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큰스님 말씀

돈오점수(頓悟漸修)

근와(槿瓦) 2014. 11. 14. 18:13

돈오점수(頓悟漸修)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1) 수심결(修心訣)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보조스님의 사상변화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수심결(修心訣)과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으로 대표되는 초년 시대인데 이때에는 선과 돈오점수가 혼돈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펴낸 절요(節要)시기인데 여기에서는 선과 교를 나누긴 하였지만 여전히 모순과 혼란이 있습니다.

 

먼저 수심결(修心訣)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지 않음이 없으니 닦음을 인연하여 깨친다.

 

예부터 모든 성인들이 누구나 먼저 깨쳐 신해하고 뒤에 닦아 결국 구경각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깨침의 모양을 밝히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해오(解悟)니 성품과 모양을 밝게 밝히는 것이요, 둘째는 증오(證悟)니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해오(解悟)에서의 ‘해(解)’라 함은 지해(知解), 즉 알음알이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불법(佛法)의 성품 모양(性相)을 알긴 알았는데 그리하여 분별심으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분별심으로 아는 그것을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이 해오(解悟)에 있어서는 번뇌망상과 사량분별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증오(證悟)라 하는 것은 실지로 자성을 바로 깨쳐서 구경각을 성취해서 참으로 체득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현묘한 극치를 이룬다’고 하는 것입니다.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구별이 전자는 구경각을 깨침을 말하고 후자는 사량분별로써 아는 것입니다. 심해(心解)니, 지해(知解)라 하기도 합니다. 해오에서는 구경각에 망상이 없다는 것을 이해했을 뿐이지 실지는 자기 마음에 체험이 되지 못한 것이고, 증오(證悟)란 완전히 마음으로 체험해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앞으로 법문해가면서 이 증오(證悟)와 해오(解悟)의 관계가 번번이 나오는데 철저히 이해해야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육조선(六祖禪)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증오(證悟), 즉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해오(解悟)인 지해(知解)는 절대로 배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해(知解)라는 것, 해오(解悟)라는 것은 삿된 종(宗)인 것입니다.

 

다만 번뇌의 마음 속에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있으니 마치 거울에 밝은 본성이 있는 것과 같음을 신해하여 결정코 의심이 없음을 해오라고 한다.

 

중생이 번뇌망상 그대로 있긴 있지만 번뇌망상 그 자체가 공(空)해서 모든 부처님의 불성(佛性)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이것을 믿고 알아 여기에 조금도 의심이 없는 것을 해오(解悟)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지로 깨쳐서 체득한 것이 아니고 분별심으로 믿고 안다(信解)는 것입니다.

 

규봉이 먼저 해오를 하고 뒤에 닦는다는 말의 뜻을 깊이 밝혀 말하였다. 얼음 못이 전부 물임을 아나 따뜻한 기운을 빌려 녹이고, 범부가 부처임을 해오하나 법력을 북돋우어 닦음을 도운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흘러 윤택하여 바야흐로 씻는 공을 나타내고, 망상이 다하면 신령하게 통하여 빛에 통하는 작용이 나타난다.

 

이 글은 수심결에 나오는 것인데, 돈오점수(頓悟漸修), 즉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다는(先悟後修)하는 근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못 전체에 얼음이 꽝꽝 얼어 붙어 있는데,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이것을 신해(信解)니 해오(解悟)라 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범부인 중생 이대로가 본래 부처라는 것, 범부의 본래 성품이 천진해서 부처님의 성품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이 해오(解悟)라는 것입니다. 알긴 알지만, 실지에 있어서 부처를 이룬 것은 아니고 범부 그대로 있습니다. 얼음 그대로가 물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았지만은 얼음은 그대로 있듯이,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 알았지만 중생의 번뇌망상 그대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력(法力)에 의지해서 자주 닦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돈오점수는 곧 선오후수(先悟後修)입니다. 여기서 돈오(頓悟)라 하는 것은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았지만 얼음이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실히 알았지만 중생 그대로임을 깨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돈오(頓悟)를 해오(解悟)라고 합니다. 그러니만치 얼음이 그대로 있듯이 망상은 그대로 있으니까, 얼음을 녹이기 위해서는 따뜻한 기운을 빌려야 하고, 망상을 없애기 위해서는 자꾸 자꾸 닦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수(漸修)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말한 육조스님의 선종 정맥에서 말하는 돈오하고는 정반대입니다. 선종정맥에서는 돈오(頓悟)라 하면 일체 망상이 다 끊어진 것을 말했습니다. 돈오한 동시에 돈수(頓修)여서 후수(後修)가 필요없습니다. 선종정맥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얼음이 본래 물임을 안 것만으로는 되지 않고, 얼음이 녹아서 물로 완전히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물 자체도 볼 수 없는 무소득(無所得)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유소득(有所得)이니 제8아뢰야 무심(無心)을 물에다 비유한 것입니다.

 

한편 돈오점수에서 주장하는 깨달음(悟)이란 얼음이 본래 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직 얼음이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알았지만 망상이 그대로 있으니, 따뜻한 기운을 빌려 얼음을 녹이듯이 공부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서 망상을 다 끊어야 하니 거기에 점수가 필요하고 그래야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육조의 선종정맥에서 주장하는 돈오돈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깨달음(悟)이라 하면 일체 망념이 다 끊어지고 망념이 끊어진 자체, 무심의 경계 이것도 벗어남을 말합니다.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되어 물이라고 하는 자체도 볼 수 없는 이 구경지(究竟地)를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돈오(頓悟)라는 말만으로 겉으로 볼 때는 다 같지만, 깨달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틀립니다. 그래서 닦아야 될 수 있는, 점수라야 될 수 있는 이것을 사종(邪宗)이라 하고 지해종(知解宗)이라 했지 육조스님의 정전이라고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이 돈오점수를 처음 주장한 사람은 하택신회(荷澤神會)이며, 그 주장을 따르는 이가 규봉(圭峰)으로 규봉이 돈오점수를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규봉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는다는 뜻을 총괄하여 결정하였다. 자성이 원래 번뇌가 없고 무루지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 부처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단박에 깨달아(悟) 이것에 의지하여 닦는 것을 최상승선이라 하며 또한 여래청정선이라 한다. 만약 능히 생각생각에 닦아 익히면 자연히 백천삼매를 얻는다. 달마문하에 구르고 펼쳐 서로 전한 것이 이 선이다. 곧 돈오점수의 뜻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가 없어도 옳지 않다.

