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마거사(維摩居士,유마경)

유마거사와 대승(大乘)의 심의(深義)

근와(槿瓦) 2014. 9. 15. 00:42

유마거사와 대승(大乘)의 심의(深義)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왕사성을 나와서 또다시 항하를 건너 비사리 성으로 들어가 성 밖의 암라수원(菴羅樹園)에서 많은 제자들과 보살들과 함께 머무르셨다.

때에 이 고을에 살고 있던 보적 장자(寶積長者)는 5백 명 정도의 부호의 자제를 거느리고 이 동산으로 나가 각각 구슬로 장식한 일산을 세존께 바치고 다시 보적 장자는 세존의 앞에 나아가 덕을 찬송하였다.

 

(1) 청정한 눈은 연꽃과 같고 조용한 마음으로 선정에 들어 오래도록 청정한 업을 쌓아 중생들을 정적으로 인도하신다. 법의 재(財)를 베풀어 법의 상(相)을 밝히고 ‘법은 모름지기 인연에서 나와「아」도 없고「신」도 없고「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도 없고 그렇다고는 하나 선과 악의 업은 멸하지 않는다’고 하셨도다.

 

(2) 오오, 세상의 노, 병, 사를 제도하는 의왕(醫王)이여, 덕은 넓어 바다와 같고 훼예(毁譽)에 동하지 않음은 마치 산과 같으며, 선에나 악에나 마음은 허공과 같이 평등하게 작용하시다.

우리들 지금, 세존의 힘에 의하여 모든 세계의 상을 보고 법왕의 대자재(大自在)인 힘을 알아 청정한 믿음을 일으켰네.

 

(3) 부처님이 하나의 음성으로 법을 설하시면 중생들은 그릇에 응하여 깨치고 각각 그 말씀을 하나로 생각한다.

또는 하나의 음성으로 혹은 의문을 혹은 두려워하고 혹은 뜬세상에 지치고 혹은 의문을 끊는다.

오오, 비할 데 없는 힘의 주여, 세간의 큰 도사여, 고뇌를 끊고 각에 이르러 두루 세상을 구하시니 우리들은 부처 앞에 공손히 절을 드리네.

 

 

보적 장자는 다시 세존께 말씀 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들 젊음이들은 모두 부처가 되고 싶다는 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모쪼록 청정한 부처의 국토와 그 국토를 세우는 행을 설해 주시옵소서.”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착하도다, 보적이여. 이제부터 그대의 물음에 대해 설하리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야 한다. 보적이여, 도를 구하는 중생에 있어서는 어디서나 중생이 사는 곳 그대로가 부처의 국토인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부처의 국토는 중생들에게 보시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비유컨대, 집을 대지에다 세우는 것과 같이 부처의 국토는 중생들의 마음을 대지로 삼아 세워지기 때문이다. 보적이여, 그 부처의 국토를 세우는 것은「순직한 마음」인 것이다. 그 마음은「깊은 마음」,「도를 구하는 마음」,「베푸는 마음」,「계를 지키는 마음」,「참는 마음」,「지혜와 자비를 낳는 마음」인 것인데, 이것은 모두 방편을 자아내어 중생들에게 도를 얻게 하는 마음인 것이다.

그러니 보적이여, 청정한 부처의 국토를 얻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마음을 청정히 하여야 한다. 마음이 청정하면 그가 사는 국토도 청정하다.“

 

 

이때 사리불은 마음에 생각하되 ‘만약 마음이 청정하면 그 국토도 청정하다고 할진대, 세존은 일찍이 도를 구하셨을 때에 꿈에도 더러운 마음을 일으키지는 않았을 터인데도 이 세상은 어째서 이와 같이 더러워져 있는 것인가?“

세존은 그 마음을 헤아리고,

“사리불이여, 장님은 해나 달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해나 달에 빛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장님의 허물이지 해나 달의 허물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 죄에 의하여 불토(佛土)의 청정함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세계는 청정하다. 그러나 그대는 그것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고 말씀하셨다.

 

 

이때 그 자리에 있었던 한 바라문이 말하였다.

“존자 사리불이여, 이 세계는 결코 더럽혀져 있지는 않다. 신들의 궁전과 같이 맑게 개여 있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세계는 언덕이나 산이나 자갈이나 갱이나 형극 등의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꽉 차 있다.”

“그것은 그대가 부처의 지혜에 의하지 않고 마음에 고저의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모든 중생에 대하여 평등의 청정한 마음을 품고 있으므로 이 국토 역시 청정하게 비치는 것이다.”

 

 

이때 세존이 발을 들어 대지를 가리키시자 홀연히 세계는 일변하여 널리 번쩍거리며, 대중들은 어느 새 모두 보석으로 아로새겨진 연화의 자리에 몸을 드러내자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이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청정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여태껏 본 일이 없습니다.”

“나의 국토는 언제나 이와 같이 청정하다. 그러나 마음이 비열한 사람은 악과 더러움이 가득찬 세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중생들이 모두 지금 나의 설법에 의해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눈을 닦고 본다면 언제나 이와 같이 번쩍거리는 세계를 볼 수 있다.”

세존이 이윽고 신통술을 거두시자 세계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적 장자를 비롯하여 많은 청년들은 모두 법의 실상을 보는 눈을 얻어 한없는 환희에 젖었다.

 

 

그 즈음, 이 비사리 성에 유마(維摩)라는 한 장자가 살고 있었다. 숙세에 깊은 선근을 심어 제법에 생멸이 없는 것을 깨닫고 모든 가르침을 총지(總持)하여 사특한 견해를 파(破)하였다. 또 중생들을 구제하는 원을 찬양하며 밝게 중생들의 마음을 알고 참된 크나큰 가르침으로 인도하였다. 참으로 부처의 취지에 들어맞아 모든 중생이 한결같이 존경하는 바가 되었다.

그는 또 많은 재물을 베풀어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능히 계를 지켜 사물을 감내하여 노여움을 억제하고 언제나 면려하며 어지러운 마음을 수습하고 그리고 산뜻한 지혜의 빛은 어리석은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을 빛나게 했다. 곧, 집에 있되 세간사에 집착하지 않고, 처자를 두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에 빠지지 않고, 많은 사람의 시중을 받으면서도 홀로 처하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고, 신분에 응하여 좋은 옷을 입더라도 자연의 인품을 잃지 않으며 어떠한 음식을 취하더라도 마음은 깊이 법의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는 또 세간의 사귐에 있어서도 유희장에 출입은 하지만 도리어 남을 인도하고, 갖가지 이교의 가르침을 듣지만 그것 때문에 바른 믿음을 파괴하는 법이 없고, 세간의 전적(典籍)을 배우면서도 불법을 즐기며, 어떤 때에는 정치에 관계하여 사람들을 편안케 하고, 학사(學舍)에 들어서는 젊은 사람들에게 바른 법을 가르치고, 매소부의 집이나 주사(酒肆)에 들어갈 때도 욕심의 잘못이나 뜻을 세울 점을 사례를 들어 가르쳤다. 또 장자들이나 장사에 관계하는 사람들과 사귐에는 재산보다도 법과 선한 행의 존귀함을 가르치고, 권세를 믿는 왕자에게는 참는 마음을, 마음이 교만하기 쉬운 승려나 수도자에게는 아만(我慢)을 제거할 것을, 일반인에게는 목전의 돈보다도 참된 복덕을 짓는 것이 절실하다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일세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는 유마는 지금 병상에 누워 있었다. 나라에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날마다 그 병상을 찾았는데 그는 이것을 좋은 기회로 삼아 사람들에게 법을 설하였다.

