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적경(大寶積經)

대보적경-1125-225

근와(槿瓦) 2017. 3. 1. 02:42

대보적경-1125-225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121 / 3476]

다시 사리자야, 보리는 취할 것도 없고 가릴 것도 없느니라. 어떤 것을 취할 것도 없고 가릴 것도 없다고 하는가? 사리자야, 눈의 자성을 훤히 알므로 취할 것이 없고 빛깔의 경계를 보지 않으므로 가릴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여래가 이 보리의 취할 것도 없고 가릴 것도 없는 것을 증득하였으므로 눈에 취하지 아니하고 빛깔에 가리우지 아니하며 식()에 머물지 않느니라. 나아가 뜻에 취하지 아니하고 법에 가리우지 아니하며 식에 머물지 않느니라.


비록 식에 머물지 아니하나 능히 일체 중생의 마음의 머무는 것을 훤히 아느니라. 어떻게 훤히 아는가? 중생의 마음은 네 가지의 법에 머무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일체 중생의 마음이 의식[]에 머물고 마음이 느낌[]에 머물며, 마음이 생각[]에 머물고 마음이 지어감[]에 머무르느니라. 여래는 이와 같이 여실히 머무름과 머물지 않음을 훤히 알거늘 중생들은 능히 머무름 없는 진실의 바닥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머무름 없는 진실한 궁극의 법[實際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라는 것은 공()의 다른 이름이니라. 공조차 빈 것이기 때문에[空空] 보리도 또한 비었으며, 보리가 비었으므로 모든 법도 또한 비었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그 공성(空性)과 같이 모든 법을 깨닫나니 공으로 말미암아 법의 공성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묘한 이치를 사무친 지혜로 말미암아 법의 성품이 공함을 깨달은 것이니 공과 보리가 성품이 둘이 없으며 둘이 없으므로 '이것은 보리다, 이것은 공성이다'라고 말할 수 없나니 만일 둘이 있다면 '이것은 보리다, 이것은 공성이다'라고 말하겠지만, 법이 둘이 없으며 두 가지 모양이 없이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지어감[]도 없으며 마침내 지어감도 아니며 또한 현재에 지어감[現行]도 아니니라.


공이란 것은 집착을 멀리 여의었고 승의제(勝義諦) 가운데는 아무 법도 얻을 것이 없나니 자성이 비었으므로 공이라고 이름함이니, 마치 텅 비인 공간[太虛]을 허공이라고 말하지만 텅 비인 공간의 자성은 말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공한 법을 공이라고 이름하지만 그 공성은 말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깨달으면 모든 법이 실로 이름이 없건만 거짓 이름과 말을 세웠을 뿐이니라. 그러나 모든 법의 이름은 어떤 방위와 처소가 없나니 이름으로 모든 법을 나


                                                                            [1122 / 3476]

타내지만 이 법이 방위도 없고 처소도 없는 것이 또한 그러하니라. 여래는 모든 법에 본래부터 난 것도 없고 일어남도 없는 것을 훤히 아나니 이렇게 알고는 해탈을 증득하지만 그 실다운 성품은 얽음도 없고 벗어남도 없거늘 어리석은 범부들은 능히 이 보리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보리의 실다운 성품을 깨치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의 성품은 태허(太虛)와 같나니, 그러나 태허의 성품은 무엇과 같다거나 같지 않다거나 할 것이 없듯이 보리도 또한 그러하여 무엇과 같다거나 같지 않다거나 할 수 없나니 마치 모든 법의 성품이 어떤 실체가 없으므로 그것이 무엇과 같다거나 같지 않다거나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사리자야, 여래는 모든 법이 그 성품이 평등하여 평등하지 않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으며, 여실히 어떤 법이 평등하다거나 평등하지 않다거나 할 것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느니라. 이와 같이 여래는 여실한 지혜의 양()으로 모든 법의 양을 다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여실한 지혜라 하는가? 모든 법이 근본 없는 데서 생겨났으며 나고는 이미 여의어 흩어지나니, 주재자[] 없이 났다가 주재자 없이 흩어져서 나거나 흩어짐이 여러 인연 따라 옮겨가며 이 가운데 한가지 법도 혹 옮겨가거나 혹 돌아오거나 따라 옮겨가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길[]을 끊기 위하여 미묘한 법을 설한다고 말하나니, 모든 중생들이 능히 모든 길 끊는 법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모든 길을 끊는 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란 것은 곧 이것이 진여의 법구[如句]니라. 어떤 것을 진여구(眞如句)의 모습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보리의 모습과 같이 모든 물질의 모습[色相]도 또한 그러하여 저 진여와 같이 물러감이 있거나 두루 이르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또한 그러하여 저 진여와 같이 두루 이르지 않음이 없느니라.
사리자야, 보리의 모습이 저 진여와 같듯이 4대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진여와 같이 물러감이 있거나 두루 이르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보리의 성품이 저 진여와 같듯이 눈의 경계·빛깔의 경계 및 안식(眼識)의 경계와 나


