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큰스님 말씀

마음의 눈을 열고

근와(槿瓦) 2015. 11. 15. 20:31

마음의 눈을 열고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불교의 참모습에 대한 안목을 차차 열어 주면 아무리 유물주의자고, 아무리 히피족이라도 불교에 대한 취미를 붙이게 됩니다. 불교에 대한 취미는 곧 자기에 대한 취미로 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我)라고 하는 이 인생은 밥만 먹고 똥이나 싸고 늙고 병들고 죽어서 썩어 없어지는 존재인 줄 알았더니, 참나(眞我)는 그것이 아니구나! 나의 참면목은 마음이로구나.」

 

이렇게 깨우쳐집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늙어 죽을 수가 있고 불에 탈 수가 있겠습니까? 이 몸뚱이나 현상계는 모두 다 자기 꿈인데, 그 꿈 속에서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겠습니까?

 

쇠망치로 두드려도 부서질 것도 없고 불에 넣어도 탈 게 없습니다. 그런 것이 생명이고 이것이 이야기할 줄 알고 오고가고 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생각할 줄 아는 이 주인공은 물질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기 때문에 이 마음은 지식이나 사상이나 생각도 아닙니다.

 

이런 줄을 알고 나면,「아! 이런 굉장한 내가 있는 줄을 모르고 육체를 나라고 고집하여 헤매었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육체생활, 이것은 팔고(八苦 = 여덟 가지 괴로움)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육체생활, 이것은 고통의 생활이고 자꾸자꾸 죽어들어가는 생활입니다.

 

가령 백 년의 명(命)을 타고 나온 사람이 1년을 살았다면 살 날이 99년밖에 남지 않은 것이고, 두 해를 살았다면 2년을 죽음 앞으로 다가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커 간다든지 살아간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이 됩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면서부터 죽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농사짓고 장사도 하고 별 짓을 다 하지만, 결국은 백 년 목숨을 타 가지고 나와서 첫날부터 하루씩 하루씩 죽어 들어가는 것밖에 안 됩니다. 삶이 무엇인지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그것도 모르고 현실에 시달려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할 뿐입니다.

 

병이 들면 괴롭고 병을 나으려고 치료를 해야 하고, 그러니 벌어야 하겠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복잡한 고통이 끝없이 따라옵니다. 세계의 약을 모두 다 구해 놓고 세계 의사들을 다 동원시켜 옆에 앉혀 놓았댔자 자기 자신은 앓을 만큼 다 앓아야 하고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 합니다.

 

아무런 회계가 안 닿는 게 소위, 우리 육신 인간의 한 평생입니다.

세계 돈을 다 모아 봐도 나한테 소득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돈 많은 사람은 돈 없는 사람보다 이 약 저 약 쓰느라고 고생만 하지,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백 년을 더 사는 것도 아니고 몸이 더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돈이 많으면 공연히 더 헤매게만 되고 무엇을 할까 하고 망상과 번민만 더 피우게 되고 밤에 잠도 못 자고 음식도 제 때에 못 찾아 먹게 되고 육체나 마음이 모두 불안해집니다.

 

권리가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위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적들이 많아지고, 적이 많아지면 결국 자기는 고독한 신세가 됩니다. 돈이 많고 권리가 높으면 적이 많아져서 더욱더 고독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다운 행복은 육체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 속아사는 생활입니다. 마음을 깨치지 못해서 현실을 잘못 보고 미래를 잘못 판단해서 속이 어두운 협잡배에게 자기의 진귀한 보배를 사기당한 생활입니다.

 

우리가 오직 구해야 될 것이 있다면 마음의 밝은 원리를 깨쳐야 하는 일이며, 육체와 현실은 다 꿈이고 착각이고 마음의 그림자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우리의 오관(五官) 작용만 해도 그렇습니다. 가령 천지를 진동하는 대포소리가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심각한 고민이 있거나 어떤 일에 열중하여 삼매(三昧)에 들어가 있을 때입니다.

