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교단의 불화(不和)와 화합(和合) 91

근와(槿瓦) 2014. 9. 26. 00:29

교단의 불화(不和)와 화합(和合) 91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다음에 남으로 내려가 항하를 건너 완사 나라를 유행하셨고, 교상미의 구사다원에 잠시 머무르셨다.

그때 어떤 제자는 사소한 죄를 범하였는데, 처음 동안은 스스로 죄를 범했다 생각하고 다른 제자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얼마 후 반대로 스스로는 죄를 범하고 있지 않다 생각하고 다른 제자들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바뀌었다. 제자들은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죄를 범하고 있다. 그 죄를 인정하는 게 좋다.”

“나는 죄를 범하고 있지 않다.”

하며 서로 물러서지 않으므로, 제자들은 승가의 규칙에 의해 승복하지 않는 자에게 가하는 빈척(擯斥)의 벌에 처했다.

그렇건만 그는 배움도 깊고 법에도 밝고 율에도 자세하고 현명하며 도를 닦는 뜻이 있는 자였기 때문에, 그 승가의 규칙에 따르지 않고서 동료에게 고했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나에게 가해진 빈척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원컨대 법과 율에 의해 나의 편이 되어 주기 바란다.”

그리하여 다른 고장에 흩어져 있는 벗들에게도 사람을 보내어 마찬가지로 한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으며 동의를 얻었다.

이리하여 그를 빈척한 제자들과 한편이 된 제자들과는 이 일로 말미암아 다투기 시작했고 차츰 틈이 벌어져 서로 맞서게 되었다. 어떤 제자가 이 일을 세존께 말씀드리자, 세존은 ‘제자의 화합이 깨어졌다’고 한탄하시면서 한쪽의 빈척한 제자들에게 가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그대들이 우리들의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제자를 빈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제자들이여, 여기 어떤 제자가 죄를 범하고 그 제자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제자들은 죄라고 보고 있다. 이 경우 그 제자가 배움도 깊고 법도 밝고 율에도 자세하고 현명하고 또 도를 닦는 뜻이 있는 자로서, 만일 그 제자를 빈척하여 모든 소임을 함께 하지 않는다는 그 일 때문에 승가에 불화가 생기고 다툼이 생긴다고 여겨질 때에는, 승가의 화합을 중하게 여겨 그 비구를 빈척해서는 안 된다.”

 

 

세존은 다음에 그 제자 편을 든 제자들에게 가서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그대들은 범죄하고 있으면서 나에게는 죄가 없다, 잘못을 고치는 일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 어떤 제자가 죄를 범했다 하자. 그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다른 제자들은 죄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경우, 만일 그 제자가 상대편인 제자를 배움도 깊고 법도 밝고 계율에도 자세하고 현명하며 도를 닦는데 뜻이 있는 자로서 자기의 일로 욕심이나 노여움이나 어리석음이나 두려움을 일으키는 일은 없다 생각하고, 자기 죄를 인정치 않기 때문에 상대편으로 하여금 자기를 빈척의 처분에 처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으로 몰아 그 때문에 승가에 불화가 생기고 다툼이 생긴다고 보일 때에는, 승가의 화합을 중하게 여겨 다른 자의 신심을 위해서 그 죄를 시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존은 이와 같이 쌍방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타이르신 뒤 거처로 돌아가셨다.

 

 

그러나 세존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두 파로 나뉘어진 제자들은 따로따로 포살(布薩)을 베풀어 승가의 작법을 진행했고 쟁론이 심해져 갔으며 차츰 그들의 몸, 입, 뜻의 삼업(三業)에 불제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것이 개재하게 되었다. 세존은 또다시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승가가 화합하지 않을 경우에는 더욱더 각자의 행동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법과는 전혀 달리 친절하지 않은 일이 행해지고 있을 때에는 본분에 어울리지 않은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고 자기 자리에 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법을 따라 친절한 일이 행해지고 있을 때에는 자리에 함께 앉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들이여, 다투는 일을 중지하라. 불화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

어떤 제자가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세존께서는 선정에 드시어 계십시오. 이 다툼이나 불화는 저희들이 책임을 지고 해결할 것입니다.”

세존은 다시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다투는 것을 그만 둬라. 불화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

그 제자는 다시 세존을 향하여 같은 말을 올리고 세존의 분부를 거역했다.

