
상응심(相應心) : 번뇌와 밀접하게 結付되어 작용하는 마음을 상응심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마음을 不相應心이라고 한다. 般若流支譯의 唯識論에서는, 迷妄의 識은 상응심이고, 眞如(우주의 根本理體) 바로 그것이다. 自性淸淨心(根本識)은 불상응심이라고 한다. 起信論에서는 妄執分別의 麤雜한 마음은 상응심이고, 아뢰야식은 자성청정심과 無明이 화합해서 하나로 되었기 때문에, 둘이 상응할 수가 없고 따라서 불상응심이라고 한다.
심소(心所) : 心數라고도 번역하여 心에 속한 것이란 뜻. 자세히는 心所有法·心所法·心數法이라 함. 5位의 하나. 心과 相應하여 心과 동시에 존재하고 心에 종속하는 가지가지의 정신작용을 말함. 心所는 心을 따라다니므로 심소에 대해 심을 心王이라고도 한다. 심왕과 심소와의 사이에는 五義平等의 의미가 있어「相應」의 관계가 있다. 이런 까닭에 心所를 相應法·心相應法이라고도 일컫는다. 또 심왕을 떠나서 별도로 심소의 體가 있는가 없는가에 관해서 有部에서 別體說을 주장하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다.
심소의 數 및 그 분류방법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다. 구사론에는 受·想·思·觸·欲·惠·念·作意·勝解·三摩地의 10大地法(모든 심과 상응하는 심소), 信·不放逸·輕安·捨·慚·愧·無貪·無瞋·不害·勤의 10大善地法(모든 善心하고만 상응하는 심소), 癡·放逸·懈怠·不信·惛沈·掉擧의 6大煩惱地法(모든 染汚心, 곧 不善心과 有覆無記心이 공동으로 상응하는 심소), 無慚·無愧의 2大不善地法(모든 不善心만 상응하는 심소), 忿·覆·慳·嫉·惱·害·恨·謟·誑·憍의 10小煩惱地法(어느 特殊한 染汚心 곧 意識相應의 無明만 상응해서 무명만 생기고 또 각각 따로따로 생겨서 2가지 이상이 동시에 생기지 않는 심소), 惡作·睡眠·尋·伺·貪·瞋·慢·疑의 不定地法(위의 5가지 이외의 심소)이라 하는 6位· 46심소를 주장한다. 단 최후의 넷은 구사론에서는「等」이라는 語句를 써서 생략하고 있다. 성유식론등엔 遍行·別境·善·煩惱·隨煩惱·不定의 6位로 분류한다. 이에 관해서 四種一體義(4의 一切)를 내세운다. 곧 一切性(善·惡·無記의 3性에 공통으로 생기는 것)·一切地(有尋有伺·無尋唯伺·無尋無伺의 3地에 공통으로 생기는 것)·一切時(無始以來로 心이 있을 때는 항상 相續되는 것)·一切俱(일체심소가 동시에 태어나는 것)의 네 가지를 말한다. 이 중에서 遍行심소는 네가지 一切義를 갖추고 있다. 別境심소는 性과 地의 두가지 일체의를 갖추고 있으며, 善은 地의 일체의만, 不定은 性의 일체의만 갖추고, 번뇌·隨번뇌는 네가지 중 어느 것도 지니지 않는다.
遍行은 作意·觸·受·想·思의 다섯가지, 別境은 欲·勝解·念·定·慧의 다섯가지이다. 이 5遍行과 5別境을 합하면 앞에서 말한 10大地法에 해당된다.
善은 信·慚·愧·無貪·無瞋·無癡·勤·輕安·不放逸·行捨·不害의 열한가지, 煩惱는 貪·瞋·癡·慢·疑·惡見의 여섯가지, 隨煩惱는 忿·恨·覆·惱·嫉·慳·誑·謟·害·憍·無慚·無愧·掉擧·惛沈·不信·懈怠·放逸·失念·散亂·不正知의 20가지, 不定은 悔(惡作)·睡眠·尋·伺의 4不定 뿐이다. 이상 51의 심소를 주장하는 가운데 수번뇌를 다시 3종으로 분류해서 처음 열가지는 따로따로 생기므로 小隨번뇌(小隨惑), 다음 두가지 곧 無慚·無愧는 일체의 不善心에 두루 생기므로 中隨번뇌(中隨惑), 최후의 여덟가지는 일체의 不善心과 有覆無記心에 두루 생기므로 大隨번뇌(大隨惑)라 한다.