 

방금 앞에서도 말했지만 돈오점수를 교가(敎家)에서만 말한 것이라 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달마문하에 굴리고 펼쳐 서로 전한 것’이 돈오점수의 선(禪)이라고 선언하여 버렸으니, 이것이 큰 문제이며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선과는 정면 충돌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돈오돈수를 말하고 점차(漸次)가 없는 것을 말했는데, 여기서는 돈오를 해서 점수를 한다 하였으니 육조정전(六祖正傳)의 선(禪)과는 근본적으로 반대입니다. 또 돈오점수를 달마의 선종이라고 말함으로써 일대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성을 보니 이 자성자리에 원래 번뇌가 없으며 무루지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구족하여 모든 부처와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돈오(頓悟)라고 한다. 비록 본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쳤다 할지라도 시작없는 습기를 갑자기 단박 없애버리기가 어려운 까닭으로 깨침을 의지해 닦아서 점점 훈습하며 노력하여 오래 성태(聖胎)를 길러 마침내 성인을 이루는 까닭에 점수(漸修)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되는 것이 얼음이 본래 물인 것을 알았지만 얼음은 그대로 있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 망상이 그대로 있는 것을 돈오니 견성(見性)이니 하고 있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입이 아프도록 말했듯이 부처님 말씀하신 것이나 마명보살이「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것이나, 그 뒤에 원효나 현수같은 대법사들이 말씀하신 것이나 선종의 육조 혜능대사가 말씀하신 것은 모두 ‘십지보살도 견성하지 못하였다’,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견성이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멸진정(滅盡定)에 들어가 오매(寤寐)가 일여(一如)하여 대무심지에 있다 하여도 이것은 견성이 아니라고 했는데 보조스님의 수심결(修心訣)에서는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는 것을 견성이라 해버렸으니 여기에도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돈오점수를 말할 때에 달마선이 돈오점수라 한 것도 선종정맥사상과 정반대가 되어 있고, 이것을 또 견성이라 한 것도 정반대가 되어 있습니다.

 

이 돈오와 점수 두 가지 문은 일천 성인의 가는 길이다.

 

일천 성인 일만 성인이 다 이 돈오 ․ 점수 두 가지 문에 의지해서 공부를 성취했다는 말입니다.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돈오하였으나 이 옛날 습기를 갑자기 없애기 어려운 까닭에 역순 경계를 만나면 성내고 기뻐하거나 옳고 그름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여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다. 만약 반야로 노력하고 힘쓰지 않으면 어찌 무명을 다스려서 크게 쉰 곳에 이를 수 있겠는가?

 

돈오점수 사상에서 말하는 돈오(頓悟)의 내용입니다. 즉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다 하였으니 중생 그대로입니다.

 

중생이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 일체 망상이 다 끊어져서 실지로 본성을 바로 깨치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뒤에 닦아서(後修) 무명을 다스려서 구경에 이른다는 것이 점수(漸修)입니다. 돈오한 뒤에는 어떻게 점수(漸修)해야 되는가?

 

깨친 뒤에는 오랫동안 모름지기 비추어 살펴서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거든 결코 따라가지 말고 또 덜어서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이니 천하 선지식의 깨친 뒤 목우행(牧牛行)이 이것이다.

 

중생이 본래 부처인 줄 알았지만 망상은 그대로 있으니까 지해심으로써 자꾸 덜고 덜어서 망상이 다 끊어져야만 무위(無爲)에 들어가서 구경이 되며, 천하 선지식들도 망상이 있는 거기에서 자꾸자꾸 목우행을 하여 비로소 구경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목우행(牧牛行)을 보림(保任)이라고도 하는데 점수설(漸修說)에서 말하는 것은 예전 큰 스님들의 목우행과는 천지차이입니다. 자명(慈明)스님이 지은 목동가(牧童歌)가 있는데 거기 보면 참으로 구경을 성취해서 호호탕탕히 자재하고 무애한 행을 목우행이라 하였지 망상이 전과 다름없는 것을 목우행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먼저 돈오하였으나 번뇌가 두텁고 익힌 업이 여물고 무거워 경계를 대함에 생각생각에 정을 낳고 인연을 만남에 마음마음에 상대하여 혼침 ․ 산란에 시달려 항상한 적지(寂知)를 잃어버리는 자는 상(相)을 따르는 문인 정혜를 빌어서 다스림을 잊지 않고 혼침과 산란을 균등히 조복하여 무위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깨치긴 깨쳤으나 번뇌가 많고 익힌 업이 무거워서 경계를 대하거나 인연을 만나거나 하면 혼침과 산란이 그대로 있습니다. 망상이 그대로 있느니만치 망상이 일어났을 때는 산란이 되고 또 망상이 없을 때에는 혼침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이 혼침 아니면 산란이고 산란 아니면 혼침이니 그렇기 때문에 ‘객진의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혼침 ․ 산란을 정혜를 빌어서 다스리고 균등히 조절하여 구경을 성취한다고 합니다.

 

먼저 반드시 돈오하여 바야흐로 점수한다 함은 이는 해오이다. 장애를 없앰으로 말하면 해가 단박 떠오름에 서리와 이슬이 사라지고, 덕을 이룸으로 말하면 어린 아이를 낳음에 기운이 점점 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말씀하되, 처음 발심할 때 정각을 이루고 연후에 삼현 ․ 십성을 차례로 닦아 깨친다고 하였다.

 

‘처음 발심할 때 정각을 이룬다’함은 우리의 본성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알았다는것이지 깨쳤다는 뜻은 아닙니다. 삼현(三賢)의 끝이 40위(位)이며 십지(十地)의 끝이 50위인데 자꾸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이 삼현 ․ 십성을 차례로 닦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오돈수라 함은 이는 상상지(上上智)를 말함이니 근기의 성품과 욕락이 모두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고 대총지를 증득한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다. 이 사람의 세 가지 업은 오직 스스로 분명히 밝아서 다른 사람이 미칠 바 아니다. 장애를 끊음은 마치 한 타래 실을 끊음에 만 가닥이 단박 끊어짐과 같고, 덕을 닦음에는 마치 한 타래 실을 물들임에 만 가닥이 물드는 것과 같다. 하택이 말하였다. ‘한 생각에 본래 성품과 상응하여 팔만 바라밀행을 일시에 함께 쓴다.’ 또한 사적상에서 말하면 우두 융대사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말한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전자는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은알았지만 번뇌망상이 그대로 있으니까 차제로 삼현 ․ 십성을 닦아서 올라가는 것을 말하고, 후자는 한 칼에 한 뭉치 실을 다 베어버리듯이, 또한 뭉치실을 다 물들여버리듯이 하나 끊을 때 전체가 다 끊어지고 하나 물들일 때 전체가 다 물들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한 생각도 나지 않고 앞뒤가 끊어진다(一念不生 前後際斷)'고 하였는데 만약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이것도 육조스님이 말하는 돈오돈수는 아닙니다. 여기에 머물러만 있어서는 제8아뢰야식에 주저앉게 되어 실지 돈오돈수가 아닙니다.

 

만약 신해가 있으면 옛날 성인과 손을 잡고 같이 간다.

 

만약 믿음이 이룩되면 의정이 단박에 쉬어 올바른 견해가 나서 스스로 긍정하는 곳에 이르니 이것이 해오이다. 믿음의 원인 속에서 모든 부처님 과덕에 계합하여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아야 바야흐로 믿음을 이룬다.

