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성철스님 일화

근와(槿瓦) 2013. 5. 21. 08:01

 성철스님 일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1) 눈속에 찾아온 대통령 장모


1977년 추운 겨울의 어느 날로 기억된다.

해인사의 설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눈이 많이 올 때는 발목이 푹푹 빠지도록 쌓이기 때문에 좀처럼 길을 찾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눈을 치우고 길을 내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눈 쌓인 길을 큰 절에 있는 젊은 수좌 스님들이 백련암까지 눈을 치우며 올라오곤 했다.

성철 스님께서 큰 절로 내려오시는 길이 미끄럽지나 않을까 해서 젊은 스님들이 수고를 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날, 스님을 친견하고자 찾아온 낯선 할머니를 모시고 온 일행이 있었다. 큰 절에 도착한 그 일행은 한눈에 보기에도 보통 사람들과 좀 달라 보였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가 박 대통령의 장모라는 것이 아닌가.

육영수 여사가 불교 신자인 것은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어머니도 독실한 불자이셨던 모양이다.

해인사 대웅전인 대적광전과 팔만대장경을 참배한 대통령의 장모 일행은 성철 스님 뵙기를 간청하였다. 멀리서 성철 스님의 고명을 듣고 눈내린 해인사를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것이라 했다.

당대 최고 권력자의 장모였던 그가 무엇이 부러웠겠는가. 딸이 대통령의 아내였고 사위는 나라를 움켜쥐고 있는 절대 권력자.....

모든 사람이 그 할머니와 끈이라도 한번 대어 봤으면 하던 시절이었다.

성철 스님 친견을 원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할머니가 관절염으로 걸음을 마음대로 옮길 수가 없는 불편한 몸이었다는 것이다.

그 몸으로 눈 쌓인 백련암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다.

그 할머니를 모시고 온 일행들은 웬만하면 스님께서 내려오셔서 한번쯤 만나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스님의 뜻은 완고했다.

웬만하면 대통령 장모의 친견을 허락하시라는 권유에,

“만날 일 없다”

이 한 말씀뿐이셨다.

그러나 할머니의 고집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엄동설한에 큰스님을 한번 뵙겠다고 눈 쌓인 천리길을 멀다 않고 찾아왔는데 그냥 갈 리 만무했다.

그러자 일행들은 임시 가마를 만들 것을 지시했다.

네사람이 들 수 있는 들것 모양으로 가마를 만들어 할머니를 모시고 백련암까지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간혹 세간의 높은 분들이 해인사에 들를 때면 자신의 세속적인 권위를 내세워서 성철 스님을 뵙고자 해인사 측에 무리한 청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철 스님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절 측에서 보더라도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스님께 알렸고, 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들이 미쳤나! 아니 눈발에 그 늙은이를 메고 오다니.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 굴러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진단 말이냐. 그렇게 올라온다면 절대로 만나 주지 않을 것이야!”

이 같은 불호령을 전해 들은 그 할머니는 그냥 쓸쓸히 해인사를 뒤로 하고 말았다.

당대 최고 권력자의 위세가 천지를 뒤덮던 그 시절, 한번 보고 가겠다는 대통령 장모의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뒤탈이 없었던 것은 오로지 성철 스님의 법력 때문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 사표수리


스님은 오랫동안 산에서 사셔서 그런지 산이나 물, 길가에 돌멩이 같은 자연물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이시곤 했다.

해인사 입구에 국민학교가 하나 있었는데 그 뒷산을 밀고 청소년 수련장을 짓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해인사에서 허락한 일이었다.

스님께서는 본시 절의 행정에는 관심이 없어서 집을 짓든 무엇을 하든 상관을 않으셨다.

그날은 마침 스님이 등산을 하기 위해 백련암 뒷산을 오르고 계실 때였다. 멀리서 요란한 기계소리가 들려오자,

“저게 무슨 소리냐?” 하고 물으셨다.

청소년 수련장을 짓기 위해 지금 산을 깎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뭐야? 절 입구에 그런 것을 허락했단 말이야?

당장 주지를 불러와!”

스님의 진노를 전해들은 주지 스님은 입장이 난처하게 되자 다른 절로 피신을 가고 말았다.

