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로(旅路)의 교회(敎誨) 92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다시 유행을 거듭하여 동남쪽으로 향하셨는데, 길을 걸으면서 제자들을 타이르셨다.
“제자들이여, 일법(一法)을 버려라. 그 법을 버린다면 다시 미(迷)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불환과(不還果)」라는 것을 증명하리라. 일법이란 탐욕을 말하는 것, 또 진에와 우치이다. 은폐하는 마음을 말한 것이다. 또 자만심을 말한 것이다.
제자들이여, 자만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에 그것을 싫다 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면 고뇌가 다하는 일은 없다. 탐욕, 진에, 우치의 경우도 모두 마찬가지다. 빠짐없이 알고 깨달아, 마음이 그것을 싫어하고 버려야만 고뇌가 다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나는 중생들이 무명(無明)에 뒤덮일 만큼 오랫동안 윤회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이 두 가지에 계박되어 중생은 길이 윤회를 계속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더할데 없는 안온을 바라고 그곳에 이르고자 애쓰고 있는 자에게 있어, 이것을 내부에서 말하면 바른 사유(思惟)만큼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바른 사유는 저절로 불선을 버리고 선을 닦는 일이다. 이것을 외부에서 말하면 착한 벗만큼 많은 도움이 되는것을 보지 못했다. 착한 벗과 친하면 저절로 불선을 버리고 선을 닦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하나의 문제가 일어나 많은 중생들의 불리, 불행, 고뇌가 되는 법이다. 하나의 문제란 승가의 화합을 깨는 일이다. 승가의 화합이 깨어져 서로 다투고 헐뜯고 담을 쌓고 서로 이간하여 그 때문에 믿음 없는 자는 믿음 없는 채로 머무르고 믿음 있는 자의 어떤 자도 그것을 잃기에 이르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또 하나의 문제가 일어나 많은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문제란 승가의 화합이다. 승가가 화합을 하면 서로 다투지 않고 담을 쌓지 않고 이간하지 않고 그 때문에 믿음 없는 자는 믿음을 얻고 믿음 있는 자는 더욱더 그것을 증장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나는 어떤 사람의 더럽혀진 마음을 마음으로써 꿰똟어보고, 이 사람이 이때 목숨이 끝나 마치 짐을 내려놓듯이 분명히 지옥에 떨어질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이 더럽혀져 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중생들은 그 더럽혀진 마음 때문에 목숨이 끝나 괴로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나는 어떤 사람이 믿고 즐기는 마음을 마음으로써 꿰뚫어 보고, 이 사람이 이때 목숨이 끝나 마치 짐을 내려놓듯이 분명히 천계에 태어날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마음에 믿는 마음이 있고 기쁨으로 넘쳐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믿고 즐기는 마음 때문에 목숨이 끝나고 천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일법을 닦고 자주 이것을 되풀이 하면 현재와 미래의 두 가지 이익을 얻으리라. 일법이란 선법에 있어서 방일하지 않은 일이다.
제자들이여, 사람이 만일 내가 알고 있듯 보시의 결과를 알고 있다면, 간탐(慳貪)의 더러움에 마음을 뺏기는 일은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조금 남은 음식일지라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먹는다는 일은 없으리라. 제자들이여, 세간의 여하한 공덕의 업도 자비의 마음에 비한다면 그 16분의 1의 가치도 없다. 자비의 마음이 그것을 초월하여 빛나는 것은, 비유컨대 별빛의 전부를 합치더라도 달빛의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달빛이 그것보다 훨씬 빛나는 것과 같다.
바른 생각과 무량한 자비를 닦는 사람은 번뇌의 계박을 풀고 망집의 세간을 뛰어넘으리.
하나인 목숨에 노여움이란 없고 자비로 향함이 선한 일이 아니랴. 모두 살고자 하고 사는 자에게 가엾음의 마음을 갖는 것이야말로 가이없는 공덕이로세.
중생이 떼지어 사는 지상을 쳐 빼앗고 다섯 가지의 제물을 바치면서 돌고 도는 성왕의 공덕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 선의 16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죽이지 않고 죽게 하지 않고 해치지 않고 해치게 하지 않고 살려고 하고 산 자에게 자비심이 있으면, 그 사람은 여하한 분함도 없는 것임을.
