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화두참구의 기본 요건

근와(槿瓦) 2013. 8. 23. 03:03

화두를 가져 참선하는 것을 보는 선이라는 뜻에서 간화선이라고 한다.

이 참선법에서는 많은 주의 사항이 전해오지만 그 핵심적인 골격은 三要라 할 수 있다.

 

첫째, 큰 믿음(大信)이다. 큰 믿음이란 일체중생이 제불보살과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으며 자신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곧게 믿는 것이다. 형상에서 차별이 있고 나타난 능력에 차이가 있고 그가

        쓰는 덕행에 차이가 있고 그가 수용하는 수명에 차이가 있더라도, 근원의 실지는 그러한 차이에

        상관없이 부처님의 위없는 지혜와 온갖 공덕이 자신에게 똑같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이

        이와 같으며 이것은 영겁으로 변치 않고 어떠한 동요에도 상관이 없는 불멸의 법으로써 있으며

        어떠한 강한 압력에도 흔들리거나 빼앗기거나 나뉘거나 때묻을 수 없는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비록 지혜가 없어 어리석음에 빠져 세간에서 낙인찍히는 악행을 했거나 다시 지옥

        에까지 떨어졌더라도 자기본성은 일찌기 때묻지 아니하고 죄짓지 아니하고 그늘지지 않은 원래로

        원만구족한 진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한다.

 

        이러한 자기본성에 대한 결정적인 확신에서 참선자의 기본자세가 이루어진다. 자신이 불성이라는

        근원진리의 주체자일진대 그에게는 끝없는 지혜와 용기와 덕성이 원래로 충만하다. 어떠한 역경도

        극복하고 뜻하는 바를 구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원래로 풍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일상

        생활이 그 본분에 어긋남이 없는 행이 될 수밖에 없다.

 

        밝음과 긍정과 너그러움과 용기는 선자의 기본표정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고난에도 좌절을 모르고

        어떠한 상황에도 희망을 불태우며 불굴의 용진이 거기서부터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이 제불

        보살과 일체중생과 함께 함을 믿는 것이므로 언제나 중생을 생각하고 세계를 생각한다. 원래로

        자신과 더불어 하나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애를 걸고 다시 세세생생을 던져서라도 이룩하고자 하는

        큰 원과 큰 정진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돌리고 불국토 실현에 두는 것이다. 선자에 있어 이기적 타산은

        대금물이다. 중생을 위하여 바친 몸이며 불국토 실현을 위하여 정진하고 살아간다. 가없는 중생은 

        기가 받들 중생이며 그 중생들은 자신의 깨달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보살의 믿음이 여기에서 연유한다.

 

        세세생생 몸을 바쳐 불국토 실현을 맹세하는 것도 이 큰믿음에 유래하는 것이다. 선자가 만약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큰 원이 없게 되고 큰 원이 없으면 정진력이 약해지고 행이 좁아지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할 뿐더러 자기 일신의 안녕과 평화를 위하여 수행하는 이기적 인간이 되고 만다. 그러고서는 선자는

        커녕 평범한 종교자나 시민조차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는 큰 분심(大憤心)이다. 크게 분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분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일까.

        불조가 제시한 화두는 불조 특유의 것이 아니라 실로는 자기 자신의 면목을 눈앞에 드러내보인 것이다.

        과거의 조사들도 거기에서 자기 본분을 회복하여 대각자(大覺者)가 되었고 제불보살도 이 도리를 깨달아

        불국토를 장엄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과거 조사들과 무엇이 부족한가. 그런데도 이 도리를

        뚫어내지 못하고 범부생활에 안착하고 있으니 이 어찌 딱하고 슬픈 노릇이 아니겠는가. 제불보살은 영겁의

        광명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그 진리는 자신에게 있어서 조금도 덜하지 않고 변질되어 있지 않다. 생생하게

        지금 내 생명에 뛰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나는 이것을 모르고 미혹하여 보는 것, 듣는 것, 만지고

        느끼는 것에 탐착하고 좋고 나쁜 것에 휘둘려 살고 있다. 일찌기 중생이 아니건만 스스로 중생을 환작하여

        그것을 달게 여기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전생도 이와 같았고 그 전생도 이와 같았는데 지금 이 생도 또 이와 같다. 이러고서 어느 때에 자신의 본분

        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사 반복하고  고뇌가 물결치는 슬픔에 빠져서 영겁을 이대로 살아갈  것인

        가. 내 가슴의 광명은 어찌하여 덮어두고 사방에 구걸하여 쉴 날이 없단 말인가. 이것을 이대로 존속시킬 것

        인가.

        이제 다행히 불법을 만났다. 미혹을 깨뜨리고 어리석음을 돌려 대해탈지로 뛰어나올 인연을 만나지 않았는

        가. 이 화두야말로 나의 어두웠던 과거생, 무지와 고뇌의 과거생, 무능과 비소의 과거 무수생을 종말짓는 결

        정적 계기가 아닌가. 기나긴 고생의 늪에서 벗어나 해탈의 언덕에 이를 수 있는 계기가 아닌가. 기나긴 생사

        의 윤회를 끊고 제불보살 모든 조사들과 손을 함께 잡고 불국토를 이룰 계기가 아닌가. 참선인은 화두를 당

        하여 이렇게 자책감이 치밀어오는 것이며 대분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 분심에서 억겁의 무명(無明)을 뚫

        고 온갖 분별의 함정에서 단번에 벗어나 대자유의 평원으로 뛰쳐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분심은 선자의 동

        력이다. 그리고 이 분심은 큰 믿음에서 우러난다. 큰 믿음에서 큰 분심이 난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세째는 큰 의심(大疑心)이다. 큰 의심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을 의심하라거나 참선법을 의심하라는 말은 물론 아니

        다. 화두를 대한 마음을 가리킨 말이다. 거듭 말한 바와 같이 화두는 법성(法性)의 전면제시이므로 망상 망

        념과 무명에 갇혀 무명으로 살고 있는 범부로서는 알 수 없고 잡을 수 없다. 생각할 수조차도 없다. 이 생각

        할 수 없는 화두를 생각하는 것이 화두참구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가히 잡아 볼 수 없고 형용할 수 없다. 없

        는 것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잡을 수도 없고 놓을 수도 없는 것이니 화두는 여기

        이르러서 전신전령을 기울여 맞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런 때의 마음상태를 의심한다고 하고 큰 의정이어야

        큰 깨침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조는 화두에서 명백하게 법 자체를 우리 눈 앞에 보여준 것이다. 불조께서는 내게 있는 나의 물건을 내 앞

        에 들이댄 것인데 나는 어찌하여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무엇이냐. 분명히 내게 있는 이 도리, 명백

        히 화두에서 밝혀 주었거늘 어찌하여 이것을 모른단 말인가. 이렇게 큰 의정이 솟아나는 것이다. 온 몸, 온

        생각이 오직 화두덩어리가 되어서 화두로 눕고 화두로 잠들게 된다. 필경 이것이 무슨 도리이냐 하는 일념

        이 끊이지 않는다. 맑고 고요하고 또렷한 의정이 눈앞에 드러난다. 이렇게 지어가는데서 화두는 순숙하게

        되며 호시절이 오는 것이다.

        요컨대 의정없는 화두공부란 소용없다. 마치 죽은 물과 같아서 산 고기가 튀어나올 수 없는 것이다. 생생하

        고 명료한 의정이 필경 본분을 밝혀낸다.

 

출처 : 이것이 선의 길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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