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四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修行하는데 障礙되는 네 가지.
① (1) 惑障. 貪 · 瞋 · 癡 등의 번뇌가 佛法의 正道를 장애함.
(2) 業障. 身 · 口 · 意의 3業이 불법의 正道를 장애하는 惡業임.
(3) 報障. 과거의 煩惱業에 의해 받는 3惡道가 佛法의 正道를 장애하는 果報임.
(4) 見障. 邪敎에 빠져 佛法을 듣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잘못된 所見이 正道를 장애하는 邪見임을 말함.
② 一闡提 · 外道 · 聲聞 · 緣覺의 4人에 대한 네 가지 장애를 말함.
(1) 闡提不信障. 一闡提人이 4諦와 3寶를 비방하면서, 善惡因果를 不信하는 장애.
(2) 外道著我障. 外道 · 凡夫가 邪道에 빠져, 我는 實體的 존재라고 고집하는 장애.
(3) 聲聞畏苦障. 聲聞이 生死의 고통을 두려워하여 灰身滅智의 涅槃에 나아감을 원하는 장애.
(4) 緣覺捨心障. 緣覺이 利他心을 버리고 自覺만을 목적으로 하여 心身이 함께 滅하는 小乘 涅槃에 들어가는 장애를 말함.
참고
장(障) : 障碍 · 覆蔽의 뜻. 열반의 깨달음을 장애하는 번뇌를 가리키는 말.
① 二障. (1) 俱舍宗에서는 慧를 장애하여 慧解脫을 얻지 못하게 하는 煩惱障으로, 定을 장애하므로 俱解脫을 얻지 못하게 解脫障(定障이라고도 함)이라고 한다. 전자는 染汚無知이며 후자는 不染汚無知다. (2) 煩惱障과 所知障.
② 三障. 三重障.
③ 四障. 闡提障(善根을 근원적으로 단절하여 成佛할 수 없는 惡衆生 곧 一闡提가 佛法을 믿지 않는 것) · 外道障(佛敎 이외의 道를 믿는 外道가 我見을 집착하는 것) · 聲聞障(聲聞이 世間의 苦를 두려워하는 것) · 緣覺障(緣覺이 대자비심을 일으키지 못하여 利他行을 행하지 않는 것)의 넷으로 佛性論 卷二에 있음. 또 惑障(煩惱) · 業障(惡業) · 報障(果報) · 見障(邪見)의 넷을 들기도 한다.
수행(修行) : 敎法을 몸에 지녀 갈고 닦아 실천하는 일.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찾는 마음을 발하여(發心), 그 願望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행하고, 그 결과로서 깨달음을 펼친다고 한다. 수행이란 특히 頭陀苦行 또는 廻國巡禮란 뜻으로 쓰고 이를 행하는 사람을 修行者, 또는 行者라 부르기도 한다. 성문 · 연각 · 보살이 각각 究極의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에 대하여 성문은 三生六十劫, 연각은 四生百劫, 보살은 三祇百劫을 요한다고 한다.
(1) 三生六十劫이란, 성문이 아라한과에 이르기까지 가장 빠른 것은 세번 태어나는 기간을 지내고, 가장 늦는 것은 60劫(이 劫은 刀兵등의 1小劫)을 지낸다고 한다. 제一生 또는 처음 20劫에는 順解脫分을 일으키고, 제二生 또는 다음의 二十劫에는 未至定에 의하여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키고, 제三生 또는 마지막 20劫에는 根本定에 의하여 다시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켜 見道에 들고 마침내는 無學果를 증명한다고 한다. 그러나 제三生에서 처음으로 順決擇分의 慧를 일으킨다고 하는 說도 있다. 또한 빠른 것은 利根, 늦은 것을 鈍根이라 하나, 거꾸로 늦은 것은 오랜 鍛鍊을 참아낼 수 있는 練根으로서의 利根이라고 할 수도 있다.
(2) 四生百劫이란 연각이 辟支佛果에 이른는데 가장 빠른 것은 四生, 가장 늦은 것은 百劫을 요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俱舍論> 권十二에는, 麟角喩獨覺(緣覺)은 반드시 百大劫 기간에 깨달음의 바탕을 닦는다고 설명하고, 四生의 說을 설명하지 않는다.
(3) 三祇百劫이란, 三祇는 3아승지겁(三僧劫, 三祇劫이라고도 함), 百劫은 百大劫의 약어로서 三僧劫百大劫이라고도 하고, 보살은 3아승지겁에 걸쳐 波羅蜜을 닦고 그후의 百大劫에 있어서 부처가 갖출 수 있는 뛰어난 姿形(즉 32相 · 80種好)의 씨앗이 되는 相好業을 심는다고 하고 이들 수행을 三祇의 修行, 이 수행을 거쳐 성불하는 것을 三祇成佛이라 한다. ......