 

 

“경들이여, 이 몸은 무상한 것이다. 제아무리 건강한 몸이라도 끝내는 쇠한다. 참으로 몸에는 갖가지 병이 모이는 곳이지만 현명한 사람은 이것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날아오르는 물방울처럼 잡을 수도 없으며 거품처럼 바로 사라져, 아지랑이처럼 애욕의 갈증이 생기며 파초와 같이 연약하고 꿈의 환상이나 그림자와도 같고 또 메아리처럼 갖가지 인연에서 생기는 것이다. 뜬구름처럼 변하기 쉽고 개처럼 각각(刻刻)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또 이 몸은 무아인 것이다. 대지에 임자가 없는 것과 같이, 불에 주체가 없는 것과 같이,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확고한 수명이라는 것이 없어 마치 물이 그릇에 따라 모양을 바꾸는 것과 같이 정해진 인격이라는 것이 없다. 가령 갖가지 물이 모여서 몸을 이루는 것이지만 그곳에 중심이 되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이 몸은 부정한 것이다. 목욕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끝내는 늙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아는 자는 이 몸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부처의 몸을 얻으려고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신(佛身)이란 법신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선과 지혜와 진실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들이여, 불신을 얻고 싶어 한다면 참된 각에 이르는 길을 원해야 한다.”

유마는 이와 같이 하여 그 병상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도에 이끌어 들였다.

때에 유마는 마음 속에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병으로 누워 있다. 세존이 만약 불쌍히 여기신다면 사람을 보내어 위로해 주실 것이다’라고 했다.

 

 

세존은 거사의 마음을 헤아려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이제부터 가서 유마를 문병하라.”

사리불이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거사를 문병할 자격이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숲속에서 좌선하고 있는데 거사가 그곳에 와서 ‘사리불이여, 앉는다는 것이 반드시 좌선일 수는 없다. 몸이라든지 뜻이라든지 형태의 약속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참된 좌선인 것이다. 적연 부동(寂然不動)의 경지에 마음을 머물게 하면서, 게다가 갖가지 활동을 하고 성도를 보유하면서 범부의 일을 행한다. 이것이 참된 좌선인 것이다. 갖가지 이교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그것에 마음이 동하지 않고 득도에 이르는 길을 닦는 것이 참된 좌선인 것이다.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이 참된 좌선인 것이다. 이러한 좌선이야말로 세존께서는 인증하는 바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에 대해 답할 수가 없어서 침묵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거사의 문병을 갈 수 없습니다.”

 

 

세존은 다음에 목련에게 말씀하시자, 그가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도 거사의 문병을 갈 자격이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비사리 마을에서 많은 신자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는데, 유마 거사가 와서 말씀하기를 ’목련이여, 법을 설하려거든 법대로 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여(眞如)의 법은 평등한 것이다. 그러니 설자(說者)로서도 설했다는 분별이 없고 듣는 자로서도 들었다고 하는 분별이 없다. 비유컨대, 마술사가 그 조작하는 인형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뜻을 체득하고 법을 설함이 좋다. 중생들의 근기(根機)에는 이근기(離根機)가 있고 둔근기(鈍根機)가 있으며 능히 그것을 알고 구애되는 바 없이 대비의 마음으로써 법을 설하고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삼보를 받들겠다는 염을 가진 연후에 법을 설하여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거사가 이와 같이 설했을 때, 그곳에 모였던 8백 명의 신자들은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재주가 없으므로 그의 문병을 갈 수 없습니다.“

 

 

세존은 이번에는 대가섭(大迦葉)에게 말씀하시자, 그도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도 그 거사를 문병할 자격이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가난한 마을에 걸식을 하러 갔는데 유마 거사가 와서 말씀하기를, ‘대가섭이여, 그대는 자비심을 가지고도 뭇 사람에게 골고루 미치게 하지 못하고, 부한 사람들을 버리고 가난한 마을에서 밥을 빌고 있다. 가섭이여, 집 순서대로 평등하게 걸식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마을에 들어가거든 마을을 공(空)으로 보고 물건을 보아도 마음에 집착하지 말고 듣는 소리는 메아리와 같이, 맡는 향기는 바람과 같이 생각하고, 먹더라도 맛을 생각하지 말고 촉감되는 것에는 모두 깨달음의 지혜를 얻어야겠다고 염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한끼의 밥을 얻음으로써 모든 중생에게 도의 마음을 베풀고 또 그 밥을 모든 부처님과 성자에게 바친 뒤에 먹어야 한다. 그곳에는 세간에 머무는 집착도 없고 그렇다고 열반에 머물고 미망의 세계를 피한다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 가섭이여, 대저 시혜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복에 대소의 차별을 붙여보지 않아야 하며, 또 손익을 계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불도에 든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구한다면 남이 베풀어 준 것을 헛되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말을 듣고 놀라면서도 기뻐했으며 그리고 모름지기 바른 수도자를 향하여 깊은 공경심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위대한 거사를 어찌 제가 문병하오리까?“

 

 

세존은 수보리에게 분부하시자 그도 사양하여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언젠가 제가 유마의 집에 가서 밥을 빌었는데, 거사는 제 바리때를 받아 밥을 담으면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여, 만약 제법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안다면 이 밥을 받아도 좋다. 또 번뇌를 끊지 않고 게다가 그 번뇌를 따라 애착에 얽매이면서 그곳을 벗어나는 지혜를 얻고, 모름지기 차별이 있는 법의 모양에 집착되지 않겠다면 이 밥을 받아도 좋다. 수보리여, 지금의 차별이 있는 견해를 갖는 그대에게 베풀면 복을 얻기는커녕 도리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말을 듣고 망연한 가운데 대답할 재주가 없어 그대로 집을 나오려고 하는데 거사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 바리때를 받으시라. 그렇게까지 두려워할 것은 없다. 만약 부처가 화신(化身)의 몸을 나타내어 이와 같이 그대를 힐난한다면 그대는 두려워할 것인가?’ 그러자 제가 ‘아니오’라고 대답하자 거사가 말씀하기를 ‘제법은 모두 환상이다.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말이란 물(物)의 성(性)과는 별개이므로 말이 없는 곳에 해탈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도저히 그의 문병을 갈 수가 없습니다.“

 

 

