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대강좌(133)-견성한 뒤의 보림수행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도가 높아지면 죽을 때 몸뚱이를 옷 벗듯 벗고 갑니다. 실은 죽는 것도 아니지만 육체가 죽는다고 보고 지게를 지고 가다 지게를 세워 놓듯이 합니다. 그렇게 놓고도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는 미(迷)해서 망상(妄想)이 일어나고 하는 자세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있지만 탁한 마음, 곧 색정(色情)이 일어납니다. 금생의 자기 몸뚱이는 옷 벗듯이 했지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때 깜박 미해서 피로 엉켜서 있습니다. 그런데 도가 더 높은 사람은 뱃속에 들어갈 때는 미하지 않고 자기 공부 그대로 하고 있는데 그렇게 열 달 동안 가만히 하는 이도 있고 아홉달 만에 자기 공부하던 걸 나와서 미한 사람도 있고 또 여덟달에 미한 사람, 한달에 미한 사람, 또 열달을 다 선방에 앉아서 공부하는 모양으로 정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백팔십일 동안 하다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그 속에서 나오느라고 큰 고통을 겪게 되므로 출태(出胎)할 때 제일 미합니다. 그래서 깊고 완전하게 될 때까지 계속 닦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견성하고 닦는 것을 보임(保任)이라 합니다. 옛날에도 견성해 놓고 이십년 · 삼십년 · 사십년 수도를 하는데 얼굴에 흙칠하고 잿더미 바르고 미친 사람 짓을 하면서 남들이 미친놈 미친놈 하는 그 가운데 자기는 멀쩡하게 천하태평이 되어 개 닭소리 안 들리고 사람 오지 못하는 산중에 깊이 들어가서 토굴(土窟)하나 만들고 솔잎이나 도토리나 먹고 들어앉아 있습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자성(自性)을 잘 보호해서 임의로 거기에 맡겨서 조금도 탈선(脫線) 행동이 없도록 하고「응무소주 이생기심」되도록 한다는 뜻으로 보임(保任)이라 한 것입니다. 범부가 탐진치(貪瞋痴)로 움직이는 마음과는 달라서 무심(無心)으로 움직이는 이것은 움직이는 것도 안 움직이는 거고 안 움직이는 것도 움직이는 거고 안 움직인 자체가 움직이는 것이어서 마치 물과 파도가 둘이 아니어서(水波不二) 사람이 그것을 파도라 할 뿐 물 자체는 파도가 아니고 움직였다 해도 달라진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물이 더 깨끗해진 것도 아니며, 물은 움직인 때나 항상 그런 것처럼 도를 깨쳐 놓고 자기 마음자리를 응무소주(應無所住)하며 이생기심(而生其心)하는 것도 종일 설법해도 설법한 게 아니고 이와 같이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부지런히 농사짓고 종일 일해도 고된 줄을 모르고 아무 생각없이 일합니다. 이게 내 일이라 생각 말고, 꼭 나만 먹을 거다 이런 생각 말고, 아무나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을 거고 헐벗은 사람이 먼저 입을 옷이라 생각하여 열 벌이고 한 벌이고 장만하는 것이 도인이 하는 행동이며 모든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대보살이고 자기도 완전히 의식주를 초월하고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길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수양이 돼서 맑아지면 소탈해지고 번뇌가 없어져서 남의 사정을 잘 알게 됩니다. 마누라를 대할 때도 그렇고 영감을 대할 때도 그렇고 제 감정으로 대하면 영감 말이 제대로 안 들어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했을 때 미운 생각으로 대하면 좋게 말해도 밉고 나쁘게 말해도 미웁니다. 아무 생각없이 대하면 영감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지 그것을 척 알게 되니까 마음을 맞추어 나갈 수 있고 해결할 도리가 나옵니다. 그렇지만 감정이 앞선 중생이 되어 놓으니깐 마누라가 무슨 소리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오고 팔월 추석이 되면 아이들 고무신 하나 사 주고 옷가지나 사 주자고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해서 그렇겠다고 얼른 주고 돈이 없으면 어디가 빚을 내 오든지 해 보자고 하고 빚도 못낼 형편이면「거 참 마음이야 아프겠지만 돈이 없어 참 안됐다고 아이들도 불쌍하지만 당신 말을 못들어 주니 참 안됐다」고 말이라도 고맙게 해주면 서로 섭섭한 눈물을 흘리며 목을 안고 울 수도 있는 거고 아무 시비가 없는 세상인데, 꼭 막혀 있으니까 큰 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고 그러니 시어머니 사정 모르고 며느리 사정 모릅니다. 응무소주로 아무 생각없이 대하면 시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잔소리를 저렇게 하시는가 하는 걸 환히 알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 줄 지혜가 나옵니다.「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안하기 때문에 주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지옥으로, 삼악도로만 가서 인간세상이 혼란해집니다.
아무 데도 머물지 않는 무소주(無所住)는 옳게 머무는 것이고 머무는 것은 그릇되게 머무는 비극(悲劇)이며 또 중생을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육도만행을 행해야 하니까 그게 이생기심(而生其心)인데「해도 한 것도 없이 하라」항복기심(降伏其心)이 됩니다. 일체 중생 무량무수 중생을 제도했지만 사실 제도한 나도 제도한 생각이 없고 또 제도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법문을 듣고 그 방법 배우고 있는 범부 때 그 자체가 앉아서 배웠고 잠깐 지나간 생각이고 흘러간 강물과 같아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다고 할 것도 없고 무슨 말을 해 줬단 말도 안됩니다. 그러니까「종일 얘기해 본 일 없이 얘기하라」하는 게 항복기심(降伏其心)이니 레코오드나 녹음기보다도 더 무심한 것입니다. 범부라도 억지로 이렇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조직으로 하는 것이지만 하면 할수록 그만큼 근사해지고 좀 탈속(脫俗)해져서 마음이 편해지고 일은 제대로 잘 됩니다.
출전 : 금강경대강좌(청담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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