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응보와 윤회

인과응보와 윤회의 실증

근와(槿瓦) 2014. 3. 9. 01:00

인과응보와 윤회의 실증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마음은 생각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지만 마음을 빼어 놓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나 복이나 착한 일이나 악한 일을 다 마음이 하고, 지옥에서 하는 고생도, 천당에서 받은 호강도, 마음을 깨치지 못하는 것도, 마음을 깨쳐서 번뇌 망상을 없애 버리는 것도 다 이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마음의 원리를 깨치지 못하면 생사윤회(生死輪廻)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데, 중생들은 항상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고 의식주를 위해 생존경쟁을 하다가 죄를 짓고 온갖 고업(苦業)을 받게 됩니다.

 

불교에는 인과응보(因果應報)란 말과 육도윤회(六途輪廻)란 술어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확실한 태도가 서 있지 않은 이상 올바른 불교도는 될 수 없습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은 전생에 죄를 지어 금생에 고생을 하게 되고 전생에 복을 지어 놓으면 금생에 잘 살게 되는 인과법칙을 말합니다.

 

자연계의 법칙으로 말하더라도 배나무를 심어 가지고 감을 못 따먹고, 호두나무를 심어서 호박을 딸 수 없습니다. 팥 심으면 팥이 나고 콩 심으면 콩이 나옵니다. 이 원칙은 우주 전체의 힘으로도 어떻게 해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현대의 학문은 주로 물질계의 인과법칙을 밝혀내는 학문입니다. 철학도 어떤 원인을 캐들어가는 학문이고 종교도 선악과 고락의 인과를 설명한 것입니다. 정신적 인과나 물질적 인과를 남김없이 마지막까지 완전히 밝혀 놓은 것이 불교입니다.

 

광대하고 심오한 불교의 원리 가운데 한 조각씩 떼어서 과학이 성립되었고 또 한 부분의 원리가 철학이 되고 경제가 된 것과 같은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과는 반드시 어떤 원인에서 오는 것이지 결코 원인 없는 결과는 생길 수 없습니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같은 사람으로 나왔으면 팔자가 다 같아야 할 텐데, 오래 사는 사람, 일찍 죽는 사람, 잘 사는 사람, 가난한 사람, 또 재주가 있는 사람, 미련한 사람,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 있게 되는 것은 다 꼭 그럴 만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높은 학식을 가지고 있고 정확한 비판을 할 줄 알고 활동력이나 사교술도 능한 사람이 거지 신세가 되다시피 해 가지고, 농사를 지어도 안 되고, 장사를 해도 안 되고, 정치를 해도 안 되고, 하는 일은 자꾸 실패만 해서 존재 없이 사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반대로 무식하고 불량하고, 남의 말도 안 듣고 고집장이고, 거지가 되어야 할 그런 사람이 돈 많고, 호강하고, 권리도 많고, 농사를 지어도 잘 되고, 장사를 해도 잘 되고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천지의 이치가 불공평하고 우리 인간으로서 생각해서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될 문제가 많아집니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서 다른 종교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느님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나쁜 사람을 잘되게 하고 착한 사람을 고생시키느냐"하면서 하느님한테 불평을 하고 데모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또 유교에서는 운수를 그렇게 타고 나서 그렇다고 하기도 합니다. 천지 운수가 그렇다, 손금 보고 사주 보고 관상을 봐서 타고난 팔자가 그러니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의 해결책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렇게 모호한 태도로 설명하는 것은 마음을 깨치지 못한 이들의 소견으로 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주의 생명체인 마음자리는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닌 질량 이전이기 때문에 이것은 불에 탈 수도 없고 물에 젖을 수도 없으며, 자살도 할 수 없고 타살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불멸의 생명인 이 영혼이 온갖 인과를 저지르게 되는데 봄에 당장 추수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간 사회의 인과 과정도 원인을 짓는 시절이 있고 그 결과를 받는 과보기(果報期)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생에 죄를지어 가지고는 금생에 아무리 대학자가 되고 재주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전생에 남을 많이 해롭게 한 죄 때문에 아무것도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그럴 만한 무슨 이유가 설명되어야 우리의 의문이 풀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불교의 인과론이 아니고서는 인생 문제는 영원히 설명될 방법이 없습니다.

