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도 삭발출가 비구니로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둘째 딸이 스스로 결심하여 삭발출가 하겠다고 말하자, 순호스님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래, 인순이 네가 정녕 삭발출가하여 득도하겠다는 말이냐?”
“예, 스님.”
“…잘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인순아….”
“예, 스님.”
“진주에 있는 네 어머니가 반대를 하면 어쩌지?”
“어머니께서 반대하시지는 않으실 거예요.…하지만 미리 연락을 하시지는 마십시오, 스님.”
“미리 연락을 하지 말자?”
“제가 머리깎고 출가한 후에 소식을 올려도 늦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래,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하온데 스님.”
“왜?”
“…저는 스님의 딸이옵니다. 하온데 스님께서는 당신의 딸이 삭발출가 하겠다는데 정말 마음이 편하시옵니까?”
“잘못이 많은 속가의 아버지로서 어찌 마음이 편안하기만 하겠느냐. 열 가지 백 가지 생각이 오락가락 했느니라. …허나 여자가 혼인을 해서 집을 떠나는 것도 출가라 하고, 삭발득도하는 것도 출가라 하지만, 혼사를 올리고 출가해서 집을 떠나는 것은 온갖 근심 걱정을 등에 짊어지고 괴로움의 바다로 들어가려는 것이요, 삭발득도하여 출가하는 것은 해탈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느냐?”
“…하오면 스님, 삭발출가한 후에는 대체 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이 되겠습니까?”
“너도 이제 수행을 해 나가노라면 차차 알게 될 것이다마는,…물거품 같다고 세상을 보아라. 아지랑이 같다고 세상을 보아라. 풀잎 위에 이슬 같다고 세상을 보아라. 이 세상 모든 부귀영화, 그것이 모두 덧없는 뜬구름 같은 것이니라….”
“부귀영화 모두가 덧없는 뜬구름 같다구요, 스님?”
“…세상 사람들은 모두들 내 땅, 내 집, 내 자식, 내 돈, 내 벼슬이라고 우기면서 욕심을 내고 아귀다툼을 하며 살지만 머지않아 인연이 다해 숨이 끊어지면 제 몸뚱이마저 흙 속에 버리고 가야하는 것, 거기에 진정한 나의 것이 어디 있겠느냐….”
“하오면 출가수행자가 구해야 할 것은….”
“오직 출가수행자가 구하고 찾아야 할 것은 맑디 맑은 마음뿐이니, 이 마음이 곧 부처이기 때문이니라….”
순호스님과 인순이의 대화는 밤이 깊도록 계속됐다. 어느새 인순이는 스님이 하는 말을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었다. 다음날,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은 인순이를 데리고 비구니스님들이 수행정진하고 있는 윤필암(潤筆庵)으로 내려갔다.
윤필암으로 통하는 산길을 걷고 있자니, 뻐꾸기들이 울어댔다.
“예, 인순아.”
성철스님이 불렀다.
“예, 스님.”
“바로 저 아래 보이는 암자가 윤필암이다.”
“예….”
“저 윤필암 식구만 해도 30명은 될게야….”
“…그렇게 많습니까요, 스님?”
“그래,…그리구 저 윤필암에는 네가 스승으로 모실만한 비구니가 여럿 있으니 법희스님, 덕수스님, 영선스님, 보현스님, 그리고 월혜스님이 있느니라.”
“그 가운데서 은사 한 분을 정해야 할 것이니 그리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예, 스님.”
청담스님의 둘째딸 인순이는 성철스님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면서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인순이는 윤필암에 내려와 한 달을 보내고나서 스스로 월혜비구니를 은사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청담스님이 물었다.
“그래 월혜비구니의 상좌(上座)가 되고 싶다구?”
“예….”
“무슨 까닭으로 월혜비구니의 상좌가 되고 싶은고?”