 

종소리의 경우만 해도 일본 사람은「강강강강」난다고 하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땡땡땡땡」이라 그럽니다. 우리가 땡땡땡땡 하면 일본 사람은 웃습니다. 또 일본 사람들은 큰 종소리를「공공」이라고 하고, 우리는「덩덩」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큰 종소리가 공공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이고 우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인에겐 꼭 공공으로만 들립니다. 그러므로 종소리는 공공도 아니고 덩덩도 아닙니다. 종소리의 실상음(實相音)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우리는 대답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는 땡땡이나 덩덩이 귀에 젖어 있기 때문에, 강강과 땡땡을 빼고 종소리를 들어 보려고 하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각국마다 다르게 됩니다. 우리는 참되고 순수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자기 기분대로 듣고 조작과 습관으로 듣게 됩니다.

 

종소리를 바로 듣는 것은 갓난아기가 처음 귀가 트여서 강강인지 공공인지 모르고 듣는 그 때입니다. 또 도인은 제대로 듣습니다. 도인은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과학입니다. 이것은 청각작용(聽覺作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눈으로 무엇을 보고 크다 작다 하는 시각작용(視覺作用)도 한가지입니다. 크다 작다 하는 절대 기준을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가령 손바닥만한 거울을 가지고 춘천 뒷산에 올라가서 비쳐 보면 춘천이 그 거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손바닥만한 거울 안에 꼭 춘천하고 똑같은 질량이 나타납니다. 실제로 십리 밖에 있는 것은 거울 안에 십리로 보이고, 오리 거리에 있는 실물은 거울 안에서도 오리로 보이지만, 이것이 거울 밖으로 십리나 오리를 뚫고 나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거울 안에 춘천만한 그림이 나타나자면 춘천만한 면적에 그림을 그려야만 할 것 아닙니까? 손바닥만한 곳에 춘천을 그리려면 큰 빌딩이 깨알만하게 나타나야 할 것인데 그대로 나타나 보이니 하나의 착각 아닙니까?

 

우리 눈에는 확실히 거울 속에 천연색 그대로 입체적으로 나타나 보이고 또 십리 밖에 있는 것은 십리 밖의 것으로 백리 밖의 것은 백리가 되어 보입니다. 또 손바닥만한 거울에는 그렇게 된다 하고 손바닥 반만한 거울에도 역시 춘천이 똑같이 나타나고, 나중에는 손톱만한 거울에도 춘천만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이 착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가 큰 것을 크다고 본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크다고 보는 결과가 됨을 말합니다. 화가가 아무리 묘사를 잘 한다고 해도 이렇게 그리기는 힘들 것입니다. 확실히 말하자면 마음이 거울에 직접 나타난 것입니다. 이 마음의 거울은 작다고 하면 바늘 끝보다도 작고, 크다고 하면 우주에 가득할 것이니, 크다 작다 하는 말은 어디에다가 기준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기분에 따라서 작은 것이 대단히 크게 보일 때도 있고, 큰 것이 아주 작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맛(味)도 기분에 따라서 설탕이 쓰고, 소태가 달 때도 있습니다. 또 추운 날이 더웁게도, 더운 날이 춥게도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다 우리의 오관이 정확하지 못하다는 것을 뜻하며 우리의 오관작용이 심한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마음에서 부처가 나오고 하나님이 나오고 우주가 생겨 나오고 꿈 속 세계도 나옵니다. 우리는 밤꿈에만 우주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꿈을 깬 낮꿈에도 우주를 창조해 냅니다.

그러므로 꿈이라고 하면 낮꿈, 밤꿈이 다 꿈입니다. 밤, 낮, 금생, 내생이 다 꿈인데 이 꿈 가운데 꿈이 아닌 것은 꿈을 꾸고 우주를 창조해 내는 이 마음뿐입니다. 밤꿈에도 이 마음 이대로이고 낮꿈에도 이 마음 이대로입니다.

