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스승과 바르지 못한 스승 84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은 죽림정사를 나와 서쪽으로 향하여 오랜만에 베나레스의 녹야원에 들어가셨다. 그로부터 교상미(憍賞彌)로 향하는 도중 가시국을 유행하셨는데, 그 길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이여, 나는 오후의 식사를 끊고 하루에 한 끼의 음식을 취하고 나서부터 병도 없고 건강과 평안함을 얻게 되었다. 너희들도 오후의 식사를 끊어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좋으리라.”
세존은 그리고 나서 기타길리라는 가시의 마을로 들어가 잠시 그곳에 머무르셨다.
그때 아설시(阿說示)와 푸나트파스카라는 두 불제자가 기타길리에 살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서,
“아침, 점심, 저녁 세 끼의 식사를 충분히 취해도 병도 나지 않고 건강하니만큼, 굳이 눈앞의 효과가 있는 것을 버리고 결과를 알 수 없는 일에 따를 필요가 없잖는가?”
하며 제자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불평만 점고해 갔다.
제자들이 이 말을 세존께 아뢰었더니, 세존은 그들 두 사람을 불러오게 하여 그 일을 확인하고서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이여, 너희들은 불고 불락의 어떠한 감각을 받더라도 악법이 줄고 선법이 는다고 내가 설법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느냐?”
“세존이시여,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자들이여, 그렇다면 어떤 즐거움의 감각이 악법을 늘리고 선법을 줄이며, 어떤 즐거움의 감각이 선법을 늘리고 악법을 줄이는가. 또 고(苦)와 불고 불락의 감각에 관해서도 같다고 가르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느냐?”
“세존이시여, 말씀하신 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여, 이 일을 내가 알고 깨닫고 시험하지 않고서 설법했다면, 그것은 적절한 것이 못되리라. 그러나 나는 스스로 알고 깨닫고 시험한 일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즐거움의 감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그리고 또 이러한 불고 불락의 감각은 버려라. 그러고 받는 것은 ‘좋다’는 것을 명한다.
제자들이여, 나는 모든 제자들에게 방일하게 행하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해탈한 자는 방일에 빠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건만 더없는 안온을 바라고서 나아가는 자는 법을 좇아 마음을 닦으면 이 현세에 출가의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을 것이므로 나는 이들에게 대해서 방일하지 않도록 말하는 것이니라.
제자들이여, 깨달음은 한꺼번에 얻어지지 않는다. 믿음을 일으켜 스승을 섬기고 법을 듣되 마음에 새기고 그 뜻을 생각하여 깨우치고 부지런히 닦아서 마음을 전일하게 하며, 그것에 의해 이 몸으로 하여금 더할 데 없는 진실을 깨칠 수가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믿음도 없고 섬기는 일도 없고 법을 들어 마음에 새기는 일도 없고 그 뜻을 생각하여 깨우치는 일도 없고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일도 없이 길을 그르치고 사악한 길로 들어가 이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여, 세간에서의 이교의 사제간에도 너희들처럼 이와 같이 하면 그것을 이루리라.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장삿속 같은 짓은 하지 않느니라. 하물며 이 가르침에 있어서는 세존은 스승, 나는 제자, 믿음 있는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꿋꿋한 정진에 의해 도달해야만 할 것을 도달하지 않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게 당연하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는 제자라야 비로소 이 세상에 있어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세존은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가시국을 지나 교상미에 이르러 구사다원(瞿師多園)에 머무르셨다. 그때 유행자인 산다카는 오백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서 피라카 동굴에 기거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나절, 아난은 선정에서 일어나 큰비가 내린 후의 동굴을 보기 위하여 몇 명의 제자를 재촉하여 나섰는데, 산다카는 멀리서 아난이 오는 것을 보자 제자들의 잡담을 중지시키고 조용히 대기하였다. 인사가 끝나고 어째서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를 아난이 묻자, 산다카는 이것을 가로막고서 존자는 친히 스승의 법에 대하여 이야기해 달라고 청했다. 아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산다카여, 지자(知者)이시고 견자(見者)이신 우리 세존은 네 가지의 몹쓸 사행(邪行)과 네 가지의 효험 없는 수행을 설하셨지만, 그 효험이 없고 해로운 일에 중생들이 빠지지 않도록 가르치신다.
산다카여, 세상에는 이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보시도 없다, 공양도 없다, 선악의 업의 과보도 없다, 현세, 내세라는 것도 없다, 부모도 없다, 중생들을 이끄는 사람도 없다. 인간은 죽을 때 본디의 것으로 돌아가고 오관(五官)은 공으로 돌아간다. 네 사람이 관을 메고서 노래를 하며 장례장에 들어가되 뼈는 비바람에 씻기고 공양의 물건은 재로 화한다. 보시를 하라는 건 헛소리이다. 어리석은 자도 현명한 자도 죽으면 없어질 뿐이다’라고 한다.