“…예, 말씀드리기 죄송하오나 다른 비구니스님들은 모두 재산이 있어서 자비량으로 쌀 소두 서 말씩을 가져오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월혜스님만은 워낙 가진 게 없으셔서 스스로 잡수실 자비량을 내놓지 못하시니, 그 대신 유나소임(維那所任 : 절의 시물을 맡고 모든 일을 지휘하는 소임)을 맡고 계시온데…가르침이 반듯하시고 자애로우셔서 웬지 마음이 끌리는 분이옵니다….”
“으음…그래, 그런 까닭으로 월혜비구니의 상좌가 되고 싶단 말이지?”
“…예.”
딸아이의 이야기를 듣고난 청담스님은 얼굴 가득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사실은 나나 성철스님도 월혜비구니를 네 은사로 정해주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구나.”
마침내 인순이는 윤필암 월혜스님을 은사로 삭발출가하게 되었다. 월혜비구니와 법희비구니가 가위로 긴 머리를 잘라주고, 덕수비구니가 삭도질을 해주었다. 성철스님은 법명을 지어주고 사미니계(沙彌尼戒)를 설했다. 성철스님이 내린 법명은 ‘묘엄’이었다.
둘째 딸을 삭발출가시켜 이제는 인순이가 아닌 묘엄이란 법명을 몇 번 불러보고, 청담스님은 성철스님과 함께 대승사로 올라가고 있었다. 은은한 범종소리가 문경 사불산 가득 울려퍼지고 있었다.
산새가 지저귀는 숲길을 걸으면서, 성철스님은 뒤를 돌아보며 청담스님에게 말을 건넸다.
“스님은…그래, 기분이 대체 어떠하시오?”
“기분이 어떠하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신고?”
“아, 파계를 해서 얻은 딸을 삭발출가시켜 부처님 제자로 만들었으니 그 소감이 어떠시냐는 말씀이지요.”
“…딸을 출가시키고 난 소감이 어떠하냐?”
“시원 섭섭하실게야, 아마….”
“내가 오늘 삭발한 기분이로구먼.”
“…삭발한 기분이다?”
“내가 처음 삭발했을 때처럼 그렇게 아주 개운하다는 말씀이야…부처님께 진 빚, 백분의 일 쯤은 갚은 것도 같구.”
“헌데 말씀요, 스님….”
“왜?”
“묘엄이 저 아이 말씀예요. 머리 깎아놓고 찬찬히 뜯어보니까….”
“…찬찬히 뜯어보니까 어떻더란 말씀인고?”
“아무래도 저 아이, 한 몫 단단히 할 아이 같습니다.”
“…글쎄…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는고….”
“두고보시오. 틀림없이 한 몫 단단히 해낼 거목으로 자랄게요.”
“거목으로 자랄지, 서까래감으로 자랄지 그거야 성철스님 손에 달린 것 아니겠는가?”
“아, 아니, 내 손에 달렸다니요?”
“아, 법명을 내렸겠다, 사미니계를 주었으면 키우는 것도 그쪽 책임인게야. 그렇지 않단 말씀이신가?”
“허허…이거 졸지에 큰 짐을 떠맡게 되었소이다 그려. 응, 허허허….”
청담스님은 성철스님과 함께 즐겁게 얘기를 나누면서 산길을 올라갔다. 딸을 삭발출가시킨 청담스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얼굴 표정이 밝았다.
묘엄수좌는 덕수스님으로부터는 한글을 배우고 월혜스님으로부터 경(經)을 배우고, 성철스님으로부터 참선하는 법을 배워가며 수행을 시작했다. 공양주 노릇을 해가며 수행정진하는 묘엄의 모습이 청담스님에게는 늘 애처롭게 보였다. 청담스님은 가끔씩 윤필암에 내려와 묘엄에게 몇 번이고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얘, 묘엄아.”
“예, 스님.”
“공양주 노릇, 채공노릇 할만 하느냐?”
“예, 고되긴 해도 견딜만 합니다, 스님.”