장애(障礙) : 障 · 礙라고만 부르기도 한다. 어떤 일이 생기고 지속하는데 지장을 줌을 일컬음. 또는 두 개의 물질이 서로 장애가 되어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공간을 占有할 수 없는 것을 障礙有對라고 한다.
혹장(惑障) : 四障의 하나. 중생이 탐 · 진 · 치 등의 惑으로 말미암아 心性을 더럽히고 바른 道를 장애하는 것.
삼독(三毒) : 貪欲 · 瞋恚 · 愚癡(貪 · 瞋 · 癡라고도 婬 · 怒 · 癡라고도 한다)의 3煩惱를 말함. 三火 · 三垢라고도 하고 중생을 해롭히는 惡의 근원이기 때문에 三不善根이라고 한다.
업장(業障) : 3障의 하나. 惡業에 의해 생겨난 障害를 가리킴. 言語 · 動作 또는 마음으로 惡業을 지어 正道를 방해하는 장애.
삼업(三業) : 三業이라 해도 그 기준에 따라 각각 다르게 나눈다.
① 身業 · 口業 · 意業의 3業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고,
② 받는 果報의 내용이 福인가 罪苦인가에 따라 福業 · 非福業 · 不動業(色界 · 無色界에 태어날 因인 善業),
③ 받을 果報의 시기에 따라 順現業 · 順生業 · 順後業의 三時業을 들기도 하며,
④ 行業의 내용이 善인가 惡인가에 따라 善業 · 惡業 · 無記業(善도 惡도 아닌 것)이 있는가 하면,
⑤ 行業을 일으키는 심리내용에 따라 曲業(아첨에서 일어남) · 穢業(嗔心에 의함) · 濁業(貪欲에 의함) 등이 있다.
보장(報障) : 異熟障이라고도 하며 三障의 하나. 지옥 · 아귀 · 축생 등의 果報를 받아 佛法을 들을 수 없는 장애.
번뇌업(煩惱業) : 貪 · 瞋 · 癡의 惑과, 이 惑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善惡의 業.
삼악도(三惡道) : 또는 三惡趣. 지옥 · 아귀 · 축생의 三道處를 말함. 죄악을 범한 결과로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악한 곳. 梵網經에「3악도에 떨어지면 二劫 · 三劫동안 부모와 삼보의 이름과 글자를 듣지 못한다」고 하였음.
과보(果報) : 異熟이라고도 한다. 因으로서의 業 곧 業因으로 말미암아 얻는 보답의 결과. 여기에 二報가 있다.
(1) 總報는 引業(總報業)에 의하여 引出되는 總體로서의 果報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일단 인간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그 인간으로서의 공통된 생존을 누리게 됨을 말한다.
(2) 別報는 滿業(別報業)에 의하여 引出되는 차별의 果報로서 滿果라고도 한다. 예를 들면, 같은 인간으로 태어난 경우에도 男 · 女 · 貧 · 富의 차가 있게 되는 등이 그것이다. 또 三時業에 대한 각각의 果報를 합하여 三報라 한다. 곧
(1) 順現報는 現報라고도 하며, 금생에 業을 지어 금생에 받는 果報를,
(2) 順生報는 生報라고도 하며 금생에 業을 지어 다음生에 받는 果報를,
(3) 順後報는 금생에 業을 지어 次生을 넘어 未來世 이후에 받는 果報를 받는다. 六趣 가운데 人趣와 天趣의 果報는 五戒 十善의 因에 의하여 받는 훌륭한 報이므로 人天勝妙의 善果라고 한다. 그렇지만 아직 凡夫의 迷惑의 경계를 여의지 못했으므로 顚倒의 善果라 부른다.
견장(見障) : 四障의 하나. 因果의 도리를 무시하여 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邪見은 곧 惡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그릇된 소견이다. 이 邪見이 보리(菩提)에 나아가는데 장애가 되므로 이를 見障이라 한다.
사교(邪敎) : ① 부정하고 요사한 가르침. 곧 外道의 가르침을 말한다. ② 惡한 것을 가르치는 것.
사견(邪見) : 五見의 하나며, 十惡의 하나. 因果의 도리를 무시하는 옳지 못한 見解. 온갖 妄見은 모두 正理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邪見이라 함.
