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큰스님 말씀

영원한 즐거움(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근와(槿瓦) 2014. 11. 8. 00:02

영원한 즐거움(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불교는 기독교, 이슬람교와 함께 세계 삼대 종교의 하나라고 일컬어집니다. 이들 종교는 저마다 내세우는 교조가 다르므로 그 내용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조와 내용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종교가 갖는 궁극적인 목표는 다 같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서울로 간다고 할 때에 북쪽에서 가든 남쪽에서 가든 바다에서 가든 육지에서 가든 비록 그 방향과 수단은 제각기 다르지만 서울에 간다고 하는 근본 목표는 다 같듯이,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어느 종교에서나 다 같습니다.

 

그러나 그 공통되는 종교의 목표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에서부터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같이, 태어남과 죽음이 있어 고통과 번뇌가 가득찬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에는 오히려 괴로움만 더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는 이 고통의 현실을 벗어난 자유의 세계로서 영원한 행복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세계 곧 생멸의 차안에서부터 절대적이고 무한한 저 세계, 곧 해탈의 피안으로 건너가야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근본 목표인 것입니다. 이렇듯 종교의 근본 목표인 영원한 행복은 바로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 욕망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행복은 이 유한한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각 종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에 들어가도록 그 방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고, 불교에서는 그 궁극의 목표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여러 경전에서도 말씀하셨지만, 특히「기신론(起信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버리고

구경의 즐거움을 얻는다.

 

이 말씀은 모든 괴로움을 다 버리고 구경(究竟)의 즐거움, 곧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을 얻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곧 상대적이고 유한한 생멸(生滅) 세계를 떠나 절대적이고 무한한 해탈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반의 종교가 갖는 목표와 꼭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상대’와 ‘유한’의 생멸세계를 버리고, ‘절대’와 ‘무한’의 자유세계에 가려고 노력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만일에 누가 서울에 간다고 한다면 왜 가는지 까닭부터 알고 가야지 무조건 서울만 가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행동일 터이요, 그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으로 취급받을 터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적이고 무한한 자유세계로 가려고 한다면 먼저 왜 가려고 하는지 그 구체적인 이유부터 아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세상에는 천지만물이 있고, 인간은 그 모든 생물과 무생물 중에서 으뜸가는 존재라 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인간은 대체로 삶을 값어치 있게 만들기 위하여 저마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려고 노력합니다.

더러 목표가 뚜렷하지 못한 사람도 있고, 또 사람마다 목표하는 바가 다르기도 하지만, 인간이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바로 행복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뭇 사람들 사이에서 행복에 대한 논의가 끊임없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현실적 삶의 모습이 얼마나 행복과 가까운지는 한번 조용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심지어 산다는 것조차도 짐스러울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계가 불타는 집이요

사생이 괴로움의 바다이다.

 

삼계화택(三界火宅)

사생고해(四生苦海) 라고 표현합니다.

삼계(三界)란 중생이 사는 이 우주 전체를 일컫는 말인데 이것을 불타는 집이라고 하고, 사생(四生)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일컫는 말인데 그 전체가 괴로움의 바다라고 하였습니다. 곧 불타는 집에서 고생만 하고 사는 것이 인생 그 자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생이란 이와 같이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고생만 하다가 끝내 죽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살다가 때에 따라서는 좋은 일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것일 뿐, 인생을 전체로써 볼 때는 괴로움의 연속이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렇게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고, 그토록 괴로운 삶이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하여 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덜 고생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이 고생스러운 삶 가운데 좀 더 행복하게 살 길을 찾아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해 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고 유한하여서 모순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모순의 세계란 곧 투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일시적으로 행복을 얻었다고 하여도 곧 종말이 오고야 맙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영원한 행복을 생각하게 되고, 그 영원한 행복을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추구하는 데에서부터 인간의 종교가 성립된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상대적이고 유한한 이 세계에서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안의 세계 곧 절대적이고 무한한 세계를 구상하여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노력하자는 것이 종교의 근본 취지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듯이, 모든 사람이 저 먼 피안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행복을 추구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따라 추구하는 행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빌어 먹는 거지에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어 본다면, 때가 되어 밥 한끼 잘 얻어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거지로서는 밥 한끼 잘 얻어먹으면 그것으로 다른 모든 시름은 다 잊고 만족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사람들은 때와 장소와 처지에 따라 서로 다른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대개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것은 거지가 밥 한끼 잘 얻어먹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원한 행복이란 공연한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수천년의 인류 역사가 지나가는 동안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 몇 사람의 경우를 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록펠러의 소원

첫 번째로 록펠러(1839~1937)의 경우를 봅시다.