 

믿음을 이룸이란 얼음이 본래 물이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확실히 믿음을 말합니다. 그렇게 믿어서 망분별의 의심이 없는데 이르는 것을 해오(解悟)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중생이 부처님 자성과 똑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것을 확신해서 의심하지 않는 데에서 실질적인 믿음, 신해(信解)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해오(解悟)와 신해(信解)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하였습니다.

 

먼저 모름지기 자신의 성품이 청정하고 묘한 마음임을 신해(信解)하여 성품을 의지해 선(禪)을닦는다. 이것이 예부터 스스로 부처의 마음을 닦고 스스로 부처님 도를 이루는 긴요한 기술이다.

 

보조스님이 결사문에서 돈오점수를 주장한 말씀입니다. 신해(信解)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만 내용은 해오(解悟)와 똑같습니다.

 

먼저 모름지기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함을 신해하고 신해에 의지하여 차차로 닦음이 무방하다.

 

신해, 즉 해오에 의지해서 차차로 닦는다는 것, 즉 점수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논하듯이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하다는 이치는 최상승선에 해당된다.

 

규봉의 도서(都序)에 있는 말을 보조스님이 인용하였는데 앞에서 ‘달마문하에서 굴리어 펴서 서로 전한 것은 이 선이다’고 말한 것과 같은 내용입니다. 결사문(結社文)에서도 신해(信解)가 곧 달마 최상승선이라고 해버렸습니다.

 

만약 큰 마음의 중생이 이 최상승 법문에 의지하여 자기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요 자기의 성품이 법의 성품임을 결정코 신해하여 이 신해에 의지해서 닦는 이는 상근기이다.

 

신해(信解)에 의지하여 점수를 하는 것을 상근기라 하고 결국 최상승법문이라 하고, 달마가 바로 전한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돈오했다는 것, 신해하고 해오했다는 그 깨친 정도가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은 아직 말을 하지 못하나(처음 깨친 사람은 설법이나 다른 사람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 적확하지 않다.) 점점 말을 하게 됨에 이르고(법을 해설한다), 점점 행동하여(십지의 십바라밀이다) 바로 평소같이 (성불)된다.

 

보조스님이 말하는 돈오한 사람, 해오한 사람의 경지가 어찌 되느냐 하면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은 알았지만은, 망상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법문도 옳게 못하고 문답도 못하지만 점점 닦아가서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선종정맥에서는 깨쳐서 법담을 잘 한다 하여도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아니하고 원오스님 같은 이는 수좌를 저 폭포수에 집어넣고 아주 어려운 질문을 물어서 척척 대답하니까 그때서야 옳게 알았다고 인정해 주는 것과는 전연 다릅니다. 그런데 규봉이나 보조스님은 아직까지 법문도 못하고 문답도 못하는 것을 돈오하고, 해오라고 하여 깨쳤다고 하니 이것을 어찌 선종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해오(解悟)한 사람의 자리(位)는 어떻게 되느냐?

 

해오 후에 십신 처음 자리에 드느니라.

 

십신(十信)이라는 것은 삼현(三賢)의 앞입니다. 삼현의 앞인 십신위(十信位)를 오해(悟解)라 하고, 해오(解悟)라 하고, 신해(信解)라 하고, 돈오(頓悟)라 하고, 견성(見性)이라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나 고불고조(古佛古祖)는 모두 다 십지 ․ 등각도 견성을 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십신위(十信位)를 견성위(見性位)라 했으니 문제가 달라져도 너무 많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변명하기를 원교십신(圓敎十信)이라고 말합니다. 원교십신이란 원융무애하여 십신(十信)이 십지(十地)고 십지(十地)가 십신(十信)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변명하지만 그 실지의 경계는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어 번뇌망상은 그대로 있느니만치 십신(十信)은 어디까지나 십신(十信)이지 이것이 십지(十地)는 절대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성이 청정하고 자성이 해탈임을 돈오하여 점점 닦아서 때를 여읜 청정과 때를 여읜 해탈을 얻게 된다.

 

‘때를 여읜 청정’, ‘때를 여읜 해탈’이란 말은 섭대승론에 나온 말입니다. 규봉이 돈오점수를 설명할 적에 중생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안 것이 자성 청정과 자성 해탈을 깨친 것이라 하고, 그리고 점점 닦아서 망상을 제거하여 실지 때를 다 없애버리면 때를 여읜 청정(離垢淸淨), 때를 여읜 해탈(離垢解脫)을 얻게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돈오점수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성이 청정함과 자성이 해탈임을 먼저 깨달아서 다음에 점수해서 때를 여읜 청정과 때를 여읜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근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종정맥에서는 자성청정(自性淸淨)이나 이구청정(離垢淸淨)이나 할 것 없이 실지로 구경각을 성취해야 이것을 견성(見性)이라 하고 돈오(頓悟)라 하였지 그 이외는 돈오라고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말씀한 바에 따르면 이런 것이 전부 사종(邪宗)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조스님이 ‘세상에 나와 사종(邪宗)을 부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홍주는 돈오문엔 비록 가까우나 적중하지 못하고, 점수문엔 전연 어긋난다.

 

‘홍주(洪州)’는 홍주에 계신 마조(馬祖)스님을 말합니다. 마조는 돈오문엔 가깝긴 가까운데 확실히 깨치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이 말씀하는 돈오는 설사 십지 ․ 등각이라 해도 침공체적(沈空滯寂)해서 견성한 것이 아니고 구경각을 성취해야만 견성이니, 제8아뢰야 무심경계까지도 완전히 벗어난 참다운 무념의 상태를 성취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규봉스님은 번뇌망상이 있는 그대로를 견성이라 하였으니, 규봉이 볼 때는 마조스님이 말하는 견성이 돈오문엔 가깝긴 가까운데 틀렸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조(馬祖)는 점수문에 있어서는 도무지 맞는 것이 없어 잘못되어서 전부 어긋난다고 규봉도 주장합니다. 마조에게는 점수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조스님은 구경각을 성취한 데서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여 절대로 후수(後修)가 없습니다. 규봉 자기가 보는 것은 마조스님에게 점수문이 없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마조스님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을 더 쓸 필요가 없는 입장이고 규봉스님은 아직 병이 그대로 있어 약을 더 써야 할 입장입니다. 규봉스님 말대로 하자면 병 다 나은 사람도 생다리를 부러뜨리고, 생배를 째서 억지로 병원으로 가서 약을 써야 하는 격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을 가야 하겠습니까? 결국은 병신을 따라가야 될건가 아니면 성한 사람을 따라가야 될건가, 그것은 스스로 생각해 보면 자연히 알 걸로 생각됩니다. 도를 닦는 근본은 병이 다 나아서 약을 쓸 필요없이 참으로 자유자재한 근본 해탈이 목적이지, 실제로 병 그대로 가지고 약을 먹고 붕대를 첩첩이 감고 다니면서 내가 돈오했다, 견성했다는 길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선종에 있어서 누구든지간에 마조가 정맥이냐 규봉이 정맥이냐 하면, 천하의 선종에서 규봉을 지해종(知解宗)이라 배격을 했지 마조를 틀렸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조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오직 규봉 혼자만이고 그 규봉을 지지한 사람이 보조스님입니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망정의 습기가 다하지 않았으면 곧 깨친 마음이 원만하지 않기에 그러하다. 혹 마음을 깨침이 원만하지 못하면 모름지기 아직 원만하지 못한 자취를 쓸어버려야 하니 다시 생애를 세워서 크게 깨침을 기약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혹 깨친 마음이 다하지 못함을 실천으로써 다하고자 하면 마치 섶을 지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더욱 불타오를 뿐이다.

