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지번뇌(五住地煩惱)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중생을 三界九地의 生死에 집착케하는 惑(번뇌)에 5가지가 있음을 밝힌 것.
(1) 見一處住地. 一切見住地라고도 한다. 見은 欲界 · 色界 · 無色界의 見惑. 이것은 智的인 迷로서 見道에 들어갈 때 일시에 끊으므로 見一處라 하고, 住地는 이 번뇌가 근본이 되어 온갖 번뇌의 의지가 되며, 또 번뇌를 내는 것이므로 住地라 한다.
(2) 愛欲住地. 欲은 欲界, 愛는 貪愛 곧 思惑. 思惑은 貪 · 瞋 · 癡 · 慢의 4에 통하거니와 貪愛는 다음 生을 받는 뜻이 가장 강함으로, 貪愛로써 思惑을 나타냄. 주지는 위와 같다.
(3) 色愛住地. 色은 色界, 愛와 住地는 위와 같다. 色界의 思惑.
(4) 有愛住地. 有는 無色界. 無色界의 思惑.
(5) 無明住地. 無明은 우치하고 암둔한 마음의 자체. 온갖 번뇌의 근본인 것. 住地는 위와 같다. 승만경에는 아라한 · 벽지불 등은 무명주지를 끊지 못하고, 부처님만이 끊었다 한다.
참고
중생(衆生) : 有情 · 含識이라고도 번역하는데 이것은 心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含識을 含生 · 含情 · 含靈이라고도 하며, 또 많은 生類라는 뜻으로 群生 · 群萠 · 群類라고도 한다. 대체로 이같은 말들은 "生存하는 것"이란 뜻으로 일체의 生類를 가리킨다. 衆生이란 말은 흔히 迷惑의 세계에 있는 生類를 가리키므로 때로는 넓은 의미로 불 · 보살까지도 포함한다. 雜阿含經 卷四十三에는 眼 · 耳 · 鼻 · 舌 · 身 · 意의 六根(여섯 感官)을 犬 · 鳥 · 蛇 · 狐 · 鰐 · 猿의 6종의 동물에 비유하여 흔히 이것을 六衆生이라 하고 六獸의 喩라고 한다.
삼계(三界) : 중생이 생사에 流轉하는 迷의 세계. 곧 有情의 경계를 셋으로 나눈 것. 生死輪廻하는 迷惑의 生存界(즉 有)의 분류이므로 三有生死라고도 하고 단순이 三有라고도 한다. 즉 欲界(欲有) · 色界(色有) · 無色界(無色有)의 셋을 말한다. 그 중에서 색계 · 무색계는 욕계보다 위에 있으므로 上二界 또는 上界라 한다(단 欲界 중의 六欲天까지도 포함한 天上界 전체를 가리켜서 上界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 경우 인간계를 下界라고도 한다). 三界는 끝이 없어 大海와 같은 迷 · 苦의 영역이므로, 苦界 · 苦海라고 한다.
삼계는 다시 여러 세계로 각각 세분되며 그 가운데 욕계는 지옥 · 아귀 · 축생의 3惡趣(아수라를 더한 4惡趣)와 天 · 人의 五(六)趣로 분류된다. 欲界의 하늘은 여섯이 있으므로 六欲天이라 한다. 색계는 初禪天에서 제 3禪天까지는 각각 3天이 있고 제四禪天은 九天(無想天을 제하고 八天이라고도 한다)이므로 色界 18天이라고 한다. 그 제四禪天 가운데 제5淨居天을 하나로 하고, 거기에 4洲의 4, 4惡趣(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의 4, 6欲天의 6, 梵天의 1, 無想天의 1, 四禪天의 4, 四無色天의 4를 합하여 二十五有라 한다. 여기에 淨居天을 5天(無煩 · 無熱 · 善現 · 善見 · 色究竟)으로 나누어 二十九有라고도 한다. 또한 欲界를 합하여 1地, 色界는 初禪天에서 제4禪天까지 4地, 無色界는 空無邊處天에서 非想非非想處天까지 4地로 하여 이것을 三界 九地라 한다.
구지(九地) : ① 有情(중생)이 머무는 세계를 欲界ㆍ色界ㆍ無色界의 3계급으로 분류하는 가운데 色界ㆍ無色界를 그 禪定三昧의 깊고 낮은 진전과정에 따라 四禪天ㆍ四無色天으로 나누고, 欲界와 합하여 九種의 有情의 所住地를 세워 九地 혹은 九有(九種의 生存)라 했다. 즉,
(1) 欲界五趣地는 지옥ㆍ鬼(餓鬼)ㆍ축생ㆍ人ㆍ天(六欲天)이 섞여 있는 곳이므로 五趣雜居地, 雜住界라고도 하고 欲界라고도 한다.
(2) 離生喜樂地는 欲界의 惡을 여의므로 생기는 喜樂을 얻는 境地로 色界初禪天에 해당하며,
(3) 定生喜樂地는 定으로부터 생기는 뛰어난 喜樂을 얻는 경지로 色界 第二禪天에 해당되며,
(4) 離喜妙樂地는 前地에서 얻은 喜를 여의고 전신에 넘치는 樂을 즐기는 경지로 色界 第三禪天에 해당하며,
(5) 捨念淸淨地는 前前地의 喜와 前地의 樂을 버리고 마음이 안정평등(곧 捨)하고 自覺的인(곧 念) 淸淨을 얻는 경지이니, 色界 第四禪天에 해당한다.이어
(6) 空無邊處地는 色界의 물질성을 여의고 허공의 無邊自在性을 증득한 경지로 無色界 第一天에 해당하며,
(7) 識無邊處地는 識의 無限闊達性을 얻는 경지로 無色界 第二天에 해당하며,
(8) 無所有處地는 前二地의 動性을 여의고「아무 것도 없다」는 寂靜想에 沈潛하는 경지로 無色界 第三天에 해당하며,
(9) 非想非非想處地는 有想과 無想을 모두 다 여의고 有無에 치우치지 않는 평등안정한 경지로 無色界 第四天 즉 有頂天에 해당한다.
② 또 四禪 가운데 未至定과 中間定과 四根本定 및 四無色定 가운데 下三無色定(즉 非想非非想處定을 제외한 것)의 九定은 원래부터 有漏定이지만, 無漏定을 일으키기 위한 강력한 지주가 되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無漏의 九地라 일컫는다.