 

조물주의 창조론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논리에 안 맞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는 우연론(偶然論)은 비과학적인 억지 이론에 불과하며, 사주 팔자설은 역시 날 때 그렇게 타고났다는 이론인데 왜 그렇게 타고났느냐는 원인을 추구해 들어가면 역시, 창조론이나 우연론에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풀어주는 설명이 곧 불교의 윤회설입니다. 전생에 선을 하면 금생에 복과 낙을 받고, 전생에 죄를 행하면 금생에 고(苦)를 받는다는 인과론이 곧 불교의 윤회설입니다. 이 윤회설을 실증적으로 풀어주는 연구가 요사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거일동이 마음에 녹음이 되고 기록이 되고, 사진이 찍혀서 녹음 테이프와 사진 필름으로 마음속에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한 개의 살아 있는 필름도 되고 살아 있는 테이프도 되어서, 온갖 증빙자료가 다 수집되고 전자계산기 이상으로 정확해서 꼼짝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남을 도와주는 것, 배고픈 사람 밥 주고, 헐벗은 사람 옷 주고, 병든 사람 구원해 주고 이렇게 남을 도우는 것을 선이라고 하셨는데, 이런 선은 곧 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악은 남을 해롭게 하고 남을 죽이고 하는 행위인데, 이것은 죄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게 되고 죄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심령학자들이 최면술을 통해서 이런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최면술로 전생을 회상시켜 보면 한국말 하는 사람, 인도말 하는 사람, 개소리 하는 사람, 닭소리 하는 사람, 여러 가지로 나옵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전생의 기억을 살려내는 것으로 전생의 녹음 테이프를 풀어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인도 사람으로 태어났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다, 개로 태어났다 한 사실을 입증하는 작업입니다. 이 지구상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말도 나오는데 이것은 전생에 다른 세계에서 살다 왔다는 것을 뜻하며, 다른 세계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최면술에 관한 실험을 소개한 학자 가운데 케논 박사의 그것을 권위 있는 것으로 쳐 주는데, 우리 나라에는「사자와의 대화」라는 책이 번역돼 나온 것이 있습니다. 서울 대학의 모 교수가 미국에 갔다가 호기심에 끌려 읽어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번역한 책입니다. 최면은 혼을 빼는 것도 아니고 잠을 재우는 것도 아닙니다. 온갖 잡념을 다 여의어 정신통일한 상태입니다.

 

최면술을 시술할 때 최면에 대한 수양이 높으면 어른에게도 시술할 수 있지만, 맨 처음에 하는 초보자는 어린애로부터 해야 합니다. 또 마음 부드러운 사람에게는 잘 되고 불행한 사람 아집(我執)이 많고 성질이 포악한 사람은 잘 안됩니다. 또 마음으로 안 받아들여도 안됩니다. 최면을 시술하면 잠이 들 듯이 차차 최면상태에 들어가는데, 마음이 차차 가라앉고 몸이 부드럽게 되고 정신이 안정이 되면서 모든 잡념이 없어집니다. 그러면서도 인식작용은 합니다.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럽니다.

 