수박(隨縛) : 박(縛)→번뇌의 異名. 중생의 마음을 속박하여 자재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
① 貪 · 瞋 · 痴를 三縛이라 한다.
② 二縛. (1) 相應縛과 所緣縛. 有部宗의 敎義. 前者는 번뇌가 동시에 心 · 心所(心의 작용)를 구속하는 것이고 後者는 번뇌가 그 대상을 속박하는 것. 또 후자를 4분하여 五縛으로 하기도 한다. (2) 相縛과 麁重縛. 유식종의 敎義. 전자는 相惑이라고도 하는데 객관의 대상이 주관인 心을 속박하는 뜻이 있으니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遍計所執의 自性을 잘못 망령되게 있는 것으로 집착하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麁重惑이라 하여 무거운 번뇌에 의해 속박되는 惑이며 인연에 따라 성립되는 依他起의 自性에 집착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 경우의 번뇌는 인연에 의해 일어남으로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子縛과 果縛.
③ 四縛. 四身繫과 같음.
육수면(六隨眠) : 6종의 근본번뇌. 貪 · 瞋 · 癡 · 慢 · 疑 · 惡見은 사람을 혼미하게 하므로 隨眠이라 한다.
탐(貪) : 貪은 貪欲이라고도 貪愛라고도 하고, 일반으로 나의 좋아하는 대상을 향하여 탐내어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고, 번뇌의 근본적인 것의 하나로 한다.
① 범어 lobha의 번역으로 三不善根(세 가지의 根本惡德, 三毒)의 하나. 이에 대해서 마음에 탐냄이 없으며 또는 탐냄의 반대를 無貪이라고 하고 心所(마음의 작용)의 이름으로, 구사종에서는 10大善地法의 하나로 하며, 유식종에서는 善의 心所의 하나로 한다. 三善根의 하나.
② 貪은 범어 raga의 번역. 心所의 이름으로 구사종에서는 不宗地法의 하나로 하며, 유식종에서는 번뇌의 心所의 하나로 한다. 또 六根本煩惱의 하나. 5頓使의 하나. 일반으로 貪을 없애는데 不淨觀을 닦음을 요한다. 欲界의 貪을 欲貪이라고 하고, 色界 無色界의 貪을 有貪이라고 하고, 또 有貪을 둘로 나누어, 여기에 欲貪을 더해서 欲貪 · 色貪 · 無色貪의 셋으로도 한다. 이 중에서 欲貪은 五下分結의 하나. 나머지는 한가지로 五上分結의 하나이다. 欲界의 貪은 5蓋의 하나. 또 顯色貪(色彩에 집착하는 貪) · 形色貪(姿 · 形 · 용모 등에 집착하는 貪) · 妙觸貪(피부에 부딪치는 촉각에 집착하는 貪) · 供奉貪(走居動作에 집착하는 貪)의 네 가지의 貪으로 나눈다. 貪에 의해서 생기는 身 · 口 · 意의 業을 濁業이라고 한다.
③ 범어 abhidhya의 번역. 10惡의 하나. 특히 타인의 재물에 대해서 함부로 부정한 욕망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無貪은 10善의 하나.
④ 그러나 이상 세 가지의 구별은 반드시 명확하지 않다. 上座部의 法集論에서는 이들의 말을 같은 말로 쓰고 있다.
유탐(有貪) : 有欲 · 欲貪이라고도 한다. 色界와 無色界의 貪이란 뜻이다. 有는 색계·무색계의 定과 신체를 말한다. 外道는 이 地位를 해탈이라 여김에 대하여, 아직 번뇌가 남아 있는 뜻을 표시하여 有貪이라 한다.
견(見) : 눈으로 보는 것. 생각하여 헤아리고, 사물에 대한 견해를 정하는 것. 見解 · 思想 · 主義 · 主張 · 正見 · 邪見 등으로 쓰여지지만 대개의 경우 잘못된 견해를 가리킨다. 번뇌에 五見(五利使라고도 한다)을 넣고 또 二見 · 七見 · 十見 등이 있는 것으로 분류된다.
