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그 자리’를 헛딛지 말라

근와(槿瓦) 2015. 12. 7. 18:54

그 자리’를 헛딛지 말라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절이란 출가 수행자들이 모여 살면서 수도하고 교화하는 청정한 도량(道場)이다. 전통적인 산사(山寺)에서는 살림을 맡아서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저마다 한몫씩 소임(직책)을 맡아야 한다.

 

이 소임은 원칙적으로 철(3개월)마다 바뀐다. 그러나 사무직을 비롯하여 절을 운영하는데에 기간(基幹)이 되는 소임은 자주 바뀔 수가 없다. 자주 바뀌면 살림이 자리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 사람이 한 소임을 오랫동안 맡게 되면 안일과 타성에 젖어, 자신에게도 득이 되지 않고 대중에게도 이롭지 않은 폐단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승가의 소임이란 단순한 직책이 아니고, 그 일을 통해서 수도하고 교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행승을 다른 말로 운수납자(雲水衲子)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구름과 물처럼 늘 살아서 움직인다는 뜻이다. 구름과 물이 한곳에 갇히게 되면 그때는 이미 구름과 물이 아니다. 그 바탕인 생명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납자(衲子)란 누덕누덕 기운 헌옷 입기를 좋아하는 수행자를 가리킨 말.

 

어떤 직책이든 오래 맡게 되면 거기에 집착이 생기기 쉽다. 집착은 수도하고 교화하는 데 큰 장애가 된다. 집착에는 세속적인 속심(俗心)이 배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속심에서 거듭거듭 벗어나는 일이 출가 수행자의 본질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도원 선사(道元禪師)의 <전좌교훈(典座敎訓)>을 대할 때마다 중노릇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전좌교훈>은 선사가 송나라에서 돌아온 지 10년이 되는 37세 때에 저술한 것인데, 중국의 수도원에서 받은 자극과 감명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던가를 엿보게 하는 구도(求道)의 책이다.

 

<전좌교훈>에는 절에서 소임을 보면서 사는 사람들의 자세와 지켜야 할 청규(淸規)가 실려 있다. 단순한 청규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으로 소임에 임해야 하는가를, 옛 문헌과 선사가 몸소 체험한 사실들을 들어 서술하고 있는 간절한 법문이다.

 

절에는 주지직을 비롯하여 기간 소임으로 여섯이 있는데 이것을 육지사(六知事)라고 한다.

 

도사(都寺 : 요즘의 주지)

감사(監寺 : 절의 안살림을 꾸려가는 원주)

부사(副寺 : 재정 담당직)

유나(維那 : 수행자의 지도역)

전좌(典座 : 수행자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직책)

직세(直歲 : 절을 수리하거나 작업을 담당하는 직책)

 

전좌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중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고 나누어 먹이고 먹은 뒤 그릇을 씻어 챙기는 등, 후원에서 궂은 일과 뒷바라지를 하는 소임이다.

 

법도를 갖춘 전통적인 수도원에서는 이 전좌의 소임을 맡는 사람은 도심(道心)이 깊고 학문이나 수행에도 뛰어난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큰 소임이다.

 

만약에 도심(보리심)이 없는 사람이 이런 직책을 맡게 되면 한갓 수고롭기만 할 뿐 아무 이익도 없다. 지금까지 남아 전해진 것으로 가장 오래된 (1103년) 선원의 규칙서인 <선원청규(禪苑淸規)>에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좌는 반드시 보리심을 발한 사람이어야 하고, 철따라 음식에 변화를 가져오도록 해야 한다. 많은 수행자들이 그 음식을 먹고 몸과 마음이 안락하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 옛날 위산(潙山)과 동산(洞山) 그리고 설봉(雪峰)과 같은 뛰어난 스님들도 이 전좌의 소임을 보면서 많은 덕을 쌓았으며, 이 밖에 뛰어난 조사들도 한번은 이 소임을 거쳐갔다. 그러기 때문에 요리의 진정한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일반 세속의 요리인과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도원 선사가 은사, 명전(明全)화상과 함께 상선을 타고 중국에 도착한 것은 1223년 4월 초순이었다. 선사의 나이 24세 때. 바로 상륙하지 않고 석 달쯤 항구에 정박 중인 배 안에서 머문다. 어느 날 선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나이 60쯤 되어 보이는 노스님 한 분이 배에 올라왔다. 일본의 표고버섯을 사러 왔다고 했다.

 

도원은 노스님을 반기면서 배 안으로 맞이하여 차를 대접한다. 온 곳을 물으니 그 노스님은 아육왕산(阿育王山)의 전좌(典座)였다.

 

노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서쪽 촉(蜀 : 지금의 四川省)의 태생인데 고향을 떠난 지 어느 새 40년, 올해 예순하나라오. 이제까지 여기저기 총림(叢林 : 선원)을 찾아 다니다가 몇해 전에 아육왕산의 승당(僧堂)에 방부를 들여 그럭저럭 지내왔지요. 그러다가 작년 여름 안거를 마치던 날 생각지도 않게 큰 소임(典座)을 맞게 되었소.

 

내일은 5월 초닷새 마침 단오절이오. 대중공양이 있는 날이라 뭘로 할까 생각하다가 국수공양을 하기로 했어요. 사중에 표고버섯이 떨어지고 없었는데 마침 일본에서 배가 들어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버섯을 사려고 이렇게 왔소.”

