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뜻과 형식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慈覺禪師坐禪儀-
앉아서 참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가장 높고 깊고 크고 넓은 제일 거룩하고 최고 지상의 진리인 이 마음의 본래면목을 깨달은 연후에 마땅히 이 마음을 이냥 이대로 챙기고 가다듬어서 청정하고도 온전하게 가져서 모든 망상을 뿌리채 뽑아 없애야 한다.
혼혼침침하여 무기력한 허무공(虛無空)에 빠져 있지 아니한 것을 앉았다고 하는 것이며, 모든 애욕경계에서 살되 털끝만큼도 애욕이 없으며 혼란한 이 세상에 머물러 있으되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을 선을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밖으로는 흥망시비 고락의 파동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안으로는 모든 욕심이 없으므로 한 생각도 새어 나가지 아니하는 것을 앉았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 데도 애착된 일이 없으며 또한 의지할 곳을 구하지도 아니하여 이 나의 밝고 밝은 불멸의 생명이 이렇게 항상 반듯이 드러나 있는 것을「선」을 닦는다고 한다.
바깥 경계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속에 번뇌 망상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것을 앉았다고 하는 것이며 항상 바깥 사정만을 알고자 하는 미혹한 중생의 살림살이를 정반대 방향으로 돌려서 자심반성(自心反省)에, 정진(精進)에, 8만4천 번뇌망상을 일으키는 그 본체 심원(心源)에 사무친 것을「선」을 닦는다고 하는 것이다.
역경순경(逆境順境)에 팔리지 아니하며 시비잡음과 남녀미색에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을 앉았다고 하는 것이며, 어두운 세상에는 일월보다 더 밝은 광명이 되며, 사람을 교화함에는 그 역량이 천지보다 더 큰 것을「선」을 닦는다고 한다.
중중첩첩으로 복잡한 차별경계에서 일미평등(一味平等)으로 차별없는 자심정(自心定)에 드는 것을 앉았다고 하는 것이며, 일체의 번뇌망상이 끊어지고 절대평등하여 두가지가 아닌 자심지(自心智)에서 일체 차별만법을 통달한 차별 지(智)로 나타내는 것을「선」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치열히 맹활동을 하되 이 마음을 본래부터 한적하여 흥망과 시비에 놀라지 아니하는 것이므로, 어느 때 어느 곳 무슨 일에서든지 항상 자유자재하며 일체 만사에 구속되지 아니하고 초연(超然)히 활동하는 것을 좌선이라고 한다.
대강 말하면 이러하거니와 상세히 할 말을 다 하려면 종이와 먹을 감당할 수 없다. 본래부터 밝고도 안정된 이 마음은 고요한 것도 없고 움직이는 것도 없으며 진실하여 변함이 없으되 또한 능히 세계로 이룩하는 기묘한 이 마음은 언제 생긴 것도 아니며 또한 없어지지도 아니하는 것이다. 물건이 아니므로 볼래야 볼 수가 없으며, 소리가 아니므로 들을래야 들을 수도 없는 것이다. 빈 것이지만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이지만 물건도 허공도 아니다. 크기는 무한대가 모자라며 작기로는 안팎이 없다. 신통묘용(神通妙用)과 한량없는 광명과 측량할 수 없는 목숨, 그리고 또한 큰 지헤와 자비가 무궁무진한 것이니,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한번 큰 용기를 내어서 참선을 시작하여 일생의 정력을 다하여 정진하되 나머지 없이 크게 깨달아야만 불법문중에 들어서는 것이다.
손뼉을 치며「야아-」하고 한번 큰 소리를 치고 나면 신통묘용과 한량없는 지혜공덕을 본래부터 이 마음이 갖추어 있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저 사마외도(邪魔外道)들이 요사한 방법과 문서조각을 서로 전하고 받음으로써 스승과 제자가 되며, 얻은 바가 있는 것으로써 궁극 이치로 삼는 것과 같을 수가 있으랴.
참선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커다란 문제가 하나 있어야 한다. 무엇이냐 하면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다. 왜 났는가? 오직 죽기 위해서만 난 것인가? 이 세상에는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는데, 눈앞에 닥쳐오는 일은 모두가 나를 늙게 하며 병들게 하며 죽게 하는 일 그것들 뿐이다.
참으로 그것뿐이며 왜 그러할까? 가는 인생을 붙잡을 수 없고 오는 인생을 막을 수도 없다. 과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이렇게도 목적없이 왔다가 목적없이 가야만 할 것인가? 먹고는 자고 자고는 먹고 그리하다 보면 늙고 병들고 죽고 그것뿐으로 끝장인지 또는 딋일이 남아 있는지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섭섭하고 슬픈 일이며, 겁도 나며 답답하구나. 한번 가는 걸음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 어디인지 아주 가버리고 마는 것만 같으니 걱정이다. 나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뜻없는 세상이나마 영원히 죽기는 싫고 하다 못해 일년이라도 겨우 한달 아니 하루라도 더 살고만 싶다. 왜 그러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 그런 모양이다. 이 최고 최대의 문제가 풀리기 전에 인생의 다른 할 일이란 무엇이 있으랴.
