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아함경(122)-1220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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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여, '나[我]'란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나는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요, '나는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나는 색유(色有)가 될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요, '나는 무색유(無色有)가 될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며, '나는 색유도 무색유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想]이 있을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요, '나는 생각이 없을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며, '나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여도 또한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뽐내는 것[貢高]이요, 이것은 교만[憍慠]이며, 이것은 방일(放逸)이다.
비구여, 만일 이 일체의 자랑과 뽐냄과 교만과 방일이 없으면 그것을 마음의 쉼[意息]이라 하느니라.
비구여, 만일 그 마음이 쉬면 곧 미워하지도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며, 고달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그 비구는 법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밉다고 말할 것이 없느니라. 만일 미워하지 않으면 걱정하지 않을 것이요, 걱정하지 않으면 시름하지 않을 것이며, 시름하지 않으면 고달파하지 않을 것이요, 고달파하지 않으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곧 반열반(般涅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생은 이미 다하고, 범행은 이미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세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진실 그대로 알게 될 것이니라."
이렇게 설법을 마치자, 존자 불가라사리는 티끌을 멀리 하고 때[垢]를 여의어 모든 법안(法眼)이 생겼다. 이에 존자 불가라사리는 법을 보아 법을 얻고, 희고 깨끗한 법[白淨法]을 깨달아 의심을 끊고 의혹을 벗어나 다시는 더 이상 존경할 사람이 없고, 다시는 남을 의지할 것도 없어, 아무 망설임 없이 이미 과증(果證)에 머물러 세존의 법에서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예배드리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잘못을 뉘우칩니다. 선서(善逝)시여, 저는 고백합니다. 미련한 사람처럼, 미친 사람처럼,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바보처럼 좋은 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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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깨달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저는 여래 무소착 등정각을 일컬어 '그대'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세존이시여, 참회를 받아 주십시오. 저는 이제 참회한 뒤에는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비구여, 너는 진실로 미련하고 어리석었으며, 너는 진실로 정신이 나간 바보였다. 너는 여래 무소착 등정각을 일컬어 '그대'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비구여, 만일 네가 스스로 참회하고 잘못을 알아 드러내며 조심해 다시는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면, 비구여, 그와 같이 한다면 곧 거룩한 법(法)과 율(律)에 있어서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 하면 능히 스스로 참회하고 잘못을 알아 드러내었으며, 조심하여 다시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존자 불가라사리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제2 [제4 분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勝林給孤獨園)에 계셨다. 그 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설법하리라. 그것은 처음도 묘하고 중간도 묘하며, 마지막도 또한 묘하다. 의미도 있고 문체도 있으며, 청정(淸淨)을 구족하고 범행(梵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이라고 하니, 자세히 듣고 잘 기억하도록 하라."그 때 모든 비구들이 아뢰었다."세존이시여, 마땅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너희들은 마땅히 6처(處)의 안[內]을 알아야 하고,[팔리본에는 이 부분이 '6내처(內處)를 알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 팔리본에는 6외처(外處 : 六境)와 6식신(識身)도 거론하고 있으나 한역본에는 없다.]6갱락처(更樂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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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알아야 하며,[팔리본에는 '6촉신(觸身)을 알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갱락(更樂)은 후대에 촉(觸)으로 번역되었다.]
마땅히 6처(處)의 안[內]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안처(眼處)와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처(意處)이다. 마땅히 6처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6갱락처(更樂處)의 안[內]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눈의 갱락은 빛깔[色]을 보는 것이요, 귀의 갱락은 소리[聲]를 듣는 것이며, 코의 갱락은 냄새[香]를 맡는 것이요, 혀의 갱락은 맛[味]을 보는 것이며, 몸의 갱락은 촉감[觸]을 느끼는 것이고, 뜻의 갱락(更樂)은 법(法)을 아는 것이니, 6갱락처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다.