 

마음을 깨침이 원만치 못하다 함은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이 없는 경계는 말할 것도 없고 아주 미세한 제8아뢰야 근본무명이 남아 있는 경계를 말한다. 실지로 바로 깨치지 못한 것임을 확실히 알 때는 다시 발심하여 크게 철저하게 깨쳐야 하는데, 깨치지 못한 상태에서 이천(履踐) 즉 보림(保任)한다, 점수(漸修)한다 하여 공부를 성취하려는 사람은 섶을 지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불은 끄지 못하고 불꽃만 더욱 사납게 타오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2) 절요(節要)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돈오점수(頓悟漸修)사상은 교가(敎家)에서는 혹 방편적으로 용납이 되지만 조계 선종정맥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사상이라는 것을 대중들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해동(海東)으로 와서 보조스님은 그런 사상을 이어받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돈오점수사상은 보조스님 저술에 있어서「수심결(修心訣)」과「결사문(結社文)」의 두 저술에서 근본이 되고 있습니다.「결사문」은 보조스님 서른세살에 팔공산 거조암(居祖庵)에 계실 때 지은 글입니다. 「수심결」은 지은 연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사상적으로 봐서「결사문」이후에 된 저술은 사상의 전환이 많은데 그 전환점을 기준하여 보면「수심결」이「결사문」지을 때와 같은 보조스님 초기의 저술이라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보조스님이 서른세살에 거조암(居祖庵)에 계시면서「결사문」을 짓고 약 십년 후인 마흔 한 살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대혜어록」을 보고 ‘얻은 바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전에는 돈오해서 점수한다는 그 사상의 범위 안에 있었는데 상무주암으로 가서 ‘얻은 바가 있고’부터는 정해(情解)즉 지해분별을 원수와 같이 여기고 번뇌망상을 벗어나서 바로 안락하여 지해가 조금 높아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상무주암에 몇 해 계시다가 송광사로 가서 한 십년 계시다 오십세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반년 전 오십두살 되시던 겨울에 완성한 책이「절요(節要)」인데, 여기서는「수심결」이나「결사문」과는 달리 사상적 전환이 있습니다. 즉「절요(節要)」에 있어서는 돈오점수(頓悟漸修)는 교종(敎宗)에 해당하는 것이지 선종(禪宗)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하택 신회는 지해종사(知解宗師)다. 비록 조계의 정통은 아니나 오해(悟解)가 높고 밝아서 결택이 밝으니 종밀스님이 그 종의 뜻을 이은 까닭으로 이 책에서 그것을 펴서 활연히 볼 수 있게 한다. 지금 교를 인해서 마음을 깨친 이를 위하여 번거로운 말을 제거하고 요점을 드러내서 관행(觀行)의 귀감으로 삼는다.

 

수심결이나 결사문의 시절에는 돈오점수를 달마선이라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20년 후에 지은「절요」에 와서는 돈오점수는 지해종사(知解宗師)인 하택의 사상인데 그것을 규봉이 이었다고 선언하고 이것은 교가(敎家)를 위해서 한다는 조건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를 보다가 마음을 깨쳤다 함은 해오(解悟)이고 신해(信解)를 말합니다. 해오를 성취하여 깨쳤다고 하지만 객진 번뇌가 전과 다름없는 사람들, 즉 교가를 위해서 돈오점수를 설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규봉(圭峰)스님은 어떤 분인가? 규봉스님은 처음에는 하택의 법을 이어 받아 선종이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청량국사의「화엄소초(華嚴疏鈔)」를 보고 완전히 화엄종으로 가버린 스님, 즉 선을 버리고 교에 들어간(捨禪入敎) 스님입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잠도 자지 않고 밤새도록 살펴서 소(疏)로써 경(經)을 통하고 초(鈔)로써 소를 해석하니 일생의 남은 의심이 모두 다 없어져 버리고, 바깥 경계와 안의 마음이 활연히 간격이 없어졌나이다. 서원컨대 세세생생토록 목숨이 다하도록 널리 펴게하여 주소서.

 

이것은 규봉스님이 청량국사에게 한 편지입니다.

규봉이 참선을 닦았지만 의심도 많고 경계에 통하지 못하였는데 청량국사의 화엄소초를 보고 침식을 잊고 연구하여 의심을 완전히 풀고 자기 경계도 완전히 통하게 되었으니 이 화엄소초를 목숨이 다하도록 받들고 펴겠다고 서원하고 청량국사의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로자나불의 화장세계가 능히 나를 따라 노니는 사람은 바로 너로구나!

 

규봉의 편지에 대한 청량국사가 답한 부분입니다.

비로자나불의 화장세계, 즉 화엄경 4법계(四法界)에서 능히 나를 따라서 같이 놀 사람은 바로 너라고 청량국사가 규봉스님을 아주 원만하게 인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규봉스님은 실질적으로 청량국사의 제자가 되어 화엄오조(華嚴五祖)가 되었습니다. 규봉스님은 교가의 입장에서 선(禪)을 취급하다 보니 선(禪)과 교(敎)를 혼동하여 돈오점수가 달마선이라고 끝끝내 평생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초년에는 자기가 잘 몰라서 돈오점수가 선종이라고 주장했지만 말년에 와서는 완전히 달라졌으니 이것이 또 규봉스님과 보조스님과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규봉스님은 어째서 평생을 돈오점수를 주장했는가?

 

좋아하는 생각은 막기 어렵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마침내 대중을 떠나 산에 들어가서 정(定)과 혜(慧)를 고르게 닦아 생각 쉬기를 모두 10년을 하였다. 그랬더니 창틈에 햇빛이 비치면 티끌먼지가 요란하듯, 맑은 물 속에 그림자가 두렷이 비치듯, 미세한 습정이 기멸하면 고요한 지혜에 비춰지고 차별된 법의(法義)가 늘어서면 빈 마음에 드러났다.

 

규봉스님이 평생토록 돈오점수를 버리지 못한 것은 여기서 고백하고 있는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임이 확실합니다.