구유(九有) : 九有情居 · 九衆生居의 약칭. 三界의 有情이 住하기를 좋아하는 9종의 거처.
생사(生死) : 輪廻라고도 번역한다. 業因에 의해서 六道의 迷界에 태어나서 죽기를 거듭하면서 윤회하는 것으로서, 涅槃(깨달음)의 逆. 生死가 끝이 없는 것을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비유해서 生死海라고 하고, 번뇌의 세계이기 때문에 生死苦海라고도 한다. 생사의 고해를 건너서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難度海라고도 한다.
① 二種生死. (1) 分段生死. 有漏의 善惡業을 因으로 하고 煩惱障을 緣으로 하여 三界내에 麤한 果報를 받을 때 그 과보는 壽命의 長短이나 육체의 大小 등 일정한 제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分段身이라고 하고, 분단신을 받아 윤회하는 것을 分段生死라고 한다.
(2) 變易生死. 不思議變易生死라고도 한다. 아라한·벽지불·大力의 보살은 분단생사를 받는 일은 없으나, 그러나 無漏의 有分別의 業을 因으로 하고 所知障을 緣으로 하여, 界外 곧 三界 밖의 殊勝細妙한 果報의 身, 곧 意生身을 받아 이 몸을 가지고 三界내에 와서 보살의 行을 닦아서 佛果에 이른다. 그 몸은 悲願의 힘에 의해서 수명도 육체도 자유로히 變化改易할 수가 있으므로 일정한 제한이 없기 때문에 變易身이라고 하고, 변역신을 받는 것을 變易生死라고 한다.
② 四種生死. 분단생사를 三界에 배대하여 3으로 구별하고, 여기에 變易生死를 더하여 4로 한다. 또 변역생사를 方便·因緣·有後·無後의 四生死로 나눈다. 또 冥(현세의 卑賤)에서 冥(死後의 惡道)으로 들어가고, 冥에서 明(死後의 善趣)으로 들어가며, 明(현세의 尊貴)에서 冥으로 들어가고, 明에서 明으로 들어가는 4를 4種生死라고 한다.
③ 七種生死. 분단생사를 삼계에 배대하여 나누고, 여기에 변역생사의 4종을 더하여 7로 한다. 단 後世의 해석에서는 이것을 다음의 7종으로 한다. 分段생사·流來생사(眞如의 이치에 迷하여 생사의 迷界에 流來하는 처음을 말한다)·反出생사(發心해서 생사에서 뛰어나는 처음을 말함)·方便생사(見思의 惑을 끊고 삼계의 생사에서 超出하는 入滅의 二乘에 대해서 말함)·因緣생사(無漏業을 因으로 하고 無明을 緣으로 하여 生을 받는 初地이상의 보살에 대해서 말함)·有後생사(有有생사라고도 한다. 최후의 1品의 무명을 남기는 제十地 보살에 대해서 말함)·無後생사(無有생사라고도 한다. 무명을 끊어버려 後身을 받지 않는 等覺 보살에 대해서 말함).
집착(執着) : 事物이나 道理를 고집하여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 執·着·計着이라고도 한다. 또 貪愛心에 집착하는 것을 染着이라고도 한다.
혹(惑) : 깨달음을 장애하는 迷妄의 마음. 證悟와 반대되는 것. 곧 번뇌를 말한다. 번뇌는 우리의 마음을 의혹하는 것이므로, 惑이라 한다. 仁王經合疏 中에「惑이라 하는 것은 미망의 마음이다」하였음.
견일처주지(見一處住地) : 또는 一切見住地 · 見一切處住地라고도 하며 五住地惑의 하나로 三界의 見惑을 말한다. 見惑은 우주의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迷惑인데, 見道位에 들어가 四諦의 진리를 바로 관찰하면, 그 迷惑이 한꺼번에 없어지므로 見一處라 한다. 그리고, 이 迷惑이 근본이 되어 여러 번뇌를 일으키며 번뇌가 의지할 곳이 되고, 머물 곳이 되므로 住地라 한다.
견(見) : 눈으로 보는 것. 생각하여 헤아리고, 사물에 대한 견해를 정하는 것. 見解 · 思想 · 主義 · 主張 · 正見 · 邪見 등으로 쓰여지지만 대개의 경우 잘못된 견해를 가리킨다. 번뇌에 五見(五利使라고도 한다)을 넣고 또 二見 · 七見 · 十見 등이 있는 것으로 분류된다.
① 有見과 無見, 또는 斷見과 常見을 二見이라 한다. 이것은 五見중의 邊見에 해당된다.
② 邪見(因果의 이치를 否定) · 我見(내가 있다고 하는 견) · 常見(身心의 常住를 집착하는 것) · 斷見(身心의 斷滅을 집착하는 것) · 戒盜見(戒禁取見을 말하며, 바르지 못한 계율을 바르다고 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것) · 果道見(바르지 못한 행위에 의하여 얻은 결과를 바른 것이라 하여 집착하는 것) · 疑見(진리를 의심하는 것)을 七見이라고 하고, 五見에 貪見 · 恚見 · 慢見 · 無明見 · 疑見을 더하여 十見, 또는 十種見이라 한다.
③ 佛敎的이 아닌 잘못된 견해를 四見, 六十二見(梵網經의 설) 등으로 분류한다. 四見이란 소위 四句分別에 의해 모든 外道의 설을 망라한 것으로 예를 들면「세계는 常住」· 「無常」·「常住이면서 無常」· 「常住도 無常도 아니다」라고 하는 네 가지 잘못된 見解와 같은 것을 말한다. 또한 邪因邪果 · 無因有果 · 有因無果 · 無因無果의 네 가지 잘못된 주장을 四見이라고도 한다.
욕계(欲界) : 일종의 有情의 生存의 상태. 또 그 有情이 사는 세계를 말한다. 欲界·色界·無色界의 三界로 나누는 중의 하나. 地獄·餓鬼·畜生·阿修羅·人間·六欲天을 합친 것의 이름. 이 세계의 有情에는 食欲·婬欲·睡眠欲의 三欲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欲界라고 한다. 欲界라고 하는 명칭은 有情世間(거기에 사는 有情)과 器世間(山河大地등)을 포함한다. 色界와 無色界가 定心(禪定三昧에 들어가서 散動하지 않는 마음)地인데 대해서, 散心(散動하는 通常의 마음)地이므로 欲界散地라 하고, 三界를 九地로 나누는 경우 欲界五趣地라고 하여, 欲界의 전체를 최초의 一地로 한다.