제자들이여, 두 개의 법을 갖출 때는 이 세간에 있어 괴로움과 고와 번뇌 때문에 서로 괴로워하고 다음 세상에서는 악도를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그것은 오관의 문을 지키지 않는 일과 먹는데 그 분량을 모르는 일과 같다. 또 두 개의 법을 갖출 때는 이 세간에 있어 괴로움과 고뇌와 번뇌 없이 즐겁게 날을 보내고 다음 세상에 있어 선도(善道)를 기다리게 할 수가 있다. 그것은 오관의 문을 지키는 일과 먹는데 그 분량을 아는 일이다.
눈, 귀, 코, 혀, 몸과 뜻. 이것들의 문을 지키지 않고, 먹는데 분량을 모르고서 제어하는 일이 없다면, 몸의 괴로움과 마음의 괴로움의 두 가지를 얻어 심신은 불태워지며, 낮이고 밤이고 함께 괴로워하리라. 이것들의 문을 잘 지키고 먹는데 분량을 알고 제어하면 몸도 마음도 평안하여 밤이고 낮이고 함께 즐거우리라.
제자들이여, 나에게 두 가지의 괴로움이 있다. 그것은 중생들이 착한 일을 하지 않고 두려움 있는 사람을 지키려 하지 않는 일과, 악한 일을 하여 잔혹한 죄를 범하는 일이다. 또 나에게 두 가지 기쁨이 있다. 그것은 중생들이 착한 일을 하며 두려움이 있는 자의 수호가 되는 일과 잔혹한 죄를 범하지 않는 일이다.
제자들이여, 두 가지의 법을 갖추고 중생들은 마치 짐을 밑에 내려놓듯 어김없이 지옥에 든다. 그것은 악한 계와 악한 견해이다. 또 두 개의 법을 갖추고 중생들은 마치 짐을 밑에 내려놓듯 어김없이 천계에 태어난다. 그것은 착한 도와 착한 견해이다.
제자들이여, 열성이 없고 수치를 모른다면 정각을 얻고 열반에 들고 더없는 안존에 이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제자들이여, 청정한 행에 사는 것은 중생들을 속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헛된 말을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존경과 명예와 이득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자기를 제어하고 모든 악을 버리고 그리하여 완전히 알기 위해서이다.
제자들이여, 두 개의 법을 갖추고 이 세상에 있어 많은 복과 즐거움을 얻어, 바르게 번뇌를 멸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포(驚怖)를 세워야 할 곳에 경포를 세우고 놀라움을 세움에 있어 바르게 정진하는 일이다.
착실히 정진하며 사려가 깊은 사람은 지혜에 의해 관하고 지관(止觀)을 거두어 괴로움의 종말에 이른다.
제자들이여, 부처에게는 자주 두 가지의 생각이 일어난다. 안온의 생각과 원리의 생각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자주 일어난다. ‘나는 행주좌와에 동물이든지, 초목이든지 해치는 일을 하지 않으리.’또 부처는 원리를 즐기고 기뻐하는 분이지만, 이 부처에게 이와 같은 생각이 때때로 일어난다. ‘좋지 않은 것은 모조리 버렸다.’그러므로 너희들도 또한 해 없음을 즐기고 기꺼이 살아가라. 또한 원리를 즐기고 기꺼이 살아가는 것이 좋다.
제자들이여, 깨끗한 지혜가 결여된 자는 재난이다. 이 세간에서는 뇌(惱)와 번거로움으로 괴로워하고 미래에는 악도(惡道)가 기다린다. 깨끗한 지혜를 갖춘 자는 복이 되어 이 세간에서는 안락, 미래에는 선도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두 가지의 열반계가 있다. 유여의 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 열반(無餘依涅槃)이다. 유여의 열반이란 번뇌를 멸하고 청정한 행을 이룩하여,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서 무거운 짐을 벗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여 후생(後生)을 초치하는 번뇌를 남김없이 멸하되 올바른 지혜에 의해 해탈한 성자를 말하는 것으로서, 오관(五官)이 아직 남아 무너지지 않고 사랑해야 할 것과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함께 향유하여 고락을 맛본다. 이것이 유여의 열반이다. 무여의 열반이란 그 성자가 된 자가 모든 감각을 받아 맛보지 않고, 모든 번뇌의 열을 받지 않고 청량(淸凉)해져야 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한거를 즐기고 한거를 기뻐하고 내심(內心)을 가라앉히고자 힘쓰고 정려(靜慮)를 저해하지 말고 관찰을 밝게 하고 빈집에 머물고자 힘쓰라. 제자들이여, 계와 정(定)과 혜(慧)인 삼학(三學)의 이득을 갖되 뛰어난 지혜를 갖추고 해탈의 요제(要諦)에 의해 착한 마음의 통치하에 머물도록 하라.