한 십년 동안 정(定)과 혜(慧)를 닦으니 고요한 지혜가 조금 있기는 있으나 그 가운데 망상이 먼지 일어나듯 하니 마치 아침에 해가 뜰 때 창문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면 거기에 먼지가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듯하고 맑은 못에 그림자 모양이 환하게 밝으나 모든 차별법과 망상이 생멸을 거듭하고 있다는 경계입니다. 규봉스님이 만약 이 경계를 벗어났다면 완전히 병이 다 나은 얘기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니 언제든지 병신의 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병이 다 낫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이런 입장에서 불교를 보게 되니까 달마선이 돈오점수라고 주장하게 되고 돈오점수사상이 규봉의 근본사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보조스님은 초년에 잘 모르고「수심결」이나「결사문」을 지을 때는 돈오점수를 달마선이라고 했다가 나중에「절요」에서는 분명히 바로 잡았습니다.

 

그 본체를 몸소 증득한 후에 그를 인가하여 남은 의심을 다 끊게 한 까닭에 묵묵히 심인을 전했다고 한다. 여섯 대까지 서로 전한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이것은 절요의 말씀인데 6대, 즉 달마스님으로부터 육조 혜능스님까지 전해 내려오는 법이 모두 다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수심결」에 있어서는 달마스님이 전한 법이 모두 해오(解悟)라 하였는데 그후 한 십년 지난 뒤인「절요(節要)」에 와서는 선(禪)은 해오가 아니고 증오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히고 있으니 마침내 보조스님이 사상을 전환한 것이 됩니다.

 

먼저 모름지기 돈오하고 바야흐로 점수한다 함은 해오(解悟)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니라. 지금 또 원돈신해자가 말함이요,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앞 구절은 규봉스님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절요(節要)」목판본에는 ‘此約解言也’라 되어 있는데 중국판이나 일본판에서 보면 ‘此約解悟也’라고 분명히 나와 있느니만치 한국판이 잘못되었습니다. 처음 규봉스님 말씀을 인용하여 많은 말씀을 해놓고 끝머리에 가서 결론으로 이것은 원돈신해자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 하고서 교외별전은 돈오점수가 아니므로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면 보조스님이 말년에 가서는 돈오점수가 선종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말년 뿐 아니라 초년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조사문하에서 이심전심으로 비밀한 뜻을 지적해 전해주는 경우는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기(琪)화상이 “조사의 도를 깨쳐서 반야를 펼쳐낼 이가 말세에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권수정혜결사문」에서 대승 경론의 이치를 들어 명확한 논거를 삼고, 현전문(現傳門)에서 신해(信解)가 틔워지는 실마리(동기 ․ 이치)를 간단히 판별하였다.

 

이것을 보면 초년에 있어서도 돈오점수가 조종문하의 근본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실지로 철두철미하게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사상이 들어 있었다면 ‘달마문하에서 구르고 펴 서로 전한 이 돈오점수의 선’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그것은 초년에는 확실한 견해가 없고 분명히 몰랐기 때문에, 즉 선과 교를 혼동해서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라고 봅니다.

 

어쨌든「절요」에서 보조스님 자신이 돈오점수는 원돈신해의 교가(敎家)를 위해서 하는 말이지 교외별전은 절대로 아니다라고 말한만치 돈오점수가 선종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한 법문은 또한 말을 의지해서 해오를 일으켜 들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법에는 수연과 불변의 두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있음을 자세히 분별하였다. 그러나 만약 오직 말에 의지하여 지해만 내고 몸을 바꾸는 길을 알지 못하면 비록 종일 관찰하나 도리어 지해에 얽매이는 바 되어 쉴 때가 없다. 그러므로 다시 지금 납승 문하에서 말을 떠나 들어가서 단박에 지해를 잊는 사람을 위함이니 비록 규봉스님이 좋아하는 바는 아니나 조사 선지식이 경절의 방편으로 배우는 이를 제접하는 언구를 간략히 이끌어서 이 뒤에 부쳐놓아 참선하는 뛰어난 사람들로 하여금 몸 살아나는 한 가닥 활로를 알게 한다.

 

이것은「절요(節要)」의 결론 부분입니다. 돈오점수는 말을 의지해 알음알이를 내는(知解) 자들을 위해서 설명하기는 하지만 영원토록 그 지해(知解)에 얽매여서는 참으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니, 납승문하 곧 선종을 의지해 일체 언구를 떠나야만 깨친다는 것입니다. ‘단박에 지해를 잊어버리는’ 선종은 규봉스님이 좋아하지 않고 반대하는 것이지만 그렇지만 규봉이 반대한다고 선을 아주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 보조스님의 입장입니다.

 

보조스님이 초년에는 선(禪)과 교(敎)를 혼동해서 돈오점수를 선종이라고 주장했지만 돌아가시기 반년 전 이「절요(節要)」를 낼 때에는 사상이 전환된 것이 확실합니다. 보조스님 자신이 돈오점수는 교가(敎家)의 지해종(知解宗)을 위한 것이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위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했으니만큼 참선을 한다는 사람이면 지해종(知解宗)을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선종정맥(禪宗正脈)을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사이 우리나라의 선방을 볼 것 같으면 내가 젊은 날 행각할 때나 늙은 지금이나, 참선한다는 사람들이 보조스님의 초년에 잘못된「수심결」만 보고 자꾸 돈오점수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꽉 찼습니다. 돈오점수를 순전히 선사상(禪思想)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보조스님을 다 모르는 사람입니다. 팔백년 후인 지금에 돈오점수가 선종사상(禪宗思想)이라고 주장한다면 보조스님이 살아계셔도 웃을 일입니다. 거듭하는 말입니다만 규봉스님은 평생동안 교(敎)와 선(禪)을 완전히 구별하지 못하고 돈오점수를 끝끝내 달마선종이라고 고집해서 중대한 큰 과오를 범하고 말았지만, 보조스님은 말년에 가서 돈오점수가 선(禪)이 아님을 밝혔으니 허물이 적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절요(節要)」에 있어서도 자가당착의 모순점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이 만법을 꿰뚫으니 뜻의 맛이 가이없다. 모든 교(敎)는 벌려 놓음이요, 선종은 간략함이다. 간략함이란 법에는 불변과 수연의 두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있으니, 두 가지 뜻이 나타나면 모든 경론의 뜻을 다 알 수 있고, 두 문이 열리면 일체 현성의 가는 길을 볼 것이니 달마의 깊은 뜻은 여기(돈오점수)에 있다.