세존은 다시 부루나에게 말씀하시자 그가 여쭈옵기를,

“저도 역시 거사의 문병을 갈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숲속에서 새로 출가한 제자들에게 법을 설하고 있는데, 유마 거사가 와서 ‘부루나여, 선정에 들어 중생들의 마음을 관하고 그 뒤에 법을 설함이 좋다. 더러운 음식물을 보배의 그릇에 담아서는 안 된다. 그대는 인간의 심기(心機)를 보지 않고 얕은 가르침을 설하는 것은 상처 없는 자를 상하게 하고, 대해를 소의 발자국 속에 넣으려 하고, 개똥벌레를 햇빛과 같이 보려고 하는 것이다. 부루나여, 이 제자들은 일찍이 대승의 마음을 일으켰지만 중간에 그 뜻을 잊은 자가 있다. 이러한 사람들을 어째서 장님과 같은 적고 얕은 지혜로 이끌 수 있을 것인가’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이 제자들로 하여금 대승을 구했던 원래의 마음으로 되돌려 주자, 그들은 거사에게 절하고 그 가르침을 들어 커다란 참된 각에서 물러서지 않게끔 되었습니다. 이때 저는 중생의 근기를 보지 않고는 법을 설할 수 없다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거사를 문병할 수 없다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다음에 세존은 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에게 말씀하시자,

‘세존이시여, 저 역시 거사를 문병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세존이 법요(法要)를 설하신 뒤에 제가 그 대의를 말한바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상, 고(苦), 공(空), 무아, 적멸의 대의였습니다. 그때 유마 거사가 와서 말하기를 ’마하가전연이여, 변천하는 마음으로 실상의 법을 설해서는 안 된다. 말하건대 제법은 모두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으로, 이것이 무상의 뜻인 것이다. 갖가지 감각이 일어나지만 필경은 실이 없는 것으로 고락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알아야만 괴로움의 뜻을 아는 것, 제법은 마침내 내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공(空)의 뜻, 아와 무아가 둘이 아니라는 무아의 뜻, 원래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므로, 따라서 멸함이 없는 것이 적멸의 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설하였을 때 제자들은 마음의 계박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거사를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세존은 다시 아나율에게 말씀하시자, 그는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저도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곳에서 산책하고 있었는데 한 신이 와서 저에게 인사하면서 천안(天眼)에 대하여 물으시므로 저는 손에 들고 있던 암마라(菴摩羅)의 과일을 가리키면서 ’삼천 대천 세계를 이 열매처럼 볼 수 있겠는가‘고 말했습니다. 그곳에 유마 거사가 와서 ’아나율이여, 천안이라고 하는 것은 작용하는 상이 있는가. 만약 있다고 하면 외도의 신통력과 같은 것이며, 없다고 할진대 본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때 저는 대답할 방법이 없어 잠자코 있었습니다. 신은 놀라며 거사께 절하고 ’세간에 참된 천안을 가지고 있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하자, 거사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세존 한 분이시다. 언제나 선정에 있으면서 여러 부처의 국토를 관하시고 자타, 유무 등의 차별 있는 생각을 갖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듣자 그들은 불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거사에게 절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거사의 병문안을 가지 못하겠습니다.“

 

 

세존은 다음에 우바리에게 명하시자, 그는 아뢰옵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두 제자가 계율을 범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세존 앞에 나서지 못하고 저의 처소에 와서 ’어떻게 하면 이 의문과 뉘우치는 마음에서 벗어나 허물을 면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므로 저는 ’정한대로 20명의 제자들 앞에서 참회하도록 하라‘고 설한 즉, 때마침 유마 거사가 오시어 ’우바리여, 만약 마음이 해탈될 때에 더러움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없다‘고 대답하자 거사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의 마음에 더러움이 없는 것 역시 그와 같은 것이다. 우리바리여, 망상, 전도된 견해,「아」의 집착은 이 모두가 더러운 것이나, 이러한 것을 여의면 청정한 것이다. 우바리여, 제법은 모름지기 생하면 멸하여 머물지 않아 상호간에 기다리지 않으며 마치 환상이나 번갯불 같아서 일념도 머무는 일이 없다. 이것을 실재한다고 생각함은 망견(妄見)이며 마치 꿈과 같고 불꽃과 같아, 물 속의 달이나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아서 만물은 모두 망상에 비치는 그림자와 같다. 이와 같이 앎으로써 비로소 참된 계율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두 제자는 의문과 후회하는 마음이 제거되어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이 거사와 같이 변재(辯才)를 얻고 싶은 원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저는 그 거사를 문병할 수 없습니다.“

 

 

세존은 다시 라후라에게 명하시자, 그가 여쭈옵기를,

“저도 거사를 찾아갈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 비사리의 장자의 아들들이 제가 머무는 곳에 와서 ‘무엇 때문에 왕이 될 자리를 버리고 도를 위하여 출가한 것인가, 출가에는 어떠한 이익이 있는 것인가’하고 물으므로, 제가 가르침에 의하여 출가의 공덕과 이익을 설한 즉, 유마 거사가 와서 ‘라후라여, 출가의 공덕이나 이익은 설할 성질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덕과 이익은 상대의 일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비길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말할 수는 없다. 출가자라는 것은 비길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익이나 공덕이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장자의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바른 법에 출가해야 한다. 부처의 세계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면, 세존은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듣고 있습니다.’ 거사가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다만 참된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것이 곧 출가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모두 참된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저는 거사를 찾아 갈 수 없습니다.“

 

 

세존은 끝으로 아난에게 명하시자, 아뢰옵기를,

“세존이시여, 저 역시 그 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세존의 옥체에 미령이 생겼을 때 우유를 드리려고 바리때를 들고 큰 바라문의 문전에 우두커니 서 있는데, 유마 거사가 와서 일의 전말을 듣고 말하기를 ‘그만 두어라, 아난이여. 세존의 몸은 금강(金剛)이다. 모든 악을 끊고 모든 선이 모인 몸에 무슨 병, 무슨 고뇌가 있을 것인가. 만약 외도들이 이것을 듣는다면 자신의 병조차 구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중생들의 여러 병을 구제할 수 있으랴. 그럴진대 스승으로 삼기에는 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리라. 너는 속히 이곳을 떠나되 이 일이 사람들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운 생각을 품고 ‘나는 언제나 세존을 가까이하고 있으면서도 그 가르침을 그릇되게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공중에서 소리가 나며 ‘아난이여, 거사가 말한 대로이다. 다만 세존은 이와 같은 오탁(五濁)의 세계에 나오셔서 그 병을 드러내어 중생들의 병을 구제하시는 것이다. 젖을 얻는 것을 수치로 생각할 것은 못된다’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거사의 지혜와 변재는 이와 같습니다. 저는 그를 문병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밖의 5백 여 명의 대제자들도 각각 그 이유를 밝혀 거사에게 문병 가는것을 사양하였다.

여기에 세존은 미륵 보살에게 거사의 문병을 하도록 말씀하시자, 사퇴하며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저 역시 그곳에 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제가 도솔천의 신들에게 악도에 떨어지지 않을 계위에 이르는 행을 설하고 있는데, 거사가 와서 말하기를 ’미륵이여, 세존은 그대에게 일생 동안에 정각을 얻으리라는 수기(授記)를 내리셨다. 하지만 그 일생이란 언제의 생이란 것인가. 과거라면 벌써 지나가 버렸고 미래라면 아직 오지 않았고 현재라면 잠시도 머물러 있는 일은 없다. 또 생멸이 없는 각의 경지에 생이라면 이미 그 자체가 각의 지위이므로 수기를 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모든 사람들은 진여(眞如)를 떠나 있으면서도 만약 미륵이 받았다고 한다면 모든 중생들도 수기를 받게 되리라. 또 만약 미륵이 번뇌를 멸할 수가 있다면 모든 중생도 또한 번뇌를 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미륵이여, 그대의 가르침을 가지고 모든 신을 유혹해서는 안 된다.'

