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禪이란 무엇인가

근와(槿瓦) 2015. 3. 6. 00:51

禪이란 무엇인가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선(禪)은 인도에서 일어나고 선종(禪宗)은 중국에서 형성된다. 인도의 선은 각기 사상운동의 근원이고 독립된 하나의 사상은 아니다. 여기에서 선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서 일어난 선종의 그것을 말한다. 먼저 이 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선 사상의 특성이 어디에 있는지 그 원형을 편의상 임제 선사(臨濟禪師, ?~866)의 어록, 즉 <임제록(臨濟錄)>을 중심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이 책은 선 사상의 극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선종에서 항상 좌선(坐禪)이 행해지고 있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좌선의 방법은 고대 인도에서부터 한결같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각이 8, 9세기 중국에 와서는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 <임제록>에 의하면 선이 곧 좌선은 아니다. 선사는 이와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배부르게 밥을 먹고 좌선하여 선정(禪定)에 들려고 한다. 망상을 붙들고 놓지 않으면서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 이것은 외도(外道)의 짓이다. 그대들이 생각을 멈추어 조용함을 찾거나, 생각을 일으켜 밖으로 비추거나, 생각을 억제하여 안으로 가라앉히거나 혹은 생각을 가라앉혀 선정에 들려고 한다면, 이런 놈들은 모두 가짜다.”

 

여기에서 인용한 조사의 말은 하택 신회(荷澤神會)의 말이다. 그는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 사람들이 좌선에만 치우쳐 있는 것을 통렬히 비난한다. 선이 곧 좌선인 줄 알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으로써 선을 삼으려는 오류는 일찍부터 있어왔다. <유마경(維摩經)>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의 출가 제자 사리불(舍利弗)이 고요한 숲속 나무 아래 앉아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 유마힐이 그에게 타이른다.

 

“앉아만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좌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현실 속에 살면서도 몸과 마음이 동요가 없는 것이 좌선입니다. 생각이 쉬어버린 무심한 경지에 있으면서도 온갖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이 좌선입니다. 마음이 고요에 빠지지 않고 또 밖으로 흩어지지 않는 것이 좌선입니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 좌선입니다. 이와 같이 앉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부처님께서 인정하시는 좌선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좌선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좌선의 태도, 특히 그 마음가짐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좌선은 하나의 방법이지 목적은 아니다. 마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거기에 알맞은 약과 같은 것이다. 병이 나으면 약은 필요없다. 약은 앓는 사람에게만 필요하다. 성한 사람에게는 쓸데가 없다. 약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따른다. 약보다는 먼저 건강해야 한다.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아야 한다. 본래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일이 첫째가는 정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말씀하기를,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자신의 성품을 더럽히지 말라고 한 것이다.

 

마조(馬祖)스님이 젊었을 때 남악산의 회양(懷讓)선사 문하에서 열심히 좌선을 했다. 하루는 선사께서 좌선하고 있는 제자에게 묻는다.

 

“거기서 무엇하고 있나?”

“좌선합니다.”

“좌선은 해서 무엇하게?”

“부처가 되려고 좌선하지요.”

 

이튿날 선사는 제자가 좌선하고 있는 앞에 가서 벽돌을 득득 바위에 간다. 제자는 선사께 묻는다.

“스님, 벽돌을 갈아서 어디에 쓰시렵니까?”

“거울을 만들거야.”

“아니,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다니요?”

“그래, 앉아만 있으면 부처가 될 줄 아나?”

이 말에 젊은 제자는 정신이 번쩍 든다.

 

“스님, 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소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수레를 몰아야 하나, 소를 몰아야 하나? 선은 앉거나 눕는 데에 상관이 없는 것이며, 부처는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도 집착이 없어서 취하고 버릴 게 없는 것이 진짜 선이다.”

이 말 끝에 마조 스님은 문득 깨닫는다.

 

다시 임제 선사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보자.

“도반들이여, 대장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본래 무사(本來無事)임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믿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항상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리고 허둥지둥 남의 얼굴만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선종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바로 지금이지 다른 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한 것도 병을 다스리는 한때의 약일 뿐 실(實)이 있는 것은 아니다.”