마땅히 18의행(意行)의 안[內]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비구는 눈으로 빛깔을 본 뒤에 그 빛깔을 기뻐할 만한 것[喜住]이라고 분별하고, 그 빛깔을 근심할 만한 것[憂住]이라고 분별하며, 그 빛깔을 덤덤한 것[捨住]이라고 분별한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도 또한 그러하며, 뜻이 법을 안 뒤에는 그 법을 기뻐할 만한 것이라고 분별하고, 그 법을 근심할 만한 것이라고 분별하며, 그 법을 무덤덤한 것이라고 분별한다. 이것을 6희(喜)를 분별하고, 6우(憂)를 분별하고, 6사(捨)를 분별하는 것이라 하며, 통틀어 18의행이라고 말한다. 마땅히 18의행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마땅히 36도(刀)의 안[內]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집착을 의지하는 6희(喜)가 있고,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희도 있으며, 집착을 의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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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6우(憂)가 있고,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우도 있으며, 집착을 의지하는 6사(捨)가 있고,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사도 있다. 어떤 것이 6희가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6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는 기쁨[喜]을 내는 데에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기쁨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빛깔을 사랑하며,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얻고자 하고, 이미 얻은 것은 기억하며 기뻐한다면, 이러한 기쁨을 '집착에 의지하는 기쁨'이라 한다.
어떤 기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빛깔은 무상한 것이라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일체 빛깔은 무상한 것이요 괴로움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기쁨을 낸다면, 이러한 기쁨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기쁨'이라 한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라.
뜻이 법을 알고 기쁨을 내는 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기쁨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을 알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법을 사랑하며,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은 얻고자 하고, 이미 얻은 것은 기억하며 기뻐한다면, 이러한 기쁨을 '집착을 의지하는 기쁨'이라 한다.
어떤 기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법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일체 법은 무상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기쁨을 낸다면, 이러한 기쁨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기쁨'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이 6우(憂)가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6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 근심하는 데에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근심[憂]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으로 빛깔을 보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빛깔을 사랑하면,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하고, 이미 얻은 것이 오래되어 흩어져 무너지고 멸하거나 변하고 바뀌면 근심이 생긴다. 이러한 근심을 '집착을 의지하는 근심'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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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근심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빛깔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일체 빛깔은 무상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성취하여 저곳에서 노닐 수 있을까? 모든 성인들이 성취하여 노니신 저곳에서.' 이는 위로 구족하려는 바람에서 생기는 두려움이고, 괴롭고 근심스러움을 알아서 생긴 근심이다. 이러한 근심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근심'이라 한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라.
뜻이 법을 알고 근심하는 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기도 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하기도 한다. 어떤 근심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을 알고 사랑스럽다 하여 마음으로 생각하고 법을 사랑하면, 욕심과 어울리는 즐거움이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하고, 이미 얻은 것이 오래되어 흩어져 무너지고 멸하며 변하고 바뀌면 근심이 생긴다. 이러한 근심을 '집착을 의지하는 근심'이라 한다.
어떤 근심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법이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모든 법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성취하여 저곳에서 노닐 수 있을까? 모든 성인들이 성취하여 노니신 저곳에서.' 이것은 위로 구족하려는 바람에서 생기는 두려움이고, 괴롭고 근심스러움을 알므로 생겨나는 근심이다. 이러한 근심을 '욕심 없음을 의지한 근심'이라 한다.
어떤 것이 6사(捨)가 집착을 의지하는 것이며, 어떤 것이 6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 담담한 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담담함[捨 : 다른 부분에서는 주로 사(捨)를 평정으로 번역을 했는데, 여기에서는 '평정'보다는 '담담함'이라고 번역했다.]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눈이 빛깔을 보고는 그것에 담담하지만, 그가 평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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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듣지 않았고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범부라서, 빛깔에 대해 담담하더라도 빛깔[色]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면, 이것을 '집착을 의지하는 담담함'이라 한다. 어떤 담담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빛깔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일체 빛깔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담담함에 머무르며, 만일 지극한 뜻이 있더라도 담담함을 닦아 익힌다면, 이것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담담함'이라 한다. 이와 같이 귀 코 혀 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라.
뜻이 법을 알고 그것에 담담한 데에도 두 종류가 있으니, 혹은 집착을 의지하고, 혹은 욕심 없음을 의지한다. 어떤 담담함이 집착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을 알고는 그것에 담담하지만, 그가 평등하고 많이 듣지 않았고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범부라서, 법에 대해 담담하더라도 법으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면, 이것을 '집착을 의지하는 담담함'이라 한다.
