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大寶積經)

대보적경-1445-289

근와(槿瓦) 2017. 6. 5. 00:23

대보적경-1445-289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441 / 3476]

저절로 모든 법을 통달하며
믿음의 행에 따르지 않고
지혜로써 법을 자세히 살피나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다.

지혜로운 이는 글 구절을 분별하고
뜻에 나아가 더욱 잘 배워서
백품(白品)이나 흑품(黑品) 등에 대하여
항상 닦고 또는 멀리 여의어라.

마음에 일찍이 게으름이 없으면
법에 피하여 물러남이 없고
몸과 의욕이 다 함께 가볍고 편안하여
속히 마음의 정진을 얻는다.

법을 들음으로 인해 지혜가 자라나고
지혜가 자라면 물러날 생각이 없나니
지혜를 항상 염주(念住)에 의지하면
깨끗하고 더러운 법 분명히 알게 된다.

위없는 법을 배우고
뛰어난 염혜(念慧)의 힘에 나아가
중생의 알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
스스로 긴 밤 내내 닦고 배우라.

법을 배운 뒤에는 오르고 나아가서
끝까지 나아가면 지혜가 밝아져서
중생의 알고자 함을 분명히 알 것이니
알게 된 그대로 곧 열어 보여라.


                                                                            [1442 / 3476]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이와 같이 찾고 구하며 깨달음의 지혜[覺慧]를 통찰함은 이 깨끗하고 착한 법의 밝은 문에 의지하여야 하나니, 보살은 항상 이와 같이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법을 닦고 배우려 하면 마땅히 생각하기를 '두 가지 인()과 두 가지 연()이 바른 소견을 일으킨다. 어떤 것이 두 가지냐 하면, 이른바 다른 이로부터 음성을 듣는 것[從他聞音]과 속으로 자신이 이치대로 뜻을 일으키는 것[如理作意]이다'라고 해야 하느니라.
그는 다시 생각하기를 '다른 이로부터 음성을 듣고 이치대로 뜻을 일으킨다는 것은 어떤 모양이냐 하면, 찾아서 거듭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선정[]을 즐겨 상응하는 행을 닦는 모든 보살들이면 아직 대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듣지 못했다. 또 성인의 법과 계율의 가르침을 듣지도 않고 다만 삼마지(三摩地) 가운데서 만족할 줄 아는 생각을 낼뿐이니, 이런 사람은 교만한 마음 때문에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키고 있는 것임을 알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모든 뜨거운 번뇌 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라고 말하리라.


이미 모든 뜨거운 번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거늘 어찌 다섯 가지 문[五門]의 나고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거기에 빠져서 헤매며 쉬지 않고 있다. 이 모든 중생은 실로 해탈하지 못했는데도 스스로 '나는 이미 해탈했다'고 말하고 실로 아직 고통을 여의지 못했는데도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이런 사람 때문에 사실대로 설법하신 것이니, 만일 다른 이를 따르며 법을 들으면 이야말로 모든 늙고 죽음 등에서 해탈하게 된다'고 하느니라.
또 말하기를 '나는 먼저 박가범(薄伽梵)께서 설하신 아래의 게송을 들은 것과 같다'고 하느니라.

견문이 많으면 법을 환히 알고
견문이 많으면 악을 짓지 않으며
견문이 많으면 의() 없는 것 버리고
견문이 많으면 열반을 얻는다.


                                                                            [1443 / 3476]

잘 들으면 견문이 자라고
견문은 지혜를 자라게 하며
지혜는 청정한 이치를 닦게 하고
이치를 얻으면 즐거움을 부른다.

슬기로운 이는 이치를 얻고 나서
현재법에서 열반을 증득하며
법을 듣고 깨끗하며 지혜로워졌으므로
첫째가는 즐거움[第一樂]을 증득한다.

그러므로 사리자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생각한 뒤에 마땅히 대보살장의 미묘한 법문과 거룩한 법과 비나야(毘那耶)의 가르침을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며 널리 다른 사람들에게 연설하고 열어 보여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만일 모든 중생이 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비록 또 듣는다 하더라도 이치에 맞도록 방편으로써 뜻을 짓지 않으면 이 사람은 저 성인의 도에서 바른 행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이런 사람 때문에 바른 법의 요점을 말하되 '만일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에서 해탈하고자 하면 마땅히 속으로 자신이 이치에 맞추어 생각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니, 모든 보살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이치에 맞는 방편[如理方便]이라 하며, 어떻게 보살이 이치에 맞게 뜻을 내어 닦고 배우는가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이치에 맞는 방편이라는 것은 하나의 법도 합쳐지거나 떨어짐이 없나니, 왜냐 하면 이치에 맞는 방편은 방편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이치에 맞는 방편에 뜻을 내어 편히 머무르면 이 모양은 다만 이것은 음성이로되 이 음성의 성품은 생기는 곳이 없고 또한 인연에 의하여 생기지도 않으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서 음성을 낼뿐이니, 왜냐 하면 저 모든 것은 모두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또 보살이 이 음성의 과거와 미래의 끝을 관찰하되 '무엇으로부터 생기고