 

좌선만이 아니라 8만4천 부처님의 법문도 병에 따라 처방된 약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인간의 결함을 메꾸어주는 도구. <팔만대장경>도 결국 더러움을 씻어내는 휴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래 온전한 인간에게는 보수나 수리는 쓸데없는 짓. 임제를 비롯하여 중국의 선사들은 입을 모아 한결같이 주장한다.

 

“그대들은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 도를 닦아 법을 깨닫는다고. 도대체 어떤 법을 깨닫고 어떤 도를 닦는다고 하는가. 그대들의 지금 행동에 무엇이 모자라 다시 보수하겠다는 것인가?”

 

말 뒤에 숨은 뜻에 착안할 것. 임제 선사의 출발점은 본래 청정(本來淸淨)에 있다. 본래란 과거로 소급된 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당장을 뜻한다.

 

임제 선사의 이와 같은 견해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중국 선종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점이다. 어떤 마음이든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선의 출발점이 된다.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이 아니라, 아예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이다.

 

<육조단경(六祖檀經)>은 좌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밖으로 모든 대상에 대해서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이 좌(坐)이고, 본성(本性)을 보고 어지럽지 않음이 선(禪)이다.’

 

육조 혜능(六祖慧能)은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데서 본성을 본다고 했다. 본다는 것은 지혜의 활동을 뜻한다.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좌선의 필요가 없는 것이 진정한 좌선이라는 것.

 

마조(馬祖)는 혜능에 한 걸음 더 앞서 이와 같이 말한다.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며, 손을 놀리고 눈을 깜빡거리는 등, 온갖 행동이 모두 있는 그대로의 불성(佛性)의 작용이다. 탐 · 진 · 치(貪瞋癡)가 선행을 하건 악행을 하건,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거나 모두 불성의 작용이다. 밀가루로 어떤 요리를 만들건 간에 그것은 모두 밀가루인 것과 같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 그 입장이 온갖 마음의 움직임을 긍정하는 조건이다. 일어나지 않는 마음이 주체가 되어 일어나지 않는 데에도 머물지 않으면서 끝없는 작용을 전개한다.

 

마조의 말을 더 들어보자. <전등록(傳燈錄)>권6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실려 있다.

 

어떤 스님이 스승 마조(馬祖)께 물었다.

“스님은 어째서 마음이 부처(卽心卽佛)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서다.”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음도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그럼, 울지도 않고 울음을 그치지도 않을 경우에는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런 녀석에게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그런 사나이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사나이라면 선뜻 대도(大道)를 보여주겠다.”

 

마음이 부처(卽心卽佛)란 말은 마조에게서 시작된 당대(唐代)최성기 선의 유행이다. 그것은 자기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는 사람에게 대한 약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자신 외에 따로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약은 효험이 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 장난감이다. 또 마음이 부처라고 하면 마음 밖에는 부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에는 그것을 없애는 약이 또 필요하다. 그래서 마음도 부처도 아니라고 한다.

 

이와 같이 당대(唐代) 전성기의 선은 철저히 인간을 긍정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임제 선사다. 인도의 불교가(특히 초기 불교의 경우) 인간 부정으로부터 출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의 선은 현실의 인간을 무조건 긍정한다. 그들이 즐겨 입에 담는 부정적 언사는, 실은 일체의 조건이나 개별적인 한정을 넘어선 인간 본래의 완전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몽둥이로 치고 큰소리로 꾸짖고 하는 것도, 본래의 인간에게 그 어떤 결함도 없다는 것을 선뜻 나타내는 행위다.

 

선의 세계에서는 평상심(平常心)을 귀하게 여긴다. 평상심이 곧 도(道)라고도 한다. 신(神)보다는 사람을, 신기한 것보다는 평범한 일상적인 것을, 성인보다는 일 없는 사람(無事人)을 귀하게 여긴다.

 

다시 <임제록>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대가 바른 견해(眞正見解)를 얻고 싶거든 타인으로부터 미혹(迷惑)을 입지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모두 죽이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구를 만나면 친구를 죽여라. 그래야만 그 어떤 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고 자유자재하리라.”

