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심법요(傳心法要)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근와(槿瓦) 2014. 12. 1. 01:03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주의할 바는 세상 만사를 다만 보고 듣는 데서 그칠 뿐이요, 옳고 그른 것은 따질 것이 없으며 또한 그러한 일에 불평만으로 감정을 내지 말 것이며,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떠나서 따로 이 마음을 찾으려고도 말 것이며, 보고 듣는 것을 버리고 따로 참되고 좋은 법을 얻으려고도 하지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보고 듣는 이것만이 곧 참된 본래 마음이라고 생각하여도 어긋나는 일이요, 또한 보고 듣는 것과 떨어져 있는 줄 알아도 잘못이다. 어떠한 주의 주장도 세우지 말며, 무슨 일이든지 살고 죽는 일에까지라도 태연 무심하면 탕탕하여 걸림이 없는 경지에 소요자재(逍遙自在)하므로, 어떠한 곳일지라도 수도장이 아닌 곳이 없게 된다.

 

세상 사람들이 도를 배우려고 모든 부처님이 이 마음법을 전하였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되,「이 마음 가운데 별달리 깊고 묘한 도리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을 구하여 얻을 것인가」고 ----그러한 사람은 이 마음이 곧 정법이요, 정법이 곧 이 마음인 것을 알지 못하며 또한 믿지도 못한 때문이니,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이 마음을 다시 따로 찾아 구한다면 될뻔이나 할 일인가? 천만겁을 지내도 마침내 얻을 수 없을 것이니, 아예 당장에 무심하여 문득 본정신 본마음대로인 것만 같지 못한 것이다.

 

마치 저 힘센 장사가 보배구슬을 머리 상투에다 꽂고 깜빡 잊고서 이 곳을 딴 곳에서 찾으려고 하면 온 세계를 다 돌아다니더라도 마침내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슬을 본 사람이 있어 손으로 그 사람의 상투만 가르쳐 주어도 그 당장에 그 구슬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 구슬을 잃었던 것도 아니며, 새로 얻은 것도 아니다. 그 구슬은 잃었던 때나 얻은 때나 항상 상투에 꽂혀서 있었지마는, 다만 그 사람이 모르고 공연히 찾았던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도를 배우는 사람도 자기의 본래 마음 자리가 곧 도인 것을 잊어버리고, 도리어 이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을 부정하고 드디어 달리 따로 법을 구하여 깨달으려고 한다. 온갖 공을 들여 갖은 수행을 다 닦아서 점차로 도를 깨쳐 가자고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억만겁을 부지런히 닦아도 영원히 불도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

 

어느 때든지 도를 깨닫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 않고 순간적이어서 일초도 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깨닫고 보면 저 과거에 천만다행으로 드나들며 수행을 한 것이 다 헛된 짓 한 것임을 마침내 알게 된다. 마치 힘센 장사가 자기 머리에 꽂은 구슬을 찾던 일과 같아서, 다만 본래부터 자기 머리에 꽂혀 있던 그 구슬을 발견한 것 뿐이므로, 따로 찾느라고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한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구슬은 구슬대로 온전했던 그 일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나는 실로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 일이 없느니라」하셨고, 육근(六根)과 칠진(七塵)과 육식(六識)은 서로 객(客)으로만 모여 화합하여, 무슨 형상으로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하는 것 뿐이니, 이 우주 인생을 구성한 一八계(界)가 다 이렇게 공허한 가상(假相)인 것이다. 일체 만사가 공허한 가운데 오직 이 마음자리만 항상 이대로며 탕연(蕩然)하고 청정하여 생사에 초월한 것이다.

 