최면에도 초기, 2기, 3기의 깊이가 있습니다. 3기에 들어가야 전생의 일을 알게 됩니다. 말하자면 선경에 깊이 들어간 셈입니다. 또 최면술에 깊이 들어가면 힘센 장사라도 그 사람의 팔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무한대의 힘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케논 박사의 예에서와 같은 큰 힘과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음은 어떤 권위 있는 최면사가 호주 여인에게 최면을 시술하여 얻은 실험 기록 중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여인에게 150년 전을 회상하도록 시술했습니다. 그 여인은 캐나다의 어느 도시에서 자라나서 그곳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어떤 학과는 성적이 어떻고 몇학년 때는 몇등을 하고 품행은 어떠했다. 친구의 이름은 누구누구였고 형 동생은 어떠했다. 아버지는 어느 회사 중역인데 미남이었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로 소질이 우수했다. 또 학교 가는 도중에 작은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이웃집의 친구 아무개가 그 다리에서 떨어져서 다리 병신이 된 일도 있었다 등등의 구체적 생활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최면사는 이 모든 대화를 녹음 테이프에 실어 가지고 현지 답사를 합니다. 학교에 가 보고 동회와 구청에 가서 조사해 보면 150년 전 학적부에 호주의 여인이 최면중에 말한 그대로 실려져 있고, 동회나 구청의 지적도에는 최면중에 말한 그 번지에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지금은 20층 빌딩이 올라갔지만 150년 전에는 그 자리에 작은 나무다리가 놓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자와의 대화」라는 책을 보면 이와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몬(루스 밀스시몬)이라는 여자를 최면한 이야기입니다. 시몬이라는 여자는 1923년에 출생한 여자인데 이 여자가 전생에는 1798년에 출생해서 1864년에 사망한 이야기입니다. 최면을 처음 걸 때 보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제 옛날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옛날로 소급하고 있습니다. 마치 책 페이지를 거꾸로 들추는 것과 같이......자, 당신은 일곱 살입니다. 학교에 다닙니까?"

"네."

"어느 학교에 다닙니까?"

"아델프 학원입니다."

"당신 앞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재클린입니다."

"뒤에는 누가 앉아 있습니까?"

"베르나 마에예요."

"당신이 좋아하는 과목은 무엇입니까?"

"읽는 것입니다."

"잘 읽습니까?"

"잘 읽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때 일은 다 잊으세요. 그리고 쭉 올라가서 당신의 임종 때를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당신이 몇년에 사망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 장례식때 당신을 매장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셨죠?"

"네."

"그것을 보았다면 당신이 사망한 햇수도 알 수 있을 거예요. 아마 무덤의 비석에 새겨져 있거나 다른 곳에 기록되어 있겠지요. 아마 보셨을 거예요. 몇년입니까?"

"그게...천팔백...육...음...1...8...6...4년요? 1864라고 써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비석을 보고 계십니까?"

"네."

"그럼 숫자만 아니라 모두 읽어 보세요."

"브라이짓트...캐더린...음...엠(M)...멕카시..."

"아마 당신의 출생한 해가 처음에 써 있을 것입니다."

"1...7...9...8."

"훌륭합니다. 자, 다른 숫자는 없나요."

여기서 그녀는,

"줄이 있어요. 줄이 하나 그어 있고...그리고 1864라고 써 있었어요." 라고 손짓을 해가며 말했습니다.

"이제 다시 시간을 따라 당신이 저승에 있던 영의 세계로 갑니다. 다음 당신은 미국 아이오와주에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또 이「사자와의 대화」에는 다음 최면 실기가 있습니다. 전생의 결혼식에 관한 최면 기록입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신이 브라이디 머피로서 아일랜드에 살던 때로 되돌아가십시오. 브라이디 머피였던 시절이 생각나십니까?"

"네."

"좋습니다. 그럼 결혼 당시로 돌아가십시오. 당신은 결혼 당시의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네."

"신랑의 이름은 무엇이었나요?"

"브리안"

"브리안이 이름입니까 성(姓)입니까?"

"사람들이 그를 브리안이라고 불렀어요."

"결혼은 코크에서 하셨나요 벨파스트에서 하셨나요?"

"코크에서 결혼했어요."

"코크에서요?"

"네, 저는 코크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렇지만 벨파스트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는 걸 집안 식구들에게 알리지 않았어요."

"알겠습니다. 코크에서 결혼하고 벨파스트에서 다시 결혼식을 했군요."

"그렇게 반복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은 아무거나 되풀이해서 물으시는군요."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코크에서 먼저 식을 하고 다음에 벨파스트에서 식을 했군요."

"친척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들은 이 결혼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제가 알기엔 그들은 나를 잃어 버린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퍽 상심했지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결혼한 것은 언제였나요? 그때 가톨릭 신자가 됐었나요."

"아니예요. 저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는 성당에서 식을 올리지 않았어요. 존 신부님의 방에서 결혼했어요."

"알겠습니다."

"그분은 기꺼이 그 일을 해 주셨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다만...성당에 기록해 두기 위해서이지요. 아이들을 위해서..."

