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어느 學兵의 九死一生(관음신앙)

근와(槿瓦) 2015. 4. 29. 01:50

어느 學兵의 九死一生(관음신앙)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일본이 이른바 북지사변(北支事變)을 일으켜 중일(中日)전쟁은 더욱 가열하였다. 침략전쟁을 서두르고 있던 일본은 <하늘에 대신하여 불의를 무찌른다>고 외치면서 미친 개처럼 광분하고 있었다. 그들은 물적(物的) ․ 인적(人的) 자원을 싸움터로 몰아넣고 있었으니 1943년에는 강제징병(强制徵兵) 제도가 실시되고 다음 해에는 악명(惡名)높은 학병제(學兵制)를 강행하였다.

 

이리하여 우리의 젊은 청년들은 사지(死地)로 끌려가는 몸이 되었으며 따라서 뒤에 남은 가정은 가히 난가(亂家)의 지경이었다. 이때 외아들을 빼앗긴 채 거의 실신하다시피한 한 어머니가 있었다. 마음을 안정할 수 없었으니 점쟁이도 찾아가고 온갖 영(靈)하다는 사람을 분주히 찾아다니면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을지라도 내 아들만은 꼭 살아서 돌아올 것>을 애소(哀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암흑(暗黑)의 시대에 소위 명사(名士)들은 거의가 입을 다물고 있는 세태(世態)인지라 누구에게 상의할 수도 없었다. 부인은 서울에서도 제법 명문(名門) 집안인지라 세상을 보고 듣는 바가 남다른 데가 있었으니 하루는 심우장(尋牛莊, 서울 성북동)으로 만해(萬海, 韓龍雲)선사를 찾아갔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하고 상의하려는 것이었다. 이 부인은 이때 국내에 있는 뉘라하는 위인치고 만해를 빼놓고서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심경(心境)을 말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해를 찾아간 부인은 한숨을 쉬면서 수루탄식(垂淚嘆息)할 뿐이었다. 처음 맞이하는 부인이지만, 그 몸가짐에서 벌써 느끼는 바가 있었던지 만해는,

「나라의 운명이니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허나 이제 멀지는 않았소이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것이었다. 답답증만 더해가는 부인은 입을 열어,

 

「다름이 아니오라 연희전문(延禧專門)에 다니던 아들을 빼앗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겠는지 그것부터 속시원히 말씀 좀 해 주십시오.」라고 울부짖었다. 부인은 계속해서,

「제가 큰 스님의 높으신 성화(聲華)를 듣고 오늘 뵈옵게 된 것은 저의 답답한 심정을 풀 수 있으리라 믿고 찾아왔습니다. 큰 스님께서 저의 아들이 꼭 살아 올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만해는 부인이 지금까지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분별없이 방황한 사실을 짐작하였는지라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부터 일체의 외출을 절금(切禁)하고 첫째로 마음을 진정하여 먼저 관세음보살의 등상(等像)이나 혹은 그림으로 그린 관음상이나, 그렇지 않으면 <관세음보살>이라는 지방(紙榜)을 써 붙이고 향로와 촛대(燭臺)를 갖추어 오로지 <아들이 꼭 살아서 돌아오게 하여지이다>하는 한 생각만 가지되, 모든 잡념을 버리고 정좌일심(靜坐一心)으로 관세음보살만 생각하고 부르시오. 이렇게 관음 주력(呪力)을 할 때 염주(念珠)를 헤이면서 마음을 외골수로 집주(集注)하면 더욱 영응(靈應)이 신통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관음기도를 일심으로 하면 아들이 비록 전지(戰地)에 있더라도 무사할 수 있고 혹 불행한 일을 당하더라도 악도(惡道)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니 명심(銘心)하고 시행하라는 것이었다.

부인은 선사의 친절한 법문(法門)에 따라 그대로 시행할 것을 결심하고 기도할 준비를 서둘렀다. 그야말로 생명을 걸고 불철주야 일심정념으로 관음주력(觀音呪力)을 하며 기도하였다.