미국의 록펠러 1세는 당대에 자수성가(自手成家)하여 세계적인 갑부가 되어 아흔아홉살까지 산 사람입니다. 그만하면 누가 보든지 참으로 행복하게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산도 많아 세계적인 재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더러 나이 아흔아홉이 되도록 장수하였으니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록펠러는 만년에 이르러 위암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암이란 지금의 발달된 현대의학으로도 웬만해서는 고치지 못하는 병인데 지금보다 오십 년 전인 그 때에는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세계적인 갑부로서 온갖 부를 누렸고 또 아흔아홉살의 천수를 누렸으니 그만하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 싶은데도, 그는 자기가 암에 걸려 곧 죽을 운명에 놓이게 되자 도저히 그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명을 일년 더 연장시켜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온 세계에 광고를 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그 광고비만도 이백만 불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이백만 불이면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아마 이백만 불 아니라 이백억 불을 들인다 해도 목숨을 연장하는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록펠러가 낸 그 광고를 보고 의학 분야에 오래 종사한 사람들은 록펠러를 한 해라도 더 살려 놓으면 자기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욕심에서 각양각색의 방법을 다 동원하고 제시하였습니다. 결국 록펠러는 더 살지 못하고 아흔아홉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어도 좀 더 살고 싶은 것,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것은 인간뿐만 아닙니다. 저 땅에 기어 다니는 개미나 벌레까지도 죽는 것은 다 싫어합니다.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좀 더 편안하게 살았으면 하는 욕망은 생명을 가진 생명체의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본능적인 욕망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 살고 또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산다 해도,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이면 끝나고 맙니다. 이 유한한 생멸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사람의 욕구는 결코 채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맹상군의 영화

호화코 부귀코야 맹상군만 하련마는

백년이 못다하여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요

 

맹상군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람인데, 왕자(王者)로서 정승을 지낸 이로, 천하의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지녔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역사에서 가장 호화롭게 산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맹상군이라고 말할 만큼 참으로 세상의 행복을 누리며 산 사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맹상군도 백 년을 못 살고 일흔이 가까워서 죽고 말았습니다. 살았을 적의 그의 공명에 따라 장례를 후히 지내고 그 무덤도 산과 같이 거창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는 그것이 덧없는 일에 지나지 않으니, 이제는 무덤 옆에 밭을 갈던 농부가 제 땅을 넓히려고 맹상군 무덤 위에다 밭을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 것인지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온갖 영화를 다 누리며 호화롭게 살던 맹상군도 그러한데 하물며 특별히 두드러진 것 없이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왕과 불사약