일천제(一闡提) : 범어 icchantika의 音譯. 一闡底迦라고도 쓰며, 약해서 闡提라고도 한다. 阿顚底迦(atyantika) 및 阿闡提 · 阿闡底迦(acchan=tika) 등은 모두 同類語의 訛音이라고 본다. 원래의 뜻은「欲求를 계속하는 사람」이나 斷善根 · 信不具足 · 極欲 등등으로 번역한다. 成佛하는 因을 갖지 못한 이를 말한다. 入楞伽經卷二에 의하면 이것을 두 가지로 분류해서 二種闡提라 한다. 즉 본래 解脫의 因이 없는 斷善根을 가진 것을 곧 斷善闡提와 보살이 일체중생을 제도하고자 故意로 涅槃의 깨달음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곧 大悲闡提라고 하는 두 가지이다. 大悲闡提는 菩薩闡提라고도 한다. 또 大莊嚴論經卷一에 의하면 어느 기간 成佛될 분이 없지만 결국 佛力으로 成佛할 수 있는 有性闡提와 언제까지나 결코 成佛할 수 없는 無性闡提로 나눈다. 여기서 性이란 成佛의 因을 뜻한다. 또 成唯識論掌中樞要卷上本엔 斷善闡提와 大悲闡提와 無性闡提의 三種闡提를 말한다. 이때에는 斷善闡提는 有性闡提에 속한다. 또 一闡提人을 發心시키기 어려운 것을 生盲은 치유가 될 수 없는 것에 비유하여 生盲闡提라 한다.
외도(外道) : 범어 tirthaka. 인도에 있어서 불교이외의 敎. 불교를 內道라고 하는데 대한 對稱. 外敎 · 外法 · 外學이라고도 하고, 後世에는 邪法 · 邪義의 의미를 갖는 貶稱으로 쓰인다. 인도의 外道로 알려지고 있는 것에 六師外道, 六派哲學派(數論 · 瑜伽 · 勝論 · 正理 · 聲論 · 吠檀多)가 있는데, 이 밖에 다음과 같은 분류가 있다.
[1] 外道四執. 또 外道四見 · 外道四計 · 外道四宗 · 四種外道라고도 한다. ①(1) 一切法은 同一하다고 하는 說(數論外道). (2) 一切法은 別異하다고 하는 說(勝論外道). (3) 一切法은 同一하고도 또 別異하다고 하는 說(尼犍子外道). (4) 一切法은 同一하지도 않고 別異하지도 않다고 하는 說(若提子外道, 또는 邪名外道)[外道小乘四宗論] · ②(1) 世間은 항상하다는 說. (2) 世間은 無常하다는 說. (3) 世間은 常하고 또 無常하다고 하는 說. (4) 世間은 常도 아니고 無常도 아니라고 하는 說(智度論 卷七) · ③(1) 邪因邪果(大自在天外道). (2) 無因有果(常見外道). (3) 有因無果(斷見外道). (4) 無因無果(因果의 도리를 否定하는 外道).[三論玄義 卷上]. ④ 기타. 瑜伽論 권65에는 我와 蘊의 卽離라고 하는 점에서 또 中觀論疏 卷七에는 苦의 自作 · 他作 등의 점에서 四執을 나누고 있다.
[2] 六苦行外道. 自餓外道 · 投淵外道 · 赴火外道 · 自坐外道 · 寂黙外道 · 牛狗外道(소나 개의 흉내를 냄으로 生天을 원하는 외도)[涅槃經 卷十六]. .........
성문(聲聞) : 소리를 듣는 사람이란 뜻으로 제자라고도 번역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원래는 佛在世時의 제자를 말하지만 緣覺 · 菩薩에 대해 二乘 · 三乘의 하나로 열거할 때는 부처님의 敎說에 따라 수행을 하지만 자기 혼자만 해탈하는 것을 목적하는 出家의 聖者를 뜻한다. 佛敎徒 가운데 성질 · 능력이 얕은 下根機 또 四諦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쌓아 四妙門果를 깨닫고 마침내는 心身을 다 滅盡하여 灰身滅智의 無餘涅槃에 들어가는 것을 목적하는 사람들의 뜻이다. 성문을 위한 敎를 聲聞乘, 그 교를 설한 經典을 聲聞藏이라 한다. 聲聞乘은 緣覺乘과 같이 소승에 속한다. 법화경 卷二에는 성문이 마음을 바꾸어서 대승으로 轉向하는 경우, 이를 聲聞이라 칭하는 것은「다른 사람을 제도하고자 가르침을 다른 사람에게 설하여 들려주는 사람이란 뜻이다」라고 하며 이것을 大乘聲聞(佛道聲聞)이라 부른다.