또 이렇게 떠벌리는 사람도 있다. ‘사람을 죽여도, 사람을 괴롭혀도, 훔치고 빼앗고 음행을 일삼고 거짓말을 하는 일도, 칼날을 달아맨 수레바퀴로 지상의 생물을 모조리 죽이는 것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항하의 남안에서 살생을 하고 항하의 북안에서 보시를 하더라도 죄가 없거니와 공덕도 없다.’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사람이 타락하는 것도 향상하는 것도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다. 이유도 없이 타락도 하고 향상도 한다. 힘도 없다, 면려도 없다, 모두 운명에 의해 저마다 정해진 고락을 받는 것이다’라고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지, 수, 화, 풍(地水火風), 고, 낙, 생명의 일곱 가지 근본은 만든 것도 만들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무엇인가를 낳는 것도 아니고, 봉우리처럼 기둥처럼 단단하여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고 서로 해치지 않고 서로 고락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죽이는 자도 죽임을 당하는 자도 없고, 듣는 자도 들려 주는 자도 없고 아는 자도 알려 주는 자도 없다. 날카로운 검을 갖고서 머리를 베더라도 누구라도 누구의 목숨을 빼앗은 게 아니다. 단지 검은 이 일곱 가지의 한가운데 들어갔을 뿐이다‘라고 한다.
산다카여, 이러한 네 가지 주장에 대하여 마음 있는 자는 생각한다. 만일에 이들의 말하는 바를 진실이라고 한다면, 나는 하지 않고서 이루고 행하지 않고 행한 것이 되며, 이러한 가르침을 생각해 내고 여러 가지 고행을 한다든지 하는 이러한 스승과 처자에 얽매인 채 여러 가지로 욕의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똑같은 깨달음에 도달할 뿐 아니라 내세에서도 깉은 곳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이익이 있어 이 스승 밑에서 청정한 도를 닦을 필요가 있겠는가? 그는 이 가르침이 청정한 행이 아님을 알고서는 버리고 떠나게 되리라. 산다카여, 이것이 네 가지의 몹쓸 사행(邪行)으로서 마음 있는 자가 이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 스승이 가르쳐 주신 것이다.
또 산다카여, 여기에 어떤 스승은 일체지(一切智), 일체견(一切見)이 있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일체의 지견(知見)이 나타나 있다고 말하지만, 빈집에 들어가 음식을 얻지 못하고 개에게 물리든가 마소에 쫓기든가 혹은 여자나 남자가 마을의 이름이나 길을 묻는 등, 평소 말하는 일체 지견에 위배 당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따져 물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변명을 한다. 또 어떤 스승은 옛날부터 있는 가르침을 전해 듣고 그대로 가르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잘 전한 것도 있고 잘못 전해진 것도 있고 옳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또 어떤 스승은 스스로 생각해낸 가르침을 설하고 있지만 그 사고방식에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또 어떤 스승은 어리석고 미치광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질문 받더라도 대답이 어지럽다. 마음 있는 자는 이것을 알고, 이 수행의 무익함을 알고서 싫어하고 떠나게 되리라. 산다카여, 이것이 세존께서 그것에 의지하지 않도록, 의지하더라도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네 가지의 수행이다.“
“존자 아난이여, 말씀대로입니다. 존자여, 다음은 마음 있는 자가 의지해야 할, 그리하여 바른 이익을 얻는 가르침이란 어떤 것입니까?”
“산다카여, 부처가 이 세상에 나타나 설법을 하신다고 듣고 신심을 일으켜 출가하여 수행을 하고 작은 죄라도 겁내며 번뇌를 여의고 선정에 들어 마음을 닦아 지혜를 얻어, ‘내 삶은 끝났다, 청정한 행을 이룩했다,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었다, 이것이 마지막의 생으로써 이 뒤 또다시 망집의 생을 받는 일은 없음을 안다.’제자가 그 스승 밑에서 이와 같은 뛰어난 지위에 도달할 수 있는 가르침이야말로 마음 있는 사람이 오로지 그것에 의해 바른 이익을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존자 아난이시여, 그 번뇌를 멸하고 바른 지혜로써 해탈한 성자의 제자는 욕을 즐기고 맛보는 일도 있사옵니까?”
“산다카여, 그 성자가 된 제자는 알고서 살생하거나 알고서 준 것을 취하거나, 여자와 관계하고 고의로 거짓말을 하고 재가자들이 하듯이 모으고 온갖 욕망에 잠기는 그러한 일은 없다.”
“존자여, 그 성자에게는 행주좌와(行住坐臥)에 항상 번뇌가 없어졌다는 지견(知見)이 나타나 있을까요?”
“산다카여, 나는 이에 비유를 들겠다. 여기에 손발이 잘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언제나 손발이 없는 것이지만 생각이 일어날 때만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지금의 성자도 언제나 번뇌는 없지만, 생각이 일어날 때에 번뇌가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산다카는 제자들을 향해 말하였다.
“너희들은 앞으로 세존 밑에서는 수행을 해도 좋다. 나같이 되면 이양(利養)의 집착을 버리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므로 너희들은 세존께 가서 도를 구하도록 하라.”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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