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말씀

나무 지옥대보살

근와(槿瓦) 2015. 11. 27. 19:14

나무 지옥대보살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귀의 삼보하옵고.

열심히 일하며 사는 중년의 부부입니다. 노력한 보람으로 조금씩 모아둔 것이 있어 스님께 부탁드립니다. 이제 추위도 올텐데 부처님 법을 전하는 필요한 곳에 써주시면 합니다.

                                                                                                                     10월 16일

                                                                                                                     김 OO

                                                                                                                                                                    이 OO 합장>

 

지난 가을 1백20만원이 적힌 통상환증서와 함께 이런 사연을 받았었다. 서울 강동구에 사는 분인데 나와는 평소에 안면이 전혀 없는 사이인데도 나를 믿고 보내온 것이다. 본인들에게 폐가 될까봐 두 내외분의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했다.

 

나는 즉시, 잘 받았다는 회신을 띄우면서 보람있는 곳에 쓰도록 생각해 보겠다고 했었다.

 

며칠 후에 저쪽에서 다시 편지가 왔었다.

<스님, 정진하시는데 마음 쓰실까봐 주소를 쓰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이번에 스님께 잘 전해졌으니 됐습니다. 어려웠던 어린 시절 관세음보살님께 발원했던 것이, 이제 저희 그릇에 맞게 이루게 되었습니다. 미력이나마 부처님 전에 갚는 것입니다. 알려 주시면 오히려 송구스럽습니다. 불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생활이 되게끔 노력하겠습니다.                          10월 26일  두 내외 합장드립니다.>

 

보내온 사연으로 미루어 보아 넉넉한 집안 형편도 아닌 것 같았다.

 

어렵게 지내던 어린 시절 관세음보살께 소원을 빌던 일이 자신들의 분수에 맞게 이루어진 오늘, 미력이나마 부처님께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에서 정재(淨財)를 보내온 것이다. ‘불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생활이 되게끔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는 사연 또한 어질고 착한 그 마음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친 고맙고 갸륵한 그분들의 뜻에 내 마음도 훈훈해지는 것 같았다. 대개의 경우, 애써 번 돈을 더구나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에 선뜻 내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하고 부처님의 은혜를 다소나마 갚고자 하는 그 뜻이 얼마나 갸륵하고 고마운가.

 

그 무렵 마침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어 돈연 스님과 현장 스님이 있는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 돈을 어디에 썼으면 좋겠느냐고 의논을 했었다. 돈연 스님 이야기가, 경전읽기 모임에서 그동안에 펴낸 <깨달음> 열 달치를 합본해서 곧 출간하게 되는데, 그 책을 사서 교도소와 군에 보냈으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듣고 보니, 부처님 법을 전하는 데에 필요한 일이므로 시주의 뜻에도 맞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경전읽기 모임으로부터 보내온 <깨달음>에 연재되는 글의 원고료를 받을 때마다 나는 벼룩의 간을 내먹는 것 같아 찜찜했는데, 어질고 갸륵한 시주의 보리심에 감동되어 나도 그 법보시에 동참하고 싶어 백만원을 보태었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여러 사람의 마음도 함께 청정해진다’는 <원각경>의 말씀이 떠올랐다.

 

구도(求道)의 책인 <정법안장 수문기(正法眼藏隨聞記)>를 다시 펼치기로 한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하루는 절을 찾아와 그 절의 주지 격인 노스님에게 자기 집안의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저의 집은 너무 가난해서 며칠째 식구들이 끼니를 잇지 못했습니다. 저희 부부와 자식들이 굶어서 죽을 지경입니다. 큰스님께서 저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때 그 절도 어렵게 지내던 터라 옷가지와 양식도 여유가 없었고, 돈이 될 만한 물건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딱한 사정을 듣고 노스님은 이것 저것 궁리를 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그 절에서는 약사여래상을 조성할 예정으로 그 불상의 광배(光背)로 쓰기 위해 구해놓은 동판이 조금 있었다.

 

노스님은 이 동판을 꺼내와 손수 말아서 그 가난한 사람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이걸 가지고 양식과 바꾸어 끼니를 잇도록 하게.”

그 사내는 기뻐하면서 돌아갔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안 제자들은 노스님의 처사를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동판은 불상의 광배로 쓸 물건입니다. 그런데 노스님께서는 불사에 쓸 물건을 마을 사람에게 주어버렸습니다. 부처님을 위해서 쓸 물건을 개인을 위해 썼으니 호용죄(互用罪)에 걸리지 않겠습니까?”

