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坐禪,참선)

참선의 열세 고개(전심법요)

근와(槿瓦) 2015. 12. 29. 00:40

참선의 열세 고개(전심법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결코 죽고야 마는 인생이 왜 생겨났을까? 이렇다 할 목적도 없이 왔다가 까닭도 모르게 가버린다. 맨손으로 왔다가 맨손으로 가니 뜬 구름 같은 이 세상의 삶을 남을 위해 바쳤는가, 나를 위해 살았는가? 아무리 따져 보아도 나는 모를 일이다. 나는 이 순간에도 흘러 죽어 들어간다. 그것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이렇다면 무엇을 가리켜 산다고 하며 무엇이 나고, 무엇이 살고, 무엇이 죽는 것이냐? 과연 이것 뿐인지 아닌지 진실로 알고파 하는 뜻에서 세상 살이에 깊이 무상(無常)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곧 죽는 인간에서 무엇이 귀한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생사를 해탈하기 위하여 무엇이나 다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구하고자 할 뿐이며 나 자신은 환멸의 현상계에서 실연한 사람이다. 물거품 같이 이 몸 실로 믿을 길이 없으니 하루 속히 도인을 찾아 뵈옵고 도를 배울 일만 남은 것이다.

 

그래서 세속의 은애(恩愛)가 두터운 부모 형제 처자와 이별하고 천하명산을 다 찾아서 선지식을 뵈옵고자 일편단심(一片丹心)으로 온 정성을 다하여 먹으며 굶으며 눈 비 바람을 피하지 아니하고 찬 이슬 찬 바람에 바깥 잠을 자 가면서 선지식을 찾노라니 그 고생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마는 이 역시 생사를 해탈하는 또 하나의 고개인 것이다.

 

선지식을 섬기며 목숨을 다하여 받들며 한 마디의 법을 얻어 듣기 위하여 불에나 물에도 뛰어들기 어려워 하지 아니하면 대도를 깨달아서 생사를 초월하는 법을 바로 배워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선지식 스님에게 의지하여 천칠백가지 공안 가운데서 화두 한 가지를 선택하였으니 이제 곧 참선공부를 시작하는 마당이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을 한번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시고 좌선을 하셨고 달마조사께서도 九년동안을 벽을 안고 돌아 앉아서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참선 공부를 닦는 사람들은 대개가 다 좌선에서 힘을 얻게 된다.

 

이제부터 정진하여 열셋의 일여(一如)한 단계를 지나서서 성불하게 됨을 밝힌다.

첫째, 송화두(誦話頭)이다. 이것은 화두를 입으로 외우지 아니하면 의심은 커녕 화두마저 들리지 아니하므로 부득이하여 입으로 소리를 내어 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야 간신히 화두가 들리며 의심이 조금 일어나는 정도이다. 다른 사람의 공부에 방해가 되므로 선방 밖으로 나가서 「송화두」를 짓는다.

 

둘째, 염화두(念話頭)이다. 남보기에 창피하기도 하지만 목숨을 떼어 놓고 화두를 애써 외우다가 보니 지금은 소리쳐 외우지 아니하여도 화두가 마음에 잡히고 희미하나마 의심은 일어나다가 말다가 한다.

 

셋째, 주작하두(做作話頭)이다. 위의 염화두로써 죽자 하고 애를 쓰니 어떤 날은 제법 화두가 힘차게 들리고 의심이 번쩍 일어서다가 또 며칠 동안은 잔뜩 애만 태우고 공부는 잘 아니되는 날도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생사를 해탈하고야 말겠다고 한번 작정한 이 마음은 물러가지 아니하므로 잘 되는 날이 차차로 많아져 간다. 참선이 잘 되다가 말다가 하여서 애써 주작하는 것이므로 「주작화두」라고 하는 것이다.

 

넷째, 진의돈발(眞疑頓發)이다. 이렇게 간절히 애써 감으로 공부가 점점 진보되어서 홀연히 팔만사천 망상이 뚝 끊어지고 화두에 대한 의심이 정말로 간절하여 참을 수가 없어지며 앉고 선 줄도 모르며 또한 시간이 가는 것을 모르고 딱 버티고 힘차게 앉아 있게 된다.

 

다섯째, 좌선일여(坐禪一如)이다. 그리하여 단정히 앉아서 참선을 하는 때에는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앉은 줄을 모르며 화두의 의심한 생각만이 순일하여 쭉 일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어나서 일을 하는 때는 화두가 희미하거나 없어지거나 하고 만다.