세존이시여, 유마가 이와 같이 설하여 많은 신들은 법안(法眼)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그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세존은 다시 광엄(光嚴)동자에게 명하시자 그가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저 역시 그곳에는 갈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비사리의 거리로 나서려고 할 때, 마침 유마와 마주쳤습니다. ‘거사는 어디에서’하고 그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가 ‘도량에서’하고 대답하므로 ‘도량이란 어디인가’고 했더니, 대답은 ‘곧은 마음이 도량이다. 거짓이 없으므로 행을 일으키는 것이 도량이다. 능히 일을 수행하므로 깊은 마음이 도량인 것이다. 공덕을 증장하므로 도를 구하는 마음이 도량인 것이다. 착오됨이 없으므로 또 베풀되 보수를 바라지 않고 계율을 가지며 원을 갖추며, 참되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도 마음에 장애가 없이 정진하여 게을리 하지 않고 선정에 들어 마음을 조복하고 지혜에 의해 제법을 보는 것이므로, 이들 육도(六度)는 모두 도량인 것이다. 더구나 중생들을 평등하게 연민하는 자(慈), 괴로움을 참는 비(悲), 법을 기뻐하는 희(喜), 미움과 사랑을 끊는 사(捨) 등 이러한 사도(四度) 또한 도량인 것이다. 또 중생들을 교도하는 방편을 많이 듣는 것이 도량이기도 하다. 여실하게 앎으로 모든 번뇌도 도량인 것이다. 무아를 앎으로 중생들도 도량인 것이며, 공을 앎으로 모든 법이 도량인 것이다. 갈 곳이 없으므로 삼계(三界)가 도량인 것이다. 설하여 두려움 없는 사자후, 일체지를 갖추어 일념으로 일체의 법을 아는 것도 역시 도량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이 도를 닦고 중생들을 이끈다면 한 발을 들고 내리고 하는 일이 모두 도량에서 와서 불법에 주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5백의 신들은 모두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세존은 다시 지세(持世) 보살에게 하명하였으나, 그도 사양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도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방에 홀로 있는데 악마가 제석천의 모습을 하고 1만 2천의 천녀를 거느리고는 북을 치고 줄(線)에 맞추어 노래 부르면서 그들과 함께 공손히 저에게 절하며 한쪽에 선 일이 있습니다. 저는 제석천이라 생각하고 ‘제석이여, 잘 오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복이 있더라도 스스로 방자해서는 안 되오. 욕의 무상함을 생각하여 선의 근본을 구하고 몸과 생명과 재산을 던져 다하지 않는 법과 바꿈이 좋소’라고 말하자, 그가 말하기를 ‘보살이여, 모쪼록 이들 천녀들을 받아들여 쓸고 닦는 따위의 일들에 부리십시오.’ 저는 ‘제석이여, 이러한 삶들은 출가자에게는 필요가 없소’하고 말했을 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마 거사가 나타나 ‘이건 제석이 아니야. 악마가 그대를 괴롭히려고 하는 짓이다’고 하며 다시 악마에게 ‘이 여자들을 나에게 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악마가 놀라면서 사라졌는데 거사는 천녀들에게 말하기를 ‘악마는 그대들을 나에게 주었다. 모두 함께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킴이 좋다’고 하면서 각자의 근기(根機)에 따라 법을 설하고 도의 뜻을 말하였는데 ‘그대들은 이미 도의 뜻을 일으켰다. 법을 즐김이 좋다. 애욕의 즐거움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천녀가 묻기를 ‘법의 즐거움이란 무엇이옵니까?’ 거사가 ‘법의 즐거움이란 부처님을 믿고 법을 들으려고 원하며 중생들을 공경하고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욕의 즐거움을 여의고 이를 육신의 원적으로 생각하며 도를 수호하고 번뇌를 끊고 깊은 법을 들어 겁내지 않으며, 나쁜 짓을 선도하고 선한 벗과 가까이하여 마음을 청정히 하여 한없는 법을 닦는 것이 곧 보살의 법락인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천녀들이 거사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욕의 즐거움을 원하지 않게 되자, 마궁(魔宮)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는데, 거사에게 묻기를 ‘저희는 어떤 식으로 마궁에서 처해야 하옵니까?’ 거사가 ‘제자(諸姉)여,「다함이 없는 등불」이라는 법을 배워야 한다. 비유컨대, 한 등불로 백천의 등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두운 것을 밝아지게 하면 그 밝음은 다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한 보살이 백 천의 중생을 교도하여 불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한번 일어난 도는 다함이 없다. 그대들은 비록 마궁에 있을지라도 이「다함이 없는 등불」의 가르침으로써 수많은 신들에게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여 부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천녀들은 공손히 거사에게 절하고 악마를 따라 마궁에 돌아갔습니다. 세존이시여, 거사는 이와 같이 신력과 지혜와 변재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세존은 이번에는 장자의 아들인 선덕 보살에게 명하시자, 그가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저도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아비 집에서 대법회를 베풀어 이렛동안 여러 출가자들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를 행할 때, 마침 유마 거사가 나타나 말하기를 ’장자의 아들이여, 이러한 재물을 베푸는 모임을 가져서는 안 된다. 법을 베푸는 모임을 가져야 한다.‘ 제가 ’법시(法施)란 무엇인가‘고 묻자 거사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앞뒤가 없이 일시에 모든 중생에게 바치는 것이다. 소위 불도를 구하여 대자(大慈)의 마음을 일으키고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대비의 마음을 일으킨다. 바른 법을 지니기 위하여 기쁜 마음을, 지혜를 섭수하기 위하여 사가 없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하는 자를 섭수하기 위하여 보호하고, 계율을 파괴하는 자를 가르치기 위하여 계를 지키고, 잘 참고 부지런히 일하며 선정에 들어 지혜를 일으켜 중생들을 교도하면서 공의 이치를 깊이 궁구하게 한다. 모든 법은 임시로 모인 것이므로 그 자체의 모양이 없는 것임을 깨닫고 선현을 가까이하여 악인이 증장하지 않도록 이것을 조복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깊은 마음으로 세간에 집착하는 마음을 물리쳐 잘 듣고 말과 같이 행하고,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다툼이 없는 법을 음미하며, 부처의 지혜를 향하여 행을 다스리고 중생들의 계박을 풀어 주고 덕으로 몸을 장엄하여 국토를 청정하게 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모든 지혜를 얻는다. 이것을 법을 베푸는 모임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보살이 이 법회에 있을진대 대시주라 일컬으며 또 세간의 복을 낳는 밭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거사가 이 법을 설할 때, 2백 명의 바라문은 불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저도 마음이 청정해져 거사에게 예를 드리고 값비싼 영락을 풀어 바치자, 거사는 이것을 받아서 둘로 나눠, 반을 그 회중에서 가장 천한 걸인에게 베풀고 다른 반을 난승불(難勝佛)에게 바치고 나서 말하기를 ‘만약 베푸는 사람이 평등심으로 천한 걸인에게 베푸는 것과 부처에 공양하는 일에 차별을 두지 않고, 그 보시에 의한 과보를 구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원만한 법의 보시라고 이름한다.’ 그러자 그 천한 걸인은 불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다음에 세존은 문수사리 보살에게 말씀하시자,

‘세존이시여, 저 유마는 깊이 법의 실상을 남김없이 궁구하여 지혜에 장애가 없이 여하히 설할 것인가, 여하히 행할 것인가를 알고 있으며, 모든 마를 항복시켜 뜻대로 신통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로서 될 일도 아닙니다만 세존의 뜻이라면 가기로 하겠습니다.“

많은 보살과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중생들은 문수를 따라 비사리의 고을로 들어갔다. 유마는 이것을 알고 신통력으로 그 방을 비우되 모든 물건과 시자들을 내보낸 후, 다만 한 침상만을 남겨놓고 그 위에 누워 문수를 맞이하였다.