스님들의 참선도량인 해인사 코앞에 그런 번잡스러운 것을 짓는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멀쩡한 산을 깎아 내고 그 안에 있는 생물들을 죽여 가면서까지 수련장인가 뭔가를 만든다는 데 무척이나 화를 내셨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도 그 이튿날 낯선 헬리콥터 한 대가 해인사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대통령의 사정담당 보좌관들이라면서 문제가 됐던 예의 그 장소를 둘러보고 올라갔다. 그 뒤로 그 작업은 당장 중지되었고 이 후로 다시는 해인사 근처에서 기계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일이 그렇게 마무리 되었건만 성철 스님은 기어코 주지 스님의 사표를 받아내고야 말았다.

주지 스님은 관청의 압력을 못이겨 도장을 찍어 주었다고 해명했으나 성철 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일침을 놓으셨다.

“옳은 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킬 수 있어야 책임자인 것이야. 그렇지 못하다면 그 자리를 내놔야 하는 것이고.”

 

(3) 중은 재주가 없어야


필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손재주가 좀 있는 편인 것 같다.

내가 처음 손장난으로 만든 것은 목불(木佛)의 두 손이었다.

나한전에 있는 나한의 두 손을 어느 개구쟁이들이 뽑아 갔는지 없어져서, 나한상(羅漢像)은 손이 없는 흉측한 모양으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마침내 나는 근처 산에서 쓸만한 나무 두 개를 구했다.

그리고는 톱이나 부엌 칼을 써서 아무도 몰래 나한의 두 손을 만들었다.

눈 대중으로 대강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결코 잘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 필자의 눈에는 썩 그럴 듯하게 보였다.

그것을 가져다가 나한상의 두 손을 끼워 주고 나서 나는 퍽이나 만족했다.

게다가 함께 있던 다른 스님들의 칭찬까지 들으니 흐뭇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성철 스님은 뜻밖에도 이런 걱정을 하셨다.

“중은 재주가 없어야 되는데.....”

그때 필자는 스님의 그 말씀을 오랫동안 새겼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하신 ‘재주’라는 말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인연은 잔재주로 인해 얽히고 설키게 된다. 그러다 보면 속세의 이런저런 사람들과 만남이 생기고, 자연 중노릇은 하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님은 그때부터 나를 정확히 꿰뚫고 보신 게 아닐까.

 

(4) 리어카 끌다가


해인사 말사 중에는 보현암이란 암자가 있다.

그곳은 절터만 남아 있는 곳이었는데 나중에 비구니 스님들이 암자를 새로 짓게 되었다.

회춘 스님이라는 비구니 스님이 처음 암자터의 땅을 다지고 할 초창기였다. 비구니 스님이 울퉁불퉁한 땅을 고르고 흙을 져나르고 하는 것이 보기에 안쓰러웠던 필자는 그곳에 가서 리어카로 흙을 날라주고 땅을 고르는 작업을 좀 도와준 일이 있었다.

그일이 성철 스님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스님의 진노는 대단했다.

“빌어먹을 놈! 하라는 공부는 안하구 비구니 절 짓는데 가서 일이나 하구 있어. 당장 내려오지 못해!”

그 일로 나는 백련암에서 며칠간 쫓겨난 일이 있었다.

스님은 우리가 비구니절에 얼쩡거리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아무래도 비구니 스님들 때문에 수도하는 마음이 산란해 질 것을 우려하신 거였다. 그 후로 나는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혹독한 참회를 해야만 했는데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 서릿발 같은 호통이 귀에 쟁쟁하여 모골이 송연해지곤 한다.

 

(5) 장미꽃을 좋아하신 스님


백련암 화단엔 한때 색색가지의 장미꽃이 만개한 일이 있었다.

우람한 법체와는 달리 성철 스님께서는 장미꽃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 사실을 안 우리는 장미 모종을 수십 그루 사다가 백련암 앞뜰에 심었다.

그것을 본 스님은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미소가 번졌다.

장미꽃을 기르기 위한 스님의 성의 또한 대단하셨다. 장미 기르는 법이 담긴 책자를 사오자 전지 가위를 사오라 하셨다. 봄이면 스님께서 장미를 직접 전지하시곤 했는데 장미에 꼬이는 진딧물을 보시고는 무척 난처해 하셨다.

보다 못한 우리가 진딧물 약을 사와서 뿌려댔다.

우리가 장미밭에 약을 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스님께서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마디 하셨다.

“그럴 거 없다. 장미나무를 모두 패 버리거라.”