유정(有情) : 薩多婆 · 薩埵라 音譯하고, 중생이라고도 번역한다. 生存하는 자란 뜻. 有情이라 함은 마음(情識)을 갖는 살아 있는 것을 말하고, 여기에 대해서 草木 · 山川 · 大地 등은 非情(非有情 · 無情)이라고 한다. 그러나 成唯識論述記 卷一에는, 중생이라 함은 有情 · 非情을 아울러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색계(色界) : 色天 · 色行天이라고도 한다. 欲界 · 無色界와 함께 三界의 하나이다. 淨妙한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로 四禪(四靜慮)을 닦은 사람이 死後에 태어나는 天界, 또 이와 같은 有情의 생존을 말한다. 欲界 위에 있으며 果報의 優劣에 따라 四禪天으로 크게 나누며 더욱 자세히는 모두 17天(혹은 16天 · 18天)으로 나눈다.
무색계(無色界) : 無色天 · 無色行天이라고도 한다. 欲界 · 色界와 합하여 三界의 하나. 곧 물질을 초월한 세계로 물질적 비중이 큰 것(色想)을 厭離하여 四無色定을 닦은 이가 死後에 태어나는 天界. 또 그와 같은 有情의 생존을 말한다. 물질이 없으므로 場處(空間)를 갖지 않기 때문에 공간적인 高下의 차별은 없지만 果報의 勝劣에 따라 4계급으로 나눈다. 곧 닦은 四無色定에 따라 이것을 空無邊處 · 識無邊處 · 無所有處 · 非想非非想處의 四無色界로 나누고 三界를 九地로 나눌 때는 후반의 넷을 四地라 한다. 그러므로「空無邊處地」라 하여「地」자를 덧붙여서 부르기도 하고, 또 天界에 속하므로「空無邊處天」이라 하여「天」자를 첨가하여 부르기도 하며, 그 가운데 非想非非想處天은 世界(有情의 生存)의 最高位라 하여 有頂 · 有頂天이라고도 한다. 無色界의 有情들은 男根은 없으나 모두 남자이며 그 壽命은 차례로 2 · 4 · 6 · 8萬 劫을 산다고 한다. 또 分別論者는 無色界에도 細色이 있다고 주장한다.
견혹(見惑) : 惑은 마음의 迷惑, 곧 번뇌의 별명이며, 또한 見惑이란 것은 見道에 의해 消滅되는 惑이란 뜻이고, 修惑(思惑이라고도 한다)은 修道에 의해 消滅해 없어지는 惑이다. 俱舍宗에서는 四諦의 진리(즉, 佛敎의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 眞理를 모르는 惑을 見惑, 現象的인 사물에 집착하고 迷한 迷事의 惑을 修惑이라 했으며, 唯識宗에서는 邪道의 이단자가 邪敎 등의 誘導에 의해, 또는 마음으로 생각하고 분별함을 따라 일으키는 후천적인 번뇌(分別起)를 見惑, 태어남과 동시에 저절로 생기는 선천적인 번뇌(俱生起)를 修惑이라 한다고 했다. 또한 天台宗에서는 見 · 思의 二惑은 空觀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이므로 塵沙惑 · 無明惑과 구별했으며 합해서 三惑이라 했다. 그 가운데 見 · 思의 惑은 모두 三界안의 사물에 의해 상대적으로 일어나고, 三界의 生死(즉, 迷的 生存)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界內의 惑이라 했고, 三乘이 공통으로 끊지 않으면 안되는 惑이므로 通惑이라 한다.
① 俱舍宗에서는 見惑에 八十八이 있다고 하여 見惑 八十八使(使 : 번뇌의 다른 이름)라 한다. 즉, 見道함으로 없어지는 근본번뇌는, 五利使(身見 · 邊見 · 邪見 · 見取見 · 戒禁取見)와 五鈍使(貪 · 瞋 · 癡 · 慢 · 疑)이지만, 이것을 각각 四諦에 맞춰, 三界에 해당시킬 때 欲界에 三十二, 色界 · 無色界에 各 二十八이 되므로 합하여 八十八이 된다. 또한 修惑에 八十一이 있다고 하여, 修惑 八十一品이라 했으니, 곧 修道에 의해 없어질 근본번뇌로, 欲界에서는 貪 · 瞋 · 癡 · 慢, 色界 · 無色界에서는 각각 貪 · 癡 · 慢의 十種이지만 이것들을 각각 일괄하여, 九地에 配對하고, 다시 각각 번뇌의 강약에 따라 上上品에서 下下品까지의 九種으로 나누어 八十一品으로 한 것이다. 見惑의 八十八使와 修惑의 十種을 합하여 九十八隨眠이라 한다.
② 唯識宗에서는 見惑을 百十二, 修惑을 十六으로 나누고 합하여 百二十八의 근본번뇌를 세운다.
지적(智的) : 지식 있는 (것). 지식에 관한 (것). 지식(知識. ① 어떤 사물에 관한 명료한 의식. ② 알고 있는 내용.(국어사전)
미(迷) : 일체 사물의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틀린 것에 집착하는 것을 迷라고 한다. 迷에서 깨어나 명확하게 진실을 체달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거짓 形相(假相)에 집착하여 그것을 진실로 아는 妄念을 끊지 못하는 마음을 迷情 · 迷心이라 하고, 또 迷情에 사로잡혀 一切 사물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경지, 곧 三界를 迷界 · 迷境이라 한다. 또 迷悟를 生死의 江河를 건너고 건너지 않은 것에 비유하여 迷界를 迷津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하여 진실의 知見을 열어 깨달음의 도를 얻는 것을 悟道라고 한다.