그 유명한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의 경우는 또 어떠한지 봅시다. 그는 춘추전국 시대의 맹상군보다 후대의 사람으로 6국(六國)을 정벌하고 중국 천하를 통일하여 진(秦)나라 대제국을 건설한 만고의 영웅 가운데 영웅입니다. 그가 천하를 통일하고 보니 모든 것이 자기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좋은 물건, 좋은 음식, 좋은 옷, 미인들을 모두 자기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자기가 거처하는 궁궐을 지어 아방궁(阿房宮)이라 불렀는데 집의 길이가 무려 칠백 리에 뻗쳤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 한양의 궁궐 둘레가 사십 리라고 하니 진시황의 궁궐 둘레는 천 리가 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뒷날 항우(項羽)라는 장사가 나타나서 진나라를 패망시키고 아방궁을 불태우는데 석달 동안이나 탔다고 합니다. 집이 다 타는 데에 석달이나 걸렸으니 아방궁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시황이 그렇듯 천하를 자기 것으로 하여 호사스럽게 살면서도 딱 한 가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자기 목숨이지만 이것만큼은 자신의 권세로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머리는 희끗희끗해지고,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기운은 자꾸 쇠약해져서 마침내는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한 마음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하에 영(令)을 내려 죽지 않는 불사약(不死藥)을 구해 오는 사람에게는 수만 금의 상금을 주고 벼슬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얼마 뒤에 서시라는 사람이 나타나 진시황에게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나아가면 바다 가운데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불사초라고 하는 약초를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진시황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그 약초를 캐오는 데에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습니다. 서시가 대답하기를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삼천 명과 그들을 싣고 갈 배만 준비해 주시면 가서 불사초를 구해 오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시황은 곧 영을 내려, 서시의 요구대로 동남동녀 각 삼천 명과 그들이 먹을 식량과 의복 따위를 수십 척의 배에 실어 보내어 삼신산의 불사초를 캐오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시의 생각은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그는 진시황이 호사가 넘치다 보니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공연한 짓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堯)나라의 팽조(彭祖)가 팔백 년을 살았지만 끝내 죽고 말았는데 자기가 살면 얼마나 살 것인가 하고 속으로 생각한 그는,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욕망에 집착한 진시황의 약점을 이용하여,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데리고 저 바다 가운데 좋은 섬에 가서 자기의 왕국을 하나 만들어 잘 살아 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리하여 만든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남쪽, 남해 금산 밑에 가면 바위에 ‘서시각(徐氏刻)’이라는 것이 있는데, 서시가 중국을 출발해서 남해 앞을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기록이 현재 남아 있습니다. 어찌하였든 서시는 그렇게 처녀 총각 육천 명을 배에 싣고 제 갈 길로 가 버렸고, 이를 알 리가 없는 진시황은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불사초를 구해오기만 기다렸습니다. 결국 진시황은 자기가 서시에게 속은 것을 알고 원통해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제 아무리 진시황이라도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죽어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서, 죽고 난 뒤에 자기의 무덤을 생전의 아방궁처럼 꾸미도록 엄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여산(驪山)에 터널을 뚫고 산 밑의 흙을 다 파내고 지하 궁궐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죽은 뒤에도 음식을 차려놓고, 궁녀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게 생긴 궁녀 삼천 명을 뽑아 언제든지 자기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자기의 무덤이 있는 방을 지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에 신하들은 그의 명령대로 궁녀 삼천 명을 뽑아 묘를 지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문을 봉해 버렸습니다.

 

얼마 뒤에 유방과 항우가 들고 일어나 진나라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항우가 먼저 함양에 들어가 아방궁을 불태우고, 여산의 묘를 파헤쳐서 그 속에 갇혀 있던 삼천 명의 궁녀들을 살려주어 제 갈 길로 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항우도 그 삼천 명의 궁녀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궁녀는 남 주기가 싫어서 자기가 차지했으니, 그 미인이 천하에 유명한 우미인(虞美人)입니다. 나중에 항우가 유방과 싸우다가 해하(咳下)에서 대패하고 오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천하를 덮어도

때가 이롭지 못하니 천리마도 앞을 달리지 않는구나

천리마가 달리지 않으니 어찌할거나

우미인이여, 우미인이여 나는 장차 어찌할거나

역발산혜기개세(力拔山兮氣蓋世)

시불리해추불서(時不利兮騅不逝)

추불서해가내하(騅不逝兮可奈何)

우혜우혜내약하(虞兮虞兮奈若何)

 

항우가 당장 망해서 죽게 되었는데 천리마는 버려도 우미인은 버리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마침내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란 이같이 허무할 뿐만 아니라 그 욕심으로 인해 자기와 남에게도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진시황의 아방궁을 짓고 거대한 무덤을 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했겠습니까!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눈물 위에서 진시황은 일시적인 행복은 누렸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삼천 궁녀를 그 속에 가둬 춤추게 하는 등 별별 짓을 다 했어도, 결국 영원한 행복은 성취하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어떠한 한계도 없는 영원한 행복을 구하고자 했으면서도 그 행복의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이런 일들이 앞에서 본 록펠러나 맹상군이나 진시황에게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그런 처지에 놓이면 그와 같은 욕망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곧 죽게 된 사람도 죽음을 피하고 좀 더 오래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 아무리 강한 권력이나 명예나 금력을 가졌다고 해도 실지로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해답을 주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인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나가는 데에 중대한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종교가 인간이 원하는 영원한 행복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천당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역사에서 위인(偉人), 걸사(傑士)로 꼽히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현실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행복을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국 이 현실을 떠난 다른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다 하여 다른 세계를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의 천당설(天堂說)입니다.

