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公案,話頭)이란?

활구의 세계

근와(槿瓦) 2015. 12. 17. 01:19

활구의 세계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말과 뜻이 끊어진 대화.

 

어떤 사람이 목우자에게 물었다.

화엄경에서 이미 법계무장애연기의 이치를 설명하여 가히 취사할 것이 없는 도리를 밝혀 놓았는데 어찌하여 선종에서는 이 최상의 이치를 다 열 가지의 병통이라고 하여 저 무미한 화두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것이 가장 성불을 빨리 하는 법이라고 주장하는가?

 

우주 만유의 본체인 이 마음의 이름을 법계라 하여 이것이 어디에 얽매인 데가 없기 때문에 이 마음법계에서 한 갈래로는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저 물과 불, 하늘과 땅, 큰 것과 작은 것, 있는 것과 없는 것, 예와 지금, 밝음과 어둠, 산것과 죽은 것, 이것이 저것을, 저것이 이것을 하는 식으로 서로가 꼭 반연하면 얽혀 의지하여 생겼다가 없어졌다 하여 끝없이 흘러가기만 하는 연기상대의 현상계가 있기도 하며 또 한 갈래로는 그와는 정반대로 모든 것이 서로 용납하지 아니하면서 용납하며 또한 흐르면서 흐르지도 아니하며 원융무애한 현상계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서로 융통하여서 불이 곧 물이며 물이 곧 불인 것이다. 하늘이 곧 땅이며 땅이 곧 하늘인 것이다. 사람과 짐승이 그렇고 남자와 여자가 그렇다. 나와 너, 무정과 유정, 산 것과 죽은 것이 그렇다. 중생이 곧 부처이며 부처가 곧 중생이다. 아는 것이 곧 모르는 것이며, 모르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번뇌가 곧 대각이며, 대각이 곧 망상인 것이다. 없는 것이 있는 것, 있는 것이 없는 것, 가는 것이 오는 것, 오는 것이 가는 것, 어제가 내일, 내일이 오늘, 동쪽이 서쪽, 서쪽이 동쪽, 무한대의 저 쪽이 곧 이 쪽이며, 여기는 곧 우주의 밖이며, 동시에 복판인 것이다. 큰 것이 작은 것, 작은 것이 큰 것이다. 이렇게 만물이 서로 융통하여 용납하는 것이다.

 

일대일로만 서로 용납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이 그 전체를 다 용납하므로 하나하나가 다 그렇고 또한 이 하나를 만물이 다 각각 용납하므로 하나가 만물에 두루 통해 있다. 낱낱이 다 그렇다. 그러므로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인 것이다.

 

이를테면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요, 전체는 전체요, 하나도 전체도 아니다. 다 그렇고 아니 그렇고, 그러하다. 이상과 같은 이치로 해서, 저 항하의 모래가 그 모래알 낱낱 속에 헤아릴 수 없는 대우주가 꽉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은 산이요, 물은 물로서 낱낱이 다 완전한 것인데 무엇을 가지고 꼭 이것은 대소니 유무니 흥망이니 남녀니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여 꼭 이렇다고만 별별 이름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또 그렇다고만 해서 틀릴 것은 또한 무엇인가? 그러므로 만물이 유정 무정할 것이 없이 다 부처이다.

 

이렇게 본래 마음자리를 완전히 발견해 놓고 보면 앞에서 말한 저 만물이 서로 용납하면서 용납하지 못하는 상대, 연기법칙에서 일어난 모순 불만의 이 세계가 그대로가 뚜렷이 둥글어서 서로 융통하여 아무런 장벽과 불만이 없는 완전하며 영원하며 자유 만능의 대원융 무장애 법계인 낙원이다. 이러한 최고이며 최대 최후의 낙원에의 길이 곧 이 마음인 것을 열어 보여서 다시는 따로 무엇을 앗고 버릴 것이 없는 것을 분명히 밝혔으니 그야말로 언어도단하고 심행처멸하여 최상 최승의 최상승법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선종에서는 이러한 화엄경의 원만하고 훌륭한 의론을 도리어 열가지 병통에다가 집어 넣어서 일체 경론을 다 보지 못하게 하고 단순히 재미없는 화두 한 가지만을 생각해 들어가는 것이 가장 빨리 부처되는 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목우자는 대답했다.

근래에 섣불리 불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대개가 다 그러한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종에서는 인생의 최고 사상인 부처님의 우주관과 인생관에 대한 최상의 의론을 경론으로 빼앗거나 말로 들어서 알았거나 하여 일체 의론이 끝난 뒤에 다시 물샐틈 없는 완전한 발심을 한 사람들이 의론이 막다른 곳에서 인생 최후의 문제인 이 마음의 실상을 깨닫기 위하여 한층 더 발심하여 만번 죽더라도 이 길에서 물러서지 아니할 무서운 각오와 한량없는 용기를 가지고 들어오는 앞뒤 끊어진 청풍납자들만을 받아 들이는 것이고 그 나머지 의론이 끝나지 못하고 말이 남아 있는 부족한 인간들은 받지 아니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초학자들로서는 선종에서 앞뒤를 뚝 끊어버리고 이리도 저리도 따져 볼 수 없어서 꽉 막힌 절벽과 같고 아무런 재미도 없는 화두 한 가지만을 전 생명을 다 바쳐서 생각하는 이 진실 미묘한 비밀의 종풍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의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에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한 이 마음이 차별만상으로 나타나는 이치와 그 갈피를 의론하고자 할 것 같으면 선학자로서도 어찌 이 열 가지 지해의 병통이라는 것이 저 화엄경에서 밝히는 이 한 마음 법계가 열 가지 무진법계로 나타나는 이치인 것을 모르고서 무식한 주장을 할 리가 있으랴!