견도(見道) : [修道] · [無學道] 修行의 한 階位. 합하여 三道라고 한다. 見道는 見諦道, 見諦라고도 말하고, 비로소 無漏道를 얻어 四諦(佛敎의 眞理)를 現觀하는(明了하게 본다) 位. 따라서 見道에 도달하기 이전은 凡夫(異生)이고, 見道에 들어간 뒤는 聖者이다. 修道는 見道 뒤에 다시 구체적인 事象에 대처하여 몇 번이고 되풀이 해서 修鍊 · 修習하는 位. 見道와 修道를 합하여 有學道라고 하며, 이에 대해 無學道는 無學位 · 無學果 · 無學地라고도 하고, 궁극적 최고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이미 배울 것이 없는 位를 말한다. 小乘에서는 三賢 · 四善根 등의 준비적 修行(七方便)을 닦은 사람이 비로소 無漏智를 얻어 見道에 들어간다고 하며, 大乘에서는 初地 入見道라 하여 보살의 初地를 見道, 第二地 이상을 修道, 第十地와 佛果를 無學道라 하고, 密敎에서도 淨菩提心이 처음으로 생기는 자리를 見道라고 한다. 無漏智에서 道理를 명확히 가려내는 것(決斷簡擇한다)을 決擇이라 하며 見道는 決擇의 일부분이므로 決擇分이라 하고, 또 열반의 깨달음 혹은 그에 이르기 위한 聖道는 邪가 아니므로 正性이라고 하지만, 특히 見道를 正性이라 한다. 모든 聖道는 번뇌를 여의게 하므로 離生이라 하지만, 특히 見道는 異生(곧 凡夫)의 生을 여의게 하므로 離生이라 한다. 따라서 見道를 正性離生 · 正性決定(決定이란 반드시 열반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見道에서 끊는 번뇌를 見道所斷(또는 見道斷, 見所斷)의 번뇌, 약하여 見惑이라고 하며, 修道에서 끊는 번뇌를 修道所斷(또는 修道斷, 修所斷)의 번뇌, 약하여 修惑이라 한다.
① 有部에서는, 見道에서 苦 · 集 · 滅 · 道의 四諦를 現觀하는 無漏智로써 틀림없이 見惑을 끊는다고 한다. 또, 無間道의 智(곧 忍)와 끊은 뒤에 四諦의 진리를 깨닫는 解脫道의 智가 있고, 이것을 觀察의 대상에 따라 八忍八智의 十六心이라 한다. 즉 欲界의 苦諦에 관한 無間道의 智를 苦法智忍, 欲界의 苦諦에 관한 解脫道의 智를 苦法智라 하고, 이와 같이 色界 · 無色界의 苦諦에 관한 忍과 智를 苦類智忍 · 苦類智, 마찬가지로 欲界에 대한 集法智忍 · 集法智, 上二界에 대해서는 集類智忍 · 集類智, 欲界에 있어서의 滅法智忍 · 滅類智, 欲界의 道法智忍 · 道法智, 上二界의 道類智忍 · 道類智를 세우고 이 十六心(刹那)의 觀法을 聖諦現觀이라 한다. 이 가운데 前十五心까지가 見道이고, 이 十五心을 見道十五心이라 한다. 道類智는 四諦의 眞理를 다 안 뒤의 지혜이므로 修道에 속한다고 한다. 修道는 三界 九地의 修惑의 각각에 대하여 上上品으로부터 下下품까지의 九品을 합한 八十一品의 修惑을 끊는 修道과정이다.
次第證의 편에서의 見道는 預流向이므로 第十六心(道類智)에 있어서 初果(預流果)를 깨닫지만, 이미 異生位(凡夫位)에서 世俗智에 의해 有漏의 六行觀을 닦는 修惑의 일부를 끊은 超越證은 第十六心에서 그 정도에 따라 初果 · 第二果(一來果) · 第三果(不還果)를 깨닫는다고 했고, 修道란 그 果로부터 각각 阿羅漢向까지를 말한다. 無學道는 阿羅漢果를 깨닫는 자리를 말하고, 여기에 능력 · 성질 등의 高下에 따라, 退法 내지 不退法의 七種阿羅漢에 獨覺 · 佛, 또는 慧解脫 · 俱解脫을 더한 九無學이 있다고 하며, 또 無學人은 無學正見 내지 無學正定의 八聖道와 및 無學解脫 · 無學正智의 열가지의 無漏法(十無學支)을 완성한다고 한다. 또, 鈍根은 見道에서 隨信行, 修道에서 信解, 無學道에서 時解脫을 얻는다고 하지만 利根은 차례로 각각 隨法行 · 見至 · 不時解脫을 얻는다고 한다.
② 經部나 成實論에서는 八忍八智의 十六心이 모두 見道에 속한다고 해서 十六心見道(十六心見諦)의 說을 취하고, 犢子部에서는 一諦에 대해 法智 · 法忍(有部의 說과는 별도) · 類智의 三心이 있다고 하여 十二心見道의 說을 취하고, 第十三心은 최후의 道類智가 앞의 刹那에 이어 다시 일어난다고 하고, 혹은 一刹那로써 四諦의 모두를 다시 觀한다고 하며, 第十三心부터가 修道位라고 한다. 또 大衆部에서는 頓現觀의 說을 주장하여 四諦의 모두를 한 찰나에 깨닫는다고 하고, 혹은 一時頓現觀의 說을 세워 먼저 총괄하여 觀하고 다음에 상세히 觀하므로 二刹那에 깨닫는다고도 한다. 이에 대해 有部의 說을 漸現觀이라 한다.
③ 唯識宗에서는 見道를 眞見道와 相見道로 나눈다. 전자는 根本(無分別)智를 일으켜 眞如의 이치를 깨닫고, 煩惱障 · 所知障의 분별의 隨眠을 끊는 자리이다. 이것은 一心眞見道의 說(頓證頓斷說)이다. 相見道는 眞見道를 얻은 뒤에 後得智를 일으켜 다시 眞如의 理를 觀하는 자리로, 이것은 더욱 더 三心相見道(첫째 자기의 육체를 觀察하여 我空 즉 有情으로서의 我體가 없음을 깨닫고, 둘째로 이와 같이 法空 곧 모든 것에는 實體가 없음을 깨달으며, 셋째로 自他의 모든 有情의 온갖 것을 觀察하여 我空과 法空을 깨닫는 것)와 十六心相見道(十六心으로 四諦를 觀한다)로 분류된다. 三心相見道를 眞見道에 포함시켜 三心眞見道의 說(漸證漸斷說)을 취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見道에 있어서 見惑을 끊어서 無分別智를 얻지만, 아직 餘障이 있기 때문에 修道를 하여 더욱 無分別智를 닦고 익혀 차례로 十重障을 끊고, 第十 金剛無間道에서 煩惱障과 所知障의 종자를 끊어 없애고 無學果를 깨닫는다. 이 三道를 五位에 비교하면, 見道는 通達位, 修道는 修習位, 無學道는 究竟位에 해당한다.
주지(住地) : 법을 낳는 根本體를 말함. 住는 所住. 地는 所生의 뜻. .....소주(所住)→멈추는 곳. .....소생(所生)→생겨지는 것.