"그러면 당신은 전에 편지를 쓴 적이 있으세요? 혹은 어떤 사람에게서 편지를 받은 기억이 없습니까?"

"음...저는...집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코크로부터 말씀인가요?"

"그래요."

"그런 편지들 가운데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있나요?"

"네, 보관하고 있어요."

"우리가 찾을 수 있도록 보관한 장소를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상자 속에 넣어 두었어요."

"어떤 특별한 곳에 두었나요?"

"네, 저는...아시겠지만... 그렇지요. 당신도 알 거예요....거기에는...백랍으로 만든 접시도 있어요. 그것은 갈색의 아름다운 접시예요."

"두 번째 선반 위라고요?"

"네, 작은 손가방도 그 위에 있고 또..몇개의 리본과 편지도 몇통 있어요. 또...음...작은 쌀자루며 바느질하던 것, 그리고 어머니가 주신 고무줄로 된 양말, 대님 그런 것들이었어요. 작은 쌀자루는 순결의 표시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그것을 몸에 지니고 다니라고 하셨어요. 제가 떠나올 때 가져왔지요."

 

이와 같은 최면 실례가 이밖에도 수 없이 많습니다. 하옇든 이렇게 해서 전생과 내생의 윤회를 부정해 오던 서양 사람들은 불교의 육도윤회설(六道輪廻說)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생사윤회가 있고, 인과 응보가 있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생은 전생의 연속이며 무한한 내생의 연결이고 금생에 주어진 환경이나 운명은 전생에 지은 원인으로부터 맺어진 결과이며, 금생에서 선악간에 하고 있는 우리의 일거일동은 다 내생에 받을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됩니다. 이 육체를 가지고는 천년 만년 살 수 없으므로, 육체가 부서지면 다시 소가 되고 개가 되고 사람이 되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나는 것도 다 제가 태어나고 싶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전생에서 자기가 지은 인연대로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인연이란 말은 묘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무엇을 해도 친한 사람하고만 같이 안 합니까? 사람이 수천명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구경하다가도 헤어져 나갈 때는 친한 사람끼리 짝지어가지고 나갑니다. 죽어 가는 길도 자기가 친한 길로 인연지은 곳으로 따라갑니다. 전에 내가 한번 울진 쪽에서 설악산을 올라가게 됐습니다. 날이 저물어서 마을 집에서 자고 아침에 점심을 싸 가지고 떠났습니다. 점심때가 되어서 우물 있는 집을 찾아 점심을 먹는데, 그 집에 개가 하도 따르기에 밥 한 숟갈 떠 주면서 귀여워했더니 그놈이 자꾸 따라옵니다. 아무리 쫓아도 돌아가지 않고 30리 이상을 따라옵니다. 마침 동네 나뭇군들을 만났는데, 나뭇군들이 처음에는 남의 개를 데리고 간다고 막 욕을 하더니, 내가 사실을 이야기하니까 그 사람들도 참 이상하다고 하면서 갔습니다. 내가 앉으면 저도 같이 앉고, 오면 또 같이 따라오고 좋아서 맴을 돌고 야단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이 개는 전생에 나와 스승 상좌(師弟)간이었거나, 형제간이었거나, 부자간이었거나 그랬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습니다. 초면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미가 나고 항상 얼굴이 보고 싶고, 내 마음 속에 상대방의 얼굴이 환히 드러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처음부터 미운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이 아무리 미남이고 미녀이고, 부자고 큰 학자고 아주 위대한 자선사업가라도 싫어집니다. 첫눈에 당장 보기 싫어서 주는 것도 받기 싫고 돈을 주어도 받기 싫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모릅니다. 적어도 금생에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전생에 인(因)을 지어 가지고 금생에 과(果)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금생에 복을 지어 가지고 금생에 그 과를 받을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전생에 복을 지은 밑천이 많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령 전생에 5백만 원밖에 저금하지 못한 사람은 금생에 억대의 부자가 될 수 없지만, 전생에 9천5백만원을 저금한 사람이라면 금생에 억대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금생에 조금 잘 했다 해서 큰 복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공자나 예수가 한 말이나 생각이 선이고, 그 행동이 선이었습니다. 그러나 뜻대로 못하고 간 것이 예수, 공자입니다. 공자 자신도 말하기를 초상난 집 개처럼 푸대접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도 자기 제자에게 배반을 당하고 처참한 마지막을 마쳤습니다. 이것은 다 전생에 죄만 많이 짓다가 금생에 왔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참 씨뿌리고 가꿀 때 술만 먹고 바람이나 피우고, 싸움이나 하고 돌아다니다가는 가을에 가서 추수할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인과응보라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우리가 기도를 하고 참회를 한다는 것은 전생이나 금생에 이미 저지른 과오를 씻어내고 갚아 버리는 수행입니다. 인과의 과보(果報)를 다른 방법으로는 벗어날 수 없으므로 오직 마음의 힘을 다해서 지극히 참회하고 마음을 깨쳐서 큰 능력을 갖추신 불보살님께 발원하여 가피(加被 : 구원)를 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금생은 아무리 기도를 해도 성취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생에 죄가 원체 많아서 그럽니다. 이런 사람은 더욱 더 참회하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금생에는 날마다 기도만 하다가 죽으리라. 그래서 후생에는 팔자를 고치리라. 내생에도 안 되면 내생에는 기도나 할 수 인간으로 태어나서 기도만 자꾸 하리라." 이렇게 결심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다운 기도를 해가지고 죄를 참회한 뒤에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지옥에 보낸다는 죄벌론이 아니고 내가 내 마음을 잘못 써 가지고 내가 만들어 놓은 과보를 타고 나서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서 내가 불행해질 짓을 내가 저지르지 않겠다는 태도입니다.

