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좌선삼매경(85)-17

근와(槿瓦) 2016. 2. 23. 01:51

좌선삼매경(85)-17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81 / 10002] 쪽

마치 바깥의 초목은 주인이 없는 것과 같으니, 다만 뒤바뀐 견해에 따라 내가 있다고 헤아리는 것이다.

 

[문] 만일 내가 없고[無我] 주인도 없으며[無主] 지음도 없다[無作]면, 어떻게 오고 가며 여기서 죽어 저기에 태어난다고 말하는가?

[답] 비록 내가 없지만 6정(情)이 씨앗[因]을 만들고 6진(塵)이 주변 조건[緣]을 만드는 가운데 6식(識)이 생기니, 세 가지 일이 화합하기 때문에 감촉과 인식의 대상[法]이 생기며 모든 업을 생각하여 안다. 이 오고 감으로 말미암아 이로부터 생사가 있다고 말한다. 비유컨대 해가 구슬을 사랑하여 해와 마른 쇠똥이 화합하는 방편 때문에 불이 생기니, 5음(陰)도 역시 그렇다. 이 5음이 생겼기 때문에 후세의 5음이 나왔다 하더라도 이 5음이 후세에 이른 것은 아니며 또한 이 5음을 여의고서 후세의 5음을 얻은 것도 아니니, 5음은 다만 인연을 따라서 나온다. 비유컨대 곡식의 씨앗 속에서 싹이 나오는 것과 같아서 이 씨앗이 싹은 아니며, 또한 나머지 싹의 테두리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다. 후세에 몸을 얻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비유컨대 나무에 아직 줄기ㆍ마디ㆍ가지ㆍ잎ㆍ꽃ㆍ열매가 없지만 시절 인연을 얻어서 꽃과 잎을 구족하는 것처럼 선행과 악행의 과보도 또한 이와 같다. 씨앗이 허물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며, 싹ㆍ줄기ㆍ잎 등이 생기기 때문에 끊어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니, 죽고 태어나 서로 이어지는 것도 역시 그렇다. 수행자는 모든 존재가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며 스스로 태어나고 스스로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애(愛) 등 때문에 존재함을 알며, 소멸로 인하여 이것이 다함[盡]을 알고, 다함이 바로 도(道)임을 안다. 이 네 가지 지혜로써 12분을 알면 이것이 바로 정견의 길이다. 중생은 사로잡히고 집착하기 때문에 미쳐버리니, 사람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주(寶珠)를 지니고 있으나 그것의 진가를 구별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속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

 

                                                                             [82 / 10002] 쪽

이때 보살은 ‘내 마땅히 부처가 되어 바르고 진실한 법으로 저 중생들을 교화하여 올바른 길을 보게 하리라’고 크게 인자한 마음을 일으킨다.

 

[문] 대승의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일체의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不滅], 공(空)이요 무소유(無所有)이며, 일상(一相)이요 무상(無相)이니, 이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하는데, 왜 무상(無常) 등을 관하는 것을 일컬어 정견이라고 하는가?

[답] 만일 대승 가운데서 일체 존재의 공(空)과 무상(無相)을 설하였다면, 왜 무상ㆍ고ㆍ공 등이 진실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만일 불생ㆍ불멸ㆍ공이 참다운 모습(實相)이라면 마땅히 무상(無相)이라고 말해서는 않되니, 그대의 말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 또한 부처님께서 네 가지 뒤바뀜[顚倒]을 말씀하셨으니, 무상(無常) 가운데 상(常)은 뒤바뀌었으나 또한 도리가 있다. 일체의 유위(有爲)는 무상(無常)하니, 왜냐하면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무상한 인(因)과 무상한 연(緣)이 발생시키는 결과를 어떻게 항상하다고 하겠는가? 먼저는 없었는데 지금은 있으며, 이미 있던 것이 문득 없어지니, 일체의 중생들은 모두 무상함을 보며, 안으로는 늙고 병들고 죽음이 있으며, 밖으로는 만물이 시들어 떨어지는 것을 보니, 어찌하여 무상(無常)이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가?