 

호용죄란 시주가 어디에 써달라고 내놓은 돈이나 물건을 마음대로 그 명목을 바꾸어 전용(轉用)한 허물을 말한다. 이를테면, 법당을 짓는 데에 써달라고 내놓은 돈은 법당을 짓는 데에만 써야지, 개인의 방사를 짓는 데에 쓴다거나 다른 데에 전용하면 호용죄에 해당된다.

 

요즘에도 이런 관념은 전통적인 승가에 전승되고 있다.

 

이런 항의를 받고 노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들 말과 같다. 그것은 틀림없이 호용죄에 해당된다. 그러나 한번 살펴보자. 부처님의 입장에 돌아가 그 마음을 생각해 보자. 부처님은 지난 세상에서 도를 닦을 때, 그 몸의 살이나 손발까지도 달라는 사람한테는 아낌없이 모두 베어주었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사람이 굶어 죽을 판인데 광배가 문제겠느냐. 설사 불상의 모든 것을 떼어준다 할지라도 부처님의 뜻에는 조금도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불사에 쓸 물건을 내 마음대로 전용한 죄로 내가 지옥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내 곁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 걸 보고 어떻게 구하지 않겠느냐.”

 

이런 마음을 가리켜 대승보살의 마음이라 하고 보리심이라 하며 혹은 대비심(大悲心)이라고도 한다.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갈림길 또한 이런 데에 있을 것이다.

 

나무 지옥대보살! 지옥에 들어가야 지옥의 고통을 받는 이웃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행을 쌓아 극락이나 천당에 가려는 마음은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소망이다. 그러나 큰 보리심을 발하고 대비원력(大悲願力)을 세워 지옥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몸소 불속에 들어가지 않고서 어떻게 불에 타는 사람을 구제할 수 있으며, 물속에 뛰어들지 않고 어떻게 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건질 수 있단 말인가. 부처란 곧 대비심이다. 대비심이 곧 부처님이란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들어감’과 ‘떨어짐’이다.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들이 의지 즉 원력(願力)에 의해서이고, 떨어진다는 것은 업의 무게(業力)에 의해서다.

 

한 노파가 조주(趙州) 스님에게 물었다.

“여자에게는 다섯 가지 장애가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다섯 가지 장애의 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조주 스님의 대답은 비수처럼 예리하다. 그러면서도 정곡을 찌르고 있다.

“원컨대 모든 사람들은 다 천상에 태어나고, 이 늙은이는 영원히 고해에 잠기게 하여지이다.”

 

이와 같이 항상 발원하라고 일러주었다. 이런 발원이 머리나 입술에 발린 건성이 아니고, 진실하고 간절한 대비심에서 나온 소원이라면 여기 어찌 여자 남자의 몸이 문제가 되며, 다섯 가지가 아니라 오백 가지 장애가 있다 한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무 지옥대보살!

 

노스님이 주지를 하던 그 절에서도 마침내 식량이 떨어져 이따금 온 대중이 끼니를 거르는 때가 있었다. 절에 양식이 떨어져 스님들이 굶는다는 소문을 전해 들은 한 신도가 노스님을 자기 집에 불러 비단 한 필을 내놓았다. 노스님은 고맙고 기뻐서 그 비단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몸소 품에 안고 절로 돌아왔다. 원주에게 주면서, 내일 아침 죽거리로 식량과 바꾸어오도록 일렀다.

 

그런데 이때 마침 절 아랫마을에 사는 한 사내가 찾아와 노스님께 애원을 하였다.

“집안에 갑자기 말 못할 어려운 사정이 생겨 비단 두세 필이 꼭 필요합니다. 노스님께서 저희를 살리는 셈치고 좀 도와주십시오.”

 

노스님은 조금 전에 원주에게 맡긴 그 비단을 가져오도록 하여, 그 사내에게 건네주었다.

 

이때 원주와 스님들은 이런 노스님의 행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뒷날 노스님은 이때의 일을 두고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들은 내가 한 일을 가지고 틀려먹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너희들은 오로지 불도를 수행하기 위해 이 절에 모인 줄로 안다. 불도를 닦으려는 그 마음으로 하루쯤 굶더라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얽혀 사는 사람들이 갑자기 어려운 사정이 생겨 필요하다는데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너희들이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하루를 굶는다면 이 또한 불도의 수행이 아니겠느냐.”

 

불도에 깊이 통달한 사람의 생각은 보통 사람들과는 그 바탕이 다르다. 생각의 자를 자신에게 맞추지 않고 상대편에게 맞춘다. 그러나 범속한 사람들은 자신의 자로 자신밖에 잴 줄을 모른다.

 

 

출전 : 텅빈 충만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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