 

그런데 생각은 그때 그때 환경에 따라서 추우면 춥다, 더우면 덥다고 느낍니다. 생각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만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아는 이 마음은 불변의 나입니다. 생사의 변천이 있고 질량의 변화가 있을 수 없는 이 나는 모든 지식의 주체인데 이 마음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가지고 큰 것은 크다, 작은 것은 작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신도 마음이 만든 피조물(被造物)인데 중생들이 육신을 주인으로 마음을 육신의 종으로 삼아서 주객을 뒤엎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육신이 죽는 것은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죽을 방법이 없다.」이렇게 갈파하셨습니다.

상전인 마음이 육체의 종노릇하는 것을 우리는 억울하게 생각하고, 불교 신앙으로 마음의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나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고 그 마음과 자세를 본래의 원상에 복귀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수도를 해야 하는데 수도하는 데는 지혜를 닦고 복을 짓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새 세상에서는 죄가 참회되었으므로 지혜와 복을 많이 타고 나오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면 책을 펴 보기 전에 제목만 보아도 내용을 알 수 있게 되고, 또 돈복이나 인복이나 지위의 복을 다 타고 나왔으니 이것이 행복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복이 쌓이고 쌓여서 자꾸만 나아가면 마침내 부처님의 지위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이 육신을 쟁기삼고 호미삼아 부지런히 일하여서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을 구제하여 주자는 것이 불교입니다. 자기부터 먼저 살고 남을 살리겠다는 인생관이라면 이 세상에 태어났을 그 때부터 벌써 세계 35억 사람이 다 적이 됩니다.

 

부처님의 자비사상을 배우면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35억이 다 내 부모가 되고 내가 또한 35억을 위해 나온 것이니, 이것이 극락 세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 불자(佛子)들은 이와 같은 불법에 의지하여 남을 해롭게 안 하도록 힘써야 복을 받습니다. 특히 남의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살생을 많이 한 사람은 자비의 마음이 끊어지고 명이 단축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입니다.

 

미꾸라지로 추어탕 하여 먹으려면 안 죽으려는 생명, 수만마리를 솥에 삶습니다. 미꾸라지가 물이 뜨거워 오면 참다 못해서 입을 쫑긋쫑긋 하는데 이것은 누가 불을 때느냐고 욕하고 저주하는 소리라고 합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 한 마리한테 수십 번 죽고도 그 업이 남습니다.

 

살고만 싶은 것이 생명체이므로 미꾸라지가 죽을 때나 사람이 죽을 때나 짐승이 죽을 때나 원한을 품는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돼지 목을 찌르면 피를 흘리면서 죽어 가는 그 돼지가 원한을 품습니다. 돼지 살을 입에다 넣고 꾹꾹 씹으면 원한 맺힌 핏덩어리가 내 몸에 들어가 더러운 피가 되고 나쁜 살이 됩니다. 그러니 육식을 많이 하는 사람, 살생을 많이 하는 사람은 명이 짧은 부모를 만나고 명이 짧은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 딸 잔뜩 낳고는 상처하여 홀아비가 되고 오래 살지 못하게 됩니다.

 

또 도둑질을 많이 한 사람은 농사를 지어도, 장사를 하여도 안 되는 것 뿐입니다. 잘 산다고 하는 사람도 내용을 알고 보면 내외 간과 부자 간에 마음이 맞지 아니하여 서로 불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전생에 도둑질한 사람과 살생한 사람입니다.

 

또 인덕 없는 것도 큰 고통입니다. 부부 간에도 맞지 않고 부자 간에도 맞지 않으며, 심지어는 식모하고도 맞지 않습니다. 밥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되고 밤에 누워도 맘이 좋지 않아서 잠이 안 옵니다. 부모· 형제· 친구· 동네 사람까지 모두 나를 욕하는 사람뿐입니다. 이런 사람은 전생에 내외 간에 배신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촌수를 말하면 부자 간에는 1촌입니다. 형제 간에는 2촌이고 거기서 하나 건너 조카와는 3촌이고 다음은 4촌이고 이렇게 규칙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내외 간에는 사람은 둘이지만 촌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두 사람이면서 하나이고 서로 피를 섞어 가지고 아들 딸 자꾸만 낳으니 촌수를 댈 수 없이 완전히 하나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이에 어질고 얌전한 부인을 속이고 다른 곳에 여자가 있으면 이것은 이 세상을, 아니 이 우주를 배신한 것과 같은 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훌륭하고 착한 남편을 내버려두고 아무도 모르게 다른 남자와 친하고 있다면 이도 역시 이 세상을 배신한 것과 같은 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진시황 · 나폴레옹 · 히틀러 · 메이지 천황 · 케네디 · 장개석 같은 사람도 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정리될 도리가 없습니다. 서로 원수끼리 모였으니까 그런 것입니다.