수도하는 사람으로서 음식을 먹을 때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망상과 욕심으로 먹는 것이요, 둘째는 지혜와 도심(道心)으로 먹는 것이다. 지혜와 도심으로 먹는다는 것은 육신을 거두기 위하여 주는대로 생기는대로 받아 먹을 뿐이고, 평생에 별로 음식에 탐욕을 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망상과 욕심으로 맛좋은 음식만 찾아서 온갖 망상으로 오직 입에 맞는 것만 찾아서 양껏 먹고도 허덕거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음식 먹는 것만 보아도 중인지 아닌지 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성문(聲聞)의 나한들은 자기 스스로가 자기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다른 선각자의 설법하는 소리를 듣고서 비로소 법을 깨달으므로 성문이라 한다. 혹은 신통을 보고서, 혹은 상서(祥瑞)나 언어 동작을 보고서, 혹은 보리 ․ 열반 등의 최상진락(最上眞樂)의 정법이 있다는 법문을 듣고서, 비로소 마음을 내어 삼무수겁(三無數劫)을 드나들며 도를 닦아서 불도를 성취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 성문의 나한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성문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샛별을 보고 깨친, 이른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종풍인 달마 선종의 지시에 의하여 한마디의 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문득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을 깨달아서, 만법이 다 이 마음이며 이 마음을 두고 따로 다른 한 법도 얻을 것이 없으며, 또한 한 가지 수행법도 닦을 법이 없는 것을 철저히 알아내면 이것이야말로 무상대도(無上大道)이며 또한 진여불(眞如佛)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일생에 이(理)와 사(事)가 구족하게 성불하여 마치지 못하는 사람은 또한 달마아손(達摩兒孫)이 아니다. 무릇 불도(佛道)를 배우는 사람은 무슨 생각이든지 털끝만치만 남아 있으면, 이 마음의 도와는 크게 어긋나는 것인 줄 잘 알아서 조심하여야 한다. 무슨 생각이든지 마음에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며, 만사를 무심으로 처리하면 곧 이것이 부처이다. 그러므로 도를 배워서 금생(今生)에 부처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저 일체 불경을 다시는 들여다보지 말고, 또한 부처가 되고자 하는 생각까지도 하지 말며, 자기 마음까지도 이것을 별달리 소중히 여기지 말고, 다만 이 마음의 천진면목으로 더불어 본래부터 소요자재(逍遙自在)할 따름이다.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으면 곧 이 마음이 청정하여 한 생각의 망상도 일어나지 않으며, 무엇이나 애착하는 일이 없으면 모든 망상이 봄바람에 눈 녹아내리듯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 마음에 생멸하는 잡념이 없으면 그 사람은 곧 부처이다. 부처님께서 팔만 사천 법을 마련하신 것은 저 어두운 중생들의 팔만 사천의 사견망상(邪見妄想)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것은 다만 저 중생들을 교화 인도하여 그 마음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우주 만법과 만물은 이것이 다 우리의 인식에서 나타난 것이고 본래는 없던 것이다. 우리가 이 현상계를 인정하는 관념만 버리면, 둥글고 밝고 깨끗한 본래 마음 자리만이 온전히 남게 되어서, 도리어 만법에 두루하여 그것들과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법을 초월하여 그것을 내 마음대로 부릴 줄 아는 이는 그가 곧 부처이다. 모든 번뇌 망상을 버리고 나면, 이것이 곧 한 법도 가히 얻을 바가 없는 본래 마음자리이다. 불도를 배워 닦는 방법의 핵심을 알고자 하거든, 다만 이 청정한 마음에 한 물건도 간직하지 말 것이다.

 

가끔 부처님의 진법신(眞法身)이 허공과 같다고 비위로 말하지마는, 그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자리인 이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이 법신(法身)이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말하되, 우리의 마음인 이 법신이 저 허공에 두루하였으므로 허공이 우리의 마음인 이 법신을 포함하고 있다 하니, 이것은 법신이 곧 허공이며 허공이 곧 법신인 원리를 모르고 하는 말인 것이다. 만일 저 허공과 마음이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허공과 마음을 따로 갈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들을 갈라 놓을 수 없는 이상, 허공이니 법신이니 하는 것은 다만 제 스스로가 별명을 지어서 그렇게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 무한대(無限大)는 아닌 것이다. 시간도 그렇고 공간도 그렇고 또한 법신도 그렇다. 오직 이 마음 자리만이 이 우주에 두루할 뿐이다.

 

그러므로 저 모든 현상계의 존재들은 아무 것도 아닌 청정한 이 본마음 자리의 파동상(波動相)이다. 따라서 저 차별 만법은 그것이 온전히 우리들이 흘리는 이 마음의 그림자인 것이다. 저 물과 물결이 이름이 다르지만 실로는 두 물건이 아니듯이 허공과 법신이 둘이 아니며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고 한 물건의 양면(兩面)이다.

 

이러한 우리의 이 마음만이 유일한 실재며 진리이며 우주의 근본 바탕인 줄을 모르고, 범부들은 우주의 사물과 온갖 형상에만 팔려서 평생을 헤매기만 하다가 끝끝내 안심(安心)을 얻지 못하고 죽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도인들은 자기의 생명인 이 마음을 살펴서 필경에는 인생의 본면목을 깨닫게 되어 생사에 초월자재하게 되는 것이니, 그것이 곧 진리요, 법이요, 부처요, 마음이요, 또한 허공이요, 유정 무정의 만물이다.

 

중생들이 망상을 완전히 버리고 이 마음을 텅 비우지 못하는 것은 버릴 것이 없어지도록 버리라고 하니 그러면 필경에 천지도 몸도 마음도 없어져서 허공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겁을 먹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본래부터 허공은 없는 것인데, 다만 내 스스로가 저 공간이 참으로 있는 것처럼 그릇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실은 오직 무한대인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이 마음 하나만이 두루하고 있는 것인데, 또한 청정하며 신령스럽고 사물을 잘 알아내는 본래부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분주하지도 고요하지도 않으며, 늙지도 젊지도 않으며, 사방도 안팎도 없으며, 빛깔도 소리도 없어서 찾아 얻을 수도 없으며, 지혜로도 말로서도 알 수가 없고, 물건도 아니며 있는 장소가 따로 없는 것이므로 공력(功力)을 들여서 가 볼 수도 없다.