 

분명히 보조스님 자신이 달마스님의 깊은 뜻이 돈오점수에 있다고 해놓고, 다시 그 뒤에서 ‘교외별전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敎外別傳者 不在此限)’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달마스님이 전한 것 외의 교외별전이 따로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달마가 두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돈오점수를 전한 달마가 있고, 교외별전을 전한 달마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사상으로 볼 때 달마가 두 사람 있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면 으레히 달마선종을 말하는 것이고, 달마(達磨)란 한 사람뿐이지 두 사람이 없으니 그러면 이 문제는 자기 모순입니다. 이런 모순이「절요」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수심결」과「결사문」에도 있어서 달마선종을 혼동시켜 놓은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수심결」에서 먼저 깨치고 뒤에 닦으니.....이것이 최상승선이며...달마문하에서 구르고 펴 서로 전한 것이다‘하고,「정혜결사문」에서는 ’지금 논한 바는...최상승선이니...조종문하에 있어서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홍주종은 돈오문에 비록 가깝기는 하나 적중하지 않음이요, 점수문에 있어서는 모두가 어긋난다. 무릇 마음 닦는 사람은 오직 하택스님을 믿고 따를 뿐이요 다른 종은 믿고 가지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앞에서도 인용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조스님은 앞의 말을 끌어놓고서 오직 돈오점수의 하택스님을 따라갈 것이지 마조스님이나 우두스님같은 분을 따라가서는 안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참 곤란한 말입니다. 마조스님은 조계정전(曹溪正傳)으로써 천하가 다 공인하는 사실인데 자기 입으로 하택은 지해종사라 하고 조계적자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우리가 누구를 따라가야 되겠느냐 하면 지해종인 하택과 규봉을 따라가야 된다 하니 이것도 모순이 안될래야 안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냉정히 비판적 입장에 서서 진실을 보아야 합니다.

 

 

(3)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보조스님의 사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6년 후에 수제자되는 진각(眞覺)스님이 간행한「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이라는 두 가지 책입니다. 보조스님이 돌어가신 뒤 유고 속에서 발견되어서 출판했는데 거기에 와서는 완전히 방향이 달라져 있습니다. 「간화결의론」에서는 ‘선이란 화두를 해서 깨친 증오(證悟)다’라고 철두철미하게 주장하여, 해오(解悟)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것은 돌아가시기 반년 전에「절요」에 그런 모순과 혼란이 있었는데 반년 뒤에 과연 명백하게 ‘증오(證悟)만이 선이고 해오(解悟)는 선이 아니다’고 하여 평생에 주장해온 사상의 대전환을 과연 할 수 있겠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보조스님이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돌아가신 뒤에 수제자인 진각스님이 지었다고 혹 추측해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책이 생전에 나오지 않았으며, 돌아가신 뒤에 곧 출판한 것도 아니고 6년 뒤에나 나왔으니 6년이란 세월을 왜 그냥 흘러 보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든가 저렇든가「간화결의론」이「절요」보다 그 사상이 한 걸음 나아간 것만은 사실이며, 또 그것이 보조스님의 친저이든지 아니든지간에 보조스님 돌아가신 뒤에 조계산 송광사 문하에서 ‘돈오점수는 교종이며 선종은 아니다’고 분명히 표시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진각스님이 스스로 발문도 짓고 여러 가지 설명을 붙여서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팔백여 년 후 오늘날 선방에서는 어째서 보조스님의 돈오점수사상이 판을 치고 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곤란합니다. 보조스님을 몰라도 너무들 모르고 있습니다.

 

보조스님은「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원돈신해(圓頓信解), 즉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사구(死口)라 하고, 경절문(徑截門) 즉 선종의 화두를 깨치는 증오문(證悟門)을 활구(活句)라 하고서 사구(死句)를 근본으로 하는 원돈신해 ․ 돈오점수의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활구(活句)를 근본으로 하는 증오문으로 들어가라고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원돈신해문은 말 길과 뜻 길이 있으며 듣고 알며 생각하는 것이어서 초심학자들도 믿고 받들어 가질 수 있다. 경절문은 비밀히 계합함을 스스로 증득하는 것이어서 말 길과 뜻 길이 없으며 듣고 알며 생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상근기의 큰 지혜가 아니면 어찌 밝게 얻을수 있으며 어찌 뚫을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보통의 배우는 무리가 의심하고 비방함은 이치가 자연히 그렇다.

 

돈오점수를 근본으로 삼는 원돈신해, 즉 해오라는 것은 말 길도 있고 뜻 길도 있고 듣고 알며 생각함도 있어서 누구든지 이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절문의 선종은 최후의 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이니, 거기에는 말 길도 없고 뜻 길도 없고 듣고 알며 생각함도 없어서 참으로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 아닐 것 같으면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 자꾸 의심을 하고 비방을 하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원돈의 이치가 비록 가장 원묘하나 모두 식정(識情)이 듣고 알며 생각하는 헤아림이므로 선문에서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여 경절의 깨쳐 들어가는 문에서는 하나하나 모두가 불법에서 지해 병을 구별한다.

 

원돈신해의 이치가 원묘해서 들어보면 그럴 듯 하지만 전체가 분별망상 속에서 하는 말이지 실지의 공부가 아니며 불법에 있어서 지해(知解)의 병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원돈사상은 불법에 있어 지해의 병이며 참된 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돈신해의 여실한 말과 가르침을 사구(死句)라 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지해의 장애만 낳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심학자로서는 경절문의 활구(活句)에 자세히 참구하기 어려우므로 법계 원융사상을 말하여 그것을 신해하게 하여 물러가지 않게 한다. 만약 상근기의 사람이 비밀히 전한 것을 감당하여 과굴을 벗어난 사람인댄 잠깐 경절문의 맛 없는 말을 듣자마자 지해의 병에 막히지 아니하고 곧 떨어지는 곳을 안다. 이는 한 번 들으면 천 가지를 깨쳐서 대총지를 얻은 사람이라고 한다.

 

원돈신해, 돈오점수는 죽은 말(死句)이다. 왜냐하면 지해만 늘어가서 근본적으로 해탈할 길이 없으니 이 길을 가지 마십시오. 초심학자들은 경절문의 산 말(活句)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화엄의 법계원융사상을 신해하여 물러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혹 죽은 말을 하기는 하지만 만약 여기에 집착하면 결국은 영원히 살아나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니, 실지로 살아남는 길, 활구, 경절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상근의 사람이 교외별전을 감당하여 지해사상을 다 벗어버리면 한번 깨칠 때 전체를 깨치고 한번 끊을 때 전체를 끊어서 돈오돈수의 구경각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부하는 사람이 경절문의 화두를 자꾸 참구할 것 같으면 즉 누구든지 활구(活句)를 의지해서 공부할 것 같으면 확철히 깨치고 대총지를 얻어서 구경을 완전히 성취하게 되는 것이니 이 길로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릇 참구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하고 사구를 참구하지 말아라. 활구 끝에서 깨치면 영원토록 잊지 않고, 사구 끝에 깨치면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하느니라.

 

공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교가적(敎家的)인 원돈신해(圓頓信解),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사구(死句)로는 들어가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화두(話頭)를 참구해야 합니다.