 

부부 간의 배신은 죄 중의 제일 큰 죄입니다. 재산 많고 지위 높은 것도 관계없이 인덕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먹여 살려 주고 내 신세를 가장 많이 진 부하들까지도 나를 욕합니다. 이 사람은 전생에 부부 간에 배신을 많이 한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살생을 하면 단명하고 도둑질하면 박복(薄福)하고 부부 간이나 직장에서나 부정한 짓을 하면 인덕을 못 타고 납니다. 거짓말 잘하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남이 그 사람 말은 곧이 듣지 않습니다. 술 먹은 사람은 정신이 흐려져서 어리벙벙해지는 것을 좋아했으니 내생에는 바보가 되어 나온다는 것입니다.

 

또 산신 · 칠성 · 조왕 · 용왕 등이나 잡신을 믿는 미신 행위는 바보가 되고 속되게 되고 천하게 되어 태어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불공해 봐야 잘 안 되니 칠성기도를 해봅니다. 부처 · 칠성 · 산신 중 어떤 것이 더 영특하고 영험한지 시험해 보려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 불교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고 어떻게 해야 복을 짓고 죄를 없애는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잡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은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의 근본은 죄와 복인데 자기가 복을 못 짓고서 누가 어떻게 복을 줍니까? 나쁜 잡신한테 빌면 도리어 죄와 화를 줄 것입니다.

 

부처님께 가서 기도를 하더라도 내가 도둑질한 물건이 다 내것이 되게 해달라고 하는 식의 기도라면 하루 백만 원씩 갖다 놓고 기도를 해도 아무 효험이 없습니다. 도둑놈 만들어 달라고 하는 기도니 되겠습니까?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하지 말고 곶감 하나라도 주워다가 깨끗이 씻어서 정성으로 올려 놓고 이 공덕으로 온 시민이 다 잘 살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한다면 이 얼마나 가상한 일이고 복받을 마음씨입니까? 이런 사람이 복 안 받고 누가 복을 받아야 합니까? 부처님이 복을 줄 수 있다면 이런 사람 복 안 주고 누구를 주겠느냐는 말입니다.

 

요사이 불공이 모두 기복불공이고 복을 빈다고 하는 것이 거꾸로입니다. 도둑놈처럼 욕심이 가득한 마음씨를 가지고 와서 복만 달라고 있으니 마치 빈 통장 가지고 은행에 가서 돈 내놓으라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이런 식의 불교를 기복불교라고 합니다.

 

기복불교는 낮잠이나 자고 노름이나 하고 바람이나 피우고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프니 남의 집에 가서 해놓은 밥 달라고 하는 식의 불교입니다. 날마다 누워 자던 사람이 남의 집에 가서 손을 벌리니 손바닥을 때려 주고 싶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이 불교를 잘 믿으면 그 시간부터 복을 받지만, 이렇게 거꾸로 믿으면 외상 불교가 됩니다. 외상 불교는 저만 잘 되려고 부처님께 비는 불교입니다. 여러분 신도들은 다 자기 잘 되려고 절에 가지, 부처님 위해서 절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복을 받으려면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불자는 마땅히 진실로 남을 위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이면 첫째로 남편이나 자식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그게 다 나 때문이다. 내가 전생에 죄가 많아서 남편이나 자식이 그렇구나. 어떻게 하든지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자꾸 기도해 주고 불공해 주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적선을 많이 해야겠다.」이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공덕으로 전생의 죄업이 소멸되어 좋은 남편과 자식으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해서 며느리가 저녁마다 바람을 피우러 나가더라도 내 자식이 나쁘고 내가 나쁜 것이니, 며느리를 위해서 불공해 주고 좋게 달래 주고 나쁜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사위라고 하나 봐 놓았더니 날마다 바람이나 피워서 딸이 생과부가 되었더라도 사위를 위해서 자꾸 불공드리고 적선하여야 합니다.