하기야 우선 급한 일은 먹고 싸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마는 그것은 왜 그렇게 불편하게 마련되었으며, 먹지 아니하고서 몇만년 살다가 죽었으면 사는 동안이나마 편할 것인데 도대체가 맞지 않는 일뿐이다. 좀 쉬울 법한 일도 있으련만 그런 것 저런 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이 날마다 밥 세 그릇씩은 먹어야만 사는 것이 인생이니 따분한 일이다. 거기에다 경쟁을 해야만 이런 생명이나마 끌고 가는 데까지나 갈 수가 있게 되어 있으니, 죽고만 싶을 뿐 살 의미는 발견할 수 없다. 이래도 한 평생 저래도 한 평생이니 쓸데없는 고민보다는 하고픈대로 하다가 죽는 날 죽으면 그만이 아니냐고 생각하자니 목적 없는 싸움에 한량없는 생명을 죽여야 하며, 나 혼자 살겠다고 해서 살고만 싶어하는 남의 생명을 자꾸 죽여 버리려니 참혹한 일이라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맞지 않게만 마련했을까?
하고많은 동서고금의 서적들이 있지마는 이 문제를 제대로 풀어서 이 고민하는 인생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살도록 된 큰 길을 열어준 지도자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나마저 죽자니 그것은 누구나 물론하고 결국에는 듣고 보고 배울 길도 없어져서 부득이하여 벽을 안고 돌아 앉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삼천년 전의 싯달타로 하여금 저 히말라야 산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한 번 앉아서 6년이나 일어설 줄을 모르고 사유하게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이 우주와 인생을 정관(精觀)하여 그 정견(正見)을 이룩한 뒤에 비로소 싯달타가 걷던 길과 달마 조사가 9년 동안을 소림굴에서 돌아앉아 있던 종풍을 배우는 것을 참선(參禪)한다고 한다. 참선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부귀와 재능을 겸전한 싯달타가 왜 왕궁을 버리고 하루아침에 걸인이 되어 구도의 고행을 하게 되었는가? 그 동기를 잘 살펴서 그의 인생관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할 것이며, 다음에는 그가 대각을 이루어서 부처님이 되신 후에 다시 보는 우주 인생관을 철저히 규명하여 불법정신(佛法正信)을 얻어야 한다. 만일에 정신을 얻지 못하고 사신(邪信)을 가지고 참선을 하면 마귀가 되고 마는 것은 부처님께서나 역대 도인들이 다같이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정신을 얻은 뒤에 다시 서원을 세우되, 철없이 중생들이 인생의 정견과 그 정로를 모르고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서로서로 극한투쟁만을 계속하여서, 그 보복에 골몰하고 한계도 모르는 맹목적인 삶의 애욕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을 가련하게 생각하고 어서 대도를 성취하여 이 고해중생들을 남김없이 제도할 것을 부처님 전에 맹세한다.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어버리고 안으로는 온갖 번뇌를 쉬어서 일없는 한가한 사람이 되면 몸과 마음이 개운하여 움직일 때나 앉아 있을 때에나 조심하여 마음에 틈이 없게 하며 음식은 자기 식량보다는 한두 술 덜 먹게 하며, 잠자는 시간도 차차로 조금씩 덜 자게 하되, 공부의 힘에 따라서 줄일 것이며, 공부에 힘을 쓰되 마음이 가라 앉거나 벌덕거리거나 하지 아니하도록 단도리하여 온전한 정신으로 정진하며 몸은 멋대로 앉지도 말고 또한 너무 딱 버티고 앉지도 말며 숨쉬는 것은 보통으로 순순히 하여 마음의 호흡에 끌리지 않게 하여야 한다.
좌선할 때에 앉는 법은 먼저, 조용한 처소를 마련하고 두터운 방석을 깔고 앉아서 몸을 묶은 허리띠나 대님 같은 것을 다 조금씩 늦추어서 고쳐 매어 혈액순환을 잘되게 한다. 그렇게 몸을 정리한 뒤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되 먼저 왼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올려 놓고서, 두 발을 다 안으로 당겨서 놓되 두 발목이 완전히 두 넓적다리 위에 걸쳐지게 올려 놓고 도사리고 앉으면 된다.
이것을 가부좌(跏趺坐)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저절로 허리가 쭉 펴져서 가장 정상적으로 꼿꼿이 앉게 된다.
