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1120-224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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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이치답게 생각하여서
많은 번뇌를 쉬어버리고
모든 법 평등함을 관찰하고서
성스러운 도행을 잘 닦아 익히며
옳은 법이니 그른 법이니 모든 법상(法相)에
모든 상(相)에 대해 집착하지 않으면
온갖 걱정과 두려움 해탈하리니
크게 청정한 이가 말한 바라네.
비고 탁 트여 청정한 허공 같으며
환술(幻術) 같고 꿈 같다고
갖가지 법을 잘 알면
생사의 바다를 벗어나리라.
만일 방일하여 업을 지으면
모든 존재의 세계를 윤회하리니
대비심으로 중생을 불쌍히 여겨
해탈을 증득케 하고자 함일세.
열 가지 힘을 지닌 모니존(牟尼尊)이
생사의 세계에서 교화하는 법
이것이 네 번째 두려움 없음이니
청정하기 허공과 같다네.
“이와 같아서 사리자야, 이것이 여래의 부사의한 두려움 없음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의심함 없이 더 나아가서는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그 때에 부처님께서 다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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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여래의 부사의한 대비(大悲)를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나아가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게 되는가? 사리자야, 모든 부처님 여래의 대비심은 항상 굴러 끊임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 여래는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 까닭이며, 언제든지 일체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까닭에 대비가 항상 일어나 쉬지 않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여래의 대비는 이처럼 한량없으며, 이처럼 불가사의하며, 이처럼 무엇으로 비교할 데 없으며, 이처럼 끝이 없으며, 이처럼 말할 수 없으며, 이처럼 매우 예리하며, 이처럼 오랫동안 모든 중생이 따르나니, 나아가 여래의 일체 말의 업[語業]으로도 이 대비심을 또한 선설하기 어려우리라. 왜냐하면 마치 여래가 보리를 증득한 것이 불가사의하듯이 여래가 모든 중생에게 대비심을 일으킨 것도 또한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이 여래가 보리를 증득함인가? 사리자야, 마치 여래가 이러한 뿌리[根]도 없고 머묾[住]도 없는 경계에 들어가는 까닭에 보리를 증득하는 것과 같으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뿌리라 하며, 어떤 것을 머묾이라 하는가? 몸이 있다는 견해가 뿌리가 되고, 허망 분별이 머묾이 되나니 여래는 이 두 가지 법을 평등하게 알아 깨달았느니라. 이러므로 여래가 뿌리도 없고 머묾도 없는 경계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건만 일체 중생은 이러한 두 가지 법을 알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와 같은 뿌리도 없고 머묾도 없는 법을 알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하느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라는 것은 그 자성이 적정(寂靜)하느니라. 어떤 것을 적정의 두 가지 법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안을 적(寂)이라 하고, 밖을 정(靜)이라 하느니라. 왜냐하면 눈의 자성이 공(空)하여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여의었으며 이와 같이 귀·코·혀·몸·뜻의 자성이 공하여 나와 나의 것을 여의었나니, 만일 이렇게 알면 그것을 적(寂)이라 이름하느니라. 여실히 눈의 자성이 공한 줄을 알고는 빛깔 경계에 끌려가지 아니하며, 나아가 여실히 뜻의 자성이 공한 줄을 알고는 법에 끌려가지 아니하나니 만일 이렇게 알면 그것을 정(靜)이라고 하나니, 모든 중생들이 이 적과 정 두 가지 법을 능히 알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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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적정의 두 가지 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내가 보리의 자성이 청정한 것을 증득하였나니, 어떤 것을 자성 청정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보리의 자성은 물들어 더러움이 없으며 보리의 자성은 허공과 같으며, 보리의 자성은 곧 허공의 성품이라 보리의 자성은 허공과 같아서 보리와 허공이 똑같이 평등하여 마침내 청정하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이러한 자성의 청정함을 깨닫지 못하고 객진(客塵) 번뇌에 물들어 더럽히게 되었나니, 중생들은 이 자성의 청정함을 능히 알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자성의 청정함을 알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나는 들어갈[入] 것도 없고 나갈[出] 것도 없는 보리를 증득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들어가고 나가는 두 가지 법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이른바 들어간다 함은 모든 법에 집착하는 것이요, 나간다 함은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라. 여래는 들어감도 없고 나감도 없는 평등한 법성을 밝게 보나니 마치 여래가 먼 것도 없고 피안도 없다고 밝게 보는 것과 같으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성은 먼 것과 피안을 여읜 것이기 때문이니, 능히 이런 법을 증득하였으므로 여래라고 하느니라. 중생들이 이 들어감도 없고 나감도 없는 법성을 능히 깨달아 알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내어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들어감도 없고 나감도 없는 법을 깨달아 알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나는 보리가 형상 없고 경계 없는 이치를 증득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형상 없고 경계 없는 것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안식(眼識)을 얻을 수 없는 것을 형상 없는 것이라 하고 빛깔을 보지 않는 것을 경계 없는 것이라 하며, 나아가 의식(意識)을 얻을 수 없는 것을 형상 없는 것이라 하고 법을 보지 않는 것을 경계 없는 것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형상 없고 경계 없는 것은 여러 성인의 행하는 바이니라. 