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의 후배들에게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가야산에서 내 생애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보냈다. 출가하여 처음 중노릇을 익히고 다지던 중요한 시기다.
선원인 퇴설당(堆雪堂)에 방부를 들일 무렵에는 해인사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다. 물론 매표소를 지어놓고 관광객들에게 관람료라는 걸 받지도 않았다. 강당인 궁현당 시절에도 해질녘이면 명등(明燈 : 등불을 켜고 관리하는 소임)이 호야를 닦아 내걸던 그런 때다. 관음전 한쪽 방, 비봉산이 3백호쯤 되는 전경으로 내다보이는 그 소소산방(笑笑山房) 시절에야 전기가 들어왔다. 그러니까 5 · 16 군사혁명 이후가 된다.
해인사에 살면서 누린 은혜는 무엇보다도 고마운 스승들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었던 일이다. 그 시절의 주지이신 자운(慈雲) 율사 스님에게서 계덕(戒德)이 무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우리에게 중노릇 잘하라고 구족계를 일러주신 분도 자운 스님이다.
그 시절 선원의 조실은 금봉(錦峰) 선사이신데, 살아 있는 화두에 대한 가르침은 지금도 어젯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된다. 본래 면목은 그만두고 어떤 것이 수좌의 현전면목(現前面目)인고? 조실로 추대되던 그해 여름 외나무다리 근처 개울가에서 입적하셨는데, 스님은 부르때적(상추전)을 아주 좋아하셔서 우리도 함께 그 맛을 들이게 되었다.
청담(靑潭) 스님께서 주지로 취임하시자 전에 없이 대중공사가 잦고 그 시간도 길어졌다. 말이 공사(회의)지 일방적인 훈시였다. 어떤 때는 아침 공양 끝에 시작된 공사가 앉은 자리에서 점심 공양까지 해야 할 때도 있었다. 교단 정화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사명에 출가 수행의 길이 결코 자기 형성에만 안주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다. 큰스님 밑에 올바르고 유능한 경영자가 없으면 그 어떤 이상도 실현 불가능, 한낱 구호로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지켜볼 수 있었다.
명봉(明峰) 강주 스님으로부터 처음 경전을 배웠다. 경을 보는 태도에 대해서 전통적인 인습을 극복, 경을 보는 눈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함께 배울 수 있었다. 경은 이미 이루어진 틀에 박힌 남의 주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전체의 맥락과 흐름과 사상을 캐내야 한다는 학구적인 자세를 익히게 되었다. 뜻은 대승에 두고 행동은 소승으로 하라는 그때의 가르침을 귓등으로 흘려 듣고 말았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그 말씀의 뜻이 다가서고 있다.
그 시절의 선원은 ‘唯以無念爲宗(오로지 무념으로써 삶의 지표를 삼으라)’의 편액이 붙어있는 응향각(凝香閣 : 禪悅堂의 전신)인데, 그 한쪽 방에 응선(應禪) 노스님이 머물고 있었다. 스님은 이따금 별난 짓을 하였다. 세상이 어둡다고 한낮에 등불을 켜고 다니면서 큰방에 들지 않고 깡통을 가지고 후원에서 얻어다 따로 공양을 드는 때도 있었다. 때로는 문짝을 때려부수기도 하고 아무에게나 마구 욕지거리를 퍼붓기도 하였다. 스님의 웃는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말하자면 대중에서 항상 어긋장만 놓은 괴각(乖角)노릇을 하였다. 끝내는 몹시 추운 겨울날 용탑전 아래 골짝에서 굳어진 시신으로 발견되었었다. 초우를 먹고 자살하신 것이다. 일생괴각 처중무익(一生乖角處衆無益) 평생토록 어긋장만 놓으면 대중에 있어도 아무 이익이 없다고 한 청매 선사의 교훈이 상기되었다.
선원의 유나로 계신 지월(指月)스님을 잊을 수 없다. 항상 간절한 말씀으로 후학들을 일깨워주셨고, 새파란 어린 사미승한테도 존대말을 쓰셨다. 스님은 겸손과 하심이 몸에 배어 있었다. 조실 스님이 출타하거나 안 계실 때 몇차례 상당법문을 하셨는데 늘 한결같은 내용을 똑같은 말씀으로 하셨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게 들렸다. 해진 신발을 낱낱이 꿰매 신는 분이었다.