연각(緣覺) : ① 범어 pratyeka-buddha(各自가 깨닫다는 뜻)의 번역. 獨覺이라고도 번역하고, 또 辟支佛로 音譯. 불타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道를 깨달은 이로, 寂靜한 고독을 좋아할 뿐 說法敎化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종의 聖者. 聲聞과 같이 二乘의 하나. 또 聲聞 · 보살과 같이 三乘의 하나.
② 여기에 部行獨覺과 麟角喩獨覺(麟喩獨覺)의 2종의 獨覺이 있다. 앞의 것은, 먼저 聲聞이었을 때에 不還果까지를 얻은 사람이, 제4의 阿羅漢果를 證得할 때, 불타의 敎導를 받지 않고 홀로 스스로 깨닫는 것을 말하고 뒤의 것은 獨居하여 百大劫동안 깨달음을 위한 善根功德을 쌓아 홀로 깨닫는 자를 말한다. 여기에 部行이라 함은, 聲聞이었을 때에 많은 部黨을 조직하여 단체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이름하고, 麟角喩라 함은 기린의 한 뿔에 비유해서 처음부터 伴侶가 없는 獨住者임을 가리킨다.
③ 緣覺은 다만 自利의 行만이 있고 利他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大悲心을 가지고 중생을 구원하는 일이 없고, 따라서 佛果에 이르지 못한다. 이것을 獨覺의 捨悲障이라고 한다.
④ 緣覺으로서의 階位를 辟支佛地, 약하여 支佛地라 부르고, 通敎의 十地(三乘을 통하여 10으로 나눈 佛子의 階位)의 제8에 자리(位)하고, 또 支佛地 자체도 十地에 분류된다.
⑤ 특히 이것을 緣覺이라 번역하는데 대해서 大乘義章 卷十七에는, 十二因緣을 깨달기 때문에, 또 바람이 나무를 움직인다(飛花落葉)등의 外緣에 의해서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오늘의 학자 사이에는 아마도 緣覺의 번역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신(信) : ① 心所(마음의 작용)의 이름. 마음을 淸淨하게 하는 작용. 俱舍宗에서는 10大善地法의 하나. 唯識宗에서는 善의 心所의 하나로 들고 있다. 그 반대를 不信이라 한다. 俱舍宗에서는 10大煩惱地法의 하나라고 한다.
② 信은 道에 들어가는 第一步인 까닭에 菩薩階位 52位중에서 10信位가 최초의 자리이며 5根이나 5力 중에서 信根 · 信力은 최초의 位가 된다. 舊譯 華嚴經卷六 賢首菩薩品에서는, 「信은 道의 근원이며 功德의 어머니」라 했고, 智度論卷一에는「佛法의 大海에서는 信을 能入이요 智를 能度로 한다」고 했다.
③ 信心. 眞宗에선 부처님을 믿는 것은 부처님의 願心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大信이라 한다.
사제(四諦) : ① 諦는 범어 satya, 파리어 sacca의 번역으로 진리란 뜻. 자세히는 四聖諦 · 四眞諦라 하며 4가지의 틀림없는 진리를 말한다. 四諦는 대체로 12緣起의 뜻을 교리적으로 조직화한 것으로 원시불교의 교리의 대강이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最勝法說’이라고도 불리워지는 석존 최초의 설법(곧 初轉法輪)에서 설한 것이라고 한다. 4가지 진리의 제1은 「迷惑의 이 세상은 다 苦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2는 「苦의 因은 구하고 탐하여도 그치지 않는 執着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다. 제3은 그 執着을 완전히 끊어 없애 버림으로 苦를 멸한 때가 궁극의 理想境이다」라고 한 가르침이며, 제4는 「이와 같이 苦가 없는 열반경에 도달하기 위하여 八正道의 옳은 修行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 4가지는 순서와 같이 苦聖諦 · 苦集聖諦 · 苦滅聖諦 · 苦滅道聖諦라고 불리운다. 이를 약하여 苦諦 · 集諦 · 滅諦 · 道諦라고도 한다. 이 苦 · 集 · 滅 · 道의 四諦 가운데 苦와 集은 迷妄의 세계의 因果를 나타내고, 滅과 道는 證悟의 세계의 인과를 나타낸다. 四諦의 이치가 三段階인데 여기에 각각 4가지의 行相을 붙여서 說할 때 이것을 三轉十二行相이라고 한다. 곧 三轉이란 제1轉 「이것은 苦諦(集 · 滅 · 道諦)이다」라고 하는 示轉, 제2轉은 「이 苦諦(集 · 滅 · 道)는 徧知(永斷 · 作證 · 修習)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勸轉, 제3轉은 「이 苦諦(내지 道諦)는 이미 徧知(내지 修習)되었다」고 하는 證轉이 그것이다. 12行相이란 이 三轉에 각각 眼 · 智 · 明 · 覺(옳은 智慧에 의한 이해를 뜻하는 4개의 同義語)의 四行相을 假設하고 각각의 諦에 12行相이 있다고 한 것. 그러나 다른 견해에 따르면 眼 · 智 · 明 · 覺을 고려하지 않고 一諦에 三轉이 있어 四諦全體로서 모두 12行相이 있다고도 해석한다.