 

 

그때 세존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를,

“제자들이여, 옛날 베나레스에 범달다(梵達多)라는 가시국(迦尸國)의 왕이 있었다. 부강하여 강한 병사와 많은 수레를 갖추고, 수많은 나라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때 교사라국에 장재(長災)왕이 있었지만, 가난하여 병정도 적고 나라도 작아 결국은 범달다왕의 적일 수는 없었다. 범달다가 사군(四軍)을 정비하여 그를 치고자 군려(軍旅)에 나섰음을 듣고 생각하기를 ‘우리 나라는 작고 방비도 없어, 범달다를 맞아 일전을 벌이는 일조차 어렵기 때문에 차라리 성을 나와 도망하는 편이 좋으리라’고 했다. 그리하여 싸우지 않고 나라를 범달다에게 내어주고 왕비를 데리고 은밀히 베나레스 근처로 달아나 유행자를 가장하고 어느 도공(陶工)의 집에 숨어 있었다. 얼마쯤 있자 왕비가 잉태했는데, 임신 때에 생기기 쉬운 이상한 소원을 이룩하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것은 해가 떠오를 때, 보병, 기병, 병거, 코끼리 등 4종의 군을 단단한 평지로 된 연병장에 늘어 세우고 그들의 검을 씻은 물을 마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왕비여, 지금 우리들은 가엾은 패잔병이 아닌가. 어떻게 그와 같은 짓을 할 수 있으랴.’‘대왕이시여,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차라리 저에게 죽음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고 했다.

장재왕의 친구로 범달다 왕가의 고문이 되어 있는 바라문이 있었다. 장재왕은 왕비의 소원을 막을 수가 없어, 그 바라문 집에 가서 이 일을 이야기하고 의논을 했다. 바라문이 한번 왕비와 만나고 싶다고 청했으므로, 장재왕은 왕비를 데리고서 다시 바라문의 집에 이르렀다. 바라문은 왕비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며 세 번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오오, 참된 교사라의 임금님은 모태 속에 드셨네’라고 했다. 그리하여 말하기를 ‘왕비시여, 실망하지 마시오. 당신의 소원은 이룩되리라’라고.

왕의 친구인 바라문은 즉각 범달다왕을 뵙고 ‘대왕이시여,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습니다. 내일 해돋음과 함께 4군을 연병장에 늘어 세우시고 그 검을 씻어야 합니다’고 했다. 왕은 즉시 분부하여 바라문이 말한 대로 명했다.

이리하여 왕비는 그 소원을 이룩하고 달이 차서 왕자를 낳았으며 장수(長壽)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왕자가 철들 무렵, 장재왕은 생각했다. ‘범달다는 우리들이 불리하기를 바라고 있다. 만일 우리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들키는 일이 있다면, 셋은 다 살해되고 말리라. 장수를 밖에서 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기들 부부는 성 안에서 살고 장수를 성 밖에 내보내어 공부를 시켰다.

그때 일찍이 교사라의 궁전에서 일하고 있던 이발사가 범달다의 궁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옛 주인인 장재왕 부부가 유행자의 모습으로 베나레스 근처의 고을에 살고 있음을 알고, 이것을 왕에게 고발했다. 장재왕 부부는 곧 붙잡혀서 팔을 뒤로 결박 당하고 네거리에서 끌려다닌 끝에 형장으로 끌려갔다.

 

 

마침 그때 장수 왕자는 가엾은 부모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서 옆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장수여, 길게 보아서는 안 된다. 짧게 보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원한은 원한에 의해 진정되지 않고 원한은 원한 아닌 것에 의해 진정되는 것이므로’하는 목소리가 그 걸음을 멈추게 했다. 사람들은 장수라 불리는 사람을 모르기 때문에 이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으므로, 가엾은 장재왕은 미쳐 버려서 까닭 모를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생각했다. 장재왕은 다시 말했다. ‘나는 머리가 돌아 버린 게 아니다. 나의 하는 말은 헛소리가 아니다. 마음 있는 자는 이 의미를 깨닫게 되리라. 장수야, 길게 보아서는 안 된다. 짧게 보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원한은 원한에 의해 진정되지 않고 원한 아님에 의해 진정되는 것이므로’라고 세 번이나 이 말을 되풀이했다.

