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1515-303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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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모든 불법 연기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모든 불법은 모두가 보리(菩提)의 모양이 연(緣)이 되어 생기는 모양임을 고찰하고 모든 연기(緣起)는 모두가 다하여 없어지는 모양이라 함을 관찰하면서도 모든 중생들을 보며 상대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고요히 사라짐[寂滅]에 나아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니, 이것도 연기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연기의 선교를 닦고 익히는 것이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모든 법의 선교[一切法善巧]인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까닭에 모든 법에서 모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를 두루 포섭하나니,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등의 유위와 무위의 모든 법에 대하여 마땅히 선교를 닦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유위의 선교인가 하면, 오묘하고 착한 몸의 행[身行]과 오묘하고 착한 말의 행[語行]과 오묘하고 착한 뜻의 행[意行]이니, 이것을 유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무위의 선교라 하는가 하면, 곧 이와 같이 묘하고 착한 몸과 말과 뜻의 행을 마지막 무위의 보리에 회향하고 무위 보리의 묘한 관[妙觀]에 회향하며 또 살벌야[薩伐若]에 회향하는 것이니, 이것을 무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유위의 선교라 함은 곧 다섯 가지 도피안(到彼岸)을 쌓고 모으는 것이니라.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하면, 보시·지계·인욕·정진 및 선정의 바라밀다이니, 이것을 유위라 하느니라. 만일 반야바라밀다의 무위의 지혜를 말미암아서라면 곧 다섯 가지 도피안을 싫어하거나 헐뜯을 수가 없으며, 이와 같은 묘한 지혜는 또 도피안의 자량(資糧)인 착한 법을 쌓아 모으고 무루(無漏)의 최상의 보리를 믿고 이해하며 그리고 일체지지(一切智智)에 회향하는 것이니, 이것을 곧 무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유위의 선교라 함은 장애가 없는 광명으로써 모든 중생을 비추고 네 가지 거두어 주는 법[攝法]으로써 모든 중생을 거두어 주나니, 이것을 유위라 하느니라. 만일 모든 법에서 나가 없고 유정이 없고 취함도 없고 고집함도 없음을 관찰하며 네 가지 거두어 주는 법의 방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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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로써 무위의 평등한 깨달음[等覺]을 좋아하고 믿고 받으며 그리고 일체지지에 회향하면 이것을 무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유위의 선교라 함은 끊지 않고 나고 죽으면서 결박(結縛)이 상속되게 하고 또 영원히 끊고 나고 죽으며 번뇌가 상속하게 하며 보리를 맡아 지니며 결박이 상속하되 일부분의 결박은 다시는 현행(現行)하지 않나니, 이것을 유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만일 또 공하고 모양이 없고 소원이 없음을 닦아 익히고 모든 법의 바른 지혜와 현관(現觀)의 선교와 최상의 보리가 다른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으며 무위의 법에서 또다시 증득하려 하면 이것을 곧 무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유위의 선교라 함은 모든 보살이 비록 3계(界)를 행한다 하더라도 저 3계의 번뇌에 물들지 않나니, 이와 같은 것을 유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비록 3계에서 벗어나는 법을 두루 통달한다 하더라도 벗어나는 세계에 떨어지지 않나니, 이것을 곧 무위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모든 법의 선교[一切法善巧]를 바로 일체지지(一切智智)라 하지만, 만일 모든 보살이 일체지지에 원만하게 증득하여 들어가면 곧 어느 때나 지혜가 선교하나니, 곧 이것을 모든 법의 선교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모든 법의 선교를 닦고 익히는 것이니, 이와 같이 사리자야, 만일 보살장(菩薩藏)에 의지하여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보살마하살이라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하기 위하여 지혜에 의지하여 분별하고 교묘하게 통달하여 이와 같은 열 가지 선교를 닦고 익히는 것이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묘한 지혜[妙慧]라 하고 어떤 것이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到彼岸義]인가 하면, 사리자야, 말한 바 지혜란 모든 착한 법을 환히 잘 아는 것이니라. 이렇게 나타나 보이는 지혜[現見慧]는 모든 법을 따르면서 통달하기 때문이요, 진실하게 헤아리는 지혜[眞量慧]는 모든 법을 사실대로 통달하기 때문이며, 이 통달하는 지혜[通達慧]는 모든 견해의 갈림에 얽매이는 모든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이요, 이 소원을 여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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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離願慧]는 영원히 모든 욕구와 소원을 여의기 때문이니라.
이 편안하고 기쁜 지혜[安悅慧]는 영원히 모든 뜨거운 번뇌를 쉬게 하기 때문이요, 이 기뻐하는 지혜[歡喜智]는 반연하는 법의 기쁨과 즐거움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의지하여 나아가는 지혜[依趣智]는 모든 이치에서 지혜가 모두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요, 이 건립하는 지혜[建立慧]는 모든 각품(覺品)의 법을 건립하기 때문이며, 이 모양을 증득하는 지혜[證相慧]는 그 닦는 법[乘]에 따라 과위를 증득하기 때문이요, 이 모양을 환히 아는 지혜[了相慧]는 이 지혜의 성품을 환히 비추어 알기 때문이니라.