                                                                            [1123 / 3476]

아가 뜻의 경계·법의 경계 및 의식(意識)의 경계도 또한 그러하니라. 보리의 모습이 다만 임시로 시설한 것과 같아서 일체의 법인 온(:5(:18(:12) 등도 다만 거짓 명목일 뿐 또한 그러하나니, 이러한 모습을 아는 것을 진여의 법구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여래는 일체를 여실히 깨닫고 뒤바뀌게 깨닫지 아니하나니 처음[前際]과 같이 중간[中際]이나 나중[後際]도 또한 그러하니라. 왜냐하면 전제가 난 것이 없으므로 후제는 나감[]이 없고 중제는 멀리 여의었나니 이러한 일체를 진여의 법구라 하느니라. 이 한 법구와 같이 일체가 또한 그러하며 이 일체와 같이 한 구도 또한 그러하여 진여의 성품[如性] 가운데 하나의 성품과 많다는 성품을 얻을 수 없느니라. 중생들이 이 진여구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진여의 법구를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란 것은 행()에 들어가며 또한 행함 없는 데 들어가는 것을 말하나니, 어떤 것을 행 및 행함 없는 것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착한 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행이라 하고 일체의 법을 가히 얻지 못하는 것을 행함 없다 하느니라. 머무르지 않는 마음에 머무름을 행이라 하고 형상 없는 삼마지 해탈문을 행함 없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른바 행이라 함은 헤아리고 계교하는 방법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요, 행함 없다 함은 헤아림 등을 넘어선 것[]이니라. 어찌하여 헤아림을 넘어선다고 하는가? 어디서나 모든 인식 작용의 업()이 없는 까닭이니라. 사리자야, 행이라 함은 이곳에서 함 있는 법을 관찰하는 것이요, 행함 없다 함은 이곳에서 함이 없는 법을 증득함이니라. 어리석은 범부는 능히 행과 행 아닌 데 들어가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내가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행과 행 아닌 데 들어가는 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란 것은 흐름도 없고 취착함도 없나니 어떤 것을 흐름도 없고 취착함도 없다고 하는가? 사리자야, 네 가지 흐름[四流]의 성품을 여의므로 흐름이 없다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욕심에 대한 흐름[欲流]의 성품을 여의며, 존재[]에 대한 흐름의 성품을 여의며, 무명(無明)


                                                                            [1124 / 3476]