 

 

장수가 손을 쓸 겨를도 없는 새에 부모는 형장에 끌려가 네 토막으로 잘린채 버려졌다. 일대(一隊)의 병사가 그 뒤의 감시로 잔류했다. 장수는 고을에 가서 술을 사 가지고 감시병에게 주어 곯아 떨어지게 하고서, 그 동안에 나무 더미를 만들어 부모의 시체를 화장하고 손을 모아 절하며 그나마의 효를 다했다. 가시국의 왕 범달다는 이때 왕궁의 높은 다락에 올라 이 불을 보고 ‘이것은 은밀히 교사라 왕국의 인연 있는 자가 하는 짓이련만 아무도 나에게 알려 주는 자가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불쾌감과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장수 왕자는 숲속에 들어가 음식을 끊고 며칠이고 며칠이고 울며 날을 보냈으며 마음이 개이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어느 날, 겨우 마음을 수습하여 숲속을 나와 궁중에 드나드는 코끼리 부리는 사람에게 가서 제자가 되기를 청하니 코끼리 사육사는 기꺼이 승낙했다.

코끼리 우리에서 그날 밤을 밝힌 장수는 새벽에 일어나 피리를 불며 노래를 불렀다. 우연히도 그 아름다운 노래 소리와 피리 소리가 역시 새벽녘에 선선한 바람을 쐬는 왕의 마음을 움직였고, 왕은 그 노래 소리의 임자가 코끼리 사육사의 견습생이라는 것을 듣고서 불러들여 측근에 있게 했다. 장수는 왕의 명령을 삼가 받들고 특히 그 마음에 들도록 애썼으므로, 왕은 기뻐하며 믿고서 등용했고 높은 지위에 앉혔다.

 

 

어느 날, 왕은 장수를 데리고 사냥을 나갔는데, 장수는 왕의 수레를 조종하여 일부러 군대와 멀리 떨어지도록 하고, 왕을 수행하여 홀로 들로 나갔다. 왕은 말했다. ‘젊은이여, 수레를 멈춰라. 나는 피로하여 잠시 눕고자 한다.’장수가 수레를 멈추고 땅에 앉자 왕은 그 무릎을 베개 삼아 잠시 졸며 꿈을 꾸었다.

그때 장수가 생각하기를 ‘이 가시의 왕은 우리 부모의 원수이다. 이 사람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고 목숨을 빼앗기셨다. 지금이야말로 그 원수를 갚을 때이다’고 기뻐 날뛰며 칼집을 들어 검을 뽑았다. 그때 뜻밖에도 가슴에 떠오른 것은 아버지의 임종할 때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이 말을 생각하면서 검을 칼집에 꽂았다. 이리하여 장수는 두 번 세 번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이다.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검을 뽑았지만 그때마다 아버지의 유언에 눌려 검을 칼집에 꽂았다.

조금 있으려니까 범달다왕은 섬뜩 눈을 뜨고 겁에 질린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젊은이여, 지금 내가 잠자고 있을 때에 교사라 왕국의 왕자인 장수가 검을 뽑아 나에게 달려들었으므로 놀라서 일어났던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자 장수는 왼손으로 왕의 머리를 억누르고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대왕이시여, 내가 그 교사라의 장재 아들, 장수이다. 그대는 나의 나라에 재난을 가져왔고 나의 부모를 죽였다. 지금이야말로 다시 없는 기회이다. 나의 원한을 풀고 말리라.’ 왕은 장수의 발에 머리를 대고서 말하기를 ‘사랑하는 장수여, 부디 생명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장수는 아버지의 유언을 말하고 오히려 왕에게 용서를 빌었다. 왕은 한편 놀라고 기뻐하면서 ‘그렇다면 그대는 나의 생명을 살려 주라. 내 또한 그대의 목숨을 살리리라’고 말했고, 여기에 두 사람은 서로 그 목숨을 용서해 주고 손을 잡고서 장래 서로 돕고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두 사람은 사냥을 중지하고 수레로 왕궁으로 돌아와, 대신들을 모아놓고 왕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만일 여기서 교사라의 왕자인 장수를 발견한다면 어떻게 할 작정인가?’‘저는 그의 손을 자르겠습니다.’‘저는 귀를 베겠습니다.’하고 갖가지 대답을 했다. 왕이 말했다. ‘너희들, 이제는 그와 같은 일이 모두 헛일이다. 나는 장수 왕자에게 목숨을 구원 받았고 나는 또 그의 목숨을 살려 주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다음에 장수를 향해 말하였다. ‘사랑하는 장수여, 그대 아버지의 유언은 어떠한 의미였던가?’ ‘대왕이시여, 저의 아버지의 임종 때의 말 가운데 길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함은 원한을 길게 계속시키지 말라는 것이었으며 짧게 보아선 안 된다‘고 함은 벗들과 우정을 깨는 일에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옵니다. 원한은 원한에 의해 진정되지를 않고 원한 아닌 것에 의해 진정된다고 함은 저의 부모가 대왕에게 살해되었다 하여 제가 대왕의 목숨을 빼앗으면, 대왕을 위하는 자가 또 저의 목숨을 빼앗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저의 편을 드는 자가 또 그들을 죽이겠지요. 이리하여 영원히 원한은 원한에 의해 진정되지를 않습니다. 지금 대왕이 저의 목숨을 용서해 주신다면 저도 대왕의 목숨을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이렇듯 원한은 사랑에 의해 진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그 임종 때에 이것을 저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제자들이여, 이때 가시국의 왕 범달다는 장수 왕자의 어진 바를 칭찬하고 그 나라를 돌려준 데다가 그 공주까지 주어 영원한 평화를 맹세한 것이다.