 

현실 세계는 모든 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 있어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하지 못하고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상대적이고 유한한 세계에서는 제 아무리 뛰고 구르며 재주를 넘어보았자 영원한 행복은 절대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현실 세계에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바깥 세계에 가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곳에 가야만 우리가 찾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하고 모색하던 끝에 천당 곧 하늘나라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저 푸른 허공을 자꾸자꾸 올라가면 천당이 있다. 그 천당에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은 일체를 초월한 절대자다. 그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여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고,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다. 그 하늘나라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일체 받지 않으므로 하늘나라에 한 번 들어가면 누구든지 영원토록 생명을 누려 영생(永生)한다. 그곳에서는 괴로움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즐거움만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나라에서는 누구든지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에서는 천당, 곧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절대의 세계가 저 하늘에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괴로움 많은 인간들에게는 많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 괴로운 현실을 떠나 저 높은 하늘 위에 있는 천당이라는 좋은 세계를 발견하여 그곳에 가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선언하니,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주는 것과 같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참으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누구든지 자기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을 다 내버리고서라도 그곳에 가서 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절대적인 믿음

그런데 과연 그것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영원한 행복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단조롭고 지혜가 크게 발달되기 전에는 훌륭한 사람이 나와서 천당설을 이야기하면 아무런 의심없이 믿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차츰 인간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사람들은 지혜가 늘고 또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면서, 그러한 일방적인 가르침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늘 나라에 대해서 믿음을 잃게 되니 사람들은 자연히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천당이 어디에 있어. 무슨 하나님이 있다는 거야. 인간들이 현실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 위안하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지.”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정해 버리면 종교의 기반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절대 세계의 영원한 행복을 증명해 보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서양의 신학자들은 합리(合理), 불합리(不合理)를 논하지 말고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니 무조건 믿으라고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신학자가 성(聖)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바로 절대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와 같은 절대적인 믿음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국민학생에게는 고등수학이 믿기 힘든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한 천당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신학자들의 그 뛰어난 영혼과 깊은 지혜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이 다만 소견이 좁아서 그 존재를 의심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소견으로 합리, 불합리를 따질 것이 아니라 무조건 믿으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절대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사상을 지배하며 그 생명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사회적 상황이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지(人智)가 자꾸 발달되자 절대 세계에 대해서, 또 신(神)의 존재 여부를 비롯한 신의 문제에 대해서 자꾸 회의적인 생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을 이리저리 펼쳐보아도 하나님이나 천당이 있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회의적인 생각이 점점 크게 일자 그것이 마침내는 종교의 근본을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과학의 발달로 그 전에는 신비롭게만 여기던 자연 현상이나 우주의 모습이 신의 신비로운 조화가 아닌,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임이 밝혀짐에 따라 인간이 갖게 된 당연한 변화입니다. 우주의 모습까지 밝혀낸 현대에 와서 맹목적으로 하나님이나 천당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쉽사리 통하지 않는, 설득력 없는 강요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냥 믿으라고만 강요하기에 앞서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사실을 증명해야 비로소 믿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종교가 그 생명을 유지하려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는 뚜렷한 이론 체계를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 객관성이 없는 이론은 그야말로 아무 근거도 없는 공론(空論)이라 하여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학자 대회

최근의 동향을 보면, 과학계에서 내세우는 것이 모두 다 옳고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차츰차츰 생명의 정체를 비롯하여 자연의 법칙이며 우주의 모습에 대해서 과학자들이 일찍이 세워놓은 가설들이 사실이거나 사실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에 관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신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몇 해 전에 런던에서 ‘세계 과학자 대회’가 열렸습니다. 19세기에 다아윈이 진화론(進化論)을 발표하자, 세상은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그 때에 진화론을 앞장서서 소개하였던 사람이 헉슬리였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손자 되는 사람이 또한 영국의 과학계를 주도하는 유명한 과학자가 되어 이 회의를 주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회의 명칭은 ‘세계 과학자 대회’이지만 다른 모든 학문 분야에 대해서도 토의를 해보자는 의도가 있어서 종교 문제까지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종교문제를 토의하는 데에는 그 방면의 전문가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신부, 목사, 신학자들도 그 대회에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과학자 대회에서 토의된 종교 문제에 대한 의견을 종합하여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과 같은 우주과학 시대에는 신(神)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더 이상 존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허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떠한 종교가 앞으로 존속할 수 있는가? 불교와 같이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성직자와 신학자들을 앞에 두고 세계 과학자 대회는 이렇게 신(神)을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만이 존속될 수 있다는 중대 선언을 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랍고도 획기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서양에서의 기독교 신의 존재는 다만 종교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으니, 이천여 년을 내려오며 그들을 지배해 온 전통이요, 사상이며,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일대 혁명이랄 수 있는 이 선언은 결국 믿음이라는 근본 문제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 때에 가톨릭이나 기독교의 대신학자들이 많이 참석하였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을 전제로 하지 않은 불교와 같은 종교만이 존속할 것이라는 데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의를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정작 불교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과학자들이 이런 결론을 내렸다는 것은 반가운 일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비록 불교가 신을 전제로 한 종교와는 달리 이 우주과학 시대에 존속할 수 있다고는 하였지만, 그것은 불교의 이론 체계 역시 객관성을 가질 때에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고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그치고 만다면 불교도 존속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에 대한 문제, 종교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 현대의 과학자들이 그러한 태도를 보인 것은 그들이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라 하여 그런 말에는 귀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다고 일축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직 과학이 규명하지 못한 신비의 세계가 많이 남아 있듯이 과학에도 한계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가장 차원 높은 세계를 추구하는 종교에 대하여 과학자들이 성명서를 냈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따라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종교의 존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나 기독교의 종교인 및 신학자들은 과연 이 문제에 대하여, 오늘날 어떻게 생각하며 대처하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천주교의 교리문답