어떤 담담함이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것인가? 뜻이 법은 무상한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것인 줄을 알아 모든 욕심을 없애고 멸하고 쉬며, 과거나 현재의 일체 법은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멸하는 법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담담함에 머무르며, 또 만일 지극한 뜻이 있더라도 담담함을 닦아 익힌다면, 이것을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담담함'이라 하느니라. 이것을 집착을 의지하는 6희(喜),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희, 집착을 의지하는 6우(憂),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우, 집착을 의지하는 6사(捨), 욕심 없음을 의지하는 6사라 하나니, 이를 통틀어 36도(刀)라고 한다. '마땅히 안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이로 인해 그렇게 말한 것이니라.
이 가운데에서 '그것을 끊고 이것을 성취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른바 6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6희가 집착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이른바 6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6우가 집착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이른바 6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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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른다. 이른바 6사가 집착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이른바 6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6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이른바 6사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6우가 욕심 없음을 의지하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평정[捨]에는 한량없는 갱락(更樂), 여러 종류의 갱락이 있는 것이 있다. 또 평정에는 단 하나의 갱락, 여러 종류가 아닌 갱락이 있는 것도 있다. 어떤 평정에 한량없는 갱락, 여러 종류의 갱락이 있는가? 만일 평정이 빛깔이나, 소리 냄새 맛 촉감을 버리는 것이라면, 그 평정에는 한량없는 갱락, 여러 종류의 갱락이 있다. 어떤 평정에 단 하나의 갱락, 여러 종류가 아닌 갱락이 있는가? 이른바 평정이 한량없는 공처(空處)를 의지하거나, 혹은 한량없는 식처(識處)를 의지하거나, 혹은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의지하거나, 혹은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의지한다면 이 평정에는 단 하나의 갱락, 여러 종류가 아닌 갱락이 있다. 이른바 그 평정에 단 하나의 갱락, 여러 종류가 아닌 갱락이 있으면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그 평정에 한량없는 갱락, 여러 종류의 갱락이 있으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한량이 없음을 취하고, 한량이 없음에 의지하며, 한량이 없음에 머무는 것, 이른바 이런 평정에는 단 하나의 갱락, 여러 종류가 아닌 갱락이 있으니, 이것을 취하고, 이것에 의지하며, 이것에 머무른다. 이른바 그 평정에 한량없는 갱락, 여러 종류의 갱락이 있으면 그것을 멸하고, 그것을 없애며, 그것을 뱉나니, 이와 같이 그것을 끊는다. '그 중에서 그것을 끊고 이것을 성취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니라.'마땅히 한량없는 설법에서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여래에게는 네 부류의 제자가 있으니, 그들에게는 증상하는 행[增上行]이 있고 증상하는 뜻[增上意]이 있으며, 증상하는 생각[增上念]이 있고, 증상하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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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增上慧]가 있다. 그리고 변재가 있어서 제일가는 변재를 성취하였으며, 수명은 백 세이니라.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백 년 동안을 설법하였다. 다만 음식을 먹을 때와 대소변을 볼 때와 잠잘 때 및 모임이 있을 때는 제외된다. 그들은 여래가 말하는 법의 문구와 법의 글귀에 대해서 그 뜻을 관찰하는데 지혜로써 얼른 그 뜻을 관찰하고, 다시는 여래의 법을 묻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설법은 끝이 없고 그 법을 다할 수가 없기에, 그 많은 문구와 법구(法句)의 뜻을 관찰하다가는 결국 네 부류의 제자가 목숨을 마치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활 잘 쏘는 네 사람이 활줄을 세게 당겨 화살을 한꺼번에 쏘면 잘 배우고 잘 알고 또 방편도 있기 때문에 순식간에 꿰뚫고 지나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세존에게는 네 부류의 제자가 있으니, 그들에게는 증상하는 행이 있고, 증상하는 뜻이 있으며, 증상하는 생각이 있고, 증상하는 지혜가 있다. 변재가 있어서 제일가는 변재를 성취하였으며 수명은 백 세이니라.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백년 동안을 설법하였다. 다만 음식 먹을 때와 대소변을 볼 때와 잠잘 때 및 모임이 있을 때는 제외된다. 그들은 여래가 말하는 문구와 법의 글귀에 대해서 그 뜻을 관찰하는데 지혜로써 얼른 그 뜻을 관찰하고, 다시는 여래의 법을 묻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래의 설법은 끝이 없고,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마땅히 한량없는 설법의 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3의지