제자들이여, 이것은 무기를 손에 들고 검을 잡은 왕자의 참을성과 부드러운 사랑이다. 너희는 빈틈없이 설해진 교법과 계율 속에 출가한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너희들도 또한 이 참을성과 부드러운 사랑으로 빛나지 않으면 안 된다. 제자들이여, 다투어서는 안 된다. 불화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

세존이 이렇듯 간곡히 타이르셨지만 아직도 옳지 못한 제자는,

“세존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세존은 세존의 선정에 들어가 계십시오. 저희들이 책임을 지고 이 다툼을 해결하겠습니다.”

고 하며 분부를 듣지 않았다.

그때 세존은,

“이들 어리석은 자는 형체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므로 이치를 깨닫게 하자면 쉬운 일이 아니다.”

고 말씀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셨다. 이리하여 세존은 파라카 마을로 갔다가 파티야나의 죽림원으로 가셨으며 다시 팔리레이야카의 숲에 들어가 라키다 동산에 거처를 정하시고 그 다투는 무리들로부터 떨어져, 번거로움을 멀리하고 혼자 거처하시며 정적을 즐기셨다. 마치 많은 암코끼리, 수코끼리, 새끼코끼리를 거느린 코끼리의 왕이 코끼리 떼를 떠나 번거로움이 없는 정적을 즐기듯, 평안하니 머무셨다. 이윽고 세존은 사위성에 들어가 기원 정사에 머물러 계셨다.

세존이 떠나시고 나자 교상미의 대중들은 불화를 이룬 제자들에 대하여 화를 냈다.

“세존이 떠나신 것은 이 제자들 때문이다. 이 제자들은 우리들에게 불리한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종전처럼 이 제자들을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을 그만 두자. 그러면 제자들이 환속하여 승가를 떠나서 세존의 마음을 평안케 해드리리라.”

그들은 그 생각대로 공양을 끊기에 이르렀다. 공양이 끊겨 난처해진 제자들은 세존의 앞에서 다툼을 끝내고자 좌구를 치우고 옷과 바리때를 수습해 가지고 교상미를 떠나 사위성으로 향하였다.

사위성에서는 사리불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교상미의 제자들을 어떻게 취급해야 좋을지 세존께 물었다. 세존은 바른 것과 바르지 못한 것과의 구별을 가르치시고 바른 자에게 극진하라고 말씀하셨다. 급고독 장자(給孤獨長者)를 비롯한 많은 신자들 또한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물었고 공평하게 공양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교상미의 제자들은 기원 정사에 들어가자 먼저 죄를 범한 제자가 그 죄를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점차 제자들의 마음도 누그러지고 서로 하나가 되어 화합하는 정신을 보였고, 세존 앞에 화합의 승가를 부활시킬 수가 있었다.

 

 

세존은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제자들이여, 여기 명심하여 사랑해야 할 여섯 가지 존귀한 법이 있다. 이것에 의해 화합과 일치와 다툼 없음을 얻게 되리라.

여기 어떤 제자가 동문(同門)에 대해서 겉으로나 이면으로나 자비의 행을 지킨다. 이것이 제 1의 법이다. 다음은 동문에 대해서 겉으로나 이면으로나 자비의 말을 지킨다. 이것이 제 2의 법이다. 다음은 동문에 대해서 겉으로나 안으로나 자비의 마음을 지킨다. 이것이 제 3의 법이다. 다음은 제자가 법대로 탁발하여 음식을 얻었을 경우, 그 음식을 지계(持戒)의 동문과 공평히 나누어 먹는다. 이것이 제 4의 법이다. 다음은 제자가 더러움이나 결점이 없는 유식한 사람에게 칭찬되는 계를 갖추고 동문인 대중들과 함께 그 계대로 사는 일, 이것이 제 5의 법이다. 다음은 제자가 극히 성스럽고 괴로움을 없이하는 생각을 가지고 동문인 대중들과 이 같은 견해에서 사는 일, 이것이 제 6의 법이다.

