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이야기(女僧)

질기고 질긴 숙세(宿世)의 인연

근와(槿瓦) 2016. 7. 15. 10:01

질기고 질긴 숙세(宿世)의 인연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훗날의 청담, 순호스님은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으로 인한 한 번의 파계가 늘 마음에 걸렸다. 장장 10여년에 걸친 고행을 통해 처절한 참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늘 천근의 쇳덩이를 짊어진 것처럼 무거웠다. 그렇다고 해서 스님은 결코 자랑일 수 없는 이 파계행위를 굳이 숨기려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성철스님에게 자신의 처지를 허물없이 털어놓고 의논했던 것이다.


순호스님의 깊은 뜻을 헤아린 옛 아내 차씨부인은 둘째딸 인순이를 타일러서 흔쾌히 보내주었다. 순호스님이 어머니를 삭발출가시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진주 속가에 들렀을 때 둘째딸 인순이는 아홉 살이었다. 인순이는 어느덧 큰 처녀가 되어 단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한 스님에게 첫 인사를 올렸다.


“……그래……네가 인순이더냐?”

“……예, 스님.”

“먼길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겠구나,……고단하지?”

“아, 아니옵니다. 스님, 괜찮습니다.”

“네 어머니는 잘 계시구?”

“……예.”

“네 언니도 별일 없구?”

“예, 스님.”


옆에서 아버지와 딸의 만남을 지켜보고 있던 성철스님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말끝마다 스님, 스님하지 말고 아버지라고 한 번 불러봐라.”


성철스님의 말에 인순이는 훌쩍거리며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성철스님은 재촉했다.

“아, 어서 한번 불러봐. 여기 계신 이 스님이 바로 네 아버지시다.”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앉아 있던 인순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가……그렇게 이르더란 말이냐?”

순호스님이 딸아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요…….”

“느이 어머니께서 스님이라 부르라고 그렇게 이르셨단 말이냐?”

“……예…….”


성철스님은 목을 뒤로 젖혀 한바탕 웃고나서 말했다.

“허허……장보다 뚝배기 맛이라더니, 늬 어머님이 늬 아버지보다 한 수 위시로구나. 그래, 응? ……자, 오늘은 고단할테니 날 따라 오너라. 이 스님이 쉴 방을 가르쳐주마. ……그만 일어나.”

“……예, 그럼 편히 쉬십시오, 스님.”


둘째딸 인순이는 끝내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 스님 따라서 가거라.”


성철스님이 인순이를 데리고 객실로 간 뒤, 순호스님은 방을 나와 뒤뜰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두 눈에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고여 별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인순이를 산에 데려오기는 했으나, 순호스님은 자신의 입으로 딸에게, 머리깎고 여승(女僧)이 되라는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아버지로서의 괴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은 성철스님이었다.


성철스님이 순호스님 대신 이 괴로운 역을 떠맡아 주었다.

“얘야, 나 좀 보거라.”

“예, 스님…….”

“너 거기서 무얼하고 있었더냐?”

“뻐꾸기 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 뻐꾸기 소리가 즐겁게 들리느냐, 슬프게 들리느냐?”

“구슬프게 들립니다, 스님.”

“구슬프게 들린다?”

“……예, 스님.”

“네 이름이 인순이라고 했더냐?”

“예. 어질 인자, 순종할 순자 인순이옵니다.”


“이번에 네 아버지는 몇 번째 뵙는 것인고?”

“……세 번째 뵙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라구?”

“예……처음에는 세 살적인가 네 살적에 한 번 뵈었구요……두 번째는 할머니 모시러 오셨을 때 뵈었구요…….”

“……그래, 아직 한 번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했었느냐?”

“……예.”


성철스님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인순아…….”

“……예, 스님.”

“너 여기 올 때, 네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면서 가라고 하시더냐?”

“아버지이신 순호스님께서 널 한 번 보고싶어 하시니 다녀오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밖에 달리 무슨 말씀은 없으셨느냐?”

“예…… 하지만 스님이라고 불러야지 아버지라고 부르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주셨습니다.”

“그래……그러셨구나……헌데 말이다, 인순아…….”

“예, 스님.”


“네 아버지하고 나는 물을 부어도 새지않는 그런 사이다……말하자면 그렇게 흉허물이 없이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얘기다.”

“……예…….”

“내 그래서 하는 얘기다만, 너……여기서 머리깎고 공부하는 게 어떻겠느냐, 응?”

“……예에? 절더러 머리깎고 여승이 되라구요?”

성철스님은 언젠가는 꼭 해야될 말을 하고야 말았다. 인순이의 표정은 놀라면서도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어른들의 깊은 뜻을 짐작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스님이 되어 계시는 아버지께서 보고싶다 하시니, 다녀오라는 말만 듣고 절에 찾아왔던 둘째딸은 성철스님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스님, 스님께서 방금 저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놀랄건 없다. 널더러 꼭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라는건 아니니까…….”