 

활구를 의지하여 공부를 하면 마침내 영원토록 잊지 아니하여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되지만, 사구를 의지하여 공부를 하면 마침내 자기의 번뇌망상도 없애지 못하여 자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맙니다. 이렇게 분명히「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는 보조스님이 활구와 사구로 나누어서 말씀했습니다.

 

홀연히 재미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화두 위에서 확철히 깨치면 일심의 법계가 통연히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심성이 갖춘 백천삼매와 무량묘의의 문을 구하지 않아도 원만히 얻는다. 종전 치우친 의리와 문해로써 얻은 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종 경절문의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여 증입하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화두 참선하여 깨친 경계는 해오(解悟) ․ 신해(信解)와는 전연 다른 것임을 말합니다. 그래서「간화결의론」에 있어서는 언제든지 증오(證悟)로써 근본을 삼아 말하였지 해오(解悟)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보조스님이 임종에 가서는 선(禪)과 교(敎)를 분명히 알아서 돈오점수(頓悟漸修)라는 것은 교가의 방편설이지 교외별전의 선종정맥사상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여 확철히 깨친 사람은 무장애법계를 몸소 증득한다.

 

여기에서 ‘증득한다(證)’함은 최후 구경각을 깨친 것을 말하며, 무장애법계(無障碍法界)나 법계일심(法界一心)은 같은 내용으로써 불지(佛地)를 말합니다.

 

홀연 확철히 깨치면 법계가 통연히 명백하여 자연히 원융하여 일체 덕을 갖춘다. 육조조사가 자성이 심신을 갖추고 사지를 밝혀서 성취하니 보고 듣는 인연을 떠나지 않고서 초연히 불지에 오른다는 것이 이것이다.

 

화두를 깨쳐서 자성을 밝힌 사람, 곧 견성(見性)한 사람은 삼신(三身) ․ 사지(四智)가 원만히 구족한 부처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니 이것이 증(證)한다는 말의 참 뜻입니다.

 

이로써 선문에서 생각을 떠나 서로 전한 것은 법계를 돈증하는 곳임을 알라.

 

이 말씀은「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에 있습니다.「원돈성불론」도 보조스님이 돌아가신 뒤 발견된다는 책으로서, 그 내용은 교가(敎家)를 위해서 해오(解悟)와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중심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외별전인 선종은 해오(解悟)가 아니고 증오(證悟)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으니, 선과 교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뜻을 얻고 말을 잊어버리면 도를 친하기 쉽다’고 하니 이것은 법계처를 돈증하는 곳을 말한다.

 

여기에서 인용한 것은 분양(汾陽)스님의 말씀입니다. ‘법계를 돈증한다’함은 삼신 ․ 사지가 원만구족한 구경각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선종(禪宗)에서 깨친다 함은 해오(解悟)가 아니고 구경각(究竟覺)이라는 것, 또 견성이란 초발심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고 구경법이라는 것이 완전히 표시되어 있습니다.

 

보조스님이 선종(禪宗)을 위해서 지은「간화결의론」에서 뿐만 아니라 교가(敎家)를 위해서 지은「원돈성불론」에 있어서도 선종(禪宗)이란 해오(解悟)가 아니고 증오(證悟)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간화결의론」에서는 선(禪)과 교(敎)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선문의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처음부터 법의 이치와 들어 이해하는 생각이 없이 바로 재미없는 화두로 드러내고 깨달을 뿐이다. 그러므로 말 길도 없고 뜻 길도 없고 심식으로 생각할 곳이 없고 또한 보고 듣고 알고 행하는 등 시간의 앞뒤가 없다가 홀연히 화두를 확철히 깨치면 일심법계가 통연히 두루 밝다. 그러므로 원교의 관행하는 이와 선문의 깨친 사람과 비교하면, 교내 ․ 교외가 근본적으로 같지 않고 시간의 느리고 빠름이 또 한 같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교외별전이 교승보다 훨씬 뛰어나니 천박한 식견의 사람이 감당할 바 아니다.

 

선문의 경절문으로 들어가면 법의 이치나 들어 알고 생각하는 것이 없으며, 말 길과 뜻 길이 끊어집니다. 원돈신해문으로 들어갈 것 같으면 말 길과 뜻 길이 있어서 사구(死句)에 떨어져 돈오점수가 되고 맙니다. ‘재미가 없는 화두’란 듣고 생각하는 것이 붙을래야 붙을 수 없고 사량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니 오직 화두만 참구할 뿐입니다. 거기에서는 견문이나 해행 등을 생각할 수 없고 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일체 말이 다 끊어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깨치면 교가와 전혀 틀립니다. 시간적으로 볼 때 교(敎)로 나아가면 삼아승지겁이라는 많은 시간이 걸려서 성불하지만, 선문의 경절문 활구로 들어가면 바로 깨쳐버립니다. 교의 원돈신해문으로 나갈 것 같으면 돈오해서 점수하니까 말 길이 있고 뜻 길이 있어 듣고 이해하는 것, 즉 지해(知解)가 근본이 되어서 삼아승지겁이라는 시간이 걸려 성불은 늦어지는 것입니다.

선(禪)과 교(敎)의 내용을 모를 때는 선교일치를 부르짖었지만 알고보니 선 ․ 교가 틀리므로 돌아가실 때에는「간화결의론」에서 바른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선문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돈교와 같지 않고 또 원교에 들어가는 것과는 교를 의지하고 떠남에 느리고 빠름이 전혀 다름을 알게 하겠다.

 

선종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돈교(頓敎)와 다르고 또 일승원교와도 근본으로 틀립니다.

 

선종의 교외별전인 경절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격식과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므로 교(敎)를 배우는 이는 믿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선종의 낮은 근기가 천박하게 아는 자도 망연하여 알지 못한다.

 

이것은 선(禪)과 교(敎)가 다른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선종의 참선하는 사람도 근기가 하열하고 머리가 밝지 못한 사람은 도로 비방하고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출세간 하려는 사람은 선문의 활구를 자세히 참구하여 속히 보리를 증득하면 다행하고 다행하다.

 

바로 깨치는 최상승의 길인 경절문의 활구(活句)로 들어가서 깨쳐야지 원돈신해인 사구(死句)로 들어가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화결의(看話決疑)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곤란한 것은 말세에는 사람들의 근기가 하열하므로 조사도리를 깨쳐서 공부를 성취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 말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보조스님의「수심결」에 그 당시에도 말세에는 조사도리를 깨친 사람이 없다고 했지만 본시 말세니 하는 것은 중생에게 방편으로 하는 말이지 법(法)에서는 해당이 안됩니다. 800년 전 보조스님이 당시 기화상(琪和尙)의 말을 인용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그것은 정법을 모르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중국과 비교해 보면 대혜스님 돌아가시기 5년 전인 1158년에 보조스님이 태어났는데 대혜스님을 전후한 100~200년 동안은 임제종 양기파의 전성시대로 많은 도인이 났습니다. 또 임제 정맥으로 봐서 화선사 ․ 중봉고불 등 보조스님 후 200년 뒤에도 확철대오한 대 도인이 무수히 났으며, 송 ․ 원 ․ 명 그리고 청나라 초까지 연계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보조스님 당시 기화상이 말세에는 확철히 깨쳐 종사노릇할 사람이 없다고 한 말은 빨간 거짓말입니다. 대혜스님 이후에도 송나라에는 일등 조사가 많았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800년 전 보조스님 당시 대 조사가 없다고 하면서 지금의 말세에 경이나 보고 염불이나 하지 참선하지 말자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입니다. 자성은 본시 고금도 없고 말세도 없어서 노력하면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여 오직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노력해야 달마경전을 깨치는가?