 

[문] 나는 항상하는 것[常]이 진실이고 항상하지 않는 것[無常]이 진실하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며, 항상하는 것과 항상하지 않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께서 ‘공(空) 가운데서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의 두 가지 일을 얻을 수 없다. 만일 이 두 가지 일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둘 다 뒤바뀐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답] 그대의 말은 법과 서로 맞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다시 둘 다 모두 뒤바뀌었다고 말하는가? 일체가 공하고, 무소유(無所有)라는 이것은 진실한 것이요 뒤바뀐 것이 아니다.

 

                                                                              [83 / 10002] 쪽

만일 내가 항상함을 부숴버리고 항상하지 않음에 집착한다면 나의 존재는 마땅히 파괴되어야 하며 진실한 나[我]는 아니다. 유상(有常)하다고 뒤바뀐 것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상(無常)을 관하니, 왜냐하면 무상의 힘은 능히 유상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독이 능히 그 밖의 독을 깨뜨릴 수 있는 것과 같고, 약으로 병을 제거하면 약도 함께 버리는 것과 같으니, 약이란 것이 병을 미묘하게 제거할 수 있지만 만일 약을 버리지 않으면 뒤에는 약이 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것도 역시 그러해서, 만일 무상법에 집착한다면 마땅히 깨뜨려야만 하니, 실답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무상법(無常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고(苦)는 네 가지 참다운 진리 가운데서 진실로 괴로운 것이라고 말하니, 누가 능히 즐겁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다. 고(苦)의 인(因)은 참다운 인인데, 누가 능히 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고의 다함[盡]은 참으로 다하는 것인데, 누가 능히 다하지 않게 하겠는가? 다함의 길[道]은 참다운 길인데, 누가 능히 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해는 혹 차갑게 할 수 있고, 달은 혹 뜨겁게 할 수 있으며, 바람은 혹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네 가지 참다운 진리는 끝내 움직이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그대는 대승 가운데서 요달(了達)하지 못하고 단지 말소리에만 집착할 뿐이니, 대승 가운데 일체 존재의 참다운 모습[諸法實相]에서 참다운 모습[實相]은 깨뜨릴 수도 없고 만들 수도 없다. 만일 깨뜨릴 수 있고 만들 수 있다면 이것은 대승이 아니다. 마치 달이 처음 생겨서 하루나 이틀이 되면, 그것이 생길 때는 매우 미세하여 밝은 눈을 지니고 있는 사람만 볼 수 있어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가리켜 보여 주지만 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단지 그 손가락을 볼 뿐이요 달을 못보고 헤매니, 눈 밝은 사람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왜 단지 나의 손가락만 보는가? 손가락으로 달의 연(緣)을 삼은 것이지 손가락이 저 달은 아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그대도 역시 이와 같다.

 

                                                                              [84 / 10002] 쪽

말소리는 참다운 모습이 아니니, 다만 말을 빌려서 참다운 이치를 표현할 뿐이다. 그대가 다시 말소리에 집착하면 참다운 모습에 어두울 것이다. 수행자가 만일 이와 같이 바른 지견(知見)을 얻는다면, 12분(分)이 화합하여 원인과 결과의 두 가지 분이 됨을 관할 것이다. 과(果)일 때의 12분은 고제(苦諦)이고, 인(因)일 때의 12분은 습제(習諦:集諦)이며, 인이 소멸할 때는 이것이 진제(盡諦)이며, 인과 과가 없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 도제(道諦)이니, 네 가지로 과를 관하면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이며, 네 가지로 인을 관하면 집(集)ㆍ인(因)ㆍ연(緣)ㆍ생(生)이다.

 

[문] 과(果)에 네 가지가 있는데 단지 고제(苦諦)라 이름할 뿐이니, 그렇다면 그 밖의 것은 진리의 이름이 없는가?