 

불교를 잘 믿으면 내생에 극락간다고 하지만, 아주 잘 하면 금생에서부터 복을 받고 잘 살게 됩니다. 욕심만 버리고 살면 됩니다. 우리는 5욕락이 필요 없으므로 모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일은 하느냐? 물을 것입니다. 없는 사람, 배고픈 사람 먹여 주고, 헐벗은 사람 입혀 주고, 병든 사람 구해주기 위해서 농사하고 장사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면 나는 은연중 큰 복을 지키는 것이 되고, 온 천하에 나를 싫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미친 사람까지도 나를 좋다고 할 것입니다. 죄만 짓고서 자꾸 복 달라고 비는 기복 불교는 낮잠이나 자고 바람이나 피우고 노름이나 하다가 배고프니까 남의 짐에 가서 해 놓은 밥을 나누어 먹자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빈 통장 가지고 은행에 가서 돈 내놓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에게 불공하고 기도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빈 통장 가지고 가서 조르는 것과 같은 식이 많습니다. 24시간 하는 짓은 모두 죄뿐이면서 복을 달라고 하니 그것이 됩니까?

"전생에 내가 남의 밥을 빼앗아 먹고 착한 일을 하지 못해서 이렇게 됐으니, 나도 남을 먹여 주고 입혀 줄 수 있게금 복 좀 주십시오." 이렇게 참회 발원하고 기도하면 거지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깡통에 얻은 밥이라도 나누어 먹을 수 있습니다. 불쌍한 거지에게 나누어 먹여 주고 자기는 새로 얻어먹겠다는 태도라면 큰 복을 지어갈 수 있습니다.

 

복지을 길은 거지한테도 얼마든지 트여 있습니다. 복은 열려 가지고 있다 그 말입니다. 이런 인과응보를 믿으면 악은 죽어도 안하고, 선은 죽어도 하겠다는 윤리관이 확립됩니다. 공자의 유교나 예수의 기독교는 절대 원리에 입각한 윤리관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 급한 환경에 부딪히면 그 윤리관이 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불교의 인과응보론에 입각한 윤리관이 확립되었다면 나를 죽이려 온 사람한테까지도 배가 고프면 먹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원한이 풀립니다. 나한테는 자비한테는 적이 없습니다. 자비는 선악을 초월하고 인연을 초월해서 남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선악을 안 보면 그게 참다운 행복이고 이렇게 불교를 바로 믿는 그 시간부터 극락입니다.

 

출전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성철큰스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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