제자들이여, 이 여섯 가지 법 가운데 극히 귀하고도 괴로움을 없이하는 견해가 주된 것이다. 이 견해가 다른 다섯 가지의 법을 포섭하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그것은 무엇이냐, 여기 제자가 숲속이나 나무 밑이나 빈집에 가서 이와 같이 생각한다. ‘나의 마음 속에 아직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바르게 여실히 보여주지 않는 망집이 있는 것일까’하고.

제자들이여, 만일 그 제자가 애욕이나, 진에나, 나태나, 수면이나, 마음의 도거(掉擧)나, 나쁜 버릇이나, 의심 등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 마음은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일만을 골똘히 생각하거나 세상의 일에만 한사코 생각하고 있으면 그 마음은 사로잡혀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제자가 자기의 마음을 조복하면 이러함을 안다. ‘나의 마음 속에는 그 망집이 남아 있지 않다. 나의 마음은 참된 이치를 보기 때문에 잘 조복되어 있다’고. 이것이 극히 성스럽고 세간에도 뛰어난 제일의 지(智)에 도달한 것이다.

 

 

제자들이여, 또 제자가 ‘나는 이 정견(正見)을 수행하되 지키고 스스로 정적에 도달하고 있는가’를 내성(內省)하고서 정적에 도달해 있다고 알면, 이것이 극히 성스럽고 세간에도 뛰어난 제 2의 지(智)에 도달한 것이다.

 

 

제자들이여, 또 제자가 이 가르침에서 다른 곳에 출가하여 이 정견에 도달해 있는자가 있을까 생각하고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제 3의 지에 도달한 것이다.

 

 

제자들이여, 또 제자가 정견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도달해 있는 것과 같은 행에 나도 도달해 있다고 생각하여 도달해 있다고 알면, 그것은 제 4의 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 행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 정견을 갖추고 있는 사람은 이를테면 어린이가 손발이 숯불에 닿았을 경우 재빨리 손발을 끌어당기듯이, 자백을 해야만 죄를범했을 경우 속히 그 죄를 자백하여 재범 않도록 몸을 보호하는 일이다.

 

 

제자들이여, 또 제자가 정견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도달해 있는 것과 같은 다른 행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도 도달해 있음을 알면, 그것은 제 5의 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 행이란 어떠한 것인가. 이 정견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비유하면 송아지가 딸린 암소가 기둥을 부러뜨리더라도 송아지를 놓아 주지 않듯 동문의 일에 열심히 나섬과 동시에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에도 열심히 면려하는 일이다.

 

 

제자들이여, 또 제자가 정견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면, 그것은 제 6의 지에 도달한 것이다. 그 힘이란 부처께서 교법과 계율을 설하실 때 전심을 기울여 듣는 힘을 말한다.

 

 

또 제자가 정견(正見)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다른 힘을 갖고 있다고 알면, 그것은 제 7의 지(智)에 도달한 것이다. 그 힘이란 부처께서 교법과 계율을 설하실 때 법을 잘 깨닫고 기쁨을 얻는 힘이다.

제자들이여, 이 일곱 가지 지를 갖추고 있는 제자는 성도(聖道)의 흐름의 은총을 받은 것이다.”

모든 제자는 세존의 가르침을 기뻐하며 다시 화합을 되찾았다.

 

 

세존은 또 차례로 유행하시어 가비라 성에 이르렀고 그 성 밖인 니구로타의 숲속에 머무셨는데, 어느 날, 아침 일찍, 성 안에 들어가 탁발하시고 식후 오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가라케마카의 집으로 가셨다. 그곳에는 많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때 아난은 많은 제자와 함께 석가족인 가다의 집에서 옷을 꿰매고 있었는데, 세존은 저녁 무렵 그 집에 가시어 마련된 자리에 앉아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가라케마카의 집에는 많은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렇듯 많은 제자가 살고 있느냐?”

“세존의 말씀처럼 많은 제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지금은 저희들의 옷을 만들 철이기 때문입니다.”

"아난이여, 모이는 것을 기뻐하고 대중이 함께 있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은 제자는 빛나는 일이 없다. 그가 쉽사리 출리(出離)와 은퇴와 정적과 정각(正覺)의 즐거움을 얻을 까닭이 없다. 해탈을 얻을 도리도 없다. 아난이여, 마음으로 사랑하고 즐거움으로 삼는 자란 쇠망과 수심과 슬픔과 고뇌를 낳지 않는 것이란 없는 것이다.