 

여섯째, 동정일여(同靜一如)이다. 이 동정일여가 된 공부에 또한 세 가지 단계의 구별이 있으니 좌선일여를 지나가서 일을 하여도 화두 의심이 그대로 버티고 있으나 말을 하는 때에는 화두가 끊어지며 또한 말할 때에도 잘 되다가 소설이나 잡지 같은 것을 열심히 읽으면 끊어진다. 그러나 소설을 숙독하여도 화두는 제대로 힘차게 나가야 하며 또한 일부러 저질러서 남에게 죽도록 매를 맞는 때에도 화두가 그냥 힘차게 나가야 공부가 비로소 「동정일여」에 도달한 것이다.

 

일곱째, 몽교일여(夢覺一如)이다. 비록「동정일여」는 된다 하더라도 또한 꿈을 꿀 때에는 공부는 그만두고 중도 아닌 속인의 행세를 하는 일이 있다. 번번히 꿈에는 딴 짓을 하고 있다. 그럴수록 공부를 더욱 돈독히 힘써 가면 꿈 가운데서도 「동정일여」때와 같이 삼단계로 진보하여서 꿈에서도 오직 힘찬 화두의 의심이 앞서 있게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완전한「몽교일여」가 되는 것이다.

 

여덟째, 오매일여(寤寐一如)이다. 이와 같이 비록 「몽교일여」는 되었다 할지라도 잠이 폭든 때에는 화두가 없어지고 만다. 그러나 잠을 깨어 일어나면 화두를 다시 챙기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들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한 잠만 자는 것이 아니고 희미한 잠에 희미한 화두가 들려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드러누워서 잠을 자는 시간이라도 잠은 점점 희박해지고 화두의 의심은 점점 드러나서 확실해지는 때에는 잠은 아주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로 이 육신이라는 것이 진공의 무(無)가 변화한 환상(幻想)이기 때문에 이 몸은 당초부터 자고 깨고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다만 이 마음이 스스로 상대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움직인 끝에는 반드시 권태증을 일으키고 더하여 피로를 생각하고 피로가 잠이 된다. 이것이 다 심리상태인 것이요, 아무 것도 아닌 이 환상 자체와는 상관이 없는 일인 것이다. 이 화두의 의심이 돈독해져서 잠이 없어지고 「오매일여」가 된 지경에 이르면 불원간에 인생의 본래면목인 이 마음자리를 크게 깨달아서 생사를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아홉째, 생사일여(生死一如)이다. 이 마음 자리를 분명히 깨닫고 또한 깨친 후의 공부를 완전히 마친 도인들은 다 생로병사에 자유자재하였다. 병도 앓으려면 앓고 말라면 말며 죽는 것도 병으로 죽지 않고 이 육체 버리기를 옷 벗듯이 자유로 한다. 앉아서 이야기하다가 버리고 가며 이야기하며 걸어가다가 벗어놓고 가버린다.

 

열째, 입태일여(入胎一如)이다. 비록 이 몸 버리기를 자유로 하여 생사일여가 되었다 할지라도 내생(來生)에 부모될 인연을 만났을 때에 문득 망상을 일으켜서 「생사일여」가 없어지고 태중의 피(血) 덩어리가 되어서 생리(生理)에 묻히고 만다.

 

열한째, 주태일여(住胎一如)이다. 설사 입태할 때에 「一如」하였다 할지라도 「주태」열달 동안에 미혹하는 수도 있고 태중 열 달 동안에 「일여」했다 하더라도 출태(出胎)할 때에 깜박 잊어버리는 수가 있다.

 

열두째, 출태일여(出胎一如)이다. 이 「출태」할 시에 「일여」하면 영겁에 「일여」하게 되는 것이다.

 

열세째, 영겁일여(永劫一如)이다. 이렇게 영겁에「일여」하여 「아누다라 삼먁 삼보리」를 얻어서 성불한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열세 가지 단계를 밟아서 성불하는 것은 가장 참선하기 어려운 사람의 근기가 하는 공부법이거니와 만약 정말로 억세고 성미 급한 놈이 있다면 七일 만이면 화두를 완전히 타파(打破)하고 당장에 「영겁일여」가 되는 수도 있다.

 

이상의 열세 단계의 공부는 혹시 이만하면 내 공부가 불조(佛祖)를 지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자부심이 생겼을 때에 참고로 보면 좋을 것이다.

 

 

출전 : 傳心法要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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