“하지만 방금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스님?”

“얘, 인순아.”

“……예, 스님.”

“인순이 너는 진주에 살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계획이었느냐?”


성철스님은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어떤 일을 할 계획이라니요?”

“시집을 가려고 마음 먹었다든가, 아니면 집에서 어머니 농사일을 도우려 했다든가, 공부를 더 계속하고 싶었다든가 하여튼 무슨 생각이 있었을 것 아니냐? 그렇지?”

“……예.”

“그래,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고?”

“……상급학교에 진학해서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싶었어요. 가정 형편이 허락만 한다면요…….”

인순이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래……그것 참 좋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제마음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란다.”

“……예 스님, 저도 이제는 그걸 알아요. 이만큼 절 키우시느라고 어머니 혼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요…….”

“그래, 네 어머니께서 정말 고생이 많으셨을게야. ……그리고 또 요즘 세상 살아나가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만 있다.”


인순이의 눈망울에는 금방이라도 쏟아 내릴 듯한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포기해야 했던 소녀의 마음이야 오죽하랴. 성철스님도 인순이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듯, 얼른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뒷짐을 진 채 먼산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인순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나요, 스님.”


인순이의 목소리는 알지못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물기에 젖어있는 눈망울은 맑았지만 눈동자 역시 가늘게 떨고 있었다. 이러한 인순이의 얼굴을 내려보면서, 성철스님은 대뜸 물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질문이었다.

“혼인을 하겠느냐?”

“아녜요 스님, 그런건 아직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성철스님은 목을 한번 가다듬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얘기다만, 절에서 공부를 하게 되면 시집을 안 가도 되고, 게다가 절에서 배우면 일본 유학가는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어.”

“정말 절에서도 공부를 배울 수 있나요, 스님?”

“암 배우고 말고……불경도 배우고 공자, 맹자, 장자도 배우고 어디 그뿐이겠느냐? 역사, 지리, 철학에 붓글씨까지 다 배울 수 있지……너 참 이거 한번 읽어보아라.”


성철스님은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그 종이에는 ‘평양(平壤)’이라는 한문 두 글자가 적혀있었다.

“이건 <헤이죠>라고 배웠는데요, 스님.”

“그것봐라, 일본놈들이 우리 아이들 말짱 다 버려놨어. 너희들은 학교에서 조선말은 한 글자도 배우지 못했지?”

“……예, 스님.”

“이건 <평양>이라고 읽어야 하는데 왜놈들 식으로 <헤이죠>라고만 가르쳤으니, 어디 이것뿐이겠느냐? 일본아이들이 우리 역사도 날조를 해서 거짓으로 가르쳤어. 공부를 배우더라도 바른 공부를 배워야 하는게야.”


“그럼 스님, 제 아버님 의향도 같으신가요?”

“……글쎄다, 그건 인순이 네가 직접 한번 여쭤보도록 하는게 어떻겠느냐?”

“예 스님, 그럼 제가 한번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녁공양을 마치고나서, 순호스님은 둘째딸 인순이와 마주앉게 되었다.

“그래, 철스님의 말씀을 잘 들었단 말이지?”

“……예, 스님.”

“그러면 인순이 네 생각은 과연 어떠한고?”

“……저에게 더 많은 공부를 시켜 주시기 위해서 절에 있으라고 하시는 건가요, 스님?”

인순이는 묻는 말에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오히려 반문했다.


“꼭 그것만은 아니다만…….”

“그러시면 시집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시는 건가요?”

“물론 그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겠다마는 꼭 그 때문만은 아니야.”

“하오면 또 다른 까닭이 있으신가요 스님?”

해야할 말을 얼른 꺼내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리는 순호스님 앞에서, 인순이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순호스님이 생각해 왔던 것 보다는 훨씬 끈질기고 대담한 면이 있었다.


“……여자가 혼인을 해서 시부모 모시고 남편 봉양하고 자식들 키우며 일가를 이루고 사는 것, 물론 그것도 좋은 일이겠지만 거기에는 온갖 근심걱정이 그칠 날이 없는 법. 난 네가 부처님 제자가 되어 평생토록 부처님 시봉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고 깨달아 저 사바세계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따뜻이 보살펴주고 구해주는 그런 수행자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내 생각은…….”

“하오면 절더러 머리깎고 여승이 되라는 말씀이시옵니까요, 스님?”

“어거지로 수행자가 되라는 건 아니다. 며칠 더 쉬면서 잘 한번 생각해 보아라.”