아난이여, 모든 상(相)을 생각하지 않고 내공(內空)으로 염하고 주(住)하는 것은 부처가 머무는 집이다. 부처는 이 내공에 들어가 머물고 사람이 다가오더라도 출리와 원리(遠離)를 즐기고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마음으로 면려하기 위해 법을 설하는 것이다. 아난이여, 만일 제자로서 내공에 들어가 머물고자 생각한다면 안으로 마음을 향하여 한곳에 모아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아난이여, 제자가 안으로 마음을 향하여 한곳에 모아 진정시킨다 함은 어떠한 것이냐 하면, 욕을 여의고 불선(不善)을 여의고 선정에 들어가 머무는 것이다.

만일 제자가 내공을 관(觀)하여도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다스려지지 않음을 깨닫고서 몸 밖의 만 가지 물은 공임을 관하고, 혹은 몸의 안팎의 공을 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안팎의 공을 관하고도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관하고서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전에 닦은 선정의 상(相)에 마음을 모아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리하여 내공을 관하고 내공에 마음이 청량하여 기뻐하고 해탈하여 그것을 깨닫고, 외공(外空)을 관하고 내외공(內外空)을 관하고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관하고 마음은 나아가 기뻐하고 해탈되어 그것을 깨닫는다.

 

 

아난이여, 제자는 이렇듯 이 공(空)의 선정에 머물며, 만일 경행(經行)에 마음이 기울면 경행하고, 멈춰서는 일에 마음이 기울면 멈춰서고, 앉고 또 눕는 일에 마음이 기울면 앉거나 눕고, 행주좌와에 모든 탐욕이나 우수의 악법이 따라 일어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야기를 하는데도 쓸데없는 천박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번뇌를 멸하고 마음을 해탈시키는데 이익이 되고 열반에 들어가게 하는 그러한 이야기를 한다. 또 물(物)을 생각하는데도 탐욕과 노여움과 해침의 세 가지의 나쁜 마음에서 일어나 천박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않고서 출리와 동정과 자애의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명백히 깨닫는 것이다.

 

 

아난이여, 오욕에 대해서는 몇 번이고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 오욕의 어느 것인가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오욕에 대하여 자기의 탐욕심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알고, 어느 것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탐욕심은 이미 여의었음을 알고서 명백히 깨달을 수 있으리라.

아난이여, 제자는 어떠한 일을 보고 스승을 좇고 섬기는데 알맞다고 생각되느냐. 그것은 경의 문구를 외우는 일이 아니다. 해탈과 열반으로 이끄는 욕심이 적고도 족함을 아는 이야기를 듣고, 해탈되었음을 깨닫는 지견(知見)에 관해서 듣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스승을 섬기기에 알맞은 것이다.

 

 

아난이여, 여기 스승의 화(禍)와 제자의 화가 있다. 그것은 스승이든 제자이든 세상을 멀리 떠날 뜻을 가지고 숲속의 나무 밑이나 산의 동굴이나 무덤을 찾아 거처로 삼고 사람들이 오지 않는 곳에 있으면서도 마음을 늦추고 욕심을 일으켜 집에 마음이 끌리는 일이다. 부처의 뒤를 좇아 인가와 멀리 떨어져 수행의 거처로 정하고서도 마음을 늦추어 욕심을 일으켜 집에 마음이 끌리는 것이 수행자의 화이다. 여기에서 마래의 생을 초래하고 괴로운 결과를 낳는 악법이 증장하는 것이다. 아난이여, 그러나 너희들의 영원한 이익과 행복을 위해 나를 대하고 벗으로서의 행을 갖고서 좇되, 원수로서의 행을 갖고서 좇아서는 안 된다. 원수로서의 행이란 스승이 애련하게 여겨 법을 설하건만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세히 듣지 않고 다른 스승에 마음을 기울여 스승의 가르침을 떠나버리는 일이다. 귀를 잘 기울이며 자세히 듣고 다른 스승에 마음을 쏟지 않고 스승의 가르침을 버리지 않는 것이 벗으로서의 행을 갖고서 좇는 것이다. 아난이여, 나는 도공(陶工)이 부드러운 흙을 부드럽게 취급하듯이는 하지 않는다. 공세를 취하면서 가르치는 것이다. 영혼의 심(芯)이 있는 자만이 남게 되리라.”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