① 有見과 無見, 또는 斷見과 常見을 二見이라 한다. 이것은 五見중의 邊見에 해당된다.
② 邪見(因果의 이치를 否定) · 我見(내가 있다고 하는 견) · 常見(身心의 常住를 집착하는 것) · 斷見(身心의 斷滅을 집착하는 것) · 戒盜見(戒禁取見을 말하며, 바르지 못한 계율을 바르다고 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것) · 果道見(바르지 못한 행위에 의하여 얻은 결과를 바른 것이라 하여 집착하는 것) · 疑見(진리를 의심하는 것)을 七見이라고 하고, 五見에 貪見 · 恚見 · 慢見 · 無明見 · 疑見을 더하여 十見, 또는 十種見이라 한다.
③ 佛敎的이 아닌 잘못된 견해를 四見, 六十二見(梵網經의 설) 등으로 분류한다. 四見이란 소위 四句分別에 의해 모든 外道의 설을 망라한 것으로 예를 들면「세계는 常住」· 「無常」·「常住이면서 無常」· 「常住도 無常도 아니다」라고 하는 네 가지 잘못된 見解와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邪因邪果 · 無因有果 · 有因無果 · 無因無果의 네 가지 잘못된 주장을 四見이라고도 한다.
오견(五見) : 다섯가지의 見. 見은 생각·見解·思想의 뜻인데, 여기서는 나쁜(惡) 생각, 그릇된 견해를 의미한다. 근본번뇌 가운데 見(惡見)을 다섯가지로 나눈 것. 곧,
(1) 薩迦耶見. 번역해서 有身見. 略하여 身見이라고도 하고, 또 僞身見·壞身見이라고도 번역한다. 我가 있다고 하는 我見과, 나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我所見이 그것.
(2) 邊執見. 邊見이라고도 한다. 편벽된 극단을 집착하는 見解란 뜻. 나는 死後 常住(永久不變)라고 하는 常見(有見)과, 나는 死後 斷絶한다고 하는 斷見(無見)이 그것.
(3) 邪見. 因果의 도리를 부정하는 견해.
(4) 見取見. 잘못된 見解에 집착하여 진실한 견해라고 하는 것.
(5) 戒禁取見. 戒取見·戒盜見이라고도 한다. 바르지 않은 戒律이나, 禁制 등을 涅槃(깨달음)에 인도하는 바른 戒行이라고 고집하는 것.
십수면(十隨眠) : 貪 · 瞋 · 痴 · 慢 · 疑 · 見에서, 이 見을 나누어 有身見 · 邊執見 · 邪見 · 見取見 · 戒禁取見으로 한 열가지의 惑. 근본 번뇌의 다른 이름.
구십팔수면(九十八隨眠) : 또는 98使라고도 한다. 수면은 煩惱의 다른 이름이다. 번뇌는 항상 사람을 따라다니면서 마음을 혼미케 하나, 그 작용은 微細하여 알기 어려우므로 이같이 말한다. 98이라 함은 온갖 번뇌의 근본인 貪 · 瞋 · 癡 · 慢 · 疑 · 身見 · 邊見 · 邪見 · 見取見 · 戒禁取見의 10隨眠을 三界 五部에 배당한 것이다. 곧 欲界의 苦諦 아래 10종, 集諦 · 滅諦 아래 각기 7종(10隨眠에서 身見 · 邊見 · 戒禁取見을 除함), 道諦 아래 8종(10수면에서 身見 · 邊見을 除함)과, 欲界의 修道 아래 4종(貪 · 瞋 · 慢 · 疑)을 합하여 欲界에 36종이 있고, 色界 · 無色界에는 瞋이 없으므로 5部에서 이를 除하면 각 31종이 있다. 色界 31 · 無色界 31 · 欲界 36을 합하면 98종이 된다. 이 98隨眠은 곧 見惑 88과 修惑 10과를 합한 것이다. 五部는 苦 · 集 · 滅 · 道의 四諦와 修道를 합한 것.
