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을 뜹시다
밤새도록 밝아 있는 주렴 밖에 풍월이 낮과 같고 마른 나무 바위 위에 화초가 항상 봄이로다.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은 눈속의 가시요 대자대비 보살은 지옥의 남은 찌꺼기로다. 흰 학은 높이 날고, 붉은 토끼는 빨리 달아나며 누른 꾀꼬리 노래 부르고 범나비 춤을 춘다. 허허허 알겠는가? 들놀이 북이 둥둥 울리며 태평을 축하한다. 9 · 9는 원래는 81이로다.
이 법문을 어렵다고들 합니다만 사실 알고 보면 내 법문 같이 알기쉽고 수월한 것도 없습니다. 비유를 하면 해가 떠서 한낮이 되어 온 천하를 비춥니다. 그러면 천지에 무엇이든지 훤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 보인다 안 보인다」하는 사람은 바로 눈을 감은 사람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라! 마음의 눈을 뜨면 청천백일이고 마음의 눈을 감고 보면 캄캄 밤중입니다. 그러니「어두워서 안 보인다 안 보인다」하지 말고 어떻게든지 노력해서 마음의 눈을 떠서 오늘 이 법문 뿐 아니라 모든 불조(佛祖)의 기연(機緣)들을 손위의 구슬 보듯 볼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다. 이제 법문은 다 마쳤습니다만 우리 불교의 진리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고자 합니다.
일체 만법이 나지도 않고 일체 만법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만약 이렇게 알 것 같으면 모든 부처가 항상 나타나 있다.
이 말은 화엄경에 있는 말씀인 동시에 불교의 골수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이는 우주의 근본 원리이며 불타(佛陀)의 대각자체(大覺自體)이어서 일체불법이 이 불생불멸의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불생불멸의 원리는 매우 어려워 불타의 혜안이 아니면 이 원리를 볼 수 없어 불교 이외의 종교나 철학에서는 거론하지 못하였으며 자고로 불교의 전용어가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세상만물 전체가 생자(生者)는 필멸(必滅)입니다. 나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생자필멸 아닌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면 부처님은 어째서 모든 것이 다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거짓말이 아닌가?
이것을 바로 알려면 마음의 눈을 뜨고 도(道)를 확실히 깨우쳐서 일체가 나지도 않고 일체가 없어지지도 않는 이 도리(道理)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일체만법이, 다 불생불멸이라면 이 우주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것은 상주불멸(常住不滅)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생불멸인 이 우주를 상주법계(常住法界)라고 합니다. 항상 머물러 있는 법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
이 법이 법의 자리(位)에 머물러서(住) 세간상 이대로가 상주불멸이다
세간상(世間相)이란 언제나 시시각각으로 생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겉보기이고 실지 내용에 있어서는 상주불멸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모든 것의 참모습)이라고 하며 화엄경에서는 그것을 무진연기(無盡緣起)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불생불멸인 동시에 이 전체가 또 융화하여 온 우주를 구성하고 아무리 천변만화(千變萬化)하더라도 불생불멸 그대로이며 상주법계 상주불멸(常住法界 常住不滅)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면 우리 불교는 바로 아는 동시에 모든 불교문제가 다 해결되는데 이것을 바로 모를 것 같으면 불교는 영영 모르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모두 다 산중에 들어 와서 눈감고 앉아서 참선(參禪)을 하든지 도를 닦아 가지고 결국에는 깨우쳐야지 안 깨우치고는 모를 것이니 그것 또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설사 도를 깨우쳐서 불생불멸하는 이 도리를 확연히 자기가 알고 보지는 못하더라도 과학적으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고로 여러가지 철학도 많고 종교도 많기는 하지만 이 불생불멸에 대해서 우리 불교와 같이 이렇게 분명하게 주장한 철학도 없고, 종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고도로 발달됨에 따라 원자물리학에서도 자연계는 불생불멸의 원칙 위에 구성되어 있음을 증명하여 불교의 이론에 접근해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등가원리(等價原理)로써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자연계의 불생불멸론(不生不滅論)은 상대성이론의 등가원리에서 제창되어 저명한 과학자들에 의하여 실험되었습니다. 즉 고전물리학에서는 자연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본요소인 에너지와 질량에 대해 각각 에너지 보존법칙 및 질량불변(質量不變)의 원리로서 자연계가 불생불멸임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전물리학에서는 질량과 에너지를 분리하였으므로 그 이론이 철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현대물리학에 와서 질량이 즉 에너지이며, 에너지가 즉 질량임을 규명하여 고전물리학의 질량 불변의 원리와 에너지 보존법칙을 통일하여 등가원리 또는 에너지 보존법칙으로 호칭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말하면 질량 전체가 에너지로 전환되고 에너지 전체가 질량으로 전환되어 전환 전후의 질량과 에너지는 증감(增減)이 없습니다. 