 

경산 대혜화상이 경의 게송을 인용하여 말했다. ‘보살이 이 부사의 경계에 머무니 이 가운데에서는 생각은 끝이 없느니라.’ 이 부사의한 곳에 들어가면 생각과 생각 아님이 모두 적멸하다고 하느니라. 그러나 적멸한 곳에 머물러서도 되지 않는다. 만약 적멸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곧 법계의 헤아림에 포섭되니, 교중에서 법진번뇌(法塵煩惱)라 하느니라.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버리고 각가지 수승한 것을 일시에 모두 없애버려야만 비로소 뜰 앞의 잣나무나 마삼근, 마른 똥막대기, 개에게 불성이 없음, 한 입에 서강의 물을 모두 들이킴, 동산이 물 위로 간다는 등의 것을 볼 수 있느니라. 홀연히 한마디 끝에서 뚫어 지나야만 비로소 그것을 법계에 한없이 회향한다고 하느니라. 여실하게 보고 여실하게 행하고 여실하게 사용하여 한 터럭 끝에서 보배왕 세계를 드러낼 수 있고 미진 가운데 앉아서 대 법륜을 돌려 갖가지 법을 성취하고 갖가지 법을 파괴함은 모두 나로 말미암음이다. 마치 장사가 팔을 펼침에 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며 사자가 나 다님에 동행을 찾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이것으로 추측하건대 화두를 자세히 참구하는 자는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버리고 갖가지 수승함도 모두 없애버리고 그 후에 뜰 앞의 잣나무 등 화두를 살펴봄이 좋으리라. 홀연히 한마디에 뚫어야만 비로소 그것을 법계에 한없이 회향한다고 말하느니라. 화두의 의심을 타파하여 한 소리를 내는 자는 장애없는 법계를 직접 증득함이니라.

 

보살의 부사의한 도리는 다함이 없어서 일념불생 전후제단(一念不生前後際斷)해서 대무심지(大無心地)에 들어가면 이것이 대적멸지입니다. 이것을 부사의라고 대혜스님이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적멸처에 머물러 있으면 죽어서 깨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오매가 일여하여 모든 것이 멸진되어서 대적멸지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서 언구를 의심치 않으면 깨어나지 못합니다.

 

만약 적멸처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실지 견성이 아니고 구경각이 아닙니다. 여기서 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지니 다시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원오스님도 대혜스님에게 대적멸처에 있어도 거기서 화두를 참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적멸처인 오매일여에서도 크게 화두를 참구해서 살아나야만 비로소 바로 깨친 사람입니다. 선문에서 화두 참구하는 사람은 법계의 헤아림을 없애버리고 일체를 모두 없애야 합니다. 오매일여한 대무심지라 해서 화두참구 안하면 외도입니다. 하물며 적멸처도 아닌 사량분별이 남아 있는 곳에서 보림한다, 목우자한다고 화두를 버리면 자기가 망하고 천하사람이 다 망합니다. 대적멸지, 오매일여에서도 화두참구해서 확철히 깨친 사람은 증(證)한 것이지 해오(解悟)가 아닙니다. 이것이 실지 공부하는 사람의 생명선입니다.

 

지금까지 약 100일 동안에 말한 것을 요약합시다.

 

중도(中道)는 선과 교를 통한 근본입장입니다. 선은 중도의 실제 체험 법문이고 교는 중도의 이론입니다. 이론은 실천을 하기 위한 것이지 실천을 떠난 이론은 안됩니다. 그래서 이론에 밝은 아난도 가섭에 쫓겨난 후 깨쳐서 결집에 참여하였습니다. 이것이 선이라는 별전(別傳)의 시발점입니다.

 

별전이 인도에서는 달마까지 28대로 하고 다시 중국으로 내려왔는데, 거기서 표방하는 것은 실천법문에서는 ‘견성성불’입니다.

 

이 견성성불을 견성하여 성불한다는 식으로 나누면 잘못입니다. ‘견성이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견성은 ’자성을 깨쳤다.‘ ’불성을 깨쳤다‘ ’진여본성을 깨쳤다‘라는 말인데 불성이니 진여니 하는 것은 중도를 말하며 쌍차쌍조(雙遮雙照)인 진여를 말하는데, 즉 중도를 깨친 것이 견성이라는 것입니다. 중도를 바로 깨치면 우리 심리 상태가 대무심지이며 무념무생한 이것이 제8아뢰야의 무기식을 확철히 깨어난 대원경지의 무심입니다. 대무심지에 들어가는데 오매일여라는 관문이 있습니다. 몽중에도 완전 일여하면 7지 보살이고 잠이 꽉 들어서 일여하면 오매일여, 멸진정 이상의 제8아뢰야 경지입니다.

 

조사스님 모두가 실지 오매일여 되어서 참으로 대무심지인 여기서 깨쳐 조사노릇을 하였지 누구든 오매일여, 몽중일여도 못된 데서 깨쳤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매일여 된 데서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8아뢰야 마계(魔界)입니다. 언구를 의심해서 제8아뢰야 오매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 깨끗한 유리그릇 속 보배를 비추는 것과 같이 참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춥니다. 무심경계가 되어도 깨친 경계가 아닙니다. 대무심지에서도, 오매일여한 경지에서 다시 깨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견성이다 선이다 할 수 있습니다.

 

선종 정맥사상은 육조 스님 때 하택(荷澤)이 지해로 나가니까 지해종사라 수기했습니다. 그 뒤 규봉이 공부하여 화엄 5조가 되었습니다. 규봉이 돈오점수 사상을 만들어서 번뇌망상 있는 그대로를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고 달마선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이 죽어서 햇빛을 못보았는데 보조스님을 만나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보조스님이 초년에는 잘 몰라서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을 달마선인 줄 알고 이에 의거해서 수심결을 짓고 결사문을 지었습니다. 그 후 사상이 크게 전환하여 간화결의에서는 대무심지가 되어도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크게 살아나야 하며, 이것이 선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규봉이 말하는 해오는 선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사구인 죽은 길로 들어가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지고 막대한 노력과 시간 손해가 납니다. 우리는 경절문인 활구로 들어가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해야 합니다.

 

 

출전 : 百日法門 下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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