[답] 만일 무상의 진리[無常諦]라고 말해도 의심스럽고, 고의 진리[苦諦]라고 해도 역시 의심스러우며, 무아의 진리[無我諦]라 해도 역시 의심스러워서 똑같이 난처하다. 또한 무상의 진리가 때[咎]가 없다고 말한다면, 공과 무아의 진리도 역시 때가 없으며, 만약 무상ㆍ고ㆍ공ㆍ무아의 진리를 설명하자면 중복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네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설한 것이다.

 

[문] 괴로움에는 어떤 다른 모습이 있길래 세 가지 가운데서 홀로 이름을 얻었는가?

[답] 괴로움은 일체의 중생들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바이지만 무상(無常)은 그렇지 않으니, 혹 어떤 사람이 괴로움의 핍박을 받는다면 무상을 얻으려고 생각하지, 괴로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있지 않다.

 

[문] 어떤 사람이 칼을 잡고 자살하거나 바늘로 찌르거나 쓴 약을 도적에게 준다면, 이와 같은 여러 가지는 괴로움을 찾는 것이 아닌가?

[답] 괴로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니,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을 취하는 것이다. 괴로움은 제일의 근심이며, 즐거움은 제일의 이로움이니, 이 때문에 참다운 괴로움을 여의고 쾌락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과분(果分)으로 오직 괴로움의 진리를 이름하셨을 뿐이요, 무상이나 공이나 무아로 하지 않으셨다.

 

                                                                              [85 / 10002] 쪽

이 네 가지 진리 가운데서 참다운 지혜를 분명하게 깨닫고 의심하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는 이것을 바른 소견[正見]이라고 하며, 이 일을 사유하여 갖가지로 불어나기 때문에 이것을 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하니, 삿된 생활을 제거하고 네 가지 삿된 말을 거두며, 그 밖의 네 가지 삿된 말을 여의고 네 가지 바른 말을 섭수한다. 삿된 생활을 제거하여 몸의 세 가지 업을 섭수하고, 그 밖의 세 가지 삿된 업을 제거하면 바른 업[正業]이라고 하며, 그 밖의 가지가지 삿된 생활을 여의면 이것을 바른 생활[正命]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때를 관하여 정진하면 이것이 올바른 방편[正方便]이며, 이 일을 생각하여 흩어지지 않는 것을 올바른 관찰[正念]이라고 하며, 이 일을 사유하여 동요하지 않는 것을 올바른 선정[正定]이라고 한다. 올바른 깨달음[正覺]은 왕과 같아서 일곱 가지 일이 따르니, 이것을 도제(道諦)라고 한다.

 

이 일을 한마음으로 진실하게 믿어서 움직이지 않으면 이것을 신근(信根)이라 하며, 한마음으로 정밀하고 정성스럽게 도를 찾으면 이것을 정진근(精進根)이라고 하며, 한마음으로 생각하여 잊어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염근(念根)이라고 하고, 마음이 한곳에 머물러 또한 내달려 흩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정근(定根)이라고 하며, 사유하고 분별하여 무상(無常) 등을 깨달으면 이것을 혜근(慧根)이라고 하니, 이 근(根)이 늘어나고 자라서 힘을 얻으면 이것을 다섯 가지 힘[五力]이라고 한다.

 

[문] 8정도에서 혜(慧)ㆍ염(念)ㆍ정(定) 등을 모두 설하였는데, 근력(根力)에서 무슨 이유로 거듭 설명하는가?

[답] 따라 들어가 행할 때, 처음에는 작은 이익을 얻으니, 이때를 ‘근(根)’이라 하며, 이 다섯 가지 일이 늘어나고 자라서 힘을 얻으면 이때 ‘힘[力]’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처음으로 무루(無漏)의 견제도(見諦道)에 들어가면 이 공덕을 8정도(正道)라고 하며, 사유도(思惟道)에 들어갈 때는 7각의(覺意)라고 하며, 처음 도에 들어가서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관하여 항상 한마음으로 생각하면 이것을 4념지(念止)라고 하며, 이와 같이 선법(善法)의 맛을 얻어서 네 가......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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