즉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될 때 질량에 손실이 없이 에너지로 전환되고,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될 때도 에너지의 손실 없이 질량으로 전환되어 질량 즉 에너지, 에너지 즉 질량임이 실증된 것입니다. 손실 없이 에너지가 질량으로 질량이 에너지로 서로서로 전환 에너지가 질량으로 전환하였다고 해서 에너지가 없어지고(滅) 질량이 새로 생긴 것(生)이 아니며,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하였다고 해서 질량이 없어지고(滅) 에너지가 새로 생긴 것(生)이 아닌 것이니 불교의 근본원리인 불생불멸, 부증불감(不增不減) 그대로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얼음은 질량, 몰은 에너지와 같습니다. 얼음 한 그릇이 녹아서 물이 될 때 얼음이 없어지고(滅) 물이 생긴 것(生)이 아니며, 물이 얼음이 될 때 물이 없어지고(滅) 얼음이 생긴 것(生)이 아닙니다. 물 한 그릇이 얼음 한 그릇, 얼음 한 그릇이 물 한 그릇이어서 증멸(增滅)이 없으며, 물이 곧 얼음이요, 얼음이 곧 물이므로 불생불멸 부증불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현대물리학자들은 자연계의 불생불멸, 부증불감을 공언하는 바, 우주의 상주불멸(常住不滅)은 자연 성립되며 불교의 상주법계(常住法界)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과학이 자꾸 우리 불교에 접근해 오고 동시에 우리 불교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많은 재료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우리 불교에서는「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합니다. 색(色)이란 것은 유형(有形)을 말하고 공(空)이란 것은 무형(無形)을 말합니다. 그러니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 하니 이것도 또 곤란한 소리입니다. 어떻게 유형이 무형으로 서로 통하겠습니까? 바위하고 허공하고 통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실제 자연계의 현상을 보더라도 유형인 질량이 무형인 에너지로 전환하고, 무형인 에너지가 유형인 질량으로 전환하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그대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불생불멸 · 부증불감 ·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불교에서는 중도법문(中道法門=중도의 가르침)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처음 성불(成佛)하신 후 녹야원으로 오비구(五比丘)를 찾아가서 제일 첫 말씀으로「나는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즉 중도를 깨쳤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도라는 것이 바로 우리 불교의 근본입니다.
그럼 중도란 무엇인가? 양변(兩邊)을 여읜 것 즉 상대를 떠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양변이 대립되어 있지 않습니까? 지금 말한 생멸(生滅), 생(生)과 멸(滅)이 양변 즉 상대인 것입니다. 생과 멸은 서로 반대입니다. 그런 양변을 떠난 것이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면 결국 어떻게 되느냐? 질량이 생겼다는 것은 에너지가 없어졌다(滅)는 것이고, 에너지가 없어졌다(滅)는 것은 질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인 것입니다.
중도는 상대양변을 떠나서 그 상대 양변이 융합하는 바로 모순이 융합되는 세계를 말합니다. 모순이 융합되는 것입니다. 흔히「중도를 중간이다」라고 하는데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대립되어 있는데 중도법문(中道法門)에 의하면 그 선악을 떠나 초월해서 선악이 융통되는 것입니다. 선악을 떠나면 무엇인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간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선과 악이 서로 통해 버리는 것입니다. 선이 즉 악이고 악이 즉 선으로 서로 융통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통한다는 것은 유형이 즉 무형이고 무형이 즉 유형이라는 식으로 통한다는 뜻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질량과 에너지를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현대물리학에 와서는 에너지가 즉 질량이고, 질량이 즉 에너지로, 에너지와 질량이 서로 완전히 통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중도원리입니다. 그래서 이 중도법문(中道法門)이란 것은 일체 만물이 서로서로 융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모든 모순과 대립을 완전히 초월하여 그 모든 모순과 대립을 융합해 버리는 세계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이상의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불교의 근본이 어느 곳에 있느냐 하면 불생불멸에 있는데 그것이 중도법문입니다. 그러면 불생불멸은 관념론에 불과한 것인가?