“잘 오셨네, 문수여. 오지 않는 상(相)으로 오셨고 보이지 않는 상으로 오셨네 그려.”

 

 

문수가 말하기를,

“거사여, 그대의 말씀대로이다. 오면 거듭 오지 않고 가면 거듭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는 자에게 오는 곳이 없고 가는 자에게 갈 곳이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그렇다 하고 거사의 병은 어떠하온지. 세존께서는 간곡히 물으셨다. 거사여, 거사의 병은 어떠한 일에서 일어난 것인가. 또 오래 계속되고 있는 것인가?”

 

 

유마가 대답하기를,

“어리석음에서 애착은 일어난다. 나의 병도 그곳에서 난다. 모든 중생이 병듦으로 나도 병든다. 만약 모든 중생이 병들지 않는다면 나의 병도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미망의 세계에 들기 때문이다. 마치 아들이 병들면 부모도 병들고 아들이 나으면 부모도 낫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병은 무슨 원인으로 일어난 것인가?”

‘보살의 병은 대자비에서 일어난다.“

“이 방은 무엇 때문에 한 사람의 시자도 없이 이와 같이 비어 있는 것인가?”

“모든 세계도 모름지기 공이니까 방도 공인 것이다. 또 그대는 시자가 있지 않다고 말씀하지만 모든 마와 뭇 외도는 나의 시자인 것이다. 왜냐하면 마는 망집만을 원하지만 보살은 망집을 제도하며, 또 외도는 사특한 견해를 원하지만 보살은 그러한 생각에 움직여지는 일이 없다.”

 

 

“그대의 병은 마음이 병든 것인가 몸이 병든 것인가?”

“나는 몸을 떠나 있으므로, 몸이 아프지 않으며 마음은 환상과 같은 것임을 앎으로 마음도 아프지 않다. 중생들이 병들기 때문에 나도 병든 것이다.”

 

 

“보살은 병든 중생을 어떻게 위로하는가?‘

“몸은 무상하다고 설한다. 그러나 몸을 무상하다고 하여 천시해서도 안 된다. 몸은 괴로움이라고 설한다. 그러나 열반에 머물도록 설해서는 안 된다. 몸에는 아가 없다고 설한다. 그러나 중생들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능히 이것을 교도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 먼저 지은 죄를 뉘우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만 과거사로서 괴롭혀서는 안 된다. 내 병으로써 남의 병을 불쌍히 여기고 지나간 세상의 한없이 긴 동안의 괴로움을 알고 격려하며, 의왕(醫王)인 부처가 되어 모든 병을 낫게 하여야 한다. 설하여 병든 중생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다.”

 

 

‘거사여, 병든 중생은 어떻게 하여 마음을 조복하는가?“

‘병든 중생은 다음과 같이 생각함이 좋다. ’이 병은 번뇌의 독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으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몸은 가짜의 몸이므로 주인도 없고 아도 없는데, 어디에 병을 받아들일 곳이 있겠는가.‘ 또 병든 중생은 자신의 병이 실제로 있는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남의 병도 그와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착으로부터 일어나는 자비는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보살은 티끌과 같이 많은 번뇌를 제거하고 자비를 일으키므로 애착에서 일어나는 자비를 사사건건 피로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것을 제거하면 일에 임하여 계박되는 일이 없다. 스스로 계박되면 타인의 계박을 풀 수 없다. 그렇다면 계박되고 풀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면 선정의 맛을 탐하는 것이 계박되는 것이며, 방편으로써 망집의 생을 받는 것이 풀어지는 것이다. 또 방편이 없는 지혜는 계박되고 방편이 있는 지혜는 풀어진다. 지혜가 없는 방편은 계박되고 지혜가 있는 방편은 풀린 것을 말한다.

또 몸은 무상한 것이며 괴로움에 차 있어 무아라고 관한다면 이것을 지혜라 이름하며, 몸은 망집 속에서 병들더라도 모든 중생들에게 베풀고 지치는 일이 없으므로 이것을 방편이라고 이름한다. 또 몸은 병을 떠나지 않고 병은 몸을 떠나지 않으며, 이 병도 이 몸도 새로운 것도 낡은 것도 아니라고 본다면 이것을 지혜라 이름하며, 설령 몸은 병들더라도 이 세계를 버리고 깊이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방편이라고 이름한다.

또 병든 사람은 마음을 조복하는 일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마음을 조복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 사람은 덕에 구애되는 사람이며 뒷 사람은 어리석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를 여읜 중도(中道)가 보살행이다. 곧 범부의 행도 아니고 이른바 성현의 행도 아닌 것이 보살의 행인 것이다. 더러운 행도 아니고 청정한 행도 아니며, 마와 행을 같이 하면서도 마를 항복 받는 것이 보살행인 것이다. 혹은 망집의 세계를 멀리하는 것을 원하더라도 몸도 마음도 다 멸진(滅盡)시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 보살행이다. 법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이치를 알고 상호를 장엄하여 부처의 국토가 길이 고요하고 공한 것을 알더라도 갖가지 청정한 부처의 국토를 관하고 또 불도를 이루어 법을 설하며 또는 열반에 들더라도 남에게 베푸는 보살도를 버리지 않는 것이 보살행인 것이다.“

 

 

그때 사리불은 이 방안에 침상(寢床)이 없는 것을 보고 ‘보살들이나 제자들은 다들 어디에 앉는 것일까’하고 생각했다. 유마는 그의 마음을 헤아려 사리불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법을 위해 온 것인가, 또는 자리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인가?‘

“다만 법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사리불이여, 참으로 법을 구하는 자에게는 몸도 생명도 탐하는 일이 없다. 어찌 침상 따위를 구하랴. 법을 구하는 자, 모든 세계에 구하는 것이란 없다. 불, 법, 승의 삼보에도 마음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니 괴로움을 보더라도 그 근본인 번뇌를 끊으려고는 생각하지 않고 중도(中道)를 목적으로 도를 닦으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할진대 덮어놓고 번뇌와 보리를 다른 것으로 보는 것은 희론(戱論)인 것이다.

사리불여, 모든 법은 적멸인 것이다. 만약 생하고 멸하는 것에 매이게 되면 법을 구할 수 없다. 또 모든 법은 집착의 마음을 여의고 취사(取捨)의 마음을 떠나 있다. 만약 이것에 매이게 되면 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또 법은 빠짐없이 두루 미치는 것으로 정한 바 모양을 떠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법을 한곳에서 보거나 또는 모양에서 알 수 있다면 그것은 법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또 법은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보고 듣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견문각지(見聞覺知)의 방법으로써는 법을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법은 작위(作爲)가 없는 것으로 무위(無位)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짓는 것 곧 유위(有爲)에 매이게 되면 법을 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법을 구하는 자는 일체의 법을 향하여 구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

 

 

다시 유마는 방향을 바꾸어 문수에게 물었다.