 

한편 전쟁터로 끌려간 아들은 중국 산서(山西) 지방의 어느 산중에서 총탄이 우박처럼 난비(亂飛)하는 격렬한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어느날 오후 3시경이니 이때 공중에서 별안간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런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에까지 오시다니! 아니면 내가 귀신에게 홀렸단 말인가. 또는 어머니가 그동안 세상을 떠나서 혼신이 되어 오셨단 말인가...> 착잡한 마음을 가눌 겨를도 없이 전세는 이미 기울어 패색(敗色)이 역력하였다.

 

이러한 순간 또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재차 삼차 들려왔다. <어머니가 이런 곳에.....> 어머니를 뵈어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일어나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 방향을 따라 간 것이 무아(無我) 불식간(不識間)에 부대 뒤편의 산등을 어느 결에 넘어섰다. 그러고 보니 어느 사이에 일본군의 결사전진(決死前進) 대열에서 이미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그 전진부대는 전멸을 당하고 이 학병(學兵)만은 죽음 직전에서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생명을 건지는 바 되었다. 실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영이(靈異)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관음기도에 정진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뜻밖의 비보(悲報)가 날아왔다. 아들이 소속한 부대가 전멸하였으므로 아들의 전사(戰死) 통보와 아울러 유골(遺骨)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로서는 청천의 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부인은 아들의 유골을 끌어안고 비통해 마지 않았으며 한편으로 만해 선사마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심우장으로 선사(萬海)를 찾아가서 이 비보를 놓고 오뇌(懊惱)하였다. 선사는 무상법문(無常法門)과 인과법문(因果法門)으로 부인을 위로하고 전사한 아들의 명복을 비는 추선(追善)으로 천도제(薦度齋)를 선학원(禪學院)에서 올렸다. 재(齋)를 올린 다음 부인은 신세를 비관하여 식음(食飮)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와병(臥病)하고 있었으니 뼈에 사무치는 슬픔에 싸여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보전한 아들은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급기야 서울에 이르러 자택으로 어머니를 찾아 대문을 두드렸다.

「어머니! 제가 왔어요, 제가 살아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집안에는 아무 기척이 없다. 다시 문을 두드리며,

 

「어머니! 어머니! 제가 살아왔습니다. 문 열어 보세요. 예! 어머니.....」하고 대문을 요란스럽게 흔들었다. 아들의 전사 통보를 받고 이미 천혼제(薦魂齋)마저 올려 회향(廻向)중인 부인은 시름겨운 몸으로 와석(臥席)하고 있었으니, 대문 밖의 아들의 목소리가 믿어질 수가 없었다. 이는 혹시 <죽은 아들의 고혼(孤魂)이 찾아온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조심조심 대문간에 나가 문밖을 향하여,

 

「네가 죽은 혼백이 왔느냐? 정말 살아온 내 아들이냐? 넌 누구냐?」고 물었다.

대문 밖의 아들은 어이 없다는듯이,

「어머니! 제가 죽긴 왜 죽어요. 이렇게 사지(四肢)가 멀쩡이 살아 왔잖아요. 웬 어머니도!」

그제서야 부인은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아들을 얼싸안았다.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네가 정말 살아왔단 말이냐? 웬 자식도.....」

이렇게 죽었던 아들을 끌어 안으니 여취여광(如醉如狂)해서 앓던 병이 일시에 사라졌다. 이 두 모자(母子)는 말할 나위도 없이 관음보살의 영이(靈異)에 의한 것이었다.

 

재생의 기쁨을 안은 모자는 갖가지 차담(茶啖)을 장만하여 성북동 심우장으로 만해(萬海)선사를 예방하고 백배 치사하였다.

그 후 부인은 자택에 관음보살의 등상(等像)을 위시하여 탱화(幀畵) ․ 불화(佛畵) 등을 모시고 또 가지가지의 관음상을 갖추었으니 사람들은 이 집을 만당관음(滿堂觀音)이라 했으며, 그 신심(信心)을 높이 칭송하였다.

 

관음보살의 무외한 묘지력(妙智力)에 힘입어 일찍이 삼업(三業)을 닦아온 한 선승(禪僧)의 도력(道力)과 애절한 소구소망에 울부짖던 한 여인의 깊은 신앙심이 담겨진 이 영험실담(靈驗實談)은 평소에 만해선사를 가까이 하였던 김관호(金觀鎬) 거사의 증언에 의한 것임을 밝혀둔다.

 

 

출전 : 관음신앙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