천주교는 지금까지 사용해 오던「교리문답」이라는 책을 최근에 재편집했습니다.

「교리문답」은 천주교의 모든 교리의 기초가 되는 입문서로서, 처음에 천주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하는 책입니다. 곧 이 한 권의 책을 완전히 익혀야만 신자의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렇듯 중요한 책이 재편집되어 나왔는데, 그 첫머리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오래고도 긴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천지만물이 생겼고, 인류가 탄생하여 겨레와 나라를 이루었다.”

 

이 말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도 당연하여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주교인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의 근거가 되는 구약성경에 적힌 바와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의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나님이 계셨다. 하나님이 하늘이 있으라 하니 하늘이 있고 땅이 있으라 하니 땅이 있고 ... 사람을 만드셨다.”

 

이와 같이 천지만물은 다 하나님이 만든 것으로 저절로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 구약성경의 출발점이요 근본을 이루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약성경을 기반으로 하여 예수교는 형성되었고,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기반이 되어 온 그 근본 사상을 어느 날 갑자기 저희들 스스로 허물어뜨리고, 그 대신 진화론의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로서는 실로 큰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까닭에서 갑자기 그들이 절대시하고 가장 신성시해 온 성경과 상충되는 내용의 말로써「교리문답」의 첫머리를 삼게 되었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거의 같은 까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곧,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지혜가 향상됨에 따라 논리적으로 허술한 점이 많은 하나님의 우주 창조설이나 인간 창조설이 현대인에게는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화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닌 허구를 갖고서, 더구나 우주과학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 믿음이 될 턱이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강요일 뿐입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인들은 이 신화를 완전히 포기하고 논리적인 사실에 입각한, 일대 전환을 선언한 것입니다. 원죄설이라든지 창조설과 같은 중요한 교리를 논리적인 근거 아래 재해석하여「교리문답」을 재편성하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1967년 3월 2일자 조선일보는 ‘현대의 옷을 입는 천주교’라는 제목으로 이를 보도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한국의 천주교회에서만이 아니라 로마의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3년에 걸쳐 논쟁을 거듭하여 내린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서의 창조론에서부터 태도를 전환해야 현대인에게 믿음과 신뢰를 줄 수 있으며, 더불어 천주교도 영원한 종교적 값어치를 지닐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만이 변화한 것은 아닙니다.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천주교보다 기독교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교 무신론