“그대는 한없는 여러 국토에서 놀았지만, 어떤 국토에 가장 묘한 사자좌(獅子座)가 있던가?”

문수가 대답하기를,

“동방으로 한없는 여러 국토를 지나면 수미상(須彌相)이라고 이름하는 세계가 있는데, 그곳에 수미등왕(須彌燈王)이라고 일컫는 부처가 계시며, 지금 현재도 높고 넓직한 사자좌 위에 계시다. 그 자리야말로 비길 데 없이 묘한 것이다.”

 

 

거사는 이 말을 듣자 곧 신통력을 나타내어 그 부처님에게 청하여 3만 2천의 사자좌를 그 방에 옮겨 왔는데, 방은 널찍하여 그러한 사자좌를 수용하고도 조금도 장애가 없었으며, 그렇다고 비사리의 거리나 이 세계가 좁혀진 것도 아니다. 이리하여 거사는 늘어 서 있는 대중들을 그 장엄 무비한 자리에 청하자, 신통력을 가진 보살들은 곧 상호를 바꾸어 그 자리에 올랐지만 초심 보살이나 작은 교에 만족하는 제자들은 오를 수가 없었다. 거사는 그들을 위하여 ‘수미등왕불께  예하고 받들면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가르쳐 주어 그들을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유마는 놀라며 의심하는 사리불에게 이야기하기를,

“사리불이여, 모든 부처나 보살들은 불가사의한 해탈을 얻고 계시다. 모름지기 이 경지에 있는 자가 큰 수미산을 개자(芥子)씨 속에 넣고, 또는 사해의 바닷물을 하나의 털구멍 속에 넣더라도 산의 모습은 옛날과 같고 바다에 살고 있는 어족이나 용, 아수라 등은 조금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또 중생들의 원에 의해 이레간의 생명을 일겁(一劫)과 같이 길게 생각게 하고 혹은 일겁을 재촉하여 이레와 같이 생각게 한다. 또는 시방(十方)이 모든 세계의 바람이라는 바람을 모두 흡수하고도 그 몸을 상하지 않으며 나무도 부러지는 일이 없다. 또 사리불이여, 어떤 때에는 부처의 몸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그리고 성자의 몸이나 신들의 몸으로 나타나고 그리고 세계의 모든 소리라는 소리를 바꾸어 부처의 소리로 변하여 세간의 무상, 고(苦), 공, 무아와 함께 갖가지의 법을 설하여 두루 중생에게 들려 준다. 사리불이여, 나는 지금 간략히 이 불가사의한 해탈의 경지를 설한 것이나, 만약 광의로 한다면 겁(劫)을 다 하더라도 다 설할 수 없다.”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물었다.

“보살은 어떤 식으로 중생들을 보는 것일까?”

“그건 마술사가 나타내 보이는 환상과 같이 중생을 본다. 또는 물속의 달, 거울 속의 형상, 아지랑이, 메아리, 공중의 뜬구름, 물 위의 거품, 번쩍이는 번개, 공중을 나는 새의 자취, 석녀의 아이들, 잠을 깬 뒤의 꿈을 꾸듯 본다.”

“그와 같이 본다면 어찌해서 자비의 행을 할 수 있으랴.”

“보살은 이와 같이 본 뒤에 참된 자비를 일으킨다. 곧 고요히 하여 번뇌를 여의고 허공과 같이 가(邊)가 없고 청정하며 편안하게 차별이 없는 자비로써 중생들을 안식에 들게 하는 것이다.”

 

 

“자(慈)와 희(喜)란 무엇인가?”

“그 짓는 바의 공덕을 모든 중생과 같이 하는 것이 자(慈)요, 중생들에게 베푸는 바가 있으면 기뻐하고 후회함이 없는 것이 희(喜)인 것이다.”

 

 

‘생사에 두려움을 품는 보살은 무엇에 의해야만 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공덕의 힘에 의해야만 한다.”

“그 불력에 의함에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일체의 중생들을 해탈시키도록 해야 한다.”

“중생들을 구제함에는 무엇을 제거하여야 하는가?”

“그 번뇌를 제거하여야 한다.”

“그 번뇌를 제거함에는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생각을 바르게 하여야 한다.”

‘어떻게 하여 생각을 바르게 하는가?’

“일체 만물이 나지 않고 멸하지 않는 것이라는 이치를 증득하게 하여야 한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하지 못한 것은 억누르고 선한 것은 길러 나가야 한다.”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의 근본은 무엇인가?”

“몸이다.”

“몸의 근본은 무엇인가?”

“탐욕이다.”

“탐욕의 근본은 무엇인가?”

“망집의 분별이다.”

“분별의 근본은 무엇인가?‘

‘전도(顚倒)된 생각이다.

“전도된 생각은 무엇인가?”

“연에 의하여 일어나고 정한 자성(自性)이 없는 것이 근본인 것이다.”

“그 근본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정해진 자성이 없는 것은 한곳에 머루는 일이 없으므로 무주(無住)라 한다. 그 무주에는 근본이 없다. 이 무주를 근본으로 하여 일만 가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때 그 방에 있던 한 천녀가 몸을 나타내어 신의 세계의 꽃을 사람들의 머리에 뿌렸는데, 그 꽃이 보살들에게 닿는 것은 모두 흩어져 떨어지고 제자들에게 떨어진 것은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애써 떨어뜨리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천녀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어째서 꽃을 떨어뜨립니까?”

“꽃은 출가자에게는 부적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꽃은 왜 부적당한 건가요. 꽃에는 아무런 분별도 없습니다. 분별은 대덕(大德)에 있습니다. 부처의 도를 닦으면서 분별을 갖는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분별이 없는 것이라면 법대로 자연대로인 것입니다. 보살들에게 꽃이 붙지 않는 것은 모든 분별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비유컨대, 두려움을 품고 있을 때에 마가 들듯이 대덕들은 어디엔가 생사를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므로 무엇인가 그 틈에 붙게 되는 것입니다. 번뇌의 습기가 다하지 않기 때문에 꽃에 사로잡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대는 오래 전부터 이 방에 계셨던가?“

“제가 이 방에 있는 것은 대덕의 해탈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오랫동안 있을 것인가?”

"대덕은 해탈을 얻으시고 얼마나 경과했습니까?“

사리불은 잠자코 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다.

“커다란 지혜의 주인공인 대덕은 어째서 입을 다무시는 것입니까?”

“해탈은 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도 문자도 모두 해탈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문자를 떠난 바가 해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의 모든 법은 해탈의 상인 것이므로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탐(貪), 진(瞋), 치(癡)를 여의는 것이 해탈이 아닐까?”

“그것은 세존이 만심을 일으키는 중생에게 설하신 것으로 만심이 없는 중생에게 탐, 진, 치의 성(性) 그대로가 해탈이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천녀여, 그대의 말하는 바는 훌륭하다. 그대는 대관절 무엇을 얻고 무엇을 깨닫고서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인가?”

