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마음이다.
불교에서는 항상 하는 말이 "모든 것이 마음이다(一切唯心)"라고 합니다. 마음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心外無物). 동시에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是佛)라고도 합니다. 불교는 그 교리 전체가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 만큼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보아야 불교를 알 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누가 불교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결국 불교는 모르고마는 것 아닙니까?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심(心)한 자에 있습니다. 가장 간단합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마음 〈심〉한 자 위에 서 있습니다. 이 마음〈심〉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교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습니다.
그런 동시에 마음을 알게 되면 부처를 알고, 마음이 부처이니까 그래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 마음의 눈을 뜨자."하는 것 아닙니까?
그 뿐입니까. 마음의 눈만 뜨고 자기가 먼 천지개벽(天地開闢)전부터 벌써 성불했다는 것, 천지개벽 전부터 성불했으니 현재는 말할 것도 없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성불한 그대로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결국 자성(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관법(觀法)을 한다, 주력(呪力)을 한다, 경(經)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운다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지만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가장 수승한 방법이 참선입니다.
참선(參禪)!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수승한 방법입니다. 참선하는 이것은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에서만 참선하는 것이 아니고 딴 종교에서도 참선 많이 합니다.
참선하겠다고 나한테 화두(話頭) 배우러 많이 옵니다. 며칠전에도 예수교 믿는 사람들 셋이 와서 삼천배 절하고 화두 배워 갔습니다. 그 사람들한테 내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절을 하는데 무슨 조건으로 하느냐 하면 하나님 반대하고 예수 제일 많이 욕하는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천당에 가도록 그렇게 축원하고 절하시오" 이렇게 말해주면 참 좋아합니다. 이런 것이 종교인의 자세 아닙니까. "우리 종교 믿는 사람은 전부 다 좋은 곳으로 가고, 우리 종교 안 믿는 사람은 전부 다 나쁜 곳으로 가고...."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신사 아닙니다. 나를 욕하고 나를 침해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더 존경하고, 그 사람을 더 도우고, 그 사람을 더 좋은 자리로 앉게 하고, 부처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선해야 된다는 것 마음을 닦아야 된다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교나 다른 종교를 믿어도 관심을 많이 가질 뿐 아니라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수도원의 아빠스(수도원장)라는 분이 나한테서 화두를 배운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요새도 종종 오는데 화두 공부는 해볼 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 와서 화두 배운다고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신네들 천주교에서는 바이블(Bible) 이외에는 무엇으로써 교리의 의지(依支)로 삼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典)입니다." "그렇지요.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말입니다. 아퀴나스가 그 책을 거의 완성하게 되었을 때 자기 마음 가운데 큰 변동이 일어나서, 그래서 다시는 그 책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손을 떼어 버렸습니다. 결국 그 책은 미완성으로 남았습니다만 그래서 그 책이 하도 훌륭하므로 예수교에서는 그것을 신학교리의 큰 권위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책이 처음에는 금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썩은 지푸라기인 줄 알고 차버린 그것에 매달리지 말고, 그토록 심경 변화된 그 마음자리, 그것을 한 번 알아보는 것이 좋지 않겟습니까? 화두를 부지런히 익히면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교 사람들도 참선은 누구든지 해야 된다고해서 실제 하는 사람이 많은데, 불교 믿는 사람이 도리어 참선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다고 하면 그 근본 공부인 선(禪)이란 것을 알아서 이 공부를 해봐야 되는데 딴 종교에서는 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 같은데, 불교를 믿는 사람은 너무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내가 잘못 보았다면 다행이지만 그래서 딴 종교의 사람을 예로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참선을 하려면 무엇을 근본으로 삼아야 되느냐 하면 화두를 근본으로 해야 합니다. 화두를 배워야 합니다. 화두, 공안(公案)이라 하는 것은 마음의 눈을 떠서 확연히 깨쳐야 알지 마음의 눈을 떠서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 좋은 법문이 있습니다.
오색 비단구름 위에 신선이 나타나서 손에 든 빨간 부채로 얼굴을 가리었다. 누구나 급히 신선 얼굴을 볼 것이요 신선의 부채는 보지 말아라.
생각해 보시오. 신선이 나타나기는 나타났는데 빨간 부채로 낯을 가리었습니다. 신선을 보기는 봐야겠는데 낯가린 부채만 보고 신선봤다고 할 것입니까? 모든 법문이 다 이렇습니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 "마삼근(麻三斤)"이니 "조주무자(趙州無字)"니 하는 것은 다 부채입니다. 부채! 눈에 드러난 것은 부채일 뿐입니다. 부채 본 사람은 신선 본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신선을 보려면 부채에 가려진 그 얼굴을 봐야지, 빨간 부채를 보고서 신선을 보았다고 하면 그 말 믿어서 되겠습니까?
화두를 참구(參求)하는 근본자세가 화두는 암호인데 이 암호 내용을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느냐 하면, 잠이 꽉 들어서도 일여(一如)한 데에서 깨쳐야만 풀 수 있는 것이지 그전에는 못푼다는 것, 이것이 근본적으로 딱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눈을 확실히 뜨면 이것이 견성인 동시에 뜰앞의 잣나무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란 것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고 많지만, 똘똘 뭉치면 마음 심(心)자 한 자에 있습니다. 가장 간단합니다. 마음 심(心)자! 마음의 눈만 뜨면 일체 문제 · 일체 만법을 다 알 수 있는 것이고, 삼세제불을 다 볼 수 있는 것이고, 일체법을 다 성취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는 것이 뭐냐하면 자성을 보는 것인데 견성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공부 부지런히 하여 화두를 바로 아는 사람, 마음 눈을 뜬 사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견성하자" "성불하자"하면 너무 불교의 전문적인 것이 되어 일반 민중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자"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좀 가깝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또 사실이 그렇고, 그래서 "마음의 눈을 뜨자"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해서 하나라도 좋고 반쪽이라도 좋으니, 실제로 마음의 눈을 바로 뜬 이런 사람이 생겨서 부처님 혜명(慧命)을 바로 잇도록 노력합시다.
출전 : 성철스님법어(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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