제자들이여, 방심 없이 한마음으로 조용한 마음, 상쾌한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서 쉴새없이 선법(善法)을 관하여 머물도록 하라. 이와 같이 행을 닦는다면 이승에 있어서 성자의 각을 얻거나 그렇지 않으면 재차 망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득도(不還果)에 이르거나, 두 가지 중의 한 과(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그 악함을 버리지 않고서 지옥에 떨어지는 두 가지의 예가 있다. 청정한 행의 맹세를 세웠으면서도 더러운 행을 하는 사람과 원만히 청정한 행을 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사람이다.
제자들이여, 치우친 견해에 사로잡힌 중생들은, 혹은 존재에 집착하고 혹은 존재를 혐오한다. 그러나 눈 있는 자는 단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어떻게 하여 존재에 집착하는 것일까. 어떤 중생들은 존재를 즐기며 존재를 기뻐하고 존재를 좋아하되 존재가 멸하는 법이라고 듣더라도 마음이 그것에 향하지 않고 기울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다. 또 어떻게 되어 존재를 싫어하는 것일까. 어떤 중생들은 존재를 싫어하며 존재를 꺼려하고 존재를 싫증내되 비존재를 기뻐하는 것이다. 또한 어떻게 되어 눈 있는 사람은 보는 것일까. 존재를 존재로써 보고 그 존재를 염려하고 탐욕을 여의고 그 전멸을 기해 착수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세상에는 세 가지의 감각이 있다. 고의 감각과 낙의 감각과 불고 불락의 감각이다. 낙의 감각은 고(苦)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고의 감각은 독화살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불고 불락의 감각은 무상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보고선 옳게 보고 갈애를 끊고 계박 풀고 올바른 뜻을 깨우침에 의해 괴로움의 종말을 이루는 성자로 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갈애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욕애(慾愛)와 유애(有愛)와 비유애(非有愛)이다.
사랑의 멍애에 계박되어 유(有)와 비유(非有)를 기뻐하는 중생은 마(魔)에 사로잡혀 평안함이 없어라. 늙음과 죽음과 윤회의 길이야말로 가없도다. 애욕을 버리고 마음의 더러움을 다 없애야만 그 피안(彼岸)에 이를지니.
제자들이여, 세 가지의 법을 갖출 때에 악마의 나라를 벗어나서 태양처럼 빛나는 것이다. 세 가지의 법이란 성자의 계(戒)와 정(定)과 혜(慧)이다.
제자들이여, 세 가지 성자의 법이 있다. 몸과 뜻과 말의 조용함이다. 제자들이여, 누구에게나 탐욕과 진에와 우치를 버리지 않는다면 악마의 덫에 걸리며 악마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이 탐, 진, 치를 버릴 때에 악마의 나라를 떠나게 된다.
제자들이여, 이 세 가지를 버리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직도 바다 속에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큰 물결, 작은 물결이 솟구치고 소용돌이치고 상어나 야차의 두려움이 있다. 세 가지를 버리면 이 바다를 벗어나 이상(理想)의 피안에 이르고 깨끗한 뭍에 서는 일이라고 일컫는다.
제자들이여, 수행하는 사이에 퇴전하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시비를 좋아하고 잡담을 즐기며 잠을 탐하는 일이다. 제자들이여, 명예를 이룰 것을 바라고 부의 증장을 바라며 내세에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인정이다.
이 세 가지의 즐거움을 바란다면 좋은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들이여, 사람은 이 명예를 깨고 불명예에 패하고, 사후에는 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훼예(毁譽)밖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들이여, 이 몸의 부정을 관하라.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데 바른 염을 하면, 이 몸이 정갈하다고 하는 그릇된 생각을 일으키는 탐욕은 사라진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데 정념을 지키면 외물(外物)에 사로잡히는 장애가 없어진다. 일체의 사물에 관하여 무상을 관하면 무명(無明)은 멸하여 명(明)이 된다.