“저에게는 얻는 바도 깨닫는 바도 없으므로 이와 같이 설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얻는 바, 깨닫는 바가 있다면 불법상에 만심을 일으키는 것이 되옵니다.”

‘그대는 대체 어떠한 도를 구했단 말인가?’

“저는 이것이라는 일정한 도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첨복(瞻匐)의 숲에 들면 단지 그 꽃의 향기만으로 다른 향기를 맡지 않음과 같이 이 방에 드는 자는 부처의 뛰어난 향기 밖에 다른 성자의 향기를 원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참으로 이 방에는 낮에도 밤에도 금빛이 번쩍이고 해와 달의 빛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때가 끼고 괴로운 것이 없으며 신들이나 보살들이 모여 언제나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법을 설하며 미묘한 천악(天樂)으로 영원히 법음을 연주하고, 또 법보가 충만하여 가난한 자를 제도하며 그리고 석가모니불이나 아미타불 등의 부처님들은 생각에 따라 이 방에 나타나시어 법요를 설하십니다. 또 이 방에는 모든 신들의 아름다운 궁전, 부처님의 청정한 국토가 원만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덕이시여, 이 방은 이와 같이 수승한 덕을 지니고 있으므로 누구도 분별을 일으키는 자는 없습니다.”

 

 

“그대는 어째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는가?”

“저는 오랜 세월을 두고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여자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어째서 변신할 필요가 있으리요. 비유컨대, 마술사가 환상의 여자를 만들었을 때에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왜 그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느냐고 말했다면 바른 물음이겠습니까?”

“아니요, 요술에는 정한 상이 없으므로 바꿀 필요는 없다.”

‘법은 모두 그것과 같이 정한 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자의 몸을 바꾸는 일을 묻는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때 천녀는 신통력을 나타내어 사리불을 천녀의 모습으로 바꾸고 자신은 사리불이 되어 말한다.

“어째서 당신은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습니까?”

사리불은 천녀가 되었으면서도 혼자말처럼,

‘허허, 모르는 새에 나는 천녀가 되고 말았다.“

“만약 당신이 그 여자의 몸을 바꿀 수가 있다면 모든 여자들도 바꿀 수 있겠죠. 대덕이 여자가 아니면서 여자의 몸을 나타내듯 모든 여자도 이를테면 여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존은 세상에는 원래부터 남자와 여자라는 것은 없다고 설하셨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천녀가 신통력을 거두자 사리불도 천녀도 원래의 몸으로 돌아갔다.

“여자의 모습은 어디로 갔죠?”

“그것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

“무엇이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것은 세존이 설하신 바입니다.”

 

 

“그대는 죽어서 어디에 태어날 것인가?‘

“제가 생을 받는 것은 마치 부처가 거짓으로 생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짓는 것은 거짓 생으로, 실제로 생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도 역시 그러하며 참으로 생과 사는 없습니다.”

“그대는 언제 부처의 도를 증득하였는가?”

“대덕이 재차 범부로 되돌아 간다면 저도 부처의 도를 얻게 될 것입니다.”

“나는 범부가 될 리는 없다.”

“저 역시 부처의 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에는 주거가 없으므로 그것을 얻는 자도 없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현재 모든 부처들은 불도를 증득하셨다. 이미 증득한 분, 뒤에 증득할 분은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다고 일컫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세간의 관습에 의해서 삼세를 설한 것으로 각에는 과거, 미래, 현재라는 것은 없습니다. 대덕은 성자의 도를 증득하셨습니까?”

‘얻는 바가 없다는 것을 얻고 있다.“

“모든 부처님도 보살도 그와 같이 얻는 바가 없다는 것을 얻고 계십니다.”

 

 

그때 유마 거사는 사리불에게 이 천녀가 오랫동안 도를 닦아 무엇에나 생멸이 없는 이치를 믿는 지위에 들어 뜻대로 중생을 교도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였다.

문수 보살이 묻기를,

“보살은 여하히 하여 불도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도 아닌 일을 행함이 좋으리라. 역죄(逆罪)를 행하여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괴로움이 없고, 축생도에 이르러도 우치(愚癡)가 없고, 아귀도에 들더라도 공덕을 갖추고, 탐하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집착을 버리고, 노여움을 나타내면서도 마음을 조복 받고, 인색함을 나타내면서도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파계하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작은 죄에까지 두려움을 품고, 아첨하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좋은 방편으로써 법에 계합하고, 교만하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겸손하고, 마도에 들어가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부처의 지혜에 따르고, 풍요한 생활을 하면서 항상 무상을 생각하여 탐하지 않고, 아내를 갖더라도 진흙탕의 욕을 멀리하고 사도에 들면서도 바른 도를 권하고, 열반에 드는 일을 나타내면서도 생사를 끊는 일은 없다. 문수사리여, 이와 같이 도 아닌 일을 행하면 불도에 이를 것이다.”

 

 

“부처가 되는 종자는 무엇인가?”

“모든 외도에 사특한 견해와 모든 번뇌가 부처의 종자이다. 왜냐하면 번뇌를 여의고 열반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부처의 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연화는 고원에 나지 않고 진흙 속에 피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람은 번뇌의 더러움 가운데 불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 종자는 공중에 심으면 날 수가 없지만 비옥한 땅에서는 능히 싹이 트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무위의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불법을 낳을 수가 없으며, 산처럼 큰 아견(我見)을 일으키는 것으로 비로소 도를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불법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번뇌는 부처가 되는 종자인 것이다. 비유컨대, 바다 밑에 내려가지 않으면 보물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번뇌의 바다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체지의 보물을 얻을 수없는 것이다.”

 

 

이때 그 모임 속에 있던 보현색신(普現色身) 보살이 유마에게 묻기를,

“거사여, 거사의 부모, 처자, 친척, 스승이나 벗은 누구인가, 또 하인, 가축, 수레는 어디에 있는가?‘

유마는 게송으로 답하였다.

 

(1) 지혜는 어머니, 방편은 아버지, 뭇 중생을 인도하는 보살은 이 부모로부터 난다.

법의 기쁨은 아내, 자심(慈心)은 딸, 성심은 아들로 공적한 것을 집으로 삼는다. 번뇌는 제자의 뜻대로 따르며, 많은 덕은 선한 지식, 각을 얻음은 이에 의한다.

(2) 기쁨과 베품은 법을 노래하는 기생이랄까? 가르침의 동산에 각의 꽃이 피고 지혜의 열내가 맺네. 신통한 코끼리와 말은 훌륭한 가르침의 수레를 달려 한마음으로 제어하면서 팔정도(八正道)의 길에서 노니네. 참괴는 의복, 마음은 머리의 꽃 장식, 믿음과 계는 보배를 주어 큰 보시를 한다.

(3) 많이 듣고 지혜를 증장하여 감로의 법을 음미하며 용감하게 번뇌의 적을 쳐부셔 도량에 승리의 깃발을 세우네.