유식종(唯識宗) : 法相宗 · 應理圓實宗 · 普爲乘敎宗 · 唯識中道宗 · 中道宗이라고도 하며, 이 宗의 所依經典은 解深密經 · 成唯識論 · 瑜伽師地論이다. 佛滅 후 1천년경 북인도 사람인 無着과 世親이 세우고, 중국에서는 인도의 戒賢論師에게 법을 배운 玄奘이 窺基에게 전하다. 窺基는 慈恩寺에서 주석하였으므로 慈恩宗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圓測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玄奘에게 瑜伽論과 唯識論을 배우고 唯識疏抄를 저술하였다. 또한 경덕왕 때에는 眞表律師가 金山寺에서 戒法과 占察法을 수행하고 법상종의 宗旨를 寶宗 · 永深 · 信芳 등에게 전하여 法住寺와 桐華寺에서 크게 성하였다. 이 宗은 우주 만유의 本體보다도, 현상을 자세히 분류 설명하였으므로 법상종이라 하고, 유식종이라 함은 일체 萬有는 오직 識이 변해서 이루어 진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불교의 唯識論으로서 萬有는 오로지 아뢰야식으로 緣起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 緣起의 本體인 能變의 처음은 제 8識이요, 2能變은 제 7識, 3能變은 通 6識이라 하고, 이것들은 모두 內心으로 外境을 變現하는 것이므로 三界唯一心과 心外無別法이라 말한다.
萬有를 분류하여 五位百法으로 정하며, 만유의 진정한 理 · 事 · 迷 · 悟를 밝히기 위하여 遍計所執性 · 依他起性 · 圓成實性의 3性을 말한다. 識이 外境을 인식하는 과정에 나아가서는 이것을 4分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萬法唯識의 이치를 깨달아 알게 하는 방법으로 5重唯識觀을 세웠다. 중생의 해탈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중생의 성품에는 선천적으로 菩薩定性 · 緣覺定性 · 聲聞定性 · 三乘不定性 · 無性有情의 5性이 각각 다르므로 영구히 해탈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 宗의 三乘敎만이 옳고, 다른 종파의 一乘敎는 假說이라 하므로 이 宗을 權大乘이라 부른다.
습기(習氣) : 習이라고도 한다. 우리들이 思想이나 행위, 특히 번뇌를 가끔 일으키는데 의해서 우리들의 心중에 印象지어지고 배어진(곧 熏習된) 慣習의 氣分·習性·餘習·殘習을 말함. 그런 까닭에「번뇌는 끊어도 아직 그 餘習인 習氣는 남는 수가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런데 唯識宗에서는 이것을 종자의 異名이라 하고, 습기는 우리들의 思想이나 행위나 기타 일체의 有爲法을 産出하는 功能, 能力이라고 하고, 아뢰야식중에 감추어 있다고 한다. 습기에는 3종이 있어 3종습기라고도 3종熏習이라고도 한다.
(1) 名言習氣. 명언(言語的 表象)에 의해서 熏成된 종자, 곧 명언종자를 말하는 것으로, 일체의 유위법을 각기 내게 하는 직접의 因으로, 곧 等流果(因과 等한 종류의 果)를 引生하는 점에서 等流습기라고도 한다. 이것을 다시 表義名言(의미를 나타내는 소리)에 의한 습기와, 顯境名言(對境을 緣慮하는 心·心所)에 의한 습기의 2종으로 나눈다.
(2) 我執習氣. 아집에 의해서 길들여진 습기.
(3) 有支習氣. 有支 곧 三有(곧 三界에서의 生存)의 因(支는 因의 뜻)인 善惡의 業에 의해서 熏成된 業種子를 말하는 것으로, 異熟果(果報)를 招來하는 점에서 異熟習氣라고도 한다. 또 (2)를 없애고 등류습기와 이숙습기의 2종으로 하는 수도 있다.
종자(種子) : ① 穀類의 싹이 종자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物 · 心의 모든 존재 현상을 나게 하는 因種을 가리키는 말. 또 種이라고도 하며 곡류등의 종자를 外種 또는 밖의 種子(外種子)라고 하는데 대해, 唯識宗에서는 같은 이치로 우리의 마음의 종자가 아뢰야식 가운데 藏識(감추어져 있음)되어 있다고 하여 이것을 內種 또는 內種子라고 한다. 이 內種子는 生果의 功能(결과를 내는 작용)을 가리키며, 이것은 現行의 諸法(현재 나타나서 작용하는 모든 현상)에 의해서, 흡사 향을 담았던 상자에 향내가 배어서 나는 것처럼 아뢰야식 가운데 熏習되어 있는 일종의 慣習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習氣라고도 한다. 이 種子說은 하나의 비유로 阿含經에 보이며, 部派佛敎 당시에는 化地部에서 窮生死蘊의 識 가운데 物心의 種子가 항상 존재한다는 說을 세운바 있으며, 經量部에서는 色法(물질)과 心法(정신)이 상호 種子로서 다른 것(相體)을 熏附(서로 영향하고 相依함)하여 보존한다고 하여 色心互熏說을 세우기도 했다.