다음날부터 인순이는 성철스님으로부터 조선역사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양역사 동양역사까지도 재미있고 알기쉽게 비교해가며 설명해 주는 성철스님의 해박한 지식에 인순이는 그만 넋을 잃을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홍경스님은 인순이에게 붓글씨를 지도했는데, 한 획, 한 획 붓을 놀리며 글자를 배우는 재미에 인순이의 마음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성철스님은 인순이를 불렀다.

“얘, 인순아.”

“예, 스님.”

“인순이 너는 나만 믿으면 된다.”

“……제가 스님을 어떻게 믿어요?”

“야, 인석아. 네 아버지하고 나는 물을 부어도 새지 않을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오면 뭘 어떻게 믿으라는 말씀이신지요, 스님?”

“뭘 어떻게 믿느냐구?”

“……예, 스님.”

“허허, 이 녀석. 누가 순호스님 딸 아니라고 할까봐서 이렇게 야무진 소리를 하는게야? 인석아, 날 믿어……너 고등학교……아니지, 일본 대학에 유학한 것보다도 더 높고 깊고 넓은 공부를 가르쳐 줄 테니 나를 믿으란 말이다.”

“정말이지요, 스님?”


“허허, 글쎄 날 믿으래두 그래……그리고 인석아, 절에서 공부를 하게되면 세속학교……아니지 대학교에서도 못배우는 공부를 배우게 되는게야……너 그 공부가 무슨 공부인지 아느냐?”

“……모르겠는데요, 스님.”

“절에서 공부를 잘 배우면 이 세상 모든 근심걱정을 다 벗어나는 법을 깨닫게 되는게야. 알겠느냐?”

“……그럼 스님. 이 절에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공부하라는 말씀이신가요?”

“아, 아니다. 이 절은 네가 보다시피 남자스님들만 수행하는 곳이고, 여자스님들만 모여서 공부하는 절이 따로 있느니라.”


“여자스님들만 계시는 절에 가라구요, 스님?”

“그럼, 공부를 하려면 거기를 가야지.”

“……이 절에 있으면 안 되나요, 스님?”

“아, 여기는 남자스님들만 살아야 하는 절이래두 그러는구나.……왜 네 아버지 곁에 있고 싶어서?”

“그, 그것두 있지만은……여자 스님들만 계시는 절은 무서워서요, 스님.”

“무섭긴 인석아, 다 큰 녀석이 무엇이 무섭다고 그러느냐?”

“……저 사실은요 스님, 진주 저희집 근처에 있는 절에 가봤는데요, 여자스님들만 사시는 절 말씀예요,……그 절에서 보니까 나이 많은 노스님이 어린 여자스님을 부지깽이로 마구 때리더라구요…….”


“허허……이런 녀석을 봤나. 더러는 그런 절도 있고 그런 스님도 있는게지. 그러니까 너같이 야무진 여자가 훌륭한 비구니스님이 되어서 그런 절도, 그런 스님도 없도록 해야지……내가 보기에는 네가 틀림없이 훌륭한 비구니스님이 될게구 훌륭한 교육자가 될게야, 내 말 알겠느냐?”

“……예 스님, 며칠만 더 여유를 주십시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호스님은 둘째딸 인순이가 삭발출가하여 스님이 되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지만,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순호스님은 그동안의 딸의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그래 아직도 딱부러지게 대답을 안 하더란 말씀이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더니, 이건 그냥 쏙 빼다놓은 순호스님이야…….”

“허허, 그 아이 어디가 어째서 날 쏙 빼닮았다는게요, 그래?”

“야무지고 당차기가 아버지보다도 한 수 위라니까 그래요,……두고보면 알겠지만 똑똑한 딸 하나 두셨소이다.”


성철스님의 말을 듣고나서 순호스님은 빙그레 웃었다.

“허허, 거 칭찬인지 핀잔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기에 과히 나쁘지는 않구먼 그래요, 응? 허허허…….”


인순이가 쌍련선원에 머무른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저, 스님, 스님.”


문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호스님이 방문을 열고 내다보니, 뜰에 서 있는 것은 인순이였다.

“어, 너 인순이로구나, 왜 그러느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어, 그래……어서 들어오너라.”


아버지와 딸은 촛불아래 마주 앉았다.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무슨 말이던고?”


딸은 쉽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역시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할말을 해 보아라…….”


입술을 꼭 다물고 있던 딸은 그제서야 두 입술을 떼었다.

“저……머리깎고 공부하겠습니다, 스님.”

“무, 무엇이라구? 머리깎고 공부를 하겠다구?”


아버지는 가까이 다가앉아서 딸아이의 두 손을 꼬옥 감싸 쥐었다. 순호스님은 둘째딸 인순이의 얘기가 결코 쉽사리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출전 : 고승열전(청담큰스님 편,BBS)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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