“그래, 그만한 일은 견뎌내야지. 부처님은 설산에서 고행을 6년이나 하셨단다.”
“예, 스님.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으니, 절에서 하는 공부란 책을 보는 것만이 공부가 아니요, 참선만 하는 것이 수행이 아니며, 쌀 씻고 불지피고 채소 다듬고 나물 무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이 모두 공부요 수행이니라.”
“예 스님, 명심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앉고 서고 말하고 걷고 자리에 놓고 일어나는 것, 이것들이 모두 다 공부요 수행이니 발걸음 하나, 말 한 마디도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예 스님,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절살림은 여러 대중이 모여사는 것이니, 화합을 깨뜨리는 말, 이간시키는 말, 남을 헐뜯는 말은 결 코 해서는 안 되느니라.”
“명심하겠습니다.”
묘엄의 대답하는 태도로 보아서는 안심해도 될 듯싶지만, 행여 수행이 고달퍼서 도중에 그만두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서 타이르는 것이었다.”
“얘, 묘엄아.”
“예, 스님.”
“ 수행을 제대로 하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니다. 몸이 고달프고 잠도 모자라고 먹는 음식도 부실하고 잠자리도 불편하고…그러다가 지치고 지치면 공부도 아니되고…그렇게 되면 문득문득 하산(下山)하고 싶을 때가 누구에게나 있는 법, 바로 그때를 견뎌내지 못하면 수행자 노릇은 더 이상 못하게 된다.”
“…예, 스님.”
“허나 세속에 돌아가서 인연에 얽히면 대자대비한 큰 사랑은 떨칠 수가 없는 법….”
청담스님은 지그시 눈을 감고 손에는 단주를 굴리면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내가 보통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날은 학교에서 사탕이며 떡이며 과일을 나누어 주었는데, 나는 그 사탕이며 떡이며 과일을 내 여동생들 갖다 주려고 먹지않고 주머니에 넣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도중에서 불쌍한 거지노인을 만나게 됐었구나. 사탕이며 떡이며 과일을 저 불쌍한 노인에게 주어야지 하고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었는데…바로 그 순간, 사탕이며 떡이며 과일을 갖다주면 좋아할 여동생들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 불쌍한 거지노인에게 줄까, 동생들에게 갖다줄까 한참 망설였지만 나는 결국 집으로 가지고 와서 동생들에게 주고 말았구나. …세속 인연에 얽히면 작은 정에 이끌려서 크고 평등한 보시(布施)를 할 수가 없는 게야. …내 말 알아듣겠느냐?
“예 스님, 명심하겠습니다.”
둘째딸 인순이마저 삭발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진주 속가의 차씨부인은 허전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곧바로 윤필암으로 달려왔다.
“그래 묘엄수좌는 만나보셨소?”
몇 개월 만에 다시 보게된 청담스님은 예전의 건강을 많이 되찾아가고 있었다. 차씨부인은 우선 반갑고 기뻤다.
“예, 스님…하룻밤 그 암자에서 자고 올라오는 길이옵니다.”
“보시다시피 이 절은 비구승들만 수행하는 곳, 보살이 오실 곳이 아닙니다. 그 아이 묘엄이를 만나보셨거든 그 길로 바로 내려갈 것이지, 어쩌자고 여기까지 올라오셨단 말씀이오 그래?”
청담스님은 먼 길을 찾아온 차씨부인에게 핀잔을 주듯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저 아이 인순이가 마음에 걸려서요….”
차씨부인은 꺼져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변명을 했다.
“이제는 저 아이 이름이 인순이가 아니라 묘엄이니, 그렇게 부르도록 하시오.”
차씨부인은 여전히 묘엄이가 걱정된다는 대답만 했다.
“무엇이 그리 마음에 걸린다고 그러시는게요?”
“…대체…저 아이를…언제까지 저렇게 여승을 시킬 작정이십니까?”
“…아마도 평생토록 저렇게 살게 될 것이오.”
