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修心訣)

깨치기 전은 참 수행이 아니다

근와(槿瓦) 2014. 2. 25. 00:31

깨치기 전은 참 수행이 아니다(수심결)

 

(질문)

스님의 판단에 따르면, 깨달은 뒤 닦는 문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는 뜻에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성(自性)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相)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입니다.

자성의 문에서는 '걸림없는 고요와 앎이 원래 무위(無爲)이어서 한 티끌도 상대될 것이 없으므로 번뇌를 떨어버리려는 수고가 없고, 한 생각도 감정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얽힌 인연을 잊으려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하고 판단하기를 '그것은 돈문(頓門)에 들어간 이가 자성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을 따르는 문에서는 '이치에 맞추어 산란을 거두고 법을 선택하고 공을 관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에 들어간다'하고 판단하기를 '이것은 점문(漸門)의 낮은 근기가 행할 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대하여 의문이 없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수행할 경우, 먼저 자성의 문에 의해 선정과 지혜를 겸수한 후에 다시 상을 따르는 문의 다스리는 공부를 하는지, 아니면 먼저 상을 따르는 문에 의해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린 다음에 자성의 문에 들어가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자성의 선정과 지혜에 의지한다면, 걸림없이 고요하고 알기 때문에 다시 더 다스릴 공부가 없는데 무엇하러 또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이것은 마치 흰옥에 문채를 새겨 덕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먼저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로 다스리는 공부를 이룬 다음에 자성의 문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분명히 점문의 낮은 근기가 깨치기 전에 점차로 익히는 것이니, 어찌 돈문자가 먼저 깨치고 나서 닦는 데에 노력이 없는 노력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동시여서 전후가 없다면 두 문의 선정과 지혜가 돈 · 점이 다른데 어떻게 한꺼번에 같이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돈문자는 자성의 문에 의지해 걸림없이 더 공부할 필요도 없고, 점문의 낮은 근기가 상을 따르는 문으로 나아가 다스리는 공부에 힘쓸 것입니다. 두 문의 근기가 돈점이 다르고 우열이 분명한데, 먼저 깨치고 나서 닦는 문 가운데서 어떻게 두 가지를 함께 해석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씀하여 의문을 풀어 주소서.

 

(대답)

내 해석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문을 갖는구나.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의혹이 더욱 생기고, 뜻을 얻어 말을 잊으면 따질 필요가 없다. 그 두 문에 대해 각기 수행할 것을 판단한다면, 자성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는 돈문에서 노력함이 없는 노력으로 두 가지 고요함을 함께 활용하고 자성을 스스로 닦아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사람이다.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는 깨치기 전 점문의 낮은 근기가 다스리는 경우이고, 마음마다 의혹을 끊고 고요함을 취하는 수행자이다. 이 두 문의 수행은 돈과 점이 각기 다르므로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깨친 다음에 닦는 문에서 겸하여 상을 따르는 문의 대치를 말한 것은, 전혀 점문의 근기가 행할 바를 취한 것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하여 길을 빌리고 숙박을 의탁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돈문에도 근기가 뛰어난 이가 있고 낮은 이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예로써 그 가는 길을 똑같이 판단할 수는 없다.

 

번뇌가 사라지고 심신이 홀가분해서, 선에서도 선을 떠나고 악에서도 악을 떠나 여덟 가지 바람(八風)에도 흔들리지 않고 세 가지 느낌(三受 : 괴로움, 즐거움, 버림)에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자성의 선정과 지혜에 의해 걸림없이 겸해 닦으며 천진하여 조작이 없다. 움직이거나 고요하거나 항상 선(禪)이므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할 것이니, 어찌 상을 따르는 문의 방법을 빌리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할 필요도 없다.

 

먼저 단박 깨쳤다 할지라도 번뇌가 심히 진하고 익힌 버릇이 굳고 무거워 대상과 마주칠 때마다 생각생각 감정을 일으키고 인연을 만나면 마음마다 대상을 만든다. 혼침과 산란에 부추김을 당해 고요함과 앎이 한결같지 않은 어두운 이는,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를 빌어 대치하기를 잊지 않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다스려 무위(無爲)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비록 대치하는 공부에 의해 잠시 익힌 버릇을 억제하더라도 심성이 본래 청정하고 번뇌가 본래 공한 것임을 먼저 깨달았으므로, 점문의 낮은 근기의 오염된 수행에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깨치기 전의 수행은 비록 공부를 잊지 않아 생각생각 익히고 닦더라도 곳곳에 의문을 일으켜 거리끼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 속에 걸린 것 같아서 불안한 자취가 항상 앞에 나타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대치하는 공부가 성숙하게 되면 심신이 홀가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홀가분해질지라도 의혹의 뿌리를 끊지 못한 것이 돌로 풀을 누른 것 같아서 생사의 경계에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깨닫기 전의 수행은 진정한 수행이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깨친 사람의 경지로는 비록 대치하는 방편이 있더라도 생각마다 의혹이 없어 더럽히거나 물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면 저절로 천진한 묘성(妙性)에 계합하여 걸림없이 고요하고 분명해서, 생각마다 온갖 대상에 관계하면서도 마음마다 모든 번뇌를 아주 끊되 자성을 떠나지 않는다.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져 위 없는 보리를 성취하고, 앞에서 이야기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아무런 차별도 없다.

 

상을 따르는 문의 선정과 지혜가 비록 점기(漸機)의 행할 바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 본다면 쇠로써 금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도리를 안다면 어찌 두 문의 선정과 지혜에 앞뒤의 순서가 있다고 두 가지로 보는 의문이 있겠는가. 바라건대 수도인은 이 말을 잘 되새겨 다시는 더 의혹을 일으켜 스스로 물러서지 않도록 하라.

 

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위 없는 보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것을 버리고 다시 또 어떻게 하겠는가. 부디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참뜻을 알아 낱낱이 자신에게 돌리어 근본에 계합하면, 스승 없이 얻은 지혜가 저절로 드러나고 천진한 이치가 어둡지 않고 분명해서,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것에 의해 깨친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오묘한 뜻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기는 하지만, 일찌기 지혜의 씨를 뿌린 대승 근기가 아니면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비방하면서 무간지옥의 업을 짓는 이가 많다. 그러나 믿고 받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한번 귀를 스쳐 잠시 인연을 맺어 놓으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다.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듣기만 하고 믿지 않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난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불할 바른 인연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우며 이루어서 지키고 잊어버리지 않는 이의 공덕이야 어찌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출전 : 밖에서 찾지 말라(지은이 : 보조선사, 옮긴이 : 법정스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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