다음의 경우를 보면 좀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의 신관의 변화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의 신학대학이 주최가 되어 신교, 구교를 막론하고 신부, 목사, 신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기독교의 신관(神觀)연구’라는 제목으로 토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토의된 내용이 1966년 11월 1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되었는데, 그 기사 첫머리가 “오늘날 신은 새로운 도전과 시련 속에서 재창조 내지 재발견을 강요당하고 있다”로 시작하는, 당시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장인 서남동 교수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신은 죽지 않고 변모한다-거듭나지 않으면 매몰운명(埋沒運命)-’이라는 표제가 붙여져 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20세기 기독교는 갱신이냐, 혁명이냐의 기로에 섰다...기독교 무신론의 급진적 신학자들에 의하면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이천 년 동안의 기독교 초월신은 사라졌다. 신화적인 사고방식이나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떠나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실재라고 하는 현대의 존재론이 발전함에 따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기독교 무신론의 신학자들은 성부가 죽고 성자로 나타났고, 다시 성자는 죽고 성령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이 새로운 양태로서 나타났다. 역사적 예수가 또 형태 변화를 해서 만인의 얼굴과 손으로 분신화신하는 성령이 되었다. 따라서 지금은 성령의 시대다. 성령의 시대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시대가 된다...현대는 우주시대다. 기독교는 과학 및 기계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해 온 현대에 적응하기 위해 형태 변화를 해야 한다. 이 새 환경에서 기독교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것은 역사적 기록보관소의 종교목록대장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오늘의 급진적 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신약성경 약속이 가톨릭, 프로테스탄트에 다음가는 제3의 기독교로 성취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또 한 번의 출애굽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에 따르면 그들의 하나님 곧 신은 절대자이며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은 인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주관된다고 믿어 왔습니다. 이 믿음이 지금까지 기독교를 지탱해 온 기반입니다. 그러나 우주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신화적 신은 더 이상 절대자나 전지전능자로 용납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론 체계가 뒷받침되지 않은 신은 결코 그들의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에 기독교가 옛날처럼 계속해서 신화적인 신만을 고집한다면 기독교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한갓 기록으로나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신화적 신이 아닌 새로운 신을 재발견하거나 재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성령론입니다. 성령론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죽어서 없고 예수도 죽어서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죽고 없지만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형태 변화를 해서 성령으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분신화신(分身化身)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 사람마다 다 성령이 있으니 이 성령 속에서 하나님을 찾자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에 대해서는 기독교 내에서도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여기서는 절대적인 하나님 곧 초월신이 아닌, 인간에 내재한 내재신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하나님이고 인간 속에 하나님의 절대성이 들어 있음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모든 사람에게 다 불성이 있다 하는 것과 통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기독교 무신론을 주장하는 진보적, 급진적 신학자들에 대해 보수 교단의 목사들은 심한 반발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극도로 발달된 오늘날에도 초월적인 신의 존재만을 계속 주장한다면 기독교는 언젠가는 이 현실 사회에서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현대인이 납득할 수 있는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또 한번의 출애굽을 해야 한다고 서남동 교수는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압박받던 유대 민족이 모세의 지도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으로 탈출하였듯이, 오늘의 기독교도 새롭게 해석된 신을 재발견하고 기독교를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원룡 목사라고 하면 종교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권위있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분이 어느 잡지에 ‘과학앞에 사라진 신’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그 글에서 그는 “저 푸른 허공을 아무리 쳐다보고 쳐다보아도 거기에는 천당도 없고 하나님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노인’이라고 표현하면서 성경에서 말씀한 하나님을 보려고 망원경을 설치해 놓고 눈을 닦고 보아도 보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여러 가지 면에서 검토해 본 결과 신이 저 허공에는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니 거기에 대해서는 주장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또 죽은 송장에게 매달리듯 사라진 신에 연연해하지 말고 예수교의 나아갈 길을 달리 모색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를 들어 말하기를, 미국에서 신부들에게 설문지를 돌려 조사해 보니 90퍼센트 이상이 신에 대해 회의를 느껴 많은 이가 성직을 바꾸고 싶다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들은 그 전에는 하나님이 천당에 계시는 줄 알고 자신있게 ‘하나님이 천당에 계시니 믿으라’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허구일 뿐,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신자들에게 믿음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원룡 목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어디서 하나님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한평생 남을 위해 살았듯이 남을 위하여 사는 정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을 위하여 노력하고 살면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그것이 바로 천당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변화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에서는 더욱 심각하여 현대가 해결하여야 할 커다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비슷한 문제로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일이 또 있습니다. 타임지가 ‘신은 죽었는가’하는 표제로 실은 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글은 ‘신은 없다’하여 무신론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타임지는 이 글을 발표하기 위하여 3년 동안 연구하였다고 합니다. 곧 그동안 세계의 유명한 신학자들을 방문하여 많은 의견을 듣고 종합한 결과 신은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 기사는 이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도 함께 실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신이 있고 없음은 인간의 차원을 떠난 문제인 만큼, 과학이니 철학이니 하면서 공연히 무신론을 주장하지 말라. 우리들 인간은 무조건 신을 믿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찌되었든 그때에 타임지가 낸 그 특집기사의 지배적인 주장은 “하나님은 없다”는 내용이어서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각 신문에도 그 내용이 소개되었고, 기독교 내에서도 ‘기독교 무신론’이라는 부제를 붙여서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실을 떠난 절대 세계나 현실을 떠난 초월신은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를 떠난 절대 세계라든지 현실을 떠난 초월신을 주장하던 종교 사상은 점차로 그러한 논리를 버리고 교리를 다른 방향에서 새롭게 재창조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좀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철학자인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하여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기독교 사회에서는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신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던 터라, 신이 완전히 죽어서 없어졌다는 그의 선언은 퍽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본디부터 없던 신을 있는 것으로 잘못 믿어 오다가 뒤늦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 뿐인데, 마치 신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듯한 그런 말은 사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그 전에는 살아 있었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뒤늦게나마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다면 그 전까지의 잘못된 믿음을 버리기만 하면 될 터인데 말입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사람의 지혜가 발달하면서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하였으며 신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새삼 “신은 죽었다”는 선언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그러한 사실을 꿰뚫어볼 만큼 발달하기 전에는,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신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해 온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신을 그릴 때 사람 모양을 그린다고 합니다. 만약 개나 소에게 신을 그리라고 하면 개나 소 모양으로 그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결국 신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쓸데없는 환상을 일으켜서 관념 속에서 신을 만들어 놓고 이런 저런 식으로 해석해서 혼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이제 처음부터 없는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인 줄 알면서 거짓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실지로 파멸과 자살로 이끄는 행동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교든지 신을 전제로 하는 종교는 그 사상을 포기하고 다시 전환하여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야 할 것입니다.