② 唯識宗에서는 種子는 아뢰야식 가운데 藏在해 있다고 하며 그 관계를 成唯識論 卷二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뢰야식은 體, 種子는 用, 혹은 아뢰야식은 果, 種子는 因이라고도 하며 또 그 관계는 不一不異라고 하고, 또 種子는 아뢰야식의 相分[四分→相分(주관적인 心에 인식되는 객관의 형상), 見分(相分을 인식하는 주관의 心작용), 自證分(自體分이라고도 하며 見分과 다음의 證自證分과를 證知하는 인식작용), 證自證分(自證分을 다시 證知하는 인식작용)] 가운데 존재한다고 한다.(단, 이상은 有漏種子에 대한 해석임). 또 同卷二에서, 種子는 다음의 여섯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여 이것을 種子六義라고 했다. 곧 (1) 刹那滅. 不動不變의 無爲法이 아니라 生滅變化하는 有爲法일 것. (2) 果俱有. 種子로부터 생긴 現行 곧 果를 여의지 않고 존재하는 것. 다시 말하면 果가 발생하는 현상과 반드시 동시에 존재하며 現前에 和合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 (3) 恒隨轉. 항상 간단 없이 轉起하여 一類相續하는 것. (4) 性決定. 種子를 熏附한 現行의 善惡을 따라서 그 種子로부터 생긴 現行의 善惡을 결정하여 索亂하지 않은 것. (5) 待衆緣. 많은 緣이 和合하는 것을 기다려서 비로소 種子가 現行을 내는 것. (6) 引自果. 色 · 心이 각각의 自果를 따로 따로 引生하는 여섯. 種子가 어떻게 하여 일어났느냐 하는데 대해서는 本有說(護月의 說) · 新熏說(難陀 · 勝軍의 說) · 新舊合生說(護法의 說)의 三說이 있어서, 이것을 주장하는 學流를 각각 本有家 · 新熏家 · 新舊合生家라고 일컫는데, 法相宗에서는 第三說을 옳다고 한다. 곧 種子에는 無始이래로 아뢰야식 가운데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本有種子(本性住種)와 후천적으로 現行의 諸法에 의해 熏附된 新熏種子(習所成種)가 있어서 이 2種의 種子가 합하여 現行法으로서의 모든 現象을 낸다고 한다. 다만 見道에 이르러 처음으로 無漏智를 내는 것은 本有無漏種子에 의한다고 하고, 또 五姓의 차별을 일으키는 것을 이 本有無漏種子의 種別이나 그 有無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本有說에 있어서는 本有種子만을 세워서 新熏種子를 인정하지 않고 現行의 熏習이 新熏種子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本有種子를 增長할 따름이라고 주장하는데 대해, 新熏說에서는 新熏種子만을 인정하고 本有種子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반으로 菩提의 因인 無漏種子의 2종의 種子가 있어서, 有漏種子에는 또 名言種子와 業種子의 2종의 種子가 있다. 名言種子는 名言(言語的表象)에 의해서 아뢰야식 가운데 熏附된 種子로서 物 · 心 일체의 현상이 현재에 나타나서 작용하는(現行의) 직접의 因이 되는데, 여기에 또 2種이 있다. 表義名言種子는 의미를 나타내는 言語(곧 表義名言)를 第六意識이 반연하여(곧 인식하여) 그 언어에 따라 諸現象을 變現할 때 熏習되는 種子를 말하며, 顯境名言種子는 心 · 心所法인 前七識의 見分(主觀)등 (곧 顯境名言)이 對境을 반연할(곧 인식)지음에 熏習된 種子를 가리킨다. 