애욕주지(愛欲住地) : 애욕(愛欲)→愛는 渴愛·親愛, 欲은 貪欲·樂欲. 妻子·事物 등에 대한 깊은 愛情을 일컫는 말.
갈애(渴愛) : 欲望의 만족을 추구하는 마음이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듯 강렬함을 나타내는 말.
탐욕(貪欲) : 자기가 원하는 것을 욕심을 내어 그것에 집착하는 것. 자기의 뜻에 드는 일을 하여 그 일에 집착하는 것. 정도를 넘어서 욕심을 부리는 것. 명성과 이익에 욕심이 많은 것. 탐욕하는 마음. 소위 渴愛로 苦의 근본원인이 되는 것. 欲界의 것은 欲貪, 色界 無色界인 上二界에 속하는 것을 有貪이라고 일컫는다. 3독의 하나이다.
애정(愛情) : 사랑하는 마음. 연정(戀情).(국어사전)
욕(欲) : ① 범어 chanda의 번역으로, 樂欲이라고도 번역한다. 心所(마음의 작용)의 이름. 희망하고 欲求하는 마음의 작용. 有部에서는 모든 마음의 작용(大地法)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마음이 대상을 捕捉하는 것은 作意의 작용에 연유하는 것이고 欲의 작용에 연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欲은 모든 마음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원하고 구하는 대상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別境)으로 본다. 欲에는 善·惡·無記의 三性이 있다. 善欲은 勉勵하는 마음(勤)을 일으키는 의지할 곳이고, 惡欲중 다른 이의 財物을 욕심내는 것을 貪이라고 하여 근본번뇌의 하나로 친다. 欲의 罪果를 강조해서 欲塹(욕심의 구멍)·欲刺(욕심의 가시)라고도 한다. 色·聲·香·味·觸의 五境에 愛着하는 것을 五欲, 또 愛着되는 五境도 五欲·五欲德·五妙欲이라고 했다. 뒤에는 財·色·음식·名·睡眠에 대한 欲을 五欲이라고 했다.
色·形貌·威儀姿態·言語音聲·細滑·人相에 대한 欲을 六欲이라고 하여, 九想에 의해서 버려져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이 가운데 形貌·姿態·細觸에 대한 欲을 三欲이라 한다.
② 欲望·愛着, 특히 婬欲·性欲을 말한다. 欲界에는 이 欲이 있기 때문에 欲界라고 불리워진다.
애(愛) : ① 물건을 탐하여 집착하는 것.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구하여 마지않는 것과 같다. 욕망의 만족을 강력히 구하는 중생의 마음을 渴愛라고도 번역한다. 여기에 欲愛(性欲 · 情欲) · 有愛(生存欲) · 非有愛(無有愛라고도 한다. 生存을 부정하려는 욕망) 의 三愛, 또는 欲愛 · 色愛(물질에 대한 욕망) · 無色愛(물질을 넘어선 욕망) 의 三愛가 있고, 또 六境(色 · 聲 · 香 · 味 · 觸 · 法)에 대한 사랑을 각기 色愛 · 聲愛 등이라고 부르고, 이것들을 합해서 六愛 · 六愛身이라고 한다. 十二緣起의 제 8支의 愛는 이와 같은 사랑이다.
② 大毘婆沙論 권29에 의하면, 더럽혀진 사랑과 더러움 없는 사랑의 2種이 있으며, 앞의 것은 貪이고, 뒤의 것은 信이라고 한다. 또 智度論 권七十二에는 欲愛 · 法愛의 二愛를 설하고 있다. 欲愛라 함은 妻子 등을 愛念하는 貪欲이고, 法愛라 함은 일체중생을 慈愛하는 자비심이다.
탐애(貪愛) :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5境을 탐하여 애착하는 것.
사혹(思惑) : 修惑이라고도 하며, 事物의 차별적인 眞相을 알지 못하므로 일어나는 번뇌.
삼독(三毒) : 貪欲 · 瞋恚 · 愚癡(貪 · 瞋 · 癡라고도 婬 · 怒 · 癡라고도 한다)의 3煩惱를 말함. 三火 · 三垢라고도 하고 중생을 해롭히는 惡의 근원이기 때문에 三不善根이라고 한다.
삼불선근(三不善根) : 貪 · 瞋 · 癡의 三毒을 말함. 新譯仁王經에 「貪 · 瞋 · 癡의 세가지 不善根을 다스리고, 施 · 慈 · 慧의 3종 善根을 일으킨다」하였음.
탐진치(貪瞋癡) : 욕심·성냄·어리석음. 이 셋은 수행인을 해롭게 함이 가장 심하므로 3毒이라 한다.
만(慢) : 心所(마음의 작용)의 이름. 俱舍宗에서는 不定地法의 하나로 하고, 唯識宗에서는 근본번뇌의 하나라 한다. 自他를 비교해서 他를 경멸하고 스스로를 믿어 마음이 우쭐거리는 것. 凌蔑自負하는 것. 여기에 여러 가지 분류가 있다. 俱舍論 卷十九에는 7慢을 말하고 있다.
(1) 慢.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대하면 자기가 낫다고 자부하고, 동등한 사람에 대하여는 동등하다고 마음속으로 우쭐거리는 慢.
(2) 過慢. 자기와 동등한 자에 대해서는 자기가 낫다고 하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보고는 자신이 그 사람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慢.
(3) 慢過慢.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 오히려 자기가 낫다고 생각하는 慢.
(4) 我慢. 五蘊假和合의 육신을 집착하여 我라고 하고, 我所라고 하여, 그것을 참 나로 믿음으로서 생기는 慢.
(5) 增上慢.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 이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慢.
(6) 卑慢. 자기보다 월등하게 나은 자에 대하여 자기는 조금 못할 뿐이라고 하는 慢.
(7) 邪慢. 德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德이 있다고 내세우는 慢.
8慢이란 慢 · 大慢 · 慢慢 · 我慢 · 增上慢 · 不如慢 · 邪慢 · 傲慢을 말한다.