가부좌를 처음 하는 사람은 왼쪽 발을 오른쪽 넓적다리에 올려 놓고 앉기만 하면 되는데. 이것은 반가부좌(半跏趺坐)라고 한다. 그 다음에 오른손을 밑으로 왼손을 위에 포개놓고 두 엄지 손가락 끝을 서로 마주 닿게 하여 안으로 당겨서 배에 닿게 하되, 이 두 엄지손가락 끝과 배꼽과 코 끝이 일직선이 되게 하여 귀는 두 어깨 위에 바로 서게 한다. 다음에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이와 입술은 맞물게 한 다음에 허리를 쭉 펴고 전후 좌우로 서너 번씩 몸을 흔들어서 가벼운 운동을 한 뒤에, 다시 꼿꼿이 바로 앉아서 모든 생각을 다 놓아 버리고 아랫배에다 살며시 힘을 주면 몸이 가장 완전하게 앉아지고 정신이 온당해진다. 그러므로 이 정좌법(正坐法)은 만병통치가 되는 법이며 신체가 점점 건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앉는 법을 어기면 몸이 점점 약해져서 갖은 병이 다 생기는데, 위장병과 냉병으로 만병의 근본이 자리잡아 수십년 참선한 결과로 중병환자가 되고마니, 신경질이 생겨서 항상 마음이 불안하다. 눈은 반쯤 뜨고 석자 앞을 보는 것과 같이 하면 된다. 참선하면서 눈을 감는 것은 불조(佛祖)께서 다 금하신 것이니 절대로 눈을 감으면 아니된다.
이리하여 공부가 화두의 뜻을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는 의심이 콱 쏟아져서 일념으로 깊게 통일이 되었거나 마음의 앞뒤에 생각이 뚝 끊어지고 적멸무위(寂滅無爲)하여 힘차고 깨끗한 일념정념(一念正念)이 확연하게 드러나서 대천세계가 없어져 버릴 지경이 되면, 이것을 참선하여 선정력(禪定力)을 얻었다고 하는 것이며, 이때의 몸과 마음이 가뿐하고 상쾌한 것은 그 스스로만 알 수 있다. 마치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것과 같고, 목을 졸렸다가 풀린 것과 같으며, 무서운 꿈에서 깬 것 같이 무한한 자유해탈의 통쾌감을 느끼게 된다.
몸이 안정되므로 마음이 안정되고 따라서 호흡이 저절로 조정되니, 이런 때에 다시 한 번 아랫배를 턱 놓아 늦추어 버리며 일체 선악시비에 참여하지 말 것을 맹세하고 저 인간 세상 법이나 또한 인과 · 생사 · 죄복 · 성불 · 중생제도니 하는 이 불법까지도 도무지 생각하지 말아야 남보기에 넋빠진 등신 바보와 같이 된다. 그럴수록 안으로는 그 정신이 하나로 뭉쳐서 기운차게 되어 가며 점점 밝고 날카롭고 총명해진다.
태산과 같은 굳건한 용기와 자신이 앞서고 바다와 같은 아량과 안심의 뒷받침으로 일로향상(一路向上) 전진할 뿐이니, 상쾌할 뿐이다. 끝도 없는 시비만을 되풀이하는 만장홍진(萬丈紅塵)의 인간고해를 벗어날 길이 나타났으므로 확연한 정신(正信)이 뚜렷하다. 참선하는 한 법이 8만4천 불법을 다 꾸려가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좌선법(坐禪法)을 안락법문(安樂法門)이라 하며 해탈법문(解脫法門)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정념(正念)중에서도 홀연히 한 생각 망상이 일어나서 차차로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때가 있으니 주의하여야 한다. 이것은 다 부주의하여 정신을 차리지 아니한 탓으로 생기는 허물이니 첫생각이 일어날 때에 얼른 챙기면 곧 없어진다.