제자들이여, 세 가지의 불이 있다. 탐욕의 불과 진에의 불과 우치의 불이다. 탐욕의 불은 욕심에 빠지고 마음이 마비된 중생을 불사르고, 진에의 불은 마음이 노하여 생물을 해치고 사람을 불사르고, 우치의 불은 마음이 미혹하여 성법(聖法)을 모르는 자를 불사른다. 전혀 지혜의 빛이 없고 자기만 아낄 줄 아는 중생은 이 세 가지의 불에 불태워진다. 제자들이여, 부정관(不淨觀)을 닦고 탐욕의 불을 끄고 자비의 마음으로써 진에의 불을 끄는 것이 좋으리라. 깊이 염하고 주야로 면려하는 자는 이들 세 가지의 불을 끄고 괴로움의 종말에 이르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내부의 때, 내부의 적, 내부의 원수, 이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탐욕과 진에와 우치이다.
제자들이여, 바리때를 손에 들고 집집마다 음식을 비는 걸식은 가장 비천한 생활 방법이다. 이 비천한 생활 방법에, 재가자의 아들이 자기의 의사로써 왔다고 하자. 왕비에게 이끌려 온 것도 아니요, 도둑에게 위협되어 온 것도 아니요, 빛 때문에, 또는 두려움 때문에 온 것도 아니요, 생활 때문에 할 수 없이 온 것도 아니다. 단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삶과 늙음과 죽음과 수심, 슬픔, 괴로움, 고뇌, 번민으로 뒤덮여서 ‘이곳이야말로 괴로움, 번뇌의 종말을 이루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서 온 자라고 하자.
제자들이여, 재가자의 아들이 이와 같이 출가했는데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마음은 항상 노여워하고 생각은 더럽혀지고 관능을 다스리는 일이 없이, 마음은 흩어지고 어지럽혀져 있다면, 이 사람은 재가자의 향락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끝내 출가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는 자이다.
제자들이여, 여기에 대단찮은 것으로 얻기 쉽고 얻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 네 가지의 물건이 있다. 네 가지의 물건이란 옷으로는 분소의(糞掃衣), 음식으로는 걸식, 거처로는 나무 밑, 약으로는 부뇨약(腐尿藥)이다. 불제자가 이 보잘 것 없는 것을 감수한다면, 나는 그를 불제자의 일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나는 알고 또는 봄으로써 번뇌를 멸한다고 하지만,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보면 번뇌를 멸하는 것일까. 제자들이여, 이것은 고(苦)이다.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을 봐야 번뇌는 멸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인(因)이라고 하는 그 인을 알고 그 인을 보아야 번뇌는 멸한다. 이것을 괴로움의 멸이라고 하며 그 멸을 알고 그 멸을 보아야 번뇌는 멸한다. 이것을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임을, 그 도를 알고 그 도를 봐야 번뇌가 멸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어떤 출가자라도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멸이다. 이것을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라고 여실히 알지 못하면 참다운 출가자라고 할 수 없다. 이 사성제(四聖諦)를 여실히 알아야 비로소 참된 출가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너희들에게 옷과 음식과 거처와 약을 공양하는 재가자들은 너희들에게 있어 크나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다. 너희들도 또 시종 아름답고 청정한 법을 설하여 그들에게 도움을 준다. 출가자와 재가자는 이와 같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와 번뇌의 포박을 풀고 얽매임을 뛰어넘어 괴로움의 끝을 맺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계를 갖추고 계율에 의해 그 몸을 제어하며 머물도록 하라. 바른 행을 하고 작은 죄도 두렵게 보고 배우되 게을리 하지 않도록 힘써라. 서 있을 때도 탐욕을 버리고 진에를 버리고 게으름과 졸음을 물리치고 마음의 도거와 뉘우침을 버리고 의심을 여의고 정진하되, 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생각을 바르게 고요히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라. 앉아 있을 때도 머물러 있을 때도 누워 있을 때도 그와 같이 하라. 제자들이여, 행주좌와가 이와 같다면 마음이 하나로서 부끄러움을 알고 끊임없이 애쓰는 정성있는 자라고 일컫는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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