九慢이란,
(1) 我勝慢類 · (2) 我等慢類(이 둘은 자기와 동등한 자에 대하여 자기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慢과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慢) · (3) 我劣慢類(자기보다 나은 자에 대하여 자기가 못하다고 하는 慢) · (4) 有勝我慢類(자기보다 훌륭한 자에 대하여 그가 자기보다 나은 데가 있다고 하는 慢) · (5) 有等我慢類 · (6) 有劣我慢類(이 둘은 자기와 동등한 자에 대해서 그가 자신과 동등하다고 하는 慢과 자기보다 못한 점이 있다고 하는 慢) · (7) 無勝我慢類 · (8) 無等我慢類(이 둘은 자기와 동등한 자에 대하여 그가 자기보다 훌륭한 점이 없다고 하는 慢과 자기와 동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기보다 못하다고 하는 慢) · (9) 懋劣我慢類(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자기보다 못한 것이 없으며 자신이 그 사람보다 못하다고 하는 慢)
내생(來生) : ① 來世. 後生. 다음 세상의 生涯. 다시 태어나는 미래의 세상. ② 와서 태어나는 것. (所從來生)
색애주지(色愛住地) : 五住地惑의 하나. 色界에 대한 일체의 思惑이다.
색(色) : 범어 rupa의 번역.
① 五蘊의 하나로 色蘊이라 하고 五位의 하나로 色法이라고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의 色으로 물질적 존재의 총칭. 變壞하고(변화하고 부서지고) 變礙하는 것(質礙라고도 한다. 일정의 空間을 占有하여 다른 물체를 용납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眼·耳·鼻·舌·身의 五根과 色·聲·香·味·觸의 五境과 法處所攝色에 이르는 11色으로 나눈다. 法處所攝色은 또 隨法處色·法處色이라고도 한다. 오직 意識만이 對象인 法處에 포함되는 色法을 말한다.
(1) 有部에서는 이 11色 중 觸境의 일부가 地·水·火·風의 四大種이고 나머지는 다 四大所造色이라고 한다. 또 五根·五境은 極微로부터 성립되는 色法인데 法處所攝色은 無表業을 가리킨다. 곧 無表業은 極微로부터 성립되는 色法은 아니나 四大所造의 色法이므로 無表色(無敎色 또는 無作色이라고도 함)이라 한다.
(2) 唯識宗에서 말하는 法處所攝色은 다음 5가지이다.
곧 (가) 極略色(五根·五境의 實色(물질)을 분석하여 물질의 최소단위인 極微
에 이르는 것).
(나) 極逈색(空界·明·暗 등 能礙(장애)의 성질을 갖지 않은 물질의 極微).
(다) 受所引色(無表色).
(라) 遍計所起色(意識에 나타나는 五根·五境 등의 影像).
(마) 定所生色(定果色·自在所生色이라고 한다. 殊勝한 定에 의해서 定중에 나타나는 色·聲 등의 五境).
(3) 色은 또 內色(五根)과 外色(五境), 細色(無表色 또는 色界의 色)과 麁色(極微로부터 이루어진 色 또는 欲界의 色), 定果色(定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色)과 業果色(業에 따라서 이루어진 色) 등의 두 가지로 나누어지며, 可見有對色(狹義의 色 곧 色境)과 不可見無對色(無表色)과 不可見有對色(聲·香·味·觸·五根)의 3가지 色으로 나눈다. 可見은 有見, 不可見은 無見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有對·無對는 對礙(이 경우에는 障礙)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말한다. 無表色에 대한 表色(表業·作色 또는 有敎色)을 有部에서는 形色(身表業의 體)과 聲(語表業의 體)이라 하지만 다른 종파 學派에서는 異論을 세우기도 한다.
② 狹義의 色은 12處의 하나로 色處라고 하며 十八界의 하나인 色界라고도 하고, 또 五境·六境의 하나라고도 한다. 곧 眼根의 對境으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 顯色과 形色과의 두 가지가 있으니, 顯色이란 “빛깔”을 말하는 것으로 有部에서는 靑·黃·赤·白·雲·煙·塵·霧·影·光·明·暗의 12종을, 形色이란 “형상”으로 長·短·方·圓·高·下·正·不正의 8종을 일컫는다. 顯色에 다시 空(蒼空色)을 첨가하는 설도 있다. 또 靑·黃·赤·白에 黑을 더하여 五色(五正色·五大色)이라고도 한다.
유애주지(有愛住地) : 四住地煩惱 또는 五住地煩惱의 하나로, 여기에 唯識宗의 그것과 天台宗의 說이 있다. 無色界에는 신체가 없으므로 육체에 관한 번뇌 곧 身見과 色界의 번뇌는 없지만, 無色界의 번뇌 가운데 見과 無明을 제외한, 곧 마음에 집착하는 애착의 번뇌를 말함. 외도가 無色界를 究竟의 解脫境이라 하는데 대해, 無色界의 愛는 生死의 과보에 애착하는 마지막 번뇌가 되므로 有愛라 한다.
유(有) : 범어 bhava의 번역. 有情으로서의 존재. 生存의 뜻. 三有는 三界를 말하며, 欲有·色有·無色有. 七有는 地獄有(바람직하지 않은 有의 의미로 不可有라고도 한다)·餓鬼有·傍生有(畜生有)·天有· 人有·業有(業은 생존을 이끄는 因이기 때문에 業有라고 한다)·中有, 二十五有는 四惡趣(地獄·餓鬼· 畜生·阿修羅)·四州(東勝身州·南贍浮州·西牛貨州·北俱盧州)·六欲天(四王天·夜摩天·忉利天·兜率天·化樂天·他化自在天)·色界(初禪天·大梵天·第二禪天·第三禪天·第四禪天·無想天·五淨居天)· 四無色界(空無邊處天·識無邊處天·無所有處天·非想非非想處天), 二十九有는 二十五有중 五淨居天을 無煩·無熱·善見·善現·色究竟의 五天으로 나눈 것이다.
혹은 또 初果의 聖者는 人天의 사이를 七返往來하며 生을 받고 그 이상은 받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경우 그 생을 中有와 生有로 나누어 二十八有라 하기 때문에 二十九有는 絶無를 뜻한다. 이상과 같이 迷惑된 생존의 상태는 가지가지로(특히 이십오유에) 분류되기 때문에 諸有라 하고 그 有는 널리 際限이 없기 때문에 바다에 비유해서 諸有海라 한다. 또 智度論 권十二에는, 물건의 존재의 방식을 3종으로 나누어 三種有로 한다. 大小長短등과 같은 상대적 존재인 相待有와, 多數가 집합한 假의 존재인 假名有와, 因緣으로 생긴 것이기는 하나 「물건」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法有 등이다.
무명주지(無明住地) : 五住地의 하나. 根本無明을 말한다. 無明은 모든 번뇌의 所以와 所住가 되고, 또 번뇌를 내는 根本이 되므로 住地라 한다.