아닙니다. 상대성 이론의 등가원리에서 그 과학적 증명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또 모든 것이 융합한다는 것에 대해 한 말씀 더 하겠습니다. 요사이 흔히 말하는 4차원의 세계라는 것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제시된 것이지만 그것을 수학적으로 완전히 공식화한 사람은 민코프스키라는 사람입니다. 민코프스키는 4차원 공식을 완성해 놓고 첫 강연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떠났다.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시대가 온다. 3차원의 시간 공간의 대립은 소멸되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시간 · 공간이 완전히 융합하는 세계, 그것을 4차원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불교에서는 무애법계(無碍法界)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무애법계라는 것은 양변(兩邊) · 상대(相對)를 떠나서 서로서로 거리낌이 없이 통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4차원 세계가 불교의 무애법계 그대로는 아니지만 시공(時空)이 융합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 불교의 중도법문(中道法門)을 설명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중도란 모든 대립을 떠나서 그 대립이 융화되어 서로 합하는 것입니다. 대립 가운데서도 철학적으로 볼 것 같으면 유무(有無)가 제일 큰 대립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닙니다. 유와 무를 떠나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역유역무(亦有亦無), 다시 유(有)와 무(無)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3차원의 상대적인 유와 무는 완전히 없어지고 4차원에서 서로 통하는 유와 무가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와 무가 서로 합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유무합고(有無合故)로 명위중도(名爲中道) 즉 유와 무가 서로 합하는 것을 중도라 이름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유무의 대립관계에 대해 좋은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변증법으로 유명한 헤겔이 대문호 괴테를 찾아간 일이 있습니다.
괴테 : 참 잘 오셨습니다. 당신의 그 변증법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헤겔 : 변증법이란 모순의 논리입니다. 괴테 : 모순의 논리라고요? 그렇다면 선이 악이 될 수 있고 비(非)가 시(是)로 될 수 있습니까? 유가 무로 될 수 있고 무가 유로 될 수 있습니까?
모순의 논리라면 으레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헤겔이 당황하였습니다.
헤겔 : 아! 그거야 판단하는 사람의 두뇌 여하에 달린 것 아닙니까. 괴테 : 그렇다면 당신의 변증법을 연구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우생학을 많이 연구하여 두뇌 좋은 사람 을 자꾸 만들어 내면 그게 좋지 당신같이 변증법을 연구할 건 무엇입니까.
이래서 헤겔이 괴테한테 크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중도법문은 상대 모순의 상통상합(相通相合)을 말하는 것이며, 헤겔의 변증법은 상대 모순의 발전적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시간의 간격이 없는 모순의 직접적 상통을 말하고 헤겔의 변증법은 모순의 대립이 시간의 간격을 두고서 발전적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생불멸의 중도의 원리에 서서 보면 모든 것이 서로서로 생멸(生滅)이 없고 동시에 서로서로 융합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무애자재(無碍自在) 안 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를 떠나서 융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이 즉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이며 시(是)가 즉 비(非), 비(非)가 즉 시(是)가 되어 모든 상대 모순 투쟁은 완전히 사라지고 싸움할래야 싸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극락세계이며 절대 세계인 것입니다.
보통 피상적으로 볼 때 이 세간(世間)이라는 것은 모두가 생멸, 나서 없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어디서 꾸어 온 것인가? 그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 전체 법계 전체 이대로가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 일체 만법의 불생불멸을 깨우쳐서 그것을 우리들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일체 만법이 불생불멸인 것을 확실히 알고 이것을 바로 깨우치고 바로 알아 나갈 것 같으면 천당도 극락세계도 필요 없고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그 전체가 절대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교에서는 근본적으로 현실이 절대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극락세계를 먼 데 가서 찾을 것이 아니고 현실상(現實相) 이대로가 상주불멸(常住不滅)한 절대세계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즉 절대이므로 3차원 세계가 본래 4차원 세계이어서 4차원의 절대 영원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 3차원의 상대유한(相對有限)의 세계로 착각하여 살아가고 있으니, 착각한 망견(妄見)만 버리면 원래로 우리는 4차원 세계의 절대 영원한 존재인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감고 살면 상대생멸(相對生滅)의 세계 속이며, 마음의 눈을 뜨고 살면 모두가 불생불멸의 절대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생불멸의 세계, 절대 영원한 세계를 저 먼곳에 찾아가서 살려고 하지 맙시다. 눈을 뜨고 보면 태양이 온 우주를 훤히 비추고 있는데 자꾸 어둡다, 어둡다 하면서 갈팡질팡하지 맙시다. 바로 알고 보면 우리가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절대의 세계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의 눈을 뜹시다.
출전 : 큰빛 큰지혜 큰열반(성철큰스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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