[意止:의지(意止)는 팔리본에 satipatthana 즉 염처(念處)염주(念住)로 되어 있다.]는 이른바 성인이 익히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힌 뒤에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만일 여래가 제자들을 위하여 설법한다면, 이는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해)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며, 자비심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요익을 위함이요, 쾌락을 위함이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함이다. 혹 그 제자들이 공경하지 않고, 또한 순종하지 않으며, 지혜를 세우지 않고, 그 마음이 법을 향해 법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받지 않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겨 선정[定]을 얻지 못하더라도 세존은 그것 때문에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세존은 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평등함[捨]으로 항상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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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지혜로울 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의지(意止)로서 이른바 성인이 익히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히고 나서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또 여래가 제자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은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해)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며, 자비심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요익을 위함이요, 쾌락을 위함이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함이다. 혹 그 제자들이 공경하고 또한 순종하며, 지혜를 세우고, 그 마음이 법을 향해 법으로 나아가며, 바른 법을 받아 가지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아 능히 선정을 얻더라도 세존은 그것 때문에 기뻐하지 않는다. 그저 세존은 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항상 생각하고 항상 지혜로울 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의지로서 이른바 성인이 익히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힌 뒤에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 또 여래가 제자를 위하여 설법하는 것은 가엾이 생각하고 불쌍히 여겨 (그들을 위하여) 이치와 요익을 구하고, 안온과 쾌락을 구하며, 자비심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은) 요익을 위함이요, 쾌락을 위함이며, 요익의 즐거움을 위함이다. 그러나 혹 어떤 제자들은 공경하지 않고, 또한 순종하지 않으며, 지혜를 세우지 않고, 그 마음이 법을 향해 법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받지 않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겨 선정을 얻지 못한다. 또 어떤 제자는 공경하고, 순종하며, 지혜를 세우고, 그 마음이 법을 향해 법으로 나아가며, 바른 법을 받아 가지고, 세존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아 능히 선정을 얻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존은 그것 때문에 근심하고 슬퍼하거나 또는 기뻐하지도 않는다. 그저 세존은 하고자 하는 바가 없는 평등한 마음으로 항상 생각하고 항상 지혜로울 뿐이다. 이것이 세 번째 의지로서 이른바 성인이 익히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힌 뒤에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 '3의지는 이른바 성인이 의지하는 것이요, 성인은 이를 익힌 뒤에야 대중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니라.'위없는 조어사(調御士)는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조어사는 사람들을 다루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 남방 서방 북방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코끼리를 다루는 사람은 코끼리를 다루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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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동방 남방 서방 북방으로 나아가게 한다. 말을 다루는 사람은 말을 다루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 남방 서방 북방으로 나아가게 한다. 소를 다루는 사람은 소를 다루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나니, 혹은 동방 남방 서방 북방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와 같이 위없는 조어사는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로 나아가게 한다.그 중에 방위[方]란, 색(色)을 색으로 관찰하면, 이것을 첫 번째 방위라 한다. 안으로 색이란 생각[想]이 없고 밖으로 색을 관찰하면, 이것을 두 번째 방위라 한다. 깨끗하게 해탈하여 몸의 촉감을 성취하여 노닐면, 이것을 세 번째 방위라 한다. 일체의 색이라는 생각을 넘어 상대가 있다는 생각을 없애고 약간의 생각도 기억하지 않으면 곧 한량없는 공(空)이다. 이 한량없는 공처[無量空處]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을 네 번째 방위라 한다. 일체의 한량없는 공처를 넘으면 곧 한량없는 식(識)이다. 이 한량없는 식처[無量識處]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을 다섯 번째 방위라 한다. 일체의 한량없는 식처를 넘으면 곧 무소유이다. 이 무소유처(無所有處)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을 여섯 번째 방위라 한다. 일체의 무소유처를 넘으면 곧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이다. 이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성취하여 노니는 것을 일곱 번째 방위라 한다. 일체의 비유상비무상처를 넘어 상(想)과 지(知)가 멸해 다한 몸의 촉감을 성취하여 노니는 것, 지혜로 관찰해 번뇌[漏]가 완전히 끊어진 지혜, 이것을 여덟 번째 방위라 한다. '위없는 조어사가 사람들을 다루어 일체의 방위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분별관법경(分別觀法經)제3 [제4 분별송]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을 유행하실 적에 승림급고독원[승림급고독원은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이라고도 한다.]에 계셨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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