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修心訣)

돈오 점수(頓悟漸修)

근와(槿瓦) 2014. 3. 1. 01:10

돈오 점수(頓悟漸修)

 

(질문)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두 문이 모든 성인이 의지할 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깨달음이 단박 깨달음(頓悟)이라면 왜 차츰 닦을(漸修) 필요가 있으며, 닦음이 차츰 닦는 것이라면 어째서 단박 깨달음이라고 합니까? 돈오와 점수 두 가지 뜻을 거듭 말씀하여 의심을 풀어 주소서.

(대답)

범부가 어리석어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성(自性)이 참 법신(法身)인 줄 모르고 자기의 영지(靈知)가 참 부처인 줄 모른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다가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고 바른 길에 들어 한 생각에 문득 마음의 빛을 돌이켜 자기 본성을 본다. 이 성품의 바탕에는 본래부터 번뇌 없는 지혜가 저절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돈오라 한다. 

 

본성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닫기는 했지만, 끝없이 익혀온 버릇(習氣)은 갑자기 없애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서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모태(母胎) 기르기를 오래 하면 성(聖)을 이루게 되니, 이를 점수라 한다. 마치 어린애가 갓 태어났을 때 모든 감관이 갖추어져 있음은 어른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만,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 동안의 세월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하는 것과 같다.

 

(질문)

그러면 무슨 방편을 써야 한 생각에 문득 자성을 깨닫겠습니까?

(대답)

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이다. 이 밖에 무슨 방편이 따로 있겠는가.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 눈을 보지 못해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기 눈인데 다시 볼 필요가 무엇인가. 없어지지 않은 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또 보려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영지(靈知)도 이와 같아서 이미 자기 마음인데 무엇하러 또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알려고 한다면 얻을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니, 알지 못한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見性)이다.

 

출전 : 밖에서 찾지 말라(지은이 : 보조선사, 옮긴이 : 법정스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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