② 有部敎學의 修證論에서는 우선 四善根位에서 4諦의 하나를 觀하는데 4種의 行相이 있으므로 합하여 十六行相을 가지고 四諦를 觀한다. 곧 苦諦에서 非常 · 苦 · 空 · 非我(恒存性이 없는 苦이며 假의 존재로 實體性이 없다)의 四行相, 集諦에서는 因 · 集 · 生 · 緣(執着을 苦의 원인으로 하여 苦를 모으고 생기게 하는 苦의 助緣이다)의 四行相, 滅諦는 滅 · 靜 · 妙 · 離(苦滅의 理想境은 繫縛을 끊고 번뇌를 가라앉혀서 殊妙의 境地에 이르러 災禍를 여읜다고 함)의 四行相, 道諦에는 道 · 如 · 行 · 出(苦滅의 聖道는 聖者實踐의 正道이고 正과 理가 합하여 迷의 生存을 超出하는 것이다)의 四行相이 그것이다. 이 四善根位의 다음에 見道에 들어 無漏의 眞智를 가지고 四諦를 現觀한다. 이 見道는 預流向에 속하는 일로서 預流果 이후로는 修道에 속하는데 이 預流向 · 預流果를 통하여 16心으로 四諦를 現觀한다. 이것을 聖諦現觀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최후의 제16心만이 預流果에 속하고 앞의 제15心은 見道에 속한다. .......
삼보(三寶) : 불교도가 존경하고 공양할 佛寶와 法寶와 僧寶의 셋을 말한다. 佛은 우주와 진리와 인생의 참다운 모습을 깨닫고 이에 의해서 다른 이를 가리켜 인도하는 覺者로 불교의 敎主, 法은 그 불타가 스스로의 깨달음에 바탕하여 중생을 가르치기 위해 설한 敎, 僧은 그 法을 따라 修學하는 불타의 제자의 집단이다. 이 셋은 거룩하고 최상의 威德이 있어 변하지 않으므로 세속의 보배와 같기 때문에 寶라고 한다. 삼보에 대해서는 보통, 3종의 구별이 있다고 한다.
① 別相三寶. 階梯삼보라고도 하고, 불보와 법보와 승보가 각각 다른 존재인 측면에서 말한 것.
② 一切三寶. 同體삼보 · 同相삼보라고도 한다. 의미상으로는 불보 · 법보 · 승보의 셋으로 구별하지만, 그 본질은 다름이 없는 一體인 것을 말한다. 예컨대, 佛은 깨달은 사람이란 뜻으로 불보라 했고 불타의 덕은 깨달음의 軌範으로 할만하기 때문에 법보라고 이름하며, 僧은 다툼이 완전히 없는 화합의 상태에 있는 생활이므로 승보라고 하는데, 하나의 불보 안에 삼보가 구비하여 있고, 하나의 법보·승보 안에 삼보가 있음을 일체삼보라고 한다.
③ 住持三寶. 후세에 불교가 머물 수 있도록 전하여 가는 삼보란 뜻이니, 佛像과 經卷과 出家의 比丘 등을 말한다. 대승에서는 八相成道를 住持의 佛로 해석하고, 세상을 제도하는 온갖 敎를 住持의 법으로 삼으며, 法에 의해 敎化되어서 성립된 三乘의 대중을 住持의 僧으로 한다. 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근원이 됨으로 삼보에 歸依하는 것을 三歸 또는 三歸依라고 하여 入信 곧 최초의 入門의 요건으로 삼는다.
선악인과(善惡因果) : 善惡의 報應. 善因善果 · 惡因惡果의 이치.
착아(着我) : 五蘊이 거짓 화합한 몸임을 생각하여 내가 실재하고 있다고 집착하는 것. .....착(着)→著이라고도 쓴다. 마음이 바깥 경계의 事物에 끌리어 여의지 못하는 것을 著 또는 着이라 한다. 愛着 · 執着 · 貪着이라고도 한다.
