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과 혜는 일체임(제三)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대사께서 대중에게 이르셨다.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정혜(定慧)로써 근본을 삼느니라. 대중은 미혹하여 정(定)과 혜(慧)가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혜는 일체요 둘이 아니니 정은 이것이 혜의 체(體)요 혜는 이것이 정의 용(用)이니라. 혜에 즉할 때에 정이 혜에 있고, 정에 즉할 때 혜가 정에 있나니 만약 이 도리를 알면 정혜를 함께 배우게 되리라. 대개 도를 배우는 이들이 정을 먼저 하고 다음에 혜를 일으킨다거나 혜를 먼저 하고 다음에 정을 일으킨다거나 하여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와 같은 견해를 갖는 자는 법에 두 모양이 있는 것이니라. 이는 입으로는 선하나 마음속은 선하지 아니함이니 공연히 정혜가 있다 하고 정혜가 같지 않은 것이요, 만약 말과 마음이 함께 선하여 내외가 한가지면 곧 정과 혜가 한가지리라. 스스로 깨닫고 수행함은 입다툼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만약 먼저다 후(後)다 하여 다툰다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과 같으니 승부를 끊지 못하고 도리어 아(我)에 대한 국집만 더해가니 사상(四相)을 여의지 못하리라.
선지식아, 일행삼매(一行三昧)라 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항상 한결같은 곧은 마음을 행하는 것이니라. 〈정명경〉에 이르기를 「곧은 마음 이것이 도량(道場)이며, 곧은 마음이 정토(淨土)」라 하였으니 마음으로는 첨곡(諂曲)하면서 입으로는 다만 곧은 것을 말하며, 입으로는 일행삼매(一行三昧)를 말하나 직심(直心)은 행(行)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하느니라. 다만 직심(直心)을 행하여 일체법에 집착을 갖지 말아라.
미혹한 사람은 법상(法相)에 착하여 일행삼매에 국집하면서 곧 말하기를, 「앉아 동(動)함이 없고 망령되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즉 일행삼매(一行三昧)라」하나니, 이와 같은 견해를 갖는 자는 곧 무정물(無情物)과 같으니 이는 도리어 도를 장애하는 인연이 되느니라.
선지식아, 도는 모름지기 흘러 통하여야 하거늘 어찌하여 도리어 체(滯)하랴.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아니하면 도가 곧 통하여 흐르고 만약 마음이 법에 머무르면 이것을 스스로 얽매인다 하느니라. 만약 앉아 동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면 저 사리불과 같이 숲속에서 좌선하고 있다가 도리어 유마힐의 꾸짖음을 당하리라.
선지식아, 또 어떤 사람이 좌선을 가르치되 마음을 보고 고요를 관하며 동하지 아니하고 일어나지 아니하여 이것으로 공부를 삼는다 하거늘 미혹한 사람은 알지 못하고 곧 이에 국집하여 전도(顚倒)하게 되나니 이와 같은 자들이 적지 아니하여 이와 같이 서로 가르치니 그러므로 이것은 크게 그릇됨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선지식아, 정혜는 무엇과 같을까? 비유하면 마치 등불과 같으니 등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곧 어두우니 등은 빛의 본체요 빛은 등의 작용이라. 이름은 비록 둘이나 체는 본래 동일하니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선지식아, 정교(正敎)에는 본래 돈점(頓漸)이 없건만 사람따라 성품이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어 미혹한 이는 점차 계합하고 깨친이는 단번에 닦아서 스스로 본심을 알게 된다. 그러나 본성을 봄에는 차별이 없으니 여기서 돈점이라는 거짓 이름이 있게 되느니라.
선지식아, 나의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서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으며 무주(無住)로써 본(本)을 삼느니라. 무상(無相)이라 함은 상(相)에서 상(相)을 여읨이요, 무념이라 함은 생각에서 생각이 없음이요, 무주(無住)라 함은 사람의 본성이 세간의 선이나 악이나 밉거나 곱거나 원수거나 친하거나 모질고 거친 말을 하거나 속이고 다툼을 당하거나 할 때 그 모두를 공(空)으로 돌려버리고 상대하여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생각 생각중에 앞경계를 생각하지 않음이니라. 만약 먼저 생각, 지금 생각, 뒷생각이 생각마다 상속하여 끊임이 없으면 이것을 얽매임이라 하는 것이요 만약 모든 경계를 대함에 생각 생각에 머물지 않으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니 이 까닭에 무주(無住)가 근본이 된다 하느니라.
선지식아, 밖으로 일체 상을 여읨을 무상이라 하나니 능히 상을 여의면 곧 법계가 청정하니라. 이 까닭에 무상으로 체를 삼느니라.
선지식아, 모든 경계에 마음이 물들지 않는 것이 무념이니 스스로의 생각이 항상 모든 경계를 여의어 경계에서 마음을 내지 않느니라. 그러나 만약 다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없애어 버리면 한생각마저 끊어지면서 곧 죽게 되어 다른 곳에 몸을 받는다 한다면 이는 큰 잘못이라, 도를 배우는 사람은 경계하여야 하느니라. 만약 법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자기 혼자 잘못되는 것은 오히려 어쩔 수 없거니와 다시 타인에게 권하여 그르치게 하며, 또한 자기가 미혹한 것은 알지 못하고 오히려 부처님 경전을 비방까지 하게 되니 이 까닭에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느니라.
선지식아, 어찌하여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는다 하랴. 다만 입으로만 견성하였다 하는 사람이 있으므로 미혹한 사람은 경계 위에서 생각을 내게 되어 생각 위에서 문득 사견을 내니 일체 진로 망상이 이로부터 생기느니라. 자성은 본래 한 법도 가히 얻을 것이 없는 것을 만약 얻을 바가 있다하여 망령되이 화복을 말한다면 이것은 곧 진로며 사견이라. 그러므로 이 법문은 무념을 세워서 종을 삼느니라.
선지식아, 무(無)라 함은 무엇이 없는 것이며 념(念)이라 함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무〉라 함은 두가지 상(二相) 이 없는 것이니 모든 번거로운 망상이 없는 것이요, 〈념〉이라 함은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생각함이니 진여는 곧 생각의 본체요, 생각은 곧 진여의 작용이니라.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킴이요 눈이나 귀 · 코 · 혀가 능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 진여에 성품이 있으므로 생각이 일어날 수 있거니와 만약 진여가 없으면 눈이나 귀나 빛깔이나 소리가 당장에 없어지리라.
선지식아, 진여 자성이 생각을 일으킴으로 육근(六根)이 비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앎이 있더라도 모든 경계에 물들지 아니하며 진성(眞性)이 항상 자재하니라. 이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능히 모든 법상을 밝게 분별하나 제일의(第一義)에 있어서는 동함이 없다」하였느니라.
출전 : 법보단경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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