 

 

극락설

그렇다면 불교도 역시 종교인데, 영원한 행복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행복을 얻는 방법에는 불합리한 점이 없는지, 그래서 요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납득이 안 되는 믿음을 강요하는 점은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리 우주과학 시대라고 하더라도, 또 앞으로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가더라도 불교 자체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구애받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다른 종교는 그릇되었다 말하면서 자신의 종교인 불교만 옳다 한다고 반발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불교가 펼쳐 온 사상이 허위에 차고 거짓투성이라면, 기독교가 절대신을 부정하였듯이, 불교도 마땅히 팔만대장경을 버리고 다시 새로운 터를 닦아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라고 예외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불교의 경전에도 거짓은 있긴 하지만, 그것은 방편이라 하여 무지한 중생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 방편으로 ‘극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자꾸 가면 그곳에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을 서방정토(西方淨土)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저 하늘 위에 있다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서쪽으로 가면 있다는 극락세계는 진짜인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극락세계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망원경을 이용하여 찾아보든지 어떻게 하든지 먼저 살펴보고 나서 옳지 않으면 믿지 않아야 할 터이고, 만일에 옳다면 누구든지 그곳으로 가서 영원한 행복을 찾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극락세계를 자세하게 설명한 불교 경전으로「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중에 중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이 있으며 또 무량수의궤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저 서방세계를 지나 끝없이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그곳에 가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 삼계화택, 사생고해의 사바세계에 집착하지 않고 부지런히 염불을 하면 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극락세계의 장엄은 참으로 대단하여 천당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그런 극락세계에 누구든지 “나무아미타불”만 지극하게 부르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만 여기에 한가지 조건이 붙습니다. 5역죄를 지은 사람, 곧 부모를 죽이거나 대성인을 죽인 사람 또는 교단 화합을 파괴하거나 바른 불법을 비방한 사람 등은 아무리 아미타불을 불러도 극락세계에 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에서는 그와 달리 극락세계를 아홉 등급(九品)으로 나누고서 5역죄를 지은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한 사람이라도 극락세계에 갈 수는 있는데 그런 사람은 가장 낮은 등급인 하품하생에 간다고 말합니다. 또 ‘무량수의궤경’에서는 5역죄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한 죄를 지었다 해도 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상품상생의 가장 좋은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서방정토라고 하는 극락세계에 가는 자격에 대해서 제각기 말이 조금씩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량수경’에서는 5역죄를 지은 사람은 극락세계에 못 간다고 해놓았는데, ‘관무량수경’에서는 하품하생에는 갈 수 있다고 하다 ‘무량수의궤경’에서는 상품상생까지도 갈 수 있다고 해놓았으니, 어느 것이 진실인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관무량수경’의 끝부분을 보면 “서쪽으로 가면 극락세계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부처님은 법계장신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계란 시방(十方)의 법계이니, 곧 부처님 몸이 시방 법계에 가득 차서 그 어느 곳이나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극락세계가 서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동방에도 있고, 북방에도 있고, 남방에도 있고, 땅 밑이나 하늘 위나 없는 곳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온 시방세계가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고 부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마음이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것이 아미타불이 아니라, 일체 중생이 모두 다 가지고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부처님인 것이지 마음을 내놓고 달리 부처를 구하려는 것은 마치 불 속에서 얼음을 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처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이 부처인 것입니다. 이때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육단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방에 가득차 있어 유정, 무정이 똑같이 갖고 있는 그 마음을 말합니다. 곧 유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고 무정도 부처님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것이 곧 법계장신이며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가득 차 있어서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고 피할래야 피할 수 없다고 밝히지 않고, 왜 서방에 있다고 하면서 그곳에 갈 수 있느니 없느니 하고 빙빙 돌려서 말씀했는가? 그것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방편설입니다. 사람들의 지혜가 발달하기 전에는 그 지혜의 정도에 맞추어서, 그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또 그 사람의 지혜를 향상시키기 위해서, 부득이 사실과 꼭 같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서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선의의 거짓말을 해 가면서 지혜를 자꾸자꾸 향상시켜 가면 마침내 참말을 알게 하기 위한 거짓말임을 일깨워 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방편설 또는 방편가설이라고 합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지금 살고 있는 현실 이대로가 극락이라고 하면, 그는 미친 소리라고 비웃거나 아니면 화를 낼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고 있는데 여기가 극락이라니 마치 사람을 놀리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현실 이대로가 바로 극락세계라는 사실을 믿지 않고 그것은 거짓된 말이라고 부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들을 바로 가르치기 위해 “저 서방에 극락세계가 있으니 부지런히 아미타불을 외고 수행하면 그곳에 갈 수 있다”고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극락세계로 가기 위해서 열심히 아미타불을 부르며 수행에 열중하게 될 터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염불을 부지런히 외면서 수행에 힘쓰다보면, 그러는 사이에 지식이 늘고 지혜가 향상되면서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힘이 차츰차츰 커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얼마 뒤에 부처님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때에 이르면, 앞에서 일러 준 말은 방편일 따름이요, 사실은 시방세계 이대로가 극락이며 모든 중생이 바로 부처이니 유정과 무정이 모두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음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비로소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승법