 

절에 온다고 불교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가 무엇인 줄도 모르면서 절에 와서 불공하고 기도한다는 시간이 죄짓는 시간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일 큰 죄는 부처님 앞에 가서 남은 잘 안 되고 자기 혼자만 잘 되게 해 달라고 욕심 채우는 일입니다. 일평생 절에 한 번 안 가도 됩니다. 배고픈 사람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도우며 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경(經)에는 혹 불보살님과 도인들이나 스님께 공양하라는 말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비구승이라는 것은 마음의 원리를 깨쳐서 중생을 지도해 주면서 밥을 얻어먹는 거지이기 때문에 걸사 즉 빌어먹는 학자라고 합니다. 집도 절도 없는 게 중 신세 아닙니까? 그것도 거지니까 모든 것을 갖다가 주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먹고 편히 수도하여 도 통해 가지고 우리를 이끌어 달라는 뜻입니다.

 

물론 상거지도 먹여 주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동네 거지, 극빈자도 도와 주라는 것입니다. 수해가 나고 화재가 나고 각종 무서운 전염병이 휩쓸어 난민이 많이 생겼을 때 모아 두었던 돈을 안 쓰고 언제 쓰자는 것입니까? 돈을 아무리 하루에 백만원을 벌어도 자기 몫은 밥 세 그릇밖에 안 됩니다.

 

그렇게도 지독하고 미련하게 욕심을 부리고 살아 봐야 소득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마음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바로 가지겠느냐 하면 육체가 나라는 사고방식을 없애고 남을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사는 그것도 따지고 보면 나의 생사를 자유하기 위한 일이고 이 마음 깨쳐서 내가 부처 되자는 일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사는 자리타리(自利他利)의 법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욕심 없이 일하면 농사를 지어도 잘 되고 장사를 해도 잘 됩니다. 여관을 경영하는 경우에도 이런 마음으로 하면 우리 여관이 만원되기 전에는 다른 여관에는 안 갑니다. 잡화상을 해도 폭리하지 말고 남을 위해서 좋은 물건 사다가 싸게 팔아 주면 그 사람은 마음이 편하고 복받습니다. 욕심이 도둑놈처럼 목구멍에 차 있으니까 마음이 불안하고 액난을 당하게 됩니다.

 

욕심을 부려서 하루 네 그릇씩 먹어 봐야 위장병이 나는 것이 세상의 진리입니다. 자기 먹을 것만 내놓고는 이익을 전부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평소에 이렇게 하는 사람이 만약 무엇에 출마를 하였다면 온 시민이 다 그 사람한테 투표할 것입니다. 막걸리 사 주지 않아도 됩니다. 나까지 잡아먹으려고 임시로 주는 미끼를 누가 달게 받아 먹겠습니까?

 

불교의 인과를 철저히 실천하는 사람은 육신이 내가 아닌 줄을 알기 때문에 내 눈이 필요하다면 눈을 빼어 주고, 창자라도 꺼내 주고 심장도 도려내서 이식해 주고 그래 가지고 그 사람 비위 맞춰 주면서 불교를 이야기해 주고 영원하고 완전한 자유 해탈을 성취시켜 주려고 합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정말 자비입니다. 불교의 원리를 가지고 세계를 다스리기 전에는 인류는 전쟁으로 자멸하고 맙니다. 공산주의 가지고도 안 되고 자본주의 가지고도 안 되고 다른 일반 종교로도 안 됩니다. 대장경만 펴 놓으면 8만4천 외도가 다 나오고 기독교· 유교, 온갖 진리가 다 나옵니다. 유교니, 기독교니 하는 말은 없지만 말하자면 똑같은 원리가 다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선도에 관해서도 온갖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불교 이외의 다른 이론들은 다 완전무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교의 사랑만 해도 한계가 있는 사랑이고 자기한테 국한되어 있는 사랑이지 한계 밖에는 한 치도 못 나가는 사랑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하고 예수 믿는 사람하고 만나면 부부 간이나 부자 간에도 서로 38선이 생깁니다. 종교가 다르면 한 집안에 살면서도 며느리하고 서로 원수가 되어서 불화가 생기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잘못입니다.