心 · 心所法이 名言은 아니지만 名言이 각각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처럼 心 · 心所가 對境을 變現하므로 顯境名言이라 한다. 대저 名言種子는 種子와 같은 종류의 現行(現象)을 생기게 하므로 等流習氣라고도 한다. 다음에 業種子는 능히 異熟(果報)을 내는 직접적인 因인 名言種子를 도와서 善惡業에 따른 異熟을 생기게 하는 작용이 있는 種子로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善惡의 思(意志의 정신작용인 業의 體)에 의해서 熏附된다. 異熟은 無記이므로 異熟을 내는 名言種子는 無記이며 따라서 스스로 現行하는 힘은 없지만 善惡의 業種子의 힘이 강하면 그것이 增上緣이 되어 異熟을 生한다. 그러므로 業種子를 異熟習氣라고도 한다. 또 名言種子 가운데 我執에 의해서 熏習되고 그것에 의해서 自他의 차별을 감지하고 迷惑의 바탕인 我見 · 我所見을 일으키는 種子를 특히 我執習氣라 한다. 我執習氣 · 名言習氣 · 有支習氣(業種子에 해당)를 三種習氣라고 한다. 또 山河大地처럼 많은 有情에 공통한 환경을 내는 名言種子를 共相名言種子(共種子)라고 하는데 대해, 육체처럼 그 사람만이 받아 가지고 쓰는 것을 일으키는 種子를 不共相名言種子(不共種子)라고 하며, 이런 名言種子가 現行을 내기 위해서는 共業 · 不共業의 業種子의 도음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③ 種字라고도 쓰는 경우가 있다. 곧 密敎에서는 불 · 보살등의 諸尊을 表象하는 梵字를 가리킨다. 이것을 種子라고 하는 것은 一字에서 多字를 生하고 또 多字는 一字에 歸結됨을 뜻하는 말. 혹은 種字를 관하면 佛智를 깨닫고(了因), 種字로부터 三昧耶形등을 일으키며(生因), 種字는 본래의 性德이고 軌範으로서 모든 事物의 근원인 本有란 뜻이 있으며 여러 諸尊의 眞言의 一字를 사용한다. 예컨대 胎藏界의 大日如來의 種字를 अ(아)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一尊에의 種字 밖에 1類의 諸尊에 통하는 通種字도 있다. 種字만을 쓴 曼茶羅를 種字曼多羅, 種字에 의해서 觀行하는 것을 種字觀이라고 한다.
아뢰야식(阿賴耶識) : 阿賴耶는 범어 alaya의 音譯. 阿梨耶識이라고도 쓰고, 약하여 賴耶 · 賴耶識이라고도 한다. 八識(眼·耳·鼻·舌·身·意·末那·阿賴耶의 각 識)의 하나. 九識(八識에 阿摩羅識을 더함)의 하나. 無沒識 ·藏識이라 번역하고, 제8識 · 本識 · 宅識 등 가지가지의 명칭이 있다. 無沒識이라 함은 諸法을 執持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며, 藏識이라 함은 諸法展開의 의지할 바탕이 되는 근본 마음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또 八識의 최후에 두기 때문에 제8識, 諸法의 근본이기 때문에 本識이라고도 하고 따라서 諸識 중 특히 識主라고도 한다.
① 成唯識論 卷二에 의하면, 藏識의「藏」에 能藏·所藏·執藏의 三義가 있다. 이것을 賴耶三藏이라고도 藏三義라고도 한다. 能藏이라 함은 이 識이 諸法을 展開生起하는 種子(能力·原因)를 攝持하고 감춘다는 의미이며, 所藏이라 함은 이 識이 諸法을 生起하는 種子를 諸法으로 훈습하여 감춘다(藏)는 의미이며, 執藏이라 함은 이 識이 末那 곧「思量의 뜻」을 가지고 스스로를 愛著한다는 의미이다. 增一阿含經에 의거해서, 阿賴耶에 愛 · 樂 · 欣 · 憙의 四義가 있다고 說하는(이것을 四阿賴耶라고 한다)것도 , 여기서 말하는 執藏과 같은 의미라고 하겠다.
