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큰스님 말씀

수도자는 가난하여야(學道須學貧)

근와(槿瓦) 2014. 9. 17. 00:36

수도자는 가난하여야(學道須學貧)                               (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6.25 사변 이전에, 문경 봉암사에서 한국 불교의 새 갈길을 정립하시고 승려의 생활규범을 중국 총림의 청규에 따라야 한다고 천명하신 스님께서는 솔선수범하여 「一日不作 一日不食」의 수행을 실천하셨다.

그때 함께 하신 스님들이 오늘 조계종 큰스님들이시고, 조계종의 뿌리가 되었다는 일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6.25의 전란을 예견하시고 소장하고 계시던 불경을 미리 남쪽으로 옮기시고 고성 문수암에서 전란을 피하시었다.

그후 잠깐 창원 성주사에 주석하시다가 평소 바다를 좋아하시던 스님께서는 동영 안정사 뒤쪽, 멀리 남해가 바라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초가 세채를 지어「천제굴」이란 이름을 붙이고 주석하시었으니 이때가 6.25 전쟁이 막 끝난 시기였다.

“바다가 둘러싸고 산이 또 싸고, 그안에 돌로 싼 성속에 초가 세동...”어느 방문객이 말했듯이 돌을 주어 모아 둘러 쌓아 올린 담장이 세상을 떠난 조그마한 성채처럼 느껴졌으며, 초가집 세채는 격을 떠난 성자의 거처로서 적격이었다.

 

 

두칸밖에 안 된 식당채에는 당시 고승들이 모두 드나들었고 세칸밖에 되지 않는 불당방에는 스님을 찾아오는 신자님들의 예배처가 되었다.

두칸 스님방 중에 한칸은 경전을 모신 마루방이고, 한칸은 눕지 않고 지내신 스님께 꼭맞게 비좁은 방이었다.

8년 여의 생식생활로 건강을 걱정하는 시자들의 간곡한 간청을 받아들여 화식으로 바꾸었으므로 스님의 건강은 나빠있었으나 여전히 강인한 정신력으로 생식에 못지 않는 편식으로 일관하시었다.

사물을 아낄 줄 모른다고 야단을 맞은 시자가 도망을 해버리자, 며칠 동안 삶아 논 보리밥을 잡숫고 병을 얻어 고생하던중 찾아온 ㅅ스님의 취사로 겨우 건강을 되찾은 일들은 그 당시 스님의 생활을 말해주는 일화이었다.

생신날을 알고 부산· 마산 등지에서 찾아온 신자들을「승려는 생일이 따로 없어」하시고 천제굴 담장 안에 들어서지 못하게 하신 일들은 서른 해가 지난 오늘에도 그대로 고집하고 계시는 스님의 철칙 소신이시다.

부산에서나 마산 등지에서 찾아오는 신도들에게는 언제나 불전에「삼천번의 절」을 시켜 신심을 격려하시었으니 그때부터「삼천배」스님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어떤 신자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사경을 넘기면서 삼천배의 기도를 마치고는, 기적에 가까운 건강을 회복하였다 하여 소문이 난 일도 이때부터였다.

백번의 절도 채우지 못할 것 같은 허약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라도 스님의「삼천배」지시를 받고는 삼천번 절을 채우지 못하는 일이 없었으며, 스님께서도 잠을 주무시지 않으시고 예배 기도를 독려하시어 도중에 그치지 않도록 하시는 열성을 가지셨다. 절을 마친 신자는 몸과 마음에 환희를 느끼고, 크게 신심을 얻었으니 절을 하는 곳이라 하여 절이라고 부른다는 말씀도 이때 하신 말씀이시다.

 

 

신도님들의 공양물은 직접 취급하지 않으셨으며 가난한 사람을 도우는 것이 참으로 좋은 공양이라고 하시고 돈을 만지시지 아니 하셨으니 그후 오늘까지도 스님이 계시는 곳에는 희사함이나, 돈을 받는 준비물은 마련해 있지 않다. 신도님들에게는 삼보를 존경할 것을 가르치시었으며 스님께 삼배 예배하는 것도 그때 가르치신 것이다.

항상 보현행원의 십대원과 법공양의 실천을 강조하신 스님께서는 모든 생활 규범을 몸소 실천하시고 양말이나 누더기를 손수 기워 입었으니, 그때의 누더기가 지금도 남아 있어 낭비 풍조에 젖어 있는 요새 젊은이들의 잘못을 일깨워 주시기에 충분하다.

시자들에게「신도들의 시물을 받는 것을 화살을 받는 것처럼 어렵고 무섭게 생각(수시여전 受施如箭)하라고 하시고 스님께서는 염분이 없는 담식으로 조촐하게 식사를 드시었으니 수행하실 때 편식으로 상한 건강 때문이기도 하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불교정화 유시가 발표되어 불교정화 불사가 처음 시작될 무렵 서울에 가서 정화를 해야 한다고 권하는 0스님께,「불교정화는 밖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하는 것이며, 타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서울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산중에서 얻어지는 것이라」하시고 서울 가는 것을 사양하신 일은 오늘까지도 정화불사의 개념에 주초가 되어오고 있는 것이다.

비구측 대처측 대결로 불리워진 당시 불교정화 와중에 양측에서 똑같이 해인사 주지로 스님을 모시려는 사람이 왔으며, 두쪽의 간청을 모두 거절하시고 팔공산 파계사로 거처를 옮기시고 오로지 정진에만 몰두하시어, 정화가 시비로 잘못 인식되고 있던 때에 스님은 스님의 방법대로 정화불사를 하신 것이다.

그러나 초대 해인사 주지로 추대되었고, ㅈ스님께서 대리주지로 부임하신 일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일이었다.

 

출전 : 큰빛 큰지혜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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