                                                                            [1444 / 3476]

사라지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고, 이와 같이 관찰한다 해도 마침내 얻을 수 없느니라. 또 이러한 음성을 추구(推求)하되 '예전에 있었던 말인가, 지금에 있는 말인가, 앞으로 있을 말인가?'라고 하느니라. 또 거듭 이러한 음성을 추구하되 '이미 말했던 것인가, 지금 말하는 것인가. 앞으로 말할 것인가? 이와 같은 음성은 끊기 위하여 이미 말했는가, 끊기 위하여 지금 말을 하는가, 끊기 위하여 앞으로 말할 것인가, 이와 같은 음성은 증득하기 위하여 이미 말했었는가 증득하기 위하여 지금 말을 하는가, 증득하기 위하여 앞으로 말할 것인가?'라고 하지만, 이 보살이 이와 같이 음성을 모두 찾고 구하여도 도무지 얻는 것이 없느니라. 또 다시 관찰하되 '과거의 모양인가, 미래의 모양인가, 현재의 모양인가?'라고 이렇게 관찰한다 해도 모두 얻을 수 없느니라.
사리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바르게 관찰하는 때를 이름하여 이치에 맞는 방편으로써 뜻을 짓는다 하나니, 그러므로 이치에 맞는 방편을 쓰는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관찰하고 갖추어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이치대로 관찰하며, 모든 보살들은 어떻게 배우는가 하면,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의 제 성품[自性]은 사라져 없어진다'고 관찰하나니, 만일 이와 같이 관찰하면 이치에 맞는 관찰이라 하느니라.
만일 '모든 법의 자성이 사라진다'고 관찰하면 이러한 관찰은 이치대로 바르게 관찰하는 것[如理正觀]이라 하고, 만일 '모든 법은 결국에는 공하고 고요하다'고 관찰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 하며, 만일 '모든 법은 평등한 성품에 들어 있다'고 관찰하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 하고, 만일 '모든 법은 결국에는 남[]이 없다'고 관찰하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 하고, 만일 '모든 법은 결국에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관찰하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 하며, 만일 '모든 법은 결국에는 고요히 사라진다'고 관찰하면 이것을 이치에 맞는 바른 관찰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관찰을 할 때에도 역시 능히 관찰하는 이[能觀者]가 있음을 보지 못하나니, 이른바 '관찰한 것도 아니고 관찰하지


                                                                            [1445 / 3476]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이렇게 관찰해야 하느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이렇게 관찰하면 이치에 맞는 관찰이라 하지만, 그와 다르게 관찰한다면 이치에 맞는 관찰이 아니라고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이치에 맞는 방편을 배워야 하느냐 하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의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조그마한 법도 어리석게 하거나 미혹되게 하지 않기 때문이요,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조그마한 법에서도 장애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조그마한 법도 해탈의 문이 아님이 없고,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조그마한 법을 끊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써 정진함이 없으며, 이치에 맞는 방편이란 조그마한 법을 증득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격려하고 바르게 노력하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은 이치에 맞는 바른 소견으로써 보는 것같이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해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그가 보는 것과 같이 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한다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볼 것이 없음[無所見]을 말하여 모든 법을 관찰한다 하나니, 어떤 것을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사리자야, 보는 것이 없다는 것은 남[]이 없다는 것이요 남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일어남이 없는 것이며 일어남이 없다는 것은 비추는 것이 없다는 것이니, 그러므로 여래는 이 바른 법에 의거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이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모든 행()을 관찰하며 남이 없다[無生]고 생각하면 바로 그것이 정성결정(正性決定)에 나아가 들어간 것이니, 바르게 보는 이면 정성결정에 나아가 들어간 것이니라.
사리자야, 저 보살마하살이 생각하기를 '어떠한 인연으로 정성결정에 나아가 들어갈 수 있을까?'라고 한다면, 사리자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하나니, 만일 나라는 견해[我見]가 평등한 것이라고 관찰하면 곧 이는 모든 법이 평등한 것이니라. 만일 이렇게 관찰한다면 정성결정에 나아가 들어간 것임을 알 것이니, 그러므로 모든 보살마하살이 만일 정성결정에 나아가 들고자 하면 마땅히 이와 같은 대보살장의 미묘한 법문을 은근하고 정중하게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이치를 연구하고 다시 다른 이들을 위하여 법답게 널리 연설해야 하며, 마땅히 이 법문에 대하여 이치에 맞는...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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