무명(無明) : 범어 avidya의 번역. 사물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不如實智見을 말함. 곧 진리에 어두워서 (迷) 사물에 통달치 못하고 사물과 현상이나 도리를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不達不解不了) 정신상태로 愚癡를 그 내용으로 하며, 十二緣起의 第一支가 無明支이다. 또 俱舍宗이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心所(마음의 작용)의 하나로 하는 癡라 한다.
① 十二緣起의 無明支를 해석하는데 阿含經에서는 佛敎의 진리(四諦)에 대한 無智라 하고 渴愛와 表裏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有部에서는 十二緣起를 三世兩重의 因果로 說한 것으로 보고 無明을 과거의 煩惱의 位에 있어서의 五蘊을 가리킨다고 하며, 모든 煩惱중에 이 無明의 작용이 가장 무겁고 돋보임으로 無明이라고 이름하였다. 唯識宗에서는 二世一重의 因果로 해석하고 無明과 行과 識 등의 五果의 種子를 끌어 들이는 能引支로 보고, 그 가운데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癡로서 善惡의 業을 일으키는 것을 無明이라 한다고 했다.
② 有部나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相應無明과 不共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를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같이 일어나는 것, 또 後者는 相應하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不共無明은 홀로 일어남으로 獨頭無明이라고 하는데, 唯識宗에서는 不共無明을 다시 恒行不共無明과 獨行不共無明으로 나눈다. 前者는 第七 末那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貪 등의 根本煩惱와 相應하여 일어나나 모든 凡夫의 마음속에 늘 쉬지 않고 나타나는 作用이란 점에서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과 다르기 때문에 不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後者는 第六意識과 相應하는 無明으로 다른 근본번뇌와 상응하지 않고 홀로 일어남으로 獨行不共이라고 일컫는다. 이 獨行不共無明은 隨煩惱와 함께 일어나지 않고 홀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시 主獨行無明과 無主獨行無明으로 나눈다. 또 唯識宗에서는 無明을 種子와 現行으로 나누고 늘 衆生을 따라 다니며 第八阿賴耶識 속에 숨어 잠자고 있는 無明의 種子를 隨眠無明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표면에 나타나 現在意識으로 작용하고 있는 無明의 現行을 衆生에 붙어서 衆生을 얽어 生死(迷의 世界)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에서 纒無明(전무명)이라 한다. 이 纒無明에는 相應하는 것과 不共이 있어서 隨眠·纒·相應·不共의 四種이 있게 되므로 이것을 四種無明(四無明)이라 부른다. 또 根本과 枝末과 共과 不共과 相應과 不相應, 迷理와 迷事, 獨頭와 俱行, 覆業과 發業과 種子子時와 行業果와 惑의 15種의 無明으로 나눌 때도 있다.
③ 勝鬘經에서는 見惑 및 三界의 修惑인 貪 등과 相應하는 相應無明을 四住地(見一處住地·欲愛住地· 色愛住地·有愛住地의 넷으로 처음의 一은 見惑, 뒤의 三은 三界의 修惑을 의미한다)의 惑이라고 부른다. 獨行不共의 無明을 無始無明住地의 惑이라 하고(합하여 五住地의 惑) 이 無明住地는 모두 번뇌가 일어나는 根本이며 오직 如來의 菩提智만이 이것을 끊을 수 있다고 한다.
④ 起信論에서는, 無明을 不覺이라고 하고 이 不覺을 根本無明과 枝末無明의 두 無明으로 나눈다. 根本無明은 根本不覺·無始無明·元品無明·忽然念起無明이라고도 한다. 또 元初一念이라고도 한다. 곧 眞如平等의 眞理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忽然히 차별·대립의 念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그 元初라고 하는 것은 모든 煩惱의 元始이고 迷妄의 시작이므로 다른 煩惱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忽然」이라고 한다. 지극히 微細하므로 心王(마음)과 心所(마음의 作用)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즉 無始無明住地의 惑이 아닐 수 없다고 보인다. 枝末無明은 枝末不覺이라고도 불리우며 根本無明에 의하여 일어난 末稍的 染汚心으로 三世微麤의 惑業이다.
⑤ 天台宗에서는 空·假·中의 三觀에 의하여 각기 見思·塵沙·無明의 三惑을 끊는다고 한다. 無明과 非有非空의 진리에 迷惑되어 中道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無明을 끊음에 있어서는, 別敎에서는 十廻向位에서 항복하여, 初地이상의 12階位에서 12品의 無明(모두 12품의 무명이 있다고 한다)을 다 끊어 마친다고 한다. 이 경우 十廻向의 最後의 第十廻向에서 처음의 無明을 끊고 初地에 들어가지만 이 처음의 無明을 또 三品으로 나누어 끊으므로 이것을 三品無明이라고도 한다. 圓敎에서는 初地 이상의 42階位에서 42품의 無明(모두 42品의 無明이 있다 한다)을 끊어 마치는데, 이 경우 제51位인 等覺의 最後心에 의해 妙覺智 또는 佛智가 나타나고 이에 의해 끊어지는 最後의 無明을 元品無明·無始無明·最後品無明이라 한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說로서 실은 圓敎에서는 三觀에는 순서와 차례를 세우지 않고 一心을 가지고 觀함으로 三惑은 동체로 동시에 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치암(癡闇) : 無明의 暗惑을 말함.
근본번뇌(根本煩惱) : 根本煩惱는 本惑이라고도 하여 모든 번뇌의 근본인 貪 · 瞋 · 慢 · 無明 · 見 · 疑의 六煩惱를 가리킨다. 그중에 見을 五見으로 나누어 五利使라 하고 나머지를 五鈍使라 하며 합하여 十隨眠이라 한다. 또 九十八使로도 분류한다. 枝末煩惱는 隨煩惱라고도, 隨惑이라고도 하여 根本煩惱에 종속해서 일어나는 汚染된 마음의 작용(汚染의 心所)을 일컫는다. 곧 俱舍宗에서 말하는 枝末煩惱는 大煩惱地法 가운데 癡(無明)을 제외한 放逸 · 懈怠 · 不信 · 惛沈 · 掉擧의 五煩惱와 大不善地法의 無愧·無慚의 二, 小煩惱地法의 忿· 覆 · 慳 · 嫉 · 惱 · 害 · 恨 · 諂 · 誑 · 憍의 十, 不定地法중의 睡眠 · 惡作(悔)의 二, 이상의 十九種의 번뇌를 일컫는다. 唯識宗에서는 위의 十九 가운데 不定地法에서 둘을 빼고, 大煩惱地法 가운데 失念 · 散亂 · 不正知의 셋을 더하여 二十種으로 하고 二十隨煩惱라고 한다. 그리고 大煩惱地法을 大隨煩惱(大隨惑), 大不善地法을 中隨煩惱(中隨惑), 小煩惱地法을 小隨煩惱(小隨惑)라고 부른다.