수도도량이란 번듯한 건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진정한 수도인이 살 때 허물어져가는 낡은 집에서도 빛이 나는 법이다. 말이 없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질서와 조화와 덕화를 끼치고 있는 구참(久參) 수행자가 모여 있는 곳이 좋은 수도도량이다. 항상 온유하고 인자하고 후덕하면서도 수행자로서 깨어 있는 기상을 지닌 경험 많은 수행자를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것은 두고두고 간직할 출가자의 조촐한 복이 아닐 수 없다.
한 부처님의 제자로서 출가 수행하고 있는 이 시대의 도반인 후배 학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학인(學人)이란 영원한 구도자다. 단순히 강원에서 글을 배우는 풋중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출가한 지 얼마 안되었다는 것은 다른 한편 출세간에서 그만큼 오염이 덜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출가를 했는지, 출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화두(話頭)를 챙기듯 때때로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평생 중노릇을 하는 데에 배우고 익히고 다지는 기초교육기관이 강원(講院)이다. 단순히 글 몇줄 배운 것으로 자족한다면 밥중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학인이라면 먼저 구도자로서 학구적인 자세부터 갖춰야 한다. 배우는 일에 진지하고 열의있게 대할 때 학구적인 자세는 저절로 갖추어지게 마련이다.
오늘날 사원의 교육은 일반 교육에 견줄 때 모든 면이 낙후되어 있음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매달려 있는 중 · 고등학생들보다 우리는 훨씬 공부하는 시간이 적다. 이런저런 행사와 핑계로 공부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
물론 책상 앞에 붙어 있는 것만이 출세간의 공부는 아니다. 문제는 얼마나 진지하고 열의있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임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경전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못지않게 수행자로서 지녀야 할 행동양식도 함께 갖추어야 한다.
자기에게 주어진 소임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유능한 수행자가 될 수는 절대로 없다. 그 소임을 통해서 자신에게 잠재된 기능도 일깨우고 수행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도 함께 닦을 수 있는 것이다.
중노릇이란 한해 이태로 그칠 일이 아니고 평생의 일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고 알차게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반거충이로 어정쩡하면 하루하루가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출가의 의미는 전혀 없고 중도 속도 아닌 반거충이로서 한세상을 겉돌게 된다.
순간순간이 바로 나를 형성하는 일이고 또한 구체적인 수도생활임을 명심한다면,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지낼 수가 없다. 시간을 아껴서 활용할 줄 모르고 무익한 일에 흘려버리지 말아야 한다.
수도생활에 아무 도움도 안되는 시시한 일에 얽매이거나 관심 두지 말라. 어떤 것이 본질적인 삶이고 비본질적인 삶인지 스스로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자신으로서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자신을 거듭거듭 계발 형성해 나아간다면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될 것이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 동자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53선지식을 한 사람 한 사람 방문하는 과정에서 그때마다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구도의 의미를 다지는, 그런 간절한 태도로써 배우고 익히면서 거듭거듭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글을 배우고 경전을 독송하는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더 말할 것도 없이 옛 어른들의 살아 있는 말씀의 거울에 오늘의 우리를 비추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은 되살핌이 없다면 간경(看經)은 한낱 지식으로 하락하고 만다. 그런 지식은 출가 수행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배우고 익힐 수 있다.
현재를 최대한으로 사는 것이 수행자의 삶이라면 우리가 나날이 배우고 익히는 일이 현재의 우리 삶에 이어져야 한다. 승가의 기초교육 기관인 강원에서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도 자기 삶에 어떤 변화나 향상이 없다면, 그는 숨쉬는 송장이나 다를 바 없다.
경전에 나오는 아난이나 수보리, 사리불이나 가섭존자 등을 부처님 당시에 생존했던 과거의 인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 내 자신으로 볼 때 우리가 배우는 경전은 모두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오늘의 법문으로 내 앞에 메아리칠 것이다.
대장경판을 모신 법보의 도량에서 배우는 인연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팔만대장경판을 과거의 문화유산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온 도량에 메아리치고 있는 부처님의 사자후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도량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오늘의 법보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법보가 빛을 발할 때 이 땅의 불교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학인들이여, 법보의 긍지를 지니고 밝고 맑게 살 것을 조석으로 염원하라. 그리고 거듭거듭 출가하라!
출전 : 텅빈 충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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