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좌선삼매경-90-18

근와(槿瓦) 2016. 2. 24. 02:12

좌선삼매경-90-18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86 / 10002] 쪽

...지로 정근(精懃)하면 이것을 4정근(精懃)이라고 하며, 이와 같이 욕(欲)ㆍ정진(精進)ㆍ정(定)ㆍ혜(慧)의 초문(初門)에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마음대로 자재함을 추구하면 이것을 4신족(神足)이라고 하니, 비록 4념지ㆍ4정근ㆍ4신족ㆍ5근 등으로 부르더라도 모두 거두어 수행할 때에는 처음과 끝, 적고 많음, 수행하는 경지[地]의 연(緣) 등에 따라서 각각 이름을 얻는다. 비유컨대 4대(大)에 각각 4대가 있어서 다만 많다는 것으로 이름을 얻는 것과 같으니, 만일 땅의 종류가 많고 물ㆍ불ㆍ바람이 적은 곳이라면 이름을 지대(地大)라 할 것이며, 물ㆍ불ㆍ바람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이 37품(品) 가운데 각각 여러 품이 있으니, 마치 4념지 가운데 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 등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12분ㆍ4제를 관하여 4념지ㆍ4정근ㆍ4신족ㆍ5근ㆍ5력ㆍ7각지ㆍ8정도를 행하면 그 마음이 안락하다. 또한 이 법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한마음으로 서원하고 정진하여 부처님을 찾을 때 마음속으로 사유하고 관하여 생각하기를 ‘나는 분명하게 이 도를 관하여 알더라도 마땅히 깨달음을 취하지 않으리라. 두 가지 일의 힘이 있기 때문에 아직 열반에 들어가지 않으리니, 첫째는 커다란 슬픔[大悲]으로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깊이 아는 것이다. 모든 마음[心法]과 대상[心數法]은 인연 따라 생기는데, 나는 지금 어찌하여 이 진실하지 않은 것에 따르는가? 마땅히 스스로 사유해서 12인연을 깊이 관하여 들어가 인연이 어떠한 법인가를 알고자 한다’라고 한다. 또 다시 사유하기를 ‘이 네 가지 연, 즉 인연(因緣)ㆍ차제연(次第緣)ㆍ연연(緣緣)ㆍ증상연(增上緣)은 다섯 가지 인[因 : 생인(生因)ㆍ의인(依因)ㆍ입인(立因)ㆍ지인(持因)ㆍ양인(養因)이다.]으로 인연을 삼는다. 과거와 현재의 아라한의 최후의 마음을 제거한 나머지 과거와 현재의 마음[心法]과 대상[心數法]이 바로 차제연이다. 연연과 증상연은 일체의 존재에서 연유한다’라고 한다. 다시 스스로 사유하여 말하기를, “만일 존재가 먼저 인연 가운데 있다면 마땅히 이 존재는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없다면 또한

 

                                                                               [87 / 10002] 쪽

마땅히 인연 가운데서 생긴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반은 있고 반은 없더라도 또한 마땅히 인연으로 생긴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인연이 있다고 하는가? 만일 존재가 아직 생기지 않았는데 과거의 마음과 대상이 없어지면 어떻게 차제연을 만들 수 있는가? 만일 불법(佛法) 가운데 미묘한 법에 연(緣)이 없다면 열반은 어떻게 연연을 만들 것인가? 만일 모든 존재가 진실로 자성이 없다면 어떠한 존재도 얻을 수 없다. 만일 인연으로 결과가 생겨서 이것 때문에 저것이 있다고 설한다면 이 말은 곧 틀린 것이다. 만약 인연 속에 각각 차별이 있거나 혹은 한곳에 화합하더라도 이 과(果)는 얻을 수 없다. 어떻게 인연의 테두리에서 결과가 나오는가? 인연 가운데 과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인연 가운데 먼저 과가 없는데도 나온다면 무슨 까닭에 인연의 테두리에서 과를 낳는가? 둘 다 모두 없기 때문이다. 과는 인연에 속하며, 인연의 테두리에서 나오지만 이 인연은 자재하지 않아서 나머지 인연에 속한다. 이 과가 나머지 인연에 속한다면 어찌하여 자재하지 않는가? 인연은 능히 과를 생기게 하니, 그러므로 과는 인연을 좇아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연 아닌 것을 따라 있는 것도 아니다. 즉, 과가 아니니, 과가 없기 때문에 연(緣)과 연이 아닌 것[非緣]도 역시 없다”라고 한다.

 

[문] 부처님께서 12인연은 무명을 연하여 모든 행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인(因)과 과(果)가 없다고 하는가?

[답] 먼저 이미 대답했으니 마땅히 다시 논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논란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다시 대답하리라. 부처님께서 “눈이라는 인(因)과 빛깔이라는 대상[緣]에 의해 어리석음의 테두리에서 삿된 억념(憶念)이 생긴다”고 말씀하셨으니, 어리석음이 바로 무명이다. 이 가운데 무명은 무엇에 의지하여 머무는가? 눈[眼]에 의지하는가, 혹은 빛깔[色] 가운데 의지하는가, 혹은 식(識)에 의지하는가? 마땅히 눈에 의지하여 머물러서는 안 되니, 만일 눈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마땅히 빛깔에 의지하지 않으므로, 항상 어리석어야 마땅하다. 만일 빛깔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마땅히 눈에 기대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곧 바깥의 어리석음인데 어떻게 나의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가?