범부(凡夫) : 必栗託仡那라고 음역하고, 異生이라고 直譯한다. 또 婆羅必栗託仡那(小兒凡夫, 嬰兒凡夫, 愚異生)라고도 한다. 聖者(聖人, 聖)에 대해서, 어리석은 凡庸한 士夫(人間)란 뜻. 異生이란 말은 여러 가지 견해나 번뇌에 의해서 가지가지의 業을 일으켜 여러 가지 果를 받아서 갖가지 세계에 태어난다는 뜻. 수행의 階位上으로 말하면 見道(처음으로 無漏의 지혜가 열려서 四諦를 보는 位)에 이르기 이전이 범부인데, 구사종에서는 四善根位를 內凡, 三賢位를 外凡이라고 하며, 대승에서는 初地이전을 범부라고 하고, 十住 · 十行 · 十廻向(三賢)을 내범, 十信을 외범이라고 하고, 내범 · 외범을 아울러 二凡이라고 한다. 외범이 하는 아주 낮은 범부 곧 지옥의 有情 내지 하늘의 有情을 말한다. 범부로 하여금 범부답게 하는 性을 異生性(凡夫性)이라고 한다. 犢子部에서는 그 體를 欲界의 見惑이라고 하고, 有部에서는 聖道의 非得이라고 주장한다. 經部에서는 따로 體를 세우지 않고 聖法의 相續의 分位差別에 이름을 붙였으며, 유식종에서는 二十四 不相應行法의 하나로 하여 分別起의 煩惱障 · 所知藏의 種子적 작용에 따라 假名을 붙였다고 한다.
아(我) : 범어 atman의 번역. 본래는 呼吸의 뜻. 변하여 生命 · 自己 · 身體 · 他者에 대한 自我 · 自我의 本質 · 物일반의 本質自性. 온갖 것의 근원에 내재해서 개체를 지배하고 통일하는 獨立 영원의 主體를 의미한다. 아트만은 인도의 思想界에서는 중요한 과제의 하나이다. 불교에서는, 영원히 存續하고(常), 자주독립하여 존재하며(一), 중심적인 소유주로서(主), 모든 것을 지배하는(宰) 등의 의미를 갖는 我의 존재를 否定하고 無我說을 세웠다.
① 리그 · 베다 이래, 아트만이란 말이 쓰여졌다. 부라흐만을 인간의 생명활동의 주체인 息(氣息)으로 생각했었는데, 다음에 부라나는 개개의 생명현상을 의미하게 되고, 아트만은 일층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샷타바타 · 브라흐만에서는, 言語 · 視力 · 聽力 등의 생명현상은 아트만을 기초로 하여 나타나고, 아트만에 의해서 통괄된다고 하고, 또 造物主와 완전히 同一하다고도 했다.
② 우파니샤드의 시대에는 아트만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하고, 혹은 아트만은 個人我(小我)인 동시에 우주의 중심원리(大我)라고도 하고, 또 brahman梵(宇宙原理)과 아트만이 일체임을 구하거나, 브라흐만과 아트만이 同一하다고 하거나, 또 아트만만이 참된 實在이며 다른 것은 모두 幻이라고 한다.
③ 불교의 阿含에서는 인간 개체의 전체가 我((1) 五蘊我이다)라고 하거나, 혹은 개체 안의 中心生命이 되는 것을 我((2) 我가 五蘊을 가짐)라고 하거나, 혹은 우주원리를 我((3) 我중에 五蘊이 있다)라고 하거나, 혹은 존재요소가 각각 固有한 성질(自性)을 가지고 있다((4) 五蘊중에 我가 있다)고 하는 有我說을 否定한다(後世에는 이것을 二十句의 有身見이라고 했으니, 위의 (1)(2)(3)(4)가 五蘊의 각각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또 이것은 我見((1)에 해당됨) 과 我所見((2)(3)(4)에 해당)으로 나눈다. 我所라 함은, 我의 所有, 我의 所屬, 我와 떨어져 있지 않는 事物의 뜻).