 

불교는 그렇게는 안 합니다.

「정 그렇거든 너는 예배당을 가거라.」이런 태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른 것은 다 마귀(魔鬼)다. 그래 가지고 조금도 용서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말이 박애(博愛)지 좁은 박자 박애입니다. 공자의 인의(仁義)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자도 자기 주의와 맞지 않는 사람하고는 상종하지 말아라, 거래하지도 말아라 그럽니다.

 

불교는 안 그렇습니다. 아무나 다 평등하게 상대하여 주라. 예수교 믿는 사람도 목사도 상대해 주고 신부도 상대하여 한계를 두지 말라는 태도가 불교입니다. 기독교를 믿고 착한 일 해도 천당 가고, 유교를 믿고 착한 일 해도 천당 가고 아무것도 안 믿고 착한 일 해도 천당 간다는 것이 불교의 인과설입니다. 동시에 불교는 아무 한계가 없는 개방된 진리입니다. 우주 전체의 유정(생명계)· 무정(물질계) 그대로 설명한 것을 과학이라고 한다면 불교야말로 그대로 과학입니다. 그 설명하는 방법이 현대의 과학적 방법과 다를 뿐입니다.

 

불교는 이렇게 과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인과응보를 믿고 자신과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이 육신이 죽어가면서도 이차돈 모양으로 거짓말 안 하려고 목을 몇 번이나 내어 놓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윤리가 서야 인류사회가 안정이 되고 평화가 오고 서로 싸움이 없이 잘 살게 됩니다. 불교를 모르는 이 인간 세상에는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자기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배워 놓은 사고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간디 같은 사람은 원래 힌두교였지만 생활 내용은 불교 그대로 수양한 사람입니다. 그 제자가 동경대학에 와서 강연을 한 일이 있습니다. 간디는 27세 때에 부인과 단방을 하였으니 그 부인도 철인입니다. 간디는 처음에는 고기를 먹었는데 소화가 잘 안 되고 체하기만 하니 나중에는 고기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도 선생을 따라서 고기를 안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간디옹이 나이 75세가 되어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건강은 아주 좋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채식을 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채식을 하면 할수록 몸이 건강해지고 정신이 좋아져서 오래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고기는 흥분제입니다. 물고기나, 소나, 돼지나, 어떤 짐승이고 죽을 적에는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고 죽었겠습니까? 안 죽으려고 온갖 원한이 다 뭉쳐 있는 피와 고기를 먹는 것이기 때문에 고기 먹은 사람의 성격이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의 얼굴에 살이 피둥피둥 찌고 기름이 주루루 흘러 가지고는 공부하는 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신도로서는 거기까지는 못한다 해도 불법의 진리를 믿고 부인은 남편과 부모를 잘 섬겨야 하고 자녀 키워 교육시켜야 하며, 또 남편은 처자를 거두어야 하고 또 국민의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생각 저 생각 다 버리고 선악의 주체인 마음자리에 복귀해야 합니다. 참나는 본래 아무런 일도 안 저지르니까 선도 악도 안 하고 또 내가 선악을 다 할 수 있지만, 선은 할지언정 악까지 할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깨우쳐야 합니다.

 

이렇게 깨우쳐서 육체가 내가 아닌 줄 알고 마음자리가 나인줄 확실히 알아서 실천해 나갈 때, 이렇게 하여 육체의 노예가 되었던 우리의 마음, 물질의 학대 속에 파묻혀 있던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어 참다운 생의 환희와 진리의 희열 속에 영원 무궁하고 완전한 행복을 창조해야 합니다.

 

 

출전 : 어둠속에 비친 서광이여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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