 

경산대혜선사가 말하되 평소에 정리되지 못한 산발적인 불교 지식 그것으로 깨쳐 들어설 것이라는 부족한 생각이 앞을 막아 있으면 그 때문에 이 마음의 본래 면목인 자기의 정지견이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정지견을 막아낸 이미 정리된 망상이지마는 또한 마음 밖에 딴 곳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또한 이 마음 말고 별다른 일도 아닌데 어찌 버리려고 할 것이 따로 있겠는가, 이른바 참선하는데 열 가지 병통이라는 것은 그것이 다 어서 깨치고자 하는 화두가 아닌 딴 생각이 그 모든 병통의 근본이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이 병통이 딴 데서 온 것이 아니라고 보면 어디서 나온 것이며 또한 별다른 일도 아닐 것 같으면 그것은 뭐가 누가 하는 일이냐? 생각하건대 이것은 이 마음이 직접 10법계로 나타나서 두루 흐르며 또한 두루 흐르지 아니하는 공덕이 있는 것을 밝히는 말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모든 번뇌 망상이 다 구경각의 이 마음이며 된 생각이나 안 된 생각이나가 완전히 생사를 벗어나서 자유자재한 이 마음 아닌 것이 없다는 등의 둘이 없는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치의 의론이 비록 최고로 둥글고 묘하지마는 이것들은 다 청정본연한 마음이 아무 생각도 없이 저절로 알아지는 스승없는 지혜이다. 천지 만법을 통달하여 아는 것이 아니고 깨닫지 못한 범부 중생들의 따지고 캐고 하는 미혹한 중생들의 번뇌망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선종에서는 의론보다도 실천으로써 금생에 부처가 되고도 남을 수 있는 방법인 화두만을 휘몰아쳐서 생각하게 하는 가풍이다. 여하약하한 높고 깊고 둥글고 훌륭한 불법의 지식일지라도 그것은 다 허망하고 생멸하는 망상으로 파고 따지는 병통인 사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낱낱이 다 쳐부셔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자화두는 큰 불무더기와 같아서 들어서기만 하면 전신을 확 태워 버리기 때문에 따져서 아는 불교 지식으로는 도무지 얼러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무자화두는 생멸심으로 따져 본 불교 지식을 여지없이 쳐부수는 무기라고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번뇌망상을 능히 쳐부수는 지혜가 따로 있고 또한 부술 번뇌 망상이 따로 있는 것인 줄 알면서 버릴 것과 앗을 것이 따로 따로 두 가지가 있는 것처럼 고집한다면 이 사람은 완전히 남의 말끝에 떨어져서 적멸청정한 자기 마음 자리를 제스스로 흔들고 있는 것이다. 어찌 저 총명 영리한 사람들이 선종의 앞뒤 뚝 끊고서 공안 화두 한 가지만을 생각하며 생명을 걸고서 불철주야 용맹정진으로 공부하는 사람과 같으리오.

 

부처님께서 샛별을 보고 대각을 이룬 그 내적인 자심진리의 참 면목을 체득하는 동시에 또한 과거에 조사들이 내세운 일천칠백 가지 공안을 다 투득하여 한줄에 꿴듯한 것이며 인간으로서 한평생 대사를 이루어 마치어 넉넉히 성불하여 구원겁으로 윤회하던 생사고를 벗어나서 온 누리에 자유자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선종문하에서 수도하는 사람들로서도 이러한 선종가풍의 최고 최상 최후적인 지도법을 알아 듣지도 믿지도 못하면 감당하기 어렵게 여기는 사람들을 위하여 저 경전을 가르쳐서 차차로 배워 들어서게 하는 지도법을 이용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엄경에서 가르치는 이치와 같이 진실하고 허망하지 아니한 이 마음이 일시에 상대차별의 열 가지 법계로 나타나서 이러한 살림살이를 벌여 놓고 이 마음은 거기에 어느 한 곳에도 구애가 되지 아니하는 도리를 가리키는 일이 있다.

 

선종에서도 보통 기틀의 초학자들을 위하여 일, 이, 삼의 차례로 지고하는 세가지 비밀 방법의 문이 있는데 맨 첫 번 문에서는 천사만려로 온갖 생각을 다 내는 본체인 이 마음을 깨쳐 들어서게 하기 위해서 저 무한대의 공간에 중중무진하게 벌여 있는 무량무수한 차별세계와 이 마음과는 털끝만큼도 거리가 없는 것이며 둘이 아닌 것이다고 하였고 소리없는 한마디 말이 확연하고 분명하게 온 우주만유를 다 꾸려서 머금고 있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말이 화엄경의 이치와 꼭같은 것이다. 선종에서는 이와 같은 초학자로서 이 마음을 뚜렷하게 믿으며 납득시키기 위하여 이 마음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도록 설명한 말들이 많이 있으나 이러한 말은 다 죽은 말로 취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설법들과 부처님의 법문인 팔만사천 경전의 말씀까지라도 그 모두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즉각으로 그 마음을 깨쳐서 생사를 초월하게 하지 못하고 그 말에 팔려서 그런가 저런가 하며 따지는 생각으로 그말 밑에서 주저앉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말은 죽은 말 또는 죽이는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출전 : 전심법요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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