④ 部派佛敎에서는 生死流轉하는 윤회의 主體와 無我說의 관계등과 연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을 했다. 有部에서는, 人我와 法我의 二我를 세워서, 개체의 중심생명으로서의 我(人我)는 否定했는데, 존재의 구성요소의 실체로서 我(法我)는 항상한 참된 것으로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人我見과 法我見을 二種我見이라고 한다. 犢子部나 正量部에서는, 非卽非離蘊의 我라고 하는 我가 있다고 하여, 그것은 五蘊에 의해서 잠정적으로 구성된 생명을 갖는 개체 그것(卽蘊)도 아니고, 또 五蘊 밖에 따로 我라고 하는 존재가 있는 것(離蘊)도 아니고, 五蘊과 不卽不離하게 있다고 했다. 또 經量部에서는 勝義補特伽羅의 說이 있다. 성유식론 권일에는 불교이외 부파의 我에 대한 說을, 卽蘊我(世間一般의說) · 離蘊我(數論 · 勝論 · 經量部등) · 非卽非離蘊我( 犢子部 · 正量部등)의 3종의 我로 분류하여 비판하고 있다.
⑤ 大乘에서는, 개체로서의 我(人我)를 否定할 뿐만 아니라, 部派에서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法我(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의 실체)까지도 否定하여, 人法二無我를 說하고, 모든 것이 無自性空이라고 한다. 또 부파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無常이고 苦이고 無我이고 不淨이라고 깨달아서, 번뇌를 滅盡한 경지를 究極的인 열반이라고 하는데 대해서, 大乘에서는 모든 것은 원래 空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은 열반의 경지는 절대적인 자유의 경지로서, 常 · 樂 · 我 · 淨의 德을 갖는다고 한다. 그 我는, 凡夫가 생각하는 小我와 구별되어, 大我 · 眞我 등으로 설명된다.
⑥ 我는 또 4종의 我로 분류된다.
(1) 범부의 迷한 마음으로부터 생긴 我.
(2) 불교이외의 학파(外道)가 주장하는 神我(丈夫 · 人 · 原人이라고도 번역한다).
(3) 실체가 없는데 잠정적(假)으로 이름붙인 假我, 예컨대 五蘊으로 구성된 肉身을 거짓으로 我라 부르는 경우,
(4) 如來의 法身을 의미하는 眞我. 그 특성을 八大自在我로서 설명하는 수도 있다.
회신멸지(灰身滅智) : 또는 焚身灰智 · 灰滅 · 灰斷이라고도 함. 몸을 재로 만들고 지혜를 멸한다는 뜻. 몸과 마음이 함께 아주 없어짐을 말한다. 이것이 2乘의 최종 목적이며, 無餘涅槃이라 함.
열반(涅槃) : 滅 · 寂滅 · 滅度 · 寂이라 번역한다. 擇滅 · 離繫 · 解脫 등과 동의어로, 또 般涅槃(般은 범어 pari의 음역으로, 완전의 뜻. 圓寂이라 번역한다), 大般涅槃(大는 뛰어나다는 뜻, 大圓寂)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불어 끈다는 뜻, 불어 끈 상태, 곧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滅盡해서 깨달음의 지혜인 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말한다. 이것은 生死(迷의 세계)를 넘어선 깨달음의 세계로, 불교의 구극적인 실천목적이며, 그러므로 여기에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旗印(法印)의 하나로서 涅槃寂靜을 세우게 된다. 불교 이외의 外道에서도 열반을 말하지만, 불교의 열반과는 다르다. 불교에서도 대승 · 소승에서 각기 그 해석에 異說이 많다.
① 部派(소승)불교에서 열반이라 함은 번뇌를 멸하여 없앤 상태라 하고, 여기에 有餘열반과 無餘열반의 2종열반을 세운다. 앞의 것은 번뇌를 끊었지만 육체(「殘餘의 依身」가 아직 있다는 의미로「餘依」또는「餘」라고 한다)는 아직 殘存하는 경우, 뒤의 것은 灰身滅智의 상태로, 모든 것이 滅無로 돌아간 경우를 가리킨다. 有部등에서는 열반을 하나의 본연의 자세인 실체적인 경지로 생각하고, 經量部등에서는 열반은 번뇌가 멸한 상태에 대한 假稱的인 명칭으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② 대승에서는, 열반을 적극적인 것이라 생각하여, 常 · 樂 · 我 · 淨의 四德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을 有爲열반이라고 하는 데 대해서, 이 사덕을 갖춘 열반을 無爲열반이라 하여, 이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는다. 또 南本열반경 卷三에는, 常 · 恒 · 安 · 淸淨 · 不老 · 不死 · 無垢 · 快樂의 8味가 열반에는 갖추어 있다고 하여, 이것을 열반의 八味라고 한다. 常 · 恒은 항상, 安 · 快樂은 樂으로, 不老 · 不死는 我에, 淸淨 · 無垢는 淨에 對應하여 이것을 四德에 배속하는 수도 있다. 唯識宗에서는, 本來自性淸淨열반과 有餘依열반과 無餘依열반과 無住處열반의 4종열반으로 나눈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또 본래청정열반이라고도 性淨열반이라고도 하고 모든 것이 본래의 相에 있어서는 眞如寂滅의 理體 그것이라고 하여 진여를 가리켜서 이와같이 말한다. 무주처열반이라 함은 지혜에 의해서 煩惱障과 所知障을 여의었기 때문에 생사(迷의 세계)에도 停滯하지 않고, 또 大悲를 가지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迷의 세계중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열반의 경지에서도 머무르지 않는 것을 말하고, 대승불교의 열반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地論宗이나 攝論宗에서는 性淨열반 · 方便淨열반(도를 닦음으로 인하여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고 얻는 열반)의 二열반, 천태종에서는 性淨열반 · 圓淨열반(지론종등의 방편정열반에 상당) · 方便淨열반(불타가 중생을 구하기 위해 잠정적으로 모습을 나타냈다가 緣이 다하여 들어가는 열반으로, 應化열반이라고도 한다)의 3열반을 세운다.