에 대한 흐름의 성품을 여의며, 견해[]에 대한 흐름의 성품을 여읨이니라.
사리자야, 네 가지의 취착하는 성품을 여의므로 취착함이 없다고 하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욕심[]에 대한 취착의 성품을 여의며, 존재[]에 대한 취착의 성품을 여의며, 견해[]에 대한 취착의 성품을 여의며, ()에 대한 취착의 성품을 여읨이니라.
사리자야, 이러한 네 가지의 취착은 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캄캄한 애욕의 물웅덩이에 빨려 들어가서 나를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온··계를 받게 되었나니, 여래는 그 가운데 여실히 아취(我取)의 근본을 알고 스스로 청정을 증득하고 또한 중생에게 청정을 증득하게 하느니라.
사리자야, 여래가 이미 이러한 청정을 증득하였으므로 모든 법에 분별함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사리자야, 이 분별로 말미암아 이치답지 못한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니라. 이곳에 다만 이치가 같이 서로 응하는 까닭에 무명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무명을 일으키지 아니하므로 능히 12유지(有支)를 끌어 일으키지 않느니라. 만일 12유지를 일으키지 아니하면 곧 남[]이 없고 만일 남이 없다면 이것은 결정됨이요, 만일 결정되었다면 이것은 곧 분명한 이치[了義], 만일 분명한 이치라면 이것은 곧 승의제[勝義], 만일 승의제라면 곧 사람 없는 뜻이요, 사람 없는 뜻은 곧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곧 연기(緣起)의 뜻이요, 연기의 뜻은 곧 이것이 법의 뜻이요, 법의 뜻은 곧 여래의 뜻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능히 이렇게 연기를 관하는 이는 곧 이것은 법을 관하는 것이요, 만일 법을 관한 이는 곧 여래를 관하는 것이니 이렇게 관하는 것은 진여를 여의어서 그 밖에 관할 것이 없느니라.
이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느냐? 말하자면 상()과 연()이니라. 이 두 가지 법에 만일 능히 상도 없고 연도 없는 것을 관하면 곧 진실하게 여래를 관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모든 법 평등한 이치를 깨달으므로 평등하나니, 어리석은 범부들이 능히 이 흐름이 없고 취착할 것 없는 성품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흐름이 없고 취착할 것이 없는 성품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란 것은 그 성품이 청정하여 때[]가 없고 집착이 없


                                                                            [1125 / 3476]

느니라. 어떤 것을 청정하며 때가 없고 또한 집착이 없다 하는가? 사리자야, 공한 까닭에 청정하고 형상이 없는 까닭에 때가 없고 바라는 것이 없는 까닭에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남이 없으므로 청정하고 지음이 없으므로 때가 없고 취함이 없으므로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제 성품인 까닭에 청정하고 두루 깨끗한 까닭에 때가 없으며 빛나고 순수하므로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희론이 없으므로 청정하고 희론을 여읜 까닭에 때가 없고 희론이 적정하므로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진여인 까닭에 청정하고 법계인 까닭에 때가 없고 실제(實際)인 까닭에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비고 고요한 까닭에 청정하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때가 없고 공적한 까닭에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안으로 두루 안 까닭에 청정하고 밖으론 지어감이 없는 까닭에 때가 없고 안팎이 얻을 수 없으므로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5)을 두루 안 까닭에 청정하고 계(:18)의 자체인 까닭에 때가 없고 처(:12)를 덜어 없앤 까닭에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과거는 다한 지혜[盡智]이므로 청정하고 미래는 생사 없는 지혜[無生智]이므로 때가 없고 현재는 법계에 항상 머무는 지혜[法界住智]이므로 집착이 없느니라.
사리자야, 이렇게 청정하고 때가 없고 집착이 없는 성품이 동일하게 하나의 법구로 들어가나니, 하나의 법구는 적정구(寂靜句)이며 모두가 적정하면 곧 지극히 적정[極寂靜]하며 지극히 적정하면 곧 두루 적정[遍寂靜]하며 두루 적정하면 대모니(大牟尼)라 이름하느니라.
사리자야, 마치 태허(太虛)와 같이 보리도 또한 그러하니라. 보리의 성품과 같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며, 모든 법의 성품과 같이 진실(眞實)도 또한 그러하며, 진실의 성품과 같이 국토도 또한 그러하며, 국토의 성품과 같이 열반도 또한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열반을 모든 법 평등이라 하며 또한 구경(究竟)이라 이름하나니, 경계와 끝의 모양이 없는 까닭에 상대하여 다스릴...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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