모든 국토를 향하여 재난과 싸움을 연(緣)으로 삼아 방편을 다하여 법을 설하고 그 괴로움을 제도하도다. 물에서 연꽃이 나옴과 같이 욕에 있어서도 선정을 행하고 혹은 유녀(遊女)가 되어서는 욕의 갈고리로써 호색가를 이끌어, 끝내는 부처의 지혜에 들게 하리라. 이러한 지극한 지혜에 의해 한없는 도를 행하고 한없는 중생을 제도하니 그 공덕 찬탄하기도 어렵구나.“

 

 

그때 유마는 모든 보살들에게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불이(不二)의 법문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대들의 생각대로 설해 보시오.”

 

 

법자재(法自在)보살 : “생하고 멸하는 두 가지 법은 본래 나는 일도 없고 멸하는 일도 없다. 나는 이 법의 실상을 보는 눈을 얻어 법에 생사의 두 가지가 없는 것을 알고 불이의 법문에 들어갔다.”

 

 

덕수보살 : “아와 아소의 두 가지 아가 있으므로 아소가 있다. 그러므로 아소라는 것도 없어진다는 것을 알면 나는 이 아와 아소의 분별이 없음을 알고 불이의 법문에 들었다.”

 

 

덕정 보살 : “정(正)과 예(譽)의 두가지, 곧 본래 법에는 정과 예가 없다. 정과 예는 마음의 분별상에서 지어지는 데 불과하다. 이와 같이 알고 나는 불이의 법문에 들었다.”

 

 

선안(善眼)보살 : “나는 일상(一相)과 무상(無相)의 두 가지에 의한 만물은 본래 다 같은 하나의 상으로써 거기에는 차별의 상이 없고, 따라서 정한 상이 없다. 게다가 그 정함이 없는 생에도 또한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만물의 평등을 깨닫고 불이의 법문에 들었다.”

 

 

불사(弗沙)보살 : “나는 선과 불선의 두 가지에 대하여 만약 선, 불선의 차별을 일으키지 않고 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면 불이의 법문에 들어갈 수가 있다.”

 

 

사자보살 : “나는 죄와 복의 두 가지에 대하여 참된 지혜를 가지고, 이 두 상을 보면 죄의 성이 그대로 복인 것을 알게 되어 계박(繫縛)도 해탈도 없다. 이것이 불이의 법문에 드는 것이다.”

 

 

정해(淨해)보살 : “나는 유위(有爲)와 무위의 두 가지에 대하여 만약 일체의 분별을 여읜다면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청정한 지혜에 방해가 없다. 곧 유위, 그대로인 것이며, 무위가 얻어지는 이것이 불이의 법문에 드는 것이다.”

 

 

선의(善意)보살 : “나는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에 대하여 가령 생사의 성을 보면 생도 죽음도 없으며 계박도 해탈도 없다. 연소하는 일도 멸하는 일도 없다. 이것이 불이의 법문에 드는 것이다.”

 

 

전천(電天)보살 : “나는 명과 무명의 두 가지에 대하여 무명의 실성(實性)은 명(明)이지만 명에도 또한 집착됨이 없다. 곧 모든 분별을 여읜 평등으로 둘이 아님을 아는 것이 불이의 법문에 드는 것이다.”

 

 

적근(寂根)보살 : “나는 불법승의 삼보에 대하여 부처는 곧 법이요, 법은 곧 승으로 삼보가 다같이 무위의 상으로 허공과 같다. 여기에 이르는 것이 불이의 법문에 드는 것이다.”

 

 

주정(珠頂)보살 : “나는 정도와 사도의 두 가지에 대하여 정도에 있어서는 사(邪)와 정(正)의 분별이 없다. 이 두 가지를 여읜 것이 불이의 법문에 드는 것이다.”

 

 

낙실(樂實)보살 : “나는 실(實)과 불실과의 두 가지에 대하여 참으로 실을 보는 자는 실을 본다는 관념조차 일으키지 않는다. 이 실, 불실의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참으로 실을 본 경계에 든 까닭이다.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지혜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혜의 눈에는 본다 또는 안 본다의 분별이 없다. 이렇게 깨닫는 것이 불이의 법문에 드는 것이다.”

 

 

모든 보살들은 각기 이와 같이 자신의 설을 말하고 나자, 문수에게 물었다. 문수 가로되,

“나의 생각으로는 모든 법에 있어서 말하는 것도 나타내 보이는 것도 아는 것도 없다. 곧 모든 말이나 분별을 여읜 것이 불이의 법문인 것이다.”

끝으로 문수는 유마에게 불이의 법문을 물었다. 그런데도 유마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문수는 이것을 찬양하여 말하기를,

“착하도다, 문자나 말은 없다. 이야말로 참된 불이의 법문에 든 것이다.”

이리하여 많은 보살들은 불이의 법문에 들어, 법에 생멸이 없는 것을 깊이 믿었다.

이에 유마는 문수에게 이야기하였다.

“이제부터 모두 함께 세존께 예하고 미묘한 법을 듣도록 하자.”

문수는 이 말을 듣자 기뻐하며 함께 모였던 대중을 이끌고 암라수원(菴羅樹園)에 계시는 세존 앞에 나아가 공손히 절한 뒤 일심으로 합장하고 한쪽에 섰다.

 

 

세존이 유마에게 물으시기를,

“그대는 부처를 관하고자 하니 부처를 관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유마가 대답하기를,

“부처를 관한다는 것은 내 몸의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불신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미래로 떠나는 것도 아니며 현재에도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도 아니요, 육체의 성질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고 몸에 닿고 생각에도 떠오를 수 없는 것이므로, 망집의 세계를 초월한 것입니다. 탐, 진, 치를 떠나 하나도 아니고 다(多)도 아니며, 자, 타, 유, 무 등 차별 있는 상도 아닙니다. 차안(此岸)에도 피안(彼岸)에도 또 그 중간의 어디에도 있지 않으며, 그럼에도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적멸을 관하되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모든 분별을 떠나 정해진 방소(方所)가 없으나 방소를 떠나지 않으며, 또 유위도 무위도 아닙니다. 나타내는 일도 설하는 일도 없으며 베풀지도 않고 인색하지도 않습니다. 계를 지키지도 않고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참지도 않고 성내지도 않고 나아가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습니다. 정성스럽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으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나가지도 않고 들지도 않으며 진실로 말도 생각도 끊어진 것이 부처입니다. 세존이시여, 불신은 이와 같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관하는 것이 바른 것으로 그렇지 않은 것은 부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제석천이 세존에게 말씀하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까지 많은 법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희유하고 실상을 밝힌 법을 들은 일은 없습니다. 만약 인연 있는 사람이 이 가르침을 믿고 지닌다면, 반드시 이 법을 얻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또 그 사람은 악도의 문을 닫고 모든 선의 문을 열어 여러 부처님들의 두호를 받아 외도를 항복 받고 정각을 닦아 부처가 행한 자취를 밟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 가르침과 같이 행하는 중생을 많은 권속과 함게 공양하고 섬기게 될 것입니다.”

세존이 이를 듣고 말씀하시기를,

“착하도다, 제석이여. 너의 말과 같도다. 나는 너의 기쁨을 도울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유마거사(維摩居士,유마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30-상-유마경-3  (0) 2015.08.22
20-상-유마-2  (0) 2015.08.07
유마힐소설경(상권-1)  (0) 2015.07.29
유마경(維摩經)   (0) 2014.09.13
유마(維摩)   (0) 2014.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