이 제도하는 지혜[濟度慧]는 모든 폭류(瀑流)를 구제하기 때문이요, 저 나아가 들어가는 지혜[趣入慧]는 바른 성품의 생멸이 없는 법에 나아가기 때문이며, 저 채찍질하듯 독려하는 지혜[策勵慧]는 모든 착한 법을 떨쳐 일으키기 때문이요, 이 깨끗한 지혜[淸淨慧]는 먼저의 수면(隨眠)과 번뇌의 흐림을 여의기 때문이며, 이 가장 뛰어난 지혜[最勝慧]는 모든 법의 정수리에 오르기 때문이요, 이 미묘한 지혜[微妙慧]는 스스로의 지혜로써 법을 따라 깨닫기 때문이니라.
이 행을 여의는 지혜[離行智]는 다시는 3계(界)의 법에 물듦이 없기 때문이요, 이 섭수하는 지혜[攝受慧]는 모든 선현이 섭수할 바이기 때문이며, 이 소원을 끊은 지혜[斷願智]는 모든 모양의 분별을 제거하여 없애기 때문이요, 이 방일함을 버리는 지혜는[捨逸慧] 모든 어리석음과 어두움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며, 이 방편의 지혜[方便慧]는 모든 유가사[瑜伽師)의 지위에 머무르는 것이 성취되기 때문이니라.
이 일으켜 나아가는 지혜[發趣慧]는 장차 온갖 거룩한 지혜의 길에 머무르기 때문이요, 이 광명을 비추는 지혜[照明慧]는 모든 무명의 폭류[無明瀑流]에 가려 어두운 거품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며, 이 광명을 베푸는 지혜[施明慧]는 모든 것을 열어 인도함이 마치 눈과 같기 때문이요, 이 샘이 없는 지혜[無漏慧]는 지혜의 눈이 삿되고 편벽된 길을 뛰어넘기 때문이며, 이 뛰어난 이치의 지혜[勝義慧]는 이와 같이 크고 거룩한 지혜를 환히 비추어 주기 때문이니라.
이 분별이 없는 지혜[無別慧]는 잘 조복하고 따르기 때문이요, 이 광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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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光明慧]는 모든 지혜의 문이기 때문이며, 저 그지없는 지혜[無盡慧]는 모든 것을 두루 따라다니면서 비추기 때문이요, 이 사라짐이 없는 지혜[無滅慧]는 항상 널리 보기 때문이며, 이 해탈도의 지혜[解脫道慧]는 영원히 취하고 잡는 모든 속박을 끊기 때문이요, 이 처소를 여의지 않는 지혜[不離處慧]는 모든 번뇌장(煩惱障)의 법과는 같이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지혜의 모양은 내가 지금 간략하게 설명하였지만, 보살마하살에게는 또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은 모든 중생이 지닌 모든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에게도 그만큼 많은 지혜의 업과 행이 있는 줄 알 것이며, 이와 같은 것은 나아가 모든 중생이 지닌 모든 알려고 하는 의욕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에게도 그만큼 많은 슬기롭게 관찰하는 지혜가 있는 줄 알 것이니라.
이와 같은 것은 모든 중생이 지닌 모든 번뇌의 문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에게도 그만큼 많은 광대한 지혜의 문이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요, 이와 같은 것은 나아가 모든 성문(聲聞)과 독각(獨覺)과 그리고 정등각(正等覺)께서 지닌 두루한 지혜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에게도 그만큼 많은 지혜로 행해야 할 곳이 있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은 모든 지혜를 모든 보살마하살이 모두 부지런히 힘써 닦고 배우나니, 이것을 보살의 묘한 지혜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到彼岸義]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이와 같은 것은 알아야 할 모든 묘하고 착한 법에 이르기까지 저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것은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인 줄 알아야 할지니라.
또 사리자야,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은 모든 지혜에 대한 글 구절은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요, 또 모든 보살이 수행하는 차별되고 원만한 이치는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이와 같은 일체지지(一切智智)의 원만한 이치는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모든 유위(有爲)·무위(無爲)의 법에서 집착함이 없는 이치는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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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라.
또 한량없이 나고 죽는 큰 허물을 잘 깨달아 아는 이치는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모든 법을 깨치지 못한 이에게 잘 깨쳐서 알리는 이치는 모두가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지없는 보배의 광을 잘 열어 보이는 이치는 바로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장애가 없는 해탈의 원만한 이치는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지니라.
또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의 평등한 이치는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가장 탁월하게 결택(決擇)한 선교의 이치는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모든 중생 세계를 두루 다니는 이치는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요,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원만한 이치는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지니라.
또 물러나지 않는 지위[不退轉地]의 마침내 원만한 이치가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모든 불국토를 깨끗하게 닦고 다스리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며, 모든 중생을 성숙시키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고, 도량에 나아가 보리좌(菩提座)에 앉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며, 마침내 모든 악마의 군사를 꺾어 조복시키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고, 모든 불법이 모두 원만해지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며, 보살장의 차별된 법문에 바르게 머무르는 이치를 곧 저 언덕에 이르는 이치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이와 같은 큰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바르게 닦아 배우고 나면 나는 '이들이야말로 모든 바라밀다에서 구경(究竟)을 얻었다'고 말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대승(大乘)에 머무르는 모든 선남자와 선여인이면 모두가 이 큰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은근하게 청구하여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이치를 통달하여 널리 다른 이들에게 연설하면서 분별하고 드러내 보이리니, 왜냐 하면 사리자야, 만일 어떤 이가 이 보살장의 경전을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분별하고 해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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