“…예에? 평생토록이라니요? 아니 그러시면…잠시동안만 데리고 있으려고 머리를 깎아 주신 게 아니란 말씀이시온지요?”
“…꼭 그 까닭만은 아니었지요.”
차씨부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니, 세상에 그러면…나 혼자 어찌 살라는 말씀입니까, 스님…예?”
놀라는 옛 아내를 향해 청담스님은 비정하리만큼 냉담하게 말했다.
“…저 아이, 묘엄수좌 걱정은 이제 그만 하시고…좋은 데 있으시거든 개가를 하시던지…”
“예에? 아니 세상에 스님…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요? …예?”
“그게 싫으시면 보살도 삭발출가해서 부처님 제자가 되시는 게 어떻겠소?”
옛 남편의 말을 듣고 있자니, 갈수록 태산이었다. 차씨부인은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에? 저까지도 여승이 되라구요?”
“강요하는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오, 이제는 그저 마음 편히 사시라는 그런 말이외다.”
“…전 아직 모질지 못해서 차마 머리는 깎지 못하겠습니다, 스님…전 못하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담스님의 옛 속가부인은 삭발출가한 둘째딸의 일이 늘 마음에 걸려서 옷을 해오거나 먹을 것을 만들어 윤필암에 자주 찾아오는 것이었다. 차씨부인의 이러한 행동이, 청담스님으로서는 여간 괴로운 노릇이 아니었다.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성철스님을 의논 상대로 삼았다.
“나 좀 보시오. 철(澈)스님.”
“왜 그러십니까 스님?”
“묘엄이 어머니가 윤필암에 너무 자주 오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아도 내가 한 마디 하려고 하던 참이었지요…. 이렇게 되면 묘엄이가 세속을 떠난 것도 아니고 안 떠난 것도 아니고….”
“그래서 내 스님한테 부탁을 하려는 게요.”
“부탁이라니요?”
“내가 오지말라 하면 야속하다 할 것이니, 스님이 좀 단단히 일러주시오. 이렇게 자주 속가의 식구가 들락거리면 묘엄이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요, 보살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요, 나에게도 또한 좋은 일이 못된다고 말이오.”
“…이거 남의 집안 일에 나설 일은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한번 만나서 단단히 말씀을 드리도록 하지요.”
결국 성철스님이 어려운 일을 떠맡고 나섰다.
“…보살님, 먼길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고생은요…하는 일이 없으니 오고 가는 게, 이게 낙이지요….”
“그런데 말씀이예요, 보살님….”
“예, 스님.”
“보살님께서 이 사불산에 들어오시면 모두들 뭐라고 그러는줄 아시고 계십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성철스님?”
“보살님께서 오시면 모두들 묘엄수좌의 어머니께서 오셨다,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아니면 순호스님의 부인께서 오셨다,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그…그야 묘엄이 어미가 왔다고들 그러시겠지요, 스님.”
“허허…이런, 그게 아니니까 탈이지요, 보살님.”
“…그…그게 아니라니요, 스님?”
“보살님께서 이 사불산에 오시기만 하면 모두들 이렇게 말합니다. ‘순호스님의 옛 부인이 오셨다!’”
“…원…세상에….”
차씨부인의 얼굴은 금방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디 그뿐인줄 아십니까? 어떤 수좌녀석들은 저희들끼리 킬킬거리며서 ‘견우와 직녀가 또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들 말한답니다.”
“…아이구…원…세상에, 무슨 그런 망칙스런 말씀들을 다….”
“그래서 보다못해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보살님….”
“…예, 스님.”
“묘엄이를 위해서나 스님을 위해서나 보살님을 위해서나 너무 자주 이 곳에 오지 않으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스님. 이제 다시는 안 오겠습니다.”
청담스님의 옛 아내 차씨부인은 또 한번 눈물을 삼키면서 산에서 내려갔다.
출전 : 고승열전(청담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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