② 能藏과 所藏의 관계는, 阿賴耶識이 그 種子의 작용에 의해서 諸法 곧 우리들의 현실세계를 만들어 가매(이런 경우, 阿賴耶識의 相分 곧 對境으로서의 객관적 境界는 종자와, 眼·耳·鼻·舌·身의 五根에 의해서 드러나는 육체와, 山河大地 등의 器界이며, 이것을 種根器라고 한다), 만드(作)는 것에 의해서 逆으로 諸法에서, 다시 새로이 諸法을 창조하고자 하는 종자를 自己 중에 轉變·變異·成熟시켜, 감추어(藏) 간다고 하는 相依相待·展轉·緣起의 관계이고, 執藏은 이와 같은 아뢰야식의 轉變이, 諸法에 있어서 자기의 모습을 보려고 하는 아뢰야식 스스로의 愛著 작용을 原動力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執藏은 확실히 아뢰야식의 自相이다. 또 아뢰야식은 과거에 있어서의 善·不善의 業의 결과(곧 異熟·果報)에 의해 끌리므로 이 점은 아뢰야식의 果相이며, 그래서 아뢰야식을 異熟識(곧 果報識)이라 한다. 또 아뢰야식이, 모든 法을 生起하는 種子를 감춘(藏)다는 점에서, 그 因相으로서의 의미에 의해 아뢰야식은 一切種識(또는 種子識)이라 불리워진다. 이를 自相·果相·因相을 賴耶의 三相이라고 한다. 唯識敎學은 이상과 같은 구조아래 일체를 아뢰야식의 變現으로서 唯心論을 樹立한다. 이것은 일체를 아뢰야식에서 緣起한 것이라고 說하기 때문에, 이것을 賴耶緣起라고 한다.
③ 아뢰야식의 自相은 凡夫로부터 보살의 제7地까지, 二乘이면 有學의 聖者位에 있는 자가 갖는다고 하며, 이 자리를 我愛執藏現行位라 한다. 보살의 八地이후 또는 二乘의 無學은 我執이 없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그 自相을 버리는데, 다만 異熟識인 果相이 남는다고 하며, 이 자리를 善惡業果位라고 한다. 佛果에 이르면 異熟識의 果相도 떨어지는데, 有情利益을 행하기 위해 일부러 諸法의 종자 및 五根을 執持하여 버리지 않고 相續케 한다고 하며, 따라서 種子識인 因相만이 남는다. 이 자리를 相續執持位라고 하다. 이상을 賴耶의 三位라 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은 범부로부터 부처가 되는 轉迷開悟의 道가 되는 것으로서, 如實히 그 相을 알아야 할 것이고, 그 의지해야 할 곳이기 때문에, 아뢰야식을 所知依라고 한다.
④ 특히 아뢰야식을 轉迷開悟의 要道로 論究함에 있어 아뢰야식은 번뇌에 의해 더럽혀진 妄識인가, 自性으로서 淸淨한 眞識인가가 중국불교 敎學에서 문제가 되어, 唯識宗은 妄識의 입장을 취하고, 華嚴宗은 起信論에 의해서 眞妄和合識의 입장을 취했으며, 地論宗은 眞識의 입장을 취했다.
경부(經部) : 經量部의 약칭. 上座部·소승 20部의 하나. 여기에 根本部와 枝末部가 있으니, 佛滅 후, 1세기 경의 鳩摩羅駄(根本部)와 室利羅多(枝末部)가 그 始祖이다. 근본부는 정신과 물질(色·心)이 도와서 生死가 相續流轉하는데 色·心이 서로 종자를 熏習하여 色·心이 없어질 때(곧 죽을 때)는 그 종자를 각각 서로 보전했다가 물질과 정신이 서로 도와 다음 생을 얻는다고 하는데 대해, 枝末部에서는 輪廻轉生의 주체인 영겁불멸의 細意識을 근본으로 하여 이것에 의해서 餘地의 邊蘊(五蘊)의 法을 일으킨다고 한다.
전(纏) : 마음을 얽어서 善을 수행할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 번뇌 특히 隨煩惱의 異名. 無慚 · 無愧 · 嫉 · 慳 · 悔 · 睡眠 · 掉擧 · 惛沈의 八隨煩惱를 八纏이라 한다. 여기에 忿 · 覆을 더해서 十纏이라고도 한다. 또 經部에서는 번뇌의 種子(潜勢位)를 隨眠이라 하는데 대해서 번뇌의 現行(顯勢位)을 纏이라 한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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