 

도원과 전좌 스님 사이에 이런 문답이 오고간다.

 

도원 : 언제 아육왕산을 떠나오셨는지요?

전좌 : 점심 공양을 마치고 바로 떠났소.

도원 : 아육왕산은 여기에서 얼마나 머나요?

전좌 : 50리 길이요.

도원 : 언제 절로 돌아가십니까?

전좌 : 지금 버섯을 사가지고 바로 가야지요.

도원 : 오늘은 뜻밖에도 노스님을 뵙고 이렇게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이 어찌 좋은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밤은 제가 노스님께 공양을 올리고 싶습니다.

전좌 : 고맙지만 그건 안되오. 내일에 있을 대중공양은 내가 손수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도원 : 아육왕산과 같은 큰절에 전좌는 노스님 한 분뿐이 아니겠지요. 후원에서 거드는 사람들도 있을테니 노스님 한 분 안계시더라도 별지장이야 있겠습니까?

전좌 : 나는 이 나이에 처음으로 전좌의 소임을 맡게 되었소. 이 일은 실로 내 노년의 수행이오. 어째서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단 말이오. 그리고 떠나올 때, 하룻밤 묵고 온다는 허락을 받지 않았소.

도원 : 노스님은 이제 나이도 많으신데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참선수행을 하지 않고 전좌와 같은 귀찮은 소임을 보면서 그토록 애쓰십니까?

 

이때 노전좌 스님은 소리내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좌 : 외국에서 온 훌륭한 젊은이, 그대는 아직 수행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네그려. 그리고 문자(文字)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군!

 

도원은 이와 같은 전좌 스님의 말을 듣고 문득 부끄러움과 충격을 받는다. 다시 묻는다.

도원 : 어떤 것이 문자입니까. 그리고 어떤 것이 수행입니까?

전좌 : 지금 그대가 묻는 그 자리를 헛디디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자를 알고 수행을 체득한 것이 될거야.

 

이때 도원은 그 노스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전좌 스님은 다시 말을 잇는다.

전좌 : 아직 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다면 언젠가 아육왕산으로 찾아오시오. 한번 문자의 도리를 차분히 이야기하게.

 

전좌는 이 말을 마치고 곧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 벌써 해가 기울었네. 바삐 서둘러야겠군’하고 그는 선걸음에 돌아간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읽으면서, 수행자에게 맡겨진 직책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새삼스레 헤아려보지 않을 수 없다. 한두 철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때우는 식의 소임이라면 백년을 산다 할지라도 피차에 아무 득이 되지 않을 것이다.

 

정진이나 수행이라고 할 때 우리는 흔히 좌선하고 독경하는 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그 나이에 참선은 하지 않고 어째서 일 많고 귀찮은 그런 소임을 보고 있느냐고 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그 시절 젊은 도원만이 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어떤 것이 진짜 수행이고 정진인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출가 수행을 하고 있는지를 깊이깊이 묻지 않으면 누구나 빠지기 쉬운 겉모습(相)의 함정이다.

 

환갑이 넘은 노스님이 후원에서 대중이 먹을 음식을 마련하고 치다꺼리하는 소임을 맡게 된 것을, 너무나 감사하면서 노년의 수행을 삼고 있다. 또 그는 남이 싫어하는 소임을 하는 수 없이 떠맡은 것이 아니라, 맡겨진 소임에 긍지를 지니면서 충실하게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 나름의 투철한 안목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이 문자이고 수행이냐고 묻는 말에, ‘지금 그대가 묻는 그 자리(當處)를 헛디디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자를 알고 수행을 체득한 것이 될 거라는 답은 맹탕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같은 해 7월, 도원은 상륙하여 천동산(天童山)에 들어가 수행하게 된다. 그때 저 아육왕산의 노전좌 스님이 찾아와 도원을 만나 이야기한다.

 

“여름 안거를 마치고 전좌의 소임이 바뀌었기 때문에 40년 만에 고향에 가볼까 해요. 그런데 우연히 한 도반으로부터 그대가 이 천동산에 와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기필코 만나고 싶어서 이렇게 왔소.”

 

도원은 전좌 스님과 재회를 갖게 되어 참으로 기뻤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화제는 자연히 그때 배 안에서 나눈 문자와 수행의 일로 옮겨진다.

 

전좌 : 문자를 배우는 사람은 문자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지요. 수행에 힘쓰는 사람은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필요가 있소.

도원 : 문자란 어떤 것입니까?

전좌 : 1 2 3 4 5

도원 : 수행이란 어떤 것입니까?

전좌 : 법계에 가득 차서 일찍이 감춘 적이 없소.

 

진리는 예전부터 감추는 일이 없어, 우주 전체는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말.

이런 일이 있은 14년 후 도원 선사는 <전좌교훈(典座敎訓)>을 저술하면서 그때의 감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내가 얼마쯤 문자가 무엇인지를 알고 수행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닌 그 노전좌 스님의 큰 은혜이다.”

 

이번 여름철 살림 중에 새로 소임을 맡게 된 이름 모를 도반들과 함께, 소임의 의미에 대해서 음미해 보고 싶어 고인(古人)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출전 : 텅빈 충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