어떤 것을 행하는가? 삼계의 어리석은 범부는 성인들의 행하는 것을 능히 행하지 못하는 까닭에 형상 없고 경계 없는 것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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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고 경계 없는 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라는 것은 과거·미래·현재가 아니라 3세가 평등하고 세 가지 모양[三相]의 바퀴가 끊어졌느니라. 어떤 것을 세 가지 모양의 바퀴가 끊어졌다고 하는가? 사리자야, 과거세에 마음을 돌아보아 굴림이 없고 미래세에 식(識)이 향하여 나아감이 없으며 현재세에 뜻이 활동함이 없나니, 이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이 편안히 머무는 곳이 없이 과거를 분별하지 아니하고 미래를 집착하지 아니하고 현재를 희론하지 아니하건만 중생들은 능히 3세(世)의 자성이 평등하고 3륜(輪)이 청정한 줄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3세의 3륜이 평등하고 청정함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나는 보리가 함이 없고[無爲] 자성이 없는[無性] 이치를 증득하였느니라. 무엇 때문에 함이 없고 자성이 없다고 하는가? 사리자야, 이 보리의 자성은 안식으로 알 것이 아니며 나아가 의식으로 알 것이 아니니라. 함이 없다는 것은 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며 또한 머묾도 없나니 세 가지의 모습을 길이 여읜 까닭에 함이 없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함이 없는 자성을 알면 마땅히 함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성이 곧 자성이 없는 것이니 자성이 없다는 것은 곧 자체가 둘이 없는 것이니라. 중생들이 이 자성 없고 함이 없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자성 없고 함이 없는 이치를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나는 보리의 차별의 자취[跡]가 없는 것을 증득하였느니라. 무슨 까닭에 차별의 자취가 없다고 하는가? 사리자야, 진여와 법성, 둘을 함께 자취라 이름하나니 자성[性]이 별 다름이 없고 자성이 편안히 머무름이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모든 법의 실제를 이름하여 자취라 하나니 자성이 흔들림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고 하느니라. 모든 법의 공한 성품[空性]을 자취라 하나니 자성이 얻을 것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모든 법이 형상이 없는 것을 자취라 하나니 자성을 가히 찾을 수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모든 법이 바람[願] 없는 것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자성이 일어남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중생의 자성[性]이 없는 것을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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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다 이름하나니 그 체성이 이름이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이 허공과 같은 모습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자성을 가히 얻을 수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그 자성이 남이 없는[無生] 것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그 자성이 멸함이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그 자성이 함이 없는 것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자성이 가거나 머묾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보리의 모습이라 하는 것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그 성품이 적정한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열반의 모습이라 하는 것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그 성품이 남이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중생들이 능히 차별의 자취 없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차별의 자취 없는 이치를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는 몸으로 증득하지 못하며 마음으로 증득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몸 자체는 아는 것도 없고 작용도 없는 것이 마치 풀·나무·담벽·자갈돌의 빛과 같으며 마음의 자성도 또한 그러하여 마치 환술이나 아지랑이와 물 속의 달 그림자와 같나니, 만일 능히 이렇게 몸과 마음을 깨달으면 이것을 보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다만 세속의 언설로써 임시로 보리라고 이름지었을 뿐 보리의 실다운 성품[實性]은 말할 수 없으며, 몸으로 얻을 수 없으며, 마음으로 얻을 수 없으며, 법으로 얻을 수 없으며, 법 아닌 것으로 얻을 수 없으며, 진실로써 얻을 수 없으며, 진실 아닌 것으로 얻을 수도 없으며, 진리[諦]로써 얻을 수 없으며, 거짓[妄]으로써 얻을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보리의 자성은 말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또한 일체 법의 형상을 여읜 까닭이니라. 또 보리의 형상은 말로 통달할 수 없나니 마치 허공이 형상 없는 것이므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사리자야, 여실히 모든 법이 다 말이 없다고 관찰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 가운데에는 말이 없으며 말 가운데 또한 모든 법이 없기 때문이니, 중생들이 이러한 모든 법의 이치[理趣]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는 결정코 모든 법의 이치를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진실한 뜻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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