 

                                                                              [88 / 10002] 쪽

만일 식에 의지하여 머문다면 식은 무색이고, 상대도 없으며, 감촉도 없고, 분별이 없으며, 처소가 없으니, 무명도 역시 그러한데 어떻게 머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무명은 안도 아니며, 바깥도 아니고, 양쪽의 중간도 아니다. 전생에서 온 것이 아니며, 또한 내생으로도 가지 않는다. 동서남북의 4유(維)와 상하에서 온 것이 아니므로 참다운 존재가 있지 않다. 무명의 본성이 그러하니, 무명의 본성을 요달하면 변하여 밝음이 되며, 하나하나를 추궁하면 어리석음을 얻을 수 없다. 어떻게 무명을 연하여 행이 있는가? 허공이 불생(不生)ㆍ불멸(不滅)ㆍ불유(不有)ㆍ부진(不盡)하고 본성이 청정하듯이 무명도 역시 이와 같아서 불생ㆍ불멸ㆍ불유ㆍ부진하고 본성이 청정하며, 나아가 태어남을 연하여 늙고 죽음이 있는 것도 역시 그렇다. 보살은 이와 같이 12인연을 관하여 중생들이 헛되고 미쳐서 괴로움과 근심에 묶여 있으므로 중생은 제도하기 쉬울 뿐이지만 모든 존재가 만일 참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제도하기 어려운 것임을 아니, 이와 같이 사유하면 어리석음을 깨뜨린다. 만일 보살이 정신작용[思覺]이 많으면 항상 아나파나(阿那波那)를 생각하여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헤아려서 하나하나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한다. 보살은 이러한 방법으로 한마음을 얻어서 5개(蓋)의 욕행(欲行)을 제거한다. 보살은 도를 보면 마땅히 세 가지 인(忍)을 행해야 하니, 즉 법생인(法生忍)ㆍ유순법인(柔順法忍)ㆍ무생인(無生忍)이다. 무엇이 생인(生忍)인가? 일체의 중생들이 혹 욕하고, 혹 때리고, 혹 죽이는 등 갖가지 나쁜 일을 해도 마음이 움직이거나 변하지 않고, 성내지 않으며, 그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더욱 자비스럽다면, 이 모든 중생들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추구하고 일체를 얻고자 원하리니, 마음을 풀어놓지 않으면 이때 점차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이해할 수 있어서 마치 기운이 배어들어서 달라붙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인자한 어머니가 자기의 아이를 사랑하여 젖을 먹여 양육하되

 

                                                                               [89 / 10002] 쪽

갖가지 더러움을 더럽게 여기지 않고 가엾은 생각을 두 배로 더하여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이와 같아서 일체의 중생들이 갖가지 나쁜 일과 깨끗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일을 하더라도 마음에 악을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물러나거나 피하지도 않는다. 또한 시방의 무량한 중생들을 나 한 사람이 마땅히 모두 제도하여 부처님의 길을 얻게 하리라고 마음으로 참아서 물러서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는다. 게으르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고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이 생인 가운데 한마음으로 생각을 묶어서 세 가지 사유가 생각을 벗어나지 않게 하며, 바깥으로 여러 연(緣)을 생각하면 추슬러서 되돌아오게 하니, 이것을 생인이라고 한다.

 

무엇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하는가? 보살이 이미 생인의 공덕이 무량함을 얻었으면 이 공덕의 복덕과 과보가 무상(無常)함을 안다. 이때 무상함을 싫어하여 스스로 변함없는 복덕을 찾으며, 또한 중생을 위하여 항상 머무는 법을 찾는다. 일체의 모든 존재에서 즉, 물질과 비물질의 존재,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존재, 대립하는 것과 대립하지 않는 존재, 유루(有漏)와 무루(無漏),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상ㆍ중ㆍ하의 존재에서 그 참다운 모습을 찾는다. 참다운 모습이란 무엇인가?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항상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즐거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 않는 것도 아니며, 공도 아니고 공이 아닌 것도 아니며, 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정신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까닭에 항상하는 것이 아닌가?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먼저 없다가 이제 있으며, 그러므로 이미 있다가 도로 없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항상하지 않음[無常]이 아닌가? 업보를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바깥의 번뇌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인연이 증가하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음이 아니다.

 

                                                                               [90 / 10002] 쪽

어찌하여 즐거움이 아닌가? 새로운 괴로움 속에서 즐거운 생각을 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무상한 성질 때문이며, 욕망에 연유하여 생기기 때문에 즐거움이 아니다. 어찌하여 즐겁지 않음[不樂]이 아닌가? 즐거움은 감수작용을 지니기 때문이고, 욕망에 물들어서 생기기 때문이며, 즐거움을 찾아서 몸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즐겁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空)이 아닌가? 안팎의 입(入:12處)은 각각의 받아들임이 분명하기 때문이고, 죄와 복의 과보가 있기 때문이며, 일체의 중생이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공이 아니다. 어찌하여 공 아닌 것[不空]이 아닌가? 화합 등으로 생기기 때문이고, 분별하여 찾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마음의 힘으로 변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공 아닌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닌가? 자유자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제7식의 경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정신의 모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닌가? 후세가 있기 때문이고, 해탈을 얻기 때문이며, 각각 나의 마음이 생겨서 그 밖의 것을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정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태어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불생불멸(不生不滅)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받아들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니, 언설(言說)이 모두 사라지고 마음이 갈 곳도 끊어진다. 마치 열반의 본성과 같으니, 이것이 존재의 참다운 모습이다. 이러한 법 가운데서 믿는 마음이 청정하여 정체되지도 않고 걸림도 없으며, 유연하게 알고, 유연하게 믿으며, 유연하게 정진하니, 이것을 유순법인(柔順法忍)이라고 한다.

 

무엇이 무생법인(無生法忍)인가? 위와 같이 존재의 참다운 모습 속에서 지혜ㆍ믿음ㆍ정진이 늘어나 자라.....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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