 

모든 부처님이나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라도 대열반성(大涅槃性)의 마음은 똑같은 것이다. 성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법이니, 천진자심(天眞自心)에서 한 생각만 일으키면 다 망상인 것이다. 마음으로써 따로 마음을 구하고자 하지 말 것이며, 부처로서 새삼 부처를 구하지 말 것이며, 또한 법이 법을 찾지 말 것이다. 그러므로 대도(大道)를 배워서 닦는 사람은 곧 그 자리에서 모든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 본래 마음 그대로서 다만 묵묵히 이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까딱하면 크게 어긋나는 것이니, 옛날부터 도인들이 서로 마음으로부터 마음으로 이 비법(秘法)을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아예 자기 마음의 인식 지식 사상과 같은 알음알이만이 곧 이 마음의 전체인 줄로는 알지 말 것이다. 이것은 마치 밤에 담을 넘어 들어온 도둑놈을 자기 아들이 온 것인 줄 잘못 알고 속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중생들이 천만억겁을 살아 오면서 세세생생에 익힌 버릇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이 세 가지 마음(三毒心)이 뿌리 깊이 마음에 박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뿌리채 뽑아버리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부득이하여 선정(禪定) 닦는 방법과 방편지혜(方便智慧)를 가르쳤다. 만약 누구든지 이 마음이 본래부터 언제 한번 번뇌 망상을 일으켜 본 적이 없는 것을 알고 보면, 무엇을 닦으며 따로 또한 깨달을 법이 있으랴. 그러므로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시기를「부처님께서 八만四천가지 법을 마련하신 것은 다만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망상을 버리고 이 마음을 깨쳐서 생사 고해를 해탈케 하고자 하심이다. 나는 이미 모든 망상이 다 없어졌으니 그 법들이 나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다」고 하였다.

 

본래부터 청정한 부처인 이 마음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또한 소유물(所有物)을 간직한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붙지를 못하는 것이 마치 저 허공중에다 一五〇층 집을 짓고자 하는 것과 같아서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불성 자리인 이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아무리 무량 무수한 지혜와 공덕으로 꾸며보려고 하여도 끝내 머물러 있지를 아니할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이 마음이지마는, 쓰려고 들면 무진장(無盡藏)의 지혜와 공덕이 쏟아져 나오다가, 그만두면 아무 것도 없는 것조차 없는 것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이 마음은 절대이며 고독이며 청정이며 자유이며 안락이며 자비이며 일체 지혜이며 절대 능력으로서 정말로 영원불멸한 실제인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진정한 나(自我)인 것이다. 우주는 나의 전체이면서 또한 나의 한 조각인 것이다. 제이의(第二義)로 한걸음 내려서서 말하자면 우주만법이 다 이 마음으로부터 창설(創設)된 것이다. 저 온갖 사물을 대할 때에는 나타나서 잘 알다가, 모든 것을 여의고 나면 또한 그것들이 없어졌다는 생각조차 남지 아니하고, 본래대로 청정본연(淸淨本然)한 그대로일 뿐이다. 그것이 곧 너요 나요 만물인 것이요 또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거울같이 맑고 밝은 이 마음 자리를 공연히 허망한 저 바깥 사물에만 팔리지 말 것이다. 이른바「정혜쌍수(定慧雙修)」라는 것은 이 마음이 일체 망상이 끊어져서 태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선정력(禪定力)과 밝고도 고요하고 안락하며 똑똑한 이 마음의 본래면목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 저 객관사물을 대할 적에 조작없이 그대로를 바로 알되 또한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러니 저러니 하고 길게 늘어 놓은 말씀이, 모두가 보통 사람들의 그 발심(發心)과 신해(信解)를 위하여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당장 이 자리에서 자기 마음을 깨달아서 체득코자 하는 성급하고도 영리한 사람이 있다면, 위의 긴 말들은 다 남의 객담(客談)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말들을 다 법문(法門)이라고 듣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드디어 제 마음은 버려 두고 남의 말에 속아 떨어지게 되고 마는 것이다.

 

다만 저 세상 만법에 대하여 그것들이 있는 것이라거니 없는 것이라거니 하는 망상만 내지 아니하면 곧 자기의 본래 마음이 본래부터 온전히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출전 : 傳心法要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전심법요(傳心法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승(相承,1245)-국어사전  (2) 2024.05.15
의심을 떠나지 말라  (0) 2015.11.26
무심(無心)  (0) 2015.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