 

부처나 조사, 성인이나 스승 혹은 부모와 친구를 최고가치로 삼을 경우, 그것들은 스스로를 얽어매게 한다. 일단, 모방과 기성의 틀에 갇히게 되면 새로운 가치 창조를 방해받는다. 임제는 그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사람의 함정, 즉 인혹(人惑)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말한다.

 

“부처로서 구경(究竟 : 최고가치)을 삼지 말라. 내가 보기에는 부처도 한낱 냄새나는 존재요, 보살과 성인은 목에 씌우는 형틀, 이 모두 사람을 결박하는 것들이니라.”

 

외부적인 권위에 사로잡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스스로를 결박해서는 안된다는 항변이다.

일반적으로 선사들의 표현이 과격한 것은 산 체험을 죽은 언어와 문자로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파격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는 죽은 언어와 문자를 살려서 쓸 수가 없다.

 

남악 회양(南岳懷讓) 선사가 어떤 학인(學人)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느냐?”

“어떤 것이 정토(淨土)입니까?”

“누가 너를 더럽혔느냐?”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누가 생사를 너에게 지우더냐?”

 

이와 같이 선문답은 상대가 설정한 전제조건을 거부하고 절대 무전제의 경지로 몰고 간다. 그것은 대개 일문일답으로 그친다. 그 이상의 설명은 도리어 과잉친절이 되어 상대편의 길을 막는 결과를 낳는다.

 

질문은 지성적으로 전개되는데 답은 체험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적(知的)인 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을 일으켜 최후의 답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을 멈추어야 해답이 나오기 시작한다.

 

선은 설명하거나 해설하는 등 논리적인 전개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안에서 나온 의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찾으라고 몰아세운다. 왜냐하면 답은 질문 속에 이미 잉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꺼낼 수가 없다.

 

말을 가리켜 갈등(葛藤)이라고 한다. 말이 일단 입 밖으로 나오면 반드시 거기에 따른 곁가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제 선사는 자신이 한 그 말에조차도 얽매여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 말에 미혹(迷惑)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선가에서 내세운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은 이것저것 가진 것이 많다. 연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 옷을 너무 많이 걸치고 있다. 또 가리지 않고 마구 과식하고 있다. 분별이 많고 생각이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본래의 건강을 잃어가면서도 뉘우칠 줄을 모른다.

 

임제 선사는, 아무 것도 걸치지 말고 훨훨 벗어 던져 알몸이 되라고 한다. 알몸이 되라고 하면 우리들은 또 ‘알몸’이라는 옷을 걸치려고 한다. 진정한 알몸은 어떤 옷이든 마음대로 입었다 벗었다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연장이든지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임제 선사는 이것을 ‘경계(境)를 타는 사람’이라고 한다. 어떤 결함도 없는 완전한 인간이란 완전이라고 하는 데에도 머물지 않는 사람이다. 완전이란 이미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라, 시시각각 새로운 창조이기 때문이다.

 

임제를 비롯하여 중국의 선사들이 추구한 것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心不起) 세계였다. 물론 그와 같은 세계의 구조는 인도의 선사들에 의해서도 밝혀져 대 · 소승의 경론에서도 한결같이 다루어져 있다. 중국 선사들의 특색은 그와 같은 마음 그 자체를 구체적인 지금 당장의 자기로서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데에 있었다.

 

달마와 혜가(慧可)사이에 주고받은 저 유명한 안심 문답(安心問答)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제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십시오.”

“그래? 그럼 어디 네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하게 해주마.”

“(한참 망설인 끝에) 아무리 제 마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찌 네 마음이겠느냐. 이제 너에게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노라. 알겠느냐?”

 

이 말 끝에 혜가는 크게 깨닫는다. 달마 스님은 혜가에게, 마음을 편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선의 기능이요 그 정신이다.

 

직지인심(直指人心), 사람의 마음을 곧 바로 가리킴이란 이런 것이다. 선의 실천을 좌선으로만 연상하기 쉬운데, 중국의 선종은 이 ‘직지인심’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데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임제록>에 수록된 임제 선사의 말씀은 그와 같은 직지인심의 실례들이다. 달마도 혜능도 임제도 선을 말하지는 않았다. 불교를 말한 것도 아니다. 그분들은 저마다 자기 사상의 근원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것을 선의 사상이라고 한다면, 선은 가장 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전 : 텅빈 충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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