그 방편에 대해 가장 유명한 것이 법화경입니다. 법화경은 부처님이 49년 동안 설법한 말씀의 총 결산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가장 골자가 되는 것이 바로 ‘방편품(方便品)’입니다. 거기에 보면 “시방세계 국토 중에 오직 일승법만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일승법이란 이 세상에 부처님 아닌 것이 없고, 극락세계 아닌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을 교화하고 구원하기 위해 2승(二乘), 3승(三乘)의 방편을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방편설은 비록 사실 그대로의 참말은 아니지만 수단으로서 인정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일승을 말씀하시기 위해 2승과 3승을 설하신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육조(六祖)스님도 극락세계에 대해 “부처님이 극락세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분명히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만일에 사실이라면, 동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서방의 극락세계로 갈 수가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서방 사람은 염불을 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부처님은 아직 지혜가 성장하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하였기 때문에 방편설을 쓰셨지만, 나는 지혜가 발달된 사람들만 상대하기 때문에 방편을 쓰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육조스님의 뜻은 서방 극락세계는 실재하지 않고, 오직 내 마음이 부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 그대로가 극락세계이며, 자성(自性) 그대로가 아미타불이라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도 내 마음 속에 있고 아미타불도 내 마음 속에 있으니, 서방이든 동방이든 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 속에 있는 극락세계를, 마음 속에 있는 아미타불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종교를 믿는 것은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행복을 달성할 수가 없기 때문에 종교는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는 방편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가면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방편을 쓸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천당은 거짓말이고 옆으로 가는 극락은 참말이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요즈음에는 아이들도 극락이니 천당이니 하면 믿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는 교리를 바꾼다느니 새 시대에 맞게 그 뜻을 재해석한다 하지만, 불교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그동안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써 왔던 방편가설을 버리기만 하면 됩니다. 방편가설을 버리면 남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일승(一乘)인데 그 곳으로 바로 들어가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현실 이대로가 절대이고 극락세계이고 천당이며, 중생 모두가 하나님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아닌 사람이 없음을 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됩니다.

 

곧 불교의 기본 태도는 일승법인데, 현실 이대로가 절대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면 우리는 불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바로 부처님 법 위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출전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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