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안을 열고 자유인이 되어라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불기 2527년 음 1월 1일)
조계종 이성철 종정(李性徹 宗正73세) 스님을 뵙고 새해에 불교인들에게 주는 법어를 청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출발할 때 연말이라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필자는 여간 곤혹을 치룬 것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차에 올라 좌석에 앉으니 문득 해인사를 생각하면 연상되곤 하던 사내 팔봉(八峰)이 떠올랐다. 그 사내는 지금부터 10여년 전 해인사에서 생활을 한 스님들이라면 거의 기억할 수 있는 걸인(乞人)이었다. 인물 묘사를 한다면 그는 땅딸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뼈마디가 굵은 사지, 굵직한 음성, 사부 정도의 더부룩한 머리, 주먹코, 무지스러워 보이나 순박하게 느껴지는 40대 초반의, 그러나 앞을 못보는 맹인이었다. 팔봉은 사시사철 발등까지 내려오는 시커멓게 때가 절은 검은색 외투를 걸치고, 굵다란 지팡이를 짚고서는 해인사 큰절로 오르는 길의 약수암 입구 쪽의 고목나무 밑에 앉거나 서서 오가는 행인이 있을라치면 큰소리로 외쳤다.
「한 푼 줍쇼. 야, 한푼 주란 말이요!」
그러나 행인이 어쩌다 수도자들이면 팔봉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자신의 먼지뿐인 텅 빈 호주머니를 의식하고는 침울한 음성으로「나무아미타불」하고 불호를 외워 주었다. 그러면 팔봉은 만면에 희색을 띠고 불쑥 내민 손바닥을 얼른 거두고는 메아리처럼 답했다.
「나무아미타불」
필자가 70년 초 해인사 산문을 떠나올 때 소문에 의하면, 팔봉은 해인사를 찾는 순례객들로부터 적선금을 모아 알부자 소리를 듣게 되었고 조만간에 젊고 예쁜 아내를 맞이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그때 그가 소문대로 결혼하였으면 지금쯤은 구걸행각을 하지 않고 어엿한 가장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과 따뜻한 밥상을 받으리라. 필자는 그러한 팔봉을 상상하고 이번 해인사 길에 그를 한 번 우연이라도 만났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이렇게 인사를 하고 싶었다.
「나무아미타불 - 안녕하세요」
해인사가 자리잡고 있는 가야산은 언제부터 눈이 내렸는 지 설국(雪國)을 이루고 있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산길을 허위허위 걸어 종정예하께서 주석하시는 백련암 염화실(拈花室)을 찾았을 때 종정예하는 누더기를 입으시고 깊은 선삼매에 들어 있었다. 필자의 오체투지의 예를 잔잔한 자비의 미소로 받아들이는 종정예하께 저간의 문후와 찾아온 사유를 말씀드렸다.
「응, 건강은 그런대로 괜찮지. 얼마전에 발목을 조금 다쳤지. 이젠 다 나았어. 괜찮아. 눈길에 오느라 고생이 많았구나.」
종정예하께서 발목 다친 사유를 뒤에 시자를 통해 들으니 사하촌의 어린이들과 함께 뛰노시다가 눈길에 다치셨다는 것이었다. 한국 고승의 천진무구한 모습이 눈앞에 선해 왔다. 송구스러운 표현이지만, 종정예하께서는 어린이들을 만나면 함께 박장대소하고 술래잡기까지 하신다는 것이다. 조계종 종정이 어린이들의 다정한 벗인 것이다.
필자의 말 - 저희 불교사에서는 종정스님을 모시고 새해의 좋은 말씀을 지상을 통하여 불교계에 전하
고자 합니다. 안거중에 대단히 죄송합니다. 먼저 새해들어 바람직한 수도자의 상에 대하여
말씀을..... [필자 : 陳闡提(조계종 종정 사서실장)]
중생을 위한 영원한 기도.
새삼 바람직한 수도자상이 어디 있겠느냐?
모든 제방의 스님들이 모두 여법히 수행하며 보살도를 행하고 있지 않느냐. 허나 너에게 헛걸음을 시키지 않는 뜻에서라면, 새해에는 첫째, 수행자들이 자기 수행에 더욱 전력을 다하여야겠다. 자기 수행이 부족한 가운데 사람들은 종종 시비가 생기는 것 같다. 부처님 말씀에도 사람몸 받기 어렵고(入身難得), 불법 만나기가 어렵다(佛法難逢)잖느냐? 요즘들어 일부 수행자가 대각의 본원을 망각하고 무사안일과 더 나아가 세속화되는 경향이 있다더구나. 큰일이지. 마음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 시대는 사람들이 자칫 물질에 치우치면 그것에 끌리게 되어 인간본연의 이성을 상실하게 되고, 이성을 상실하니까 자연히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도덕과 윤리에 어긋난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 근본원인을 생각해보면 서양의 물질문명을 너무 맹종하기 때문에서 오는 병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병이 온 국가에 만연되면 세상은 갈수록 인정이 메말라 가고 살벌한 세상이 되어 버린다. 이 병을 고치려면 바로 불교의 정신, 자비와 보시 정신을 우선 사람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나는 전적으로 물질 자체를 배제하려는 것은 아니다. 정신이 주(主)가 되고 물질이 종(從)이 되는 관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념이 불교 정신인 바 국민의식 속에 뿌리를 내릴 때 국가는 안정되고 번영하며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바로 그러한 불교정신을 앞장서서 선양해야 할 사람이 바로 오늘의 수행자들이다. 항간에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수도승이라면 절에서 명(命)과 복(福)을 빌어주는 것으로만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는 이가 있다.
그러나 진정 수도승들의 세상을 향한 올바른 역할은 대승(大乘)불교의 보살사상(菩薩思想)의 원력으로 팔만세행(八萬細行)을 통하여 중생들을 제도하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 즉, 대자대비를 실천하는 것이고 인류구제의 정도일 것이다.
중생들을 제도하는 원력 앞에 생 · 사에 대한 공포(恐怖)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수도승은 미래제(未來際)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자신의 성불을 늦추며, 중생들을 한명도 남김없이 제도해 마치겠다는 홍원(弘願)을 세우고 지옥문전에 서서 그 눈가에 자비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는 지장보살(地藏菩薩)처럼, 현세의 자신만을 위한 안주(安住)보다는 중생을 위한 영원한 기도와 실천이 어느 하늘 아래, 어떠한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출전 : 큰빛 큰지혜(성철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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