참선공부가 이렇게 순일무잡(純一無雜)해진 때에 이미 불조의 정지견(正知見)을 깨달은 사람이면 용이 구름을 탄 것과 같고, 범이 산에 들어선 것과 같은 것이며, 설혹 지견을 얻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큰 바람에 산불이 나서 번지는 것과 같아서 조금씩만 힘써도 순일한 공부가 확확 차 오르게 된다. 이러한 때일수록 정진을 바짝 다잡을 것이니 결단코 서로 속지 아니할 것이다. 멀지 않은 앞날에 대도를 깨달을 것이니 쉬지 말고 정진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론(經論)에 말하기를 도가 높아 가고 공부가 깊어질수록 한동안은 점점 큰 마장이 와서 붙는다고 하였다. 천만 가지 순경과 역경으로 나타나며 어떤 때는 불보살이 나타나서 그대의 공부는 다 성취된 것이니 빨리 일어나 저 고해중생을 위하여 속히 세상에 나가서 구제하라고 권하는 것 등, 이 마음을 흔들어 보기도 하며 어느 때에는 선녀(仙女)와 같은 미인이 와서 갖은 수작을 다하여 이 마음을 유혹해 보려고 하는가 하면 무서운 짐승이 와서 이 마음을 놀라게 하려고 하다가 최후로는 28천(天) 가운데 자재천상(自在天上)의 마왕 파순(魔王波旬)이가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협박 공갈로 위협하여 빨리 일어나 항복하라고 강요하기도 하니, 이러한 것들은 다 나의 과거 전생에 다생다겁으로 사생육도(四生六道)로 돌아다니면서 착한 일 한 가지면 악한 일은 천만 가지나 저지르던 업습(業習)에서 나타나는 환영(幻影)의 그림자인 것이니, 반가워할 것도 없으며 미워하거나 무서워할 것도 없는 것이다.
역순(逆順)의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맡겨두고 거울이 물건을 대한 것과 같이 하여, 다만 증애취사(憎愛取捨)만 하지 말면 부동무심(不動無心)의 정념(正念)앞에는 저절로 사라져 없어진다. 이러한 마장이 있다는 것도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만약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별안간에 벌떡 일어나면 신체에 고장이 생기기 쉽다. 마음이 부동선정(不動禪定)에 들면 신체도 따라서 안정상태에 놓이고, 몸이 안정상태에 놓이면 혈액도 자연히 안정상태로 순환하게 되는 것이므로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여 몸을 먼저 전후좌우로 천천히 움직인 뒤에 팔을 들며 다리를 뻗고 하여 부드러운 운동을 하다가 일어나야 한다. 선정에서 일어나서 행보(行步)를 하다가 일을 할 때에도 항상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 정력(定力)을 놓치지 말도록 하되, 마치 모질게 우는 갓난 아기를 달래는 것과 같이 동정(動靜)에나 생사(生死)에 끌리지 아니하는 부동대정(不動大定)을 쉽게 성취한다.
참선을 하여 이 마음자리를 깨쳐서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은 마치 물속에 떨어뜨린 구슬을 찾는 것과 같아서, 구슬이 떨어진 자리를 보아 두고 긴 막대기를 구슬 있는 자리에 꽂아 놓고 살며시 들어가서 막대기 끝으로 구슬을 집어내면 한 손에 구슬을 찾아낼 수가 있지만 만약 처음부터 여러 사람이 모두 들어가서 물을 흐려 놓으면 점점 찾기가 어려워갈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원각경>에 말하기를「걸림이 없는 청정한 지혜는 다 선정의 힘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고, <법화경>에서는「저 조용한 곳으로 가서 그 마음을 거두어 닦되 편히 앉아서 저 태산과 같이 움직이지 말라」하였다. 그러므로 범부나 성인을 다 초월하여 사람의 본래 면목을 깨달아서 생사에 자유롭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용한 처소에서 참선공부를 닦아야 한다.
옛날의 도인들이 이 육신 벗어 버리기를 마치 입었던 옷을 벗어 버리는 것과 같이 쉽게 하되, 앉아서 말하다가 벗고 가기도 하고, 걸어서 가다가 세워 놓고 벗기도 하되, 자기의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서 태어나기도 하며, 소요자재(逍遙自在)하니 천당과 지옥이 한 개의 유흥장이며, 중생을 계도하려니 또한 조그마한 사업장이다.
이렇게 생사거래(生死去來)를 자유로 하는 것이 다 정력(定力)의 힘인 것이다. 일평생에 이 공부를 다해 마치고 대원(大願)을 세워 빈틈없이 날뛰더라도 오히려 어긋날까 걱정이 되는 것인데, 하물며 수도를 게을리 하는 사람으로서야 무슨 힘으로 다생다겁(多生多劫)을 육신본위며 자기본위로만 저질러 놓은 죄악의 업력(業力)을 막을 수 있으랴.
설사 지견(知見)을 얻은 바 있어서 불법대의(佛法大義)는 알았다 하더라도 선정력이 없는 사람은 생로병사(生老病死)에 자유가 없으므로 병에 끌리며 죽음에 끌리어 속절없이 눈만 감았으니, 일생의 중 노릇이 헛 걸음만 하고 죽어가서 가없는 저 고해(苦海)의 생사 파도에 표류(漂流)하리니 이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원컨대 참선에 뜻하는 선우(禪友)들은 명심하기를 빌고빌며 다같이 성불하여 고해중생을 제도함으로써 부처님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바이다.
출전 : 어둠 속에 비친 서광이여(청담큰스님)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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