필경 살아 있는 생명체인 진딧물을 죽여 가면서까지 아름다운 장미꽃을 본다는 것이 수도승으로서 너무나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신 거였다.

 

(6) 비둘기 목에 진주 목걸이


성철 스님께서 성전암에 계실 때였다.

기도하러 오신 여신도 중에는 가끔 자신의 신분이나 모습을 과시하려고 요란하게 화장을 하거나 화려한 옷차림에 값진 패물들을 걸치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을 뵙고자 찾아온 여신도를 바라보던 스님께서 돈많은 그 여신도의 목에 걸려 있는 진주 목걸이를 보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얼마냐? 비싼 것이냐?” 물으시더니,

“이리 가져와 봐라.” 하셨다.

그 여신도가 영문을 몰라 하며 진주 목걸이를 스님께 드렸다.

그즈음 암자에는 비둘기를 기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스님의 손 위에 비둘기가 날아왔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이 비싼 물건을 네 놈 목에도 한번 걸어볼테냐? 얼마나 멋있나 보자꾸나.”

하시더니 진주 목걸이를 비둘기 목에 턱하니 걸어 주셨다.

그러자 비둘기는 눈 깜짝할 새에 스님의 손바닥을 벗어나 산등성이로 날아가 버렸다. 한참 후 그 비둘기가 다시 날아왔으나 진주 목걸이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제자들이 그 목걸이를 찾으려고 온 산을 뒤졌으나 끝내 목걸이는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 일이 신도들 사이에 파다하게 소문이 난 후에 스님을 찾아오는 신도들은 비싼 패물이나 화려한 옷차림을 금했다. 혹 화려한 옷을 입고 온 신도들은 스님께 혼구멍이 나기 일쑤였다.

“비러먹을 년들. 절에 옷자랑 하러 왔어?”

하시며 대번에 옷을 망쳐 놓았던 것이다.

만약, 후일 가난한 나뭇꾼이나 약초꾼이 그 진주 목걸이를 주었다면 스님은 그 돈 많은 여신도에게 보시의 공덕을 쌓게 한 것이 아닐까.

 

(7) 딸의 이름은 불필(不必)


석가모니 부처님은 출가하기 전에는 가비라성의 태자이셨다.

그 시절에 그에게는 야수다라비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석가모니께서 출가하셨을 때 야수다라비는 수태중이었다. 출가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이룬 부처가 되어서 다시 가비라성에 들르셨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아들을 볼 수 있었다.

부처님 아들의 이름은 ‘라훌라’였다. 라훌라는 장애라는 뜻이다. 성도(聖道)를 이루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부인과 아들은 나란히 부처님께 귀의했다. 부처님께 귀의한 그들은 부처님의 법을 따라야했기 때문에 거친 음식과 거친 옷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나 왕궁 생활만을 하던 라훌라에게 그런 생활이 쉬울 리 없었다.

인도에서는 원래 일종식이라고 해서 하루에 한 끼씩만 먹었다.

그런데 부처님의 아들인 라훌라가 하도 배고프다고 보채고 우니까, 아침과 저녁을 더 만들어 먹이도록 제자들께 일렀다고 한다.

부처님도 역시 인간이셨나보다. 자식의 배고픔을 안타까이 여긴 그 모습이 인간미가 있지 않은가!

스님에게도 불필(不必)이란 이름의 여식이 있다.

너무나 스님과 닮은 모습이라 한번 보면 대번에 성철 스님의 혈육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이다.

의도적으로 그리 한 것은 아니겠지만 부처님의 가족들이 부처님을 따라 출가했던 것처럼 성철 스님의 여식도 스님을 따라 출가했고, 부인도 석남사란 절로 출가했다고 들었다.

스님은 따님의 법명을 지을 때도 ‘너의 법명은 필요없다.’라는 뜻으로 ‘불필(不必)’이라고 했다.

그러나 스님도 불필 스님에게는 남다른 정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후일 불필 스님이 해인사 근처에 암자를 짓도록 허락하셨고, 스님은 가끔 백련암에서 멀리 보이는 곳에 있는 그 암자를 바라보시곤 하셨다.

얼마나 가 보고 싶으셨을까? 가끔 목을 내밀고 그쪽을 바라보시며 이것 저것 집의 구조와 방향 등을 물으시곤 하셨으니 말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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