③ 소승의 聲聞이나 緣覺이 무여열반에 들어가서 다시 마음을 바꿔서 대승의 敎에 轉向하는 것을 無餘還生이라고 한다. 또 열반은 모든 차별적인 모습(有爲의 相)을 超離하여 있는데, 이것을 離相이라고 한다. 淨土敎에서는 불타의 정토를 涅槃之城 또는 無爲涅槃界라고도 한다.
④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나타난 불타(특히 釋尊)의 육체의 죽음을 涅槃 · 般涅槃 · 大般涅槃이라고 하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入涅槃 · 入滅 · 薪盡火滅(薪은 佛身 또는 機緣, 火는 지혜 또는 佛身에 비유한다)이라고 한다. 대개 본래는 석존의 成道를 열반이라고 해야 할 것이나, 지금은 아마도 無餘依열반의 의미로 이와같이 말하는 것일 것이다. 석존의 入涅槃의 모습을 본뜬 畵像 또 影像을 涅槃像, 그날(2월 15일)에 석존을 追慕하여 진력하는 법회를 涅槃會 · 涅槃忌 · 常樂會등이라고 한다. 또 승려의 死를 圓寂 · 歸寂 · 示寂 · 入寂등이라고 한다.
사심(捨心) : 四無量心의 하나. 無貪을 體로 하여 중생을 평등하게 보아 怨 · 親의 구별을 두지 않으려는 마음. 일체를 버리고 着念이 없는 것.
이타(利他) : 다른 이에게 공덕과 이익을 베풀어 주며 중생을 구제하는 것.
자각(自覺) : 三覺의 하나. 부처님은 스스로 깨달은 自覺과 남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覺他와 이와 같은 깨달음의 내용과 그 작용의 힘을 究竟的으로 완성한 覺行窮滿의 덕을 갖추고 있다. 이 가운데 自覺은 스스로 깨달아 증득하여 알지 못함이 없는 깨달음을 뜻하며, 또 自覺은 범부에 대하여, 覺他는 二乘에 대하여, 覺行窮滿은 보살의 覺에 대하여 일컫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한다.
멸(滅) : ① 열반을 말함. 따라서 終息 · 寂靜 · 寂滅이라고도 한다. 열반에 들어가는 것을 入滅이라고 한다. 석존은 돌아가시어 無餘涅槃에 들어가셨으므로 석존의 경우 그 돌아가심을 특히 입멸이라고 한다.
② 消失 · 歸滅 · 근원적으로 없애버리는 것. 否定하는 것. 활동을 정지하는 것을 뜻한다.
③ 滅絶하는 것. 곧 일체번뇌의 絶滅, 일체번뇌와 惡을 여의어 없애는 일. 四諦說에서는 第三을 滅諦라 하고 수행의 목표로 삼았다. 인연의 화합인 현상적 존재의 모습을 絶滅한 상태를 말한다. 十六行相의 하나. 인도종교 문헌에는 일반적으로 制御하다, 抑止하다의 뜻으로 사용했으며, 原始佛敎聖典 가운데 아주 오랜 語句에서도 같은 의미로 쓰인데가 있다.
④ 깨달음의 경지를 뜻할 때가 있다.
⑤ 三有爲相의 하나로 또는 四有爲相(生 · 住 · 異 · 滅)의 하나로 滅相을 약하여 滅이라고도 한다.
⑥ 毘奈耶 곧 律의 漢譯으로 쓰일 때도 있으며 敎團의 다툼이 없어졌음을 가리켜 滅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소승열반(小乘涅槃) : 위 열반을 참고하십시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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