승만경(勝鬘經) : 1권. 劉宋의 구나발다라 번역. 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의 약칭. 사위국 바사닉왕의 딸로서 아유사국으로 시집간 승만부인이 석존께 대하여 자기의 사상을 여쭙고, 부처님이 이를 기쁘게 받아들인 것을 내용으로 한 것. 一乘으로써 宗旨를 삼는 묘법연화경과 같은 것으로 묘법연화는 廣說이며 이 경은 略說이다. 법화에는 三會 및 여러 가지 權·實이 있으나 이 경은 二死五住를 말한다.
아라한(阿羅漢) : ① 범어 arhan의 音譯. 이것은 男性, 主格, 單數의 形이니, 原形은 arhat. 阿羅訶·阿囉呵·阿盧漢·遏囉曷帝라고도 쓰고, 略하여 羅漢·囉呵라고도 한다. 應供·應·殺賊·不生·無生·應眞·眞人이라고 번역한다. 보통 狹義로 풀이하여, 小乘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이를 가리킨다고 하는데, 廣義로는 大乘·小乘을 통하여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應供이라 함은 供養을 받는데 응하는 이, 相應한 이,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이라는 의미인데,「供養云云」은 補足한 말로,「應」은 확실히 이 말의 번역이다. 應供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을 大應供이라 하고, 보통 佛陀의 異名이다. 殺賊이라 함은, 번뇌의 賊을 죽였다는 의미이며, 不生 또는 無生이라 함은, 영구히 열반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다시 미혹의 세계에 태어남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이들 두 번역은 原語의 語義에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다. 이를 應供·殺賊·不生의 三義를 阿羅漢의 三義라고 한다.
② 如來十號의 하나. 이 경우는 佛陀의 異名.
③ 四沙門果. 곧 聲聞四果중에서는 최후의 자리. 여기에 다시 向과 果를 나눈다. 그 果를 向해서 수행하고 있는 사이가 阿羅漢向이고, 확실히 그 果에 도달한 때가 阿羅漢果이다. 이 阿羅漢果의 聖者를 已達의 大德이라 한다. 이것은 최후의 理想세계로, 여기에 도달하면 모든 것을 다 배워서 다시 더 배워야 할 一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無學 또는 無學果라 하고, 無學正見 내지 無學正定의 八聖道와 無學解脫·無學正智의 10종의 無漏法을 완성한다고 한다. 이것을 十無學支라고 한다.
④ 俱舍論권25에 의하면 아라한을 6종으로 분류해서, 6종 아라한을 세운다. 곧,
(1) 退法(또는 退相) 아라한(이미 얻은 아라한의 깨달음으로부터 退失하기 쉬운 사람).
(2) 思法(또는 死相) 아라한(退失이 두려워서 自害하려고 생각하는 사람).
(3) 護法(또는 守相) 아라한(退失하지 않으려고 防護하는 자).
(4) 安住法(또는 住相) 아라한(防護하지 않더라도 대개는 退失하지 않지만 또한 增進하기도 어려운 자).
(5) 堪達法(또는 可進相) 아라한(增進해서 빨리 다음의 不動法을 통달하는 자).
(6) 不動法(또는 不壞相) 아라한(전혀 退失하지 않는 자). 이들 중에서 앞의 5는 성품이 遲鈍한 자(鈍根)로 時解脫이라고도, 時愛心解脫이라고도 하고, 뒤의 1은 성품의 예리한 자(利根)로 不時解脫이라고도, 不動心解脫이라고도 한다. 또 아울러서 2종 羅漢이라고 한다. 時解脫은 좋은 緣이 있는 때를 기다려서 定에 들어가 번뇌를 해탈하는 자, 不時解脫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入定하여 해탈하는 자, 時愛心解脫은 이미 얻은 아라한의 깨달음을 항상 애호해서 번뇌를 해탈하는 자, 不動心解脫은 번뇌 때문에 아라한의 깨달음에서 退失하지 않고 해탈하는 자를 의미한다. 또 不動法아라한 중에서, 본래 利根인(예리한 성격자)을 不退(法)(또는 不退相) 아라한이라 하고, 수행의 힘에 의해서 不動法아라한에 나아간 자를 不動法아라한이라고 하여 둘로 나누고, 이것을 앞의 5에 더해서 7종 아라한이라고 하며, 不動法아라한을 不動아라한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다시 緣覺과 佛을 더하여 9종 아라한 또는 九無學이라고 한다.
⑤ 成實論 권一, 中阿含經 권十三에는, 緣覺·佛 대신 慧解脫·俱解脫을 더한 또 다른 형의 9종 아라한(九無學)을 說하고 있다. 그 중 慧解脫은 지혜의 힘에 의해 번뇌를 해탈한 아라한을 말하고, 俱解脫은 慧解脫人이 다시 滅盡定을 얻은 경우를 말한다. 이것을 俱解脫이라고 일컫는 것은, 滅盡定을 얻은 것이 心解脫을 의미하고 있고 따라서 마음과 慧의 兩(곧 俱인)해탈을 얻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慧解脫과 俱解脫을 2종 羅漢이라 하고, 여기에 無疑解脫을 더하여 3종 羅漢이라고 한다. 無疑解脫이라 함은, 俱解脫 중에서 일체의 文義에 통달하여, 四無礙解를 얻은 자를 말함.
⑥ 天台宗에서는 아라한이 不淨觀을 닦는 경우 그 對境의 차이를 따라 壞法·不壞法의 2종 羅漢으로 나눈다.
벽지불(辟支佛) : 범어 pratyekabudda. 辟支·辟支迦佛·辟支迦佛陀라고도 한다. 또는 鉢羅翳迦佛陀라 한다. 舊譯에는 緣覺, 新譯에는 獨覺이라 한다. 꽃이 피고, 잎이 지는 등의 外緣에 의하여 스승 없이 혼자 깨닫는 이.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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