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大通智勝(九)

근와(槿瓦) 2013. 8. 19. 03:56

 

大通智勝(九)

 

本則

흥양양스님에게 어느때 중이 묻기를 「대통지승불이 십겁이나 좌선도량에서 공부했으나 불법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니 불도를 이루지 못한때는 어떠합니까? 스님의 말, 그 질문이 그럴싸하다. 중이 말하기를, 이미 이가 좌선도량 이거늘 무엇때문에 불도를 이루지 못했을까요? 스님 왈, 그대가 성불못했기 때문이다.

 

설명

흥양양스님에게 어느때 중이 묻기를 「대통지승불이 십겁이란 길고 긴 세월을 두고 좌선공부에 힘썼으나 깨치지 못했다고 하는데 성불 못했을 때는 어떻게 됩니까?」하였다. 대통지승불은 출가하기 전에 열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아미타불도 한사람이고, 더우기 제일 끝의 열여섯째 아들이 석가라고 하는 전설이 있다. 이런 얘기는 별 문제로 하고, 대통지승불은 오래오래 게으르지 않고 끈덕지게 공부한 이로 유명했다. 그래서 이 중이 대통지승불을 내세우고 흥양양스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이처럼 공부를 많이 한 분이 깨치지 못했다는 것은 약간의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작정 공부 많이 했다고 깨치란 법은 없다. 깨치는 것은 기연(機緣)이 있어야 한다. 이 기연이 노력 없이 스스로 굴러 오는 것은 아니다. 선(禪)이란 일반사와 다른 점이 이러한데 있다 고나 할까? 결국은 진리를 다루는 일이란 보통 일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이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禪이 어떤 특수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소위 계반운작이 모두 선이라고 가르쳐 왔다. 다시 말하면 일상생활 전체가 禪의 입장이 아님이 없다. 다만 이 문제는 대통지승불이라는데 구애되지 말고, 깨치고 안깨친다는 말에 얽매여서 해결하지 못한다. 禪은 어구(語句)에 얽매이면 천리 만리의 거리에 놓여 꼼짝 달싹 못한다. 결국 禪은 어구를 떠나 거기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이 중이 아직은 미숙 한듯 하다. 깨치면 하늘로 날아 다니거나 먹지 않고도 살수 있는 듯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깨쳐도 눈은 가로 있고, 코는 내리있고, 산은 높고, 들은 낮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모르고 물은 말인듯 하다. 그리고 평생을 공부해도 깨치지 못하는 사람은 끝끝내 못깨치는 것인데 오래 오래 앉아 공부 했다고 깨치라는 법은 없다. 다시 말하면 꾸벅꾸벅 졸거나 소용 없는 잡념 망상이나 하며 아무리 긴 세월을 두고 앉아봤자 아무 소용 없다. 단 한 시간이라도 똑똑히 공부하면 당장에 깨칠 수 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이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고 했다. 나는 10년 공부했느니 20년 공부했느니 하고 자랑하는 사람도 없지 않으나 시간이나 세월의 수효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다. 이 중은 오래 오래 공부하면 깨치는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조가 공부한다고 고요한 산을 찾아 여러해 동안 애쓰는 것을 알고, 그의 스승인 남악선사가 하루는 찾아가서 그의 좌선하는 모습을 보니 탐탁스럽게 보이지 않아서 「그대는 좌선하여 무엇하려고 하는가?」「성불하려고 합니다.」「그래!」남악선사는 아무말 없이 곁에 깨진 기왓장을 주워가지고 마조가 좌선하고 있는 앞에서 바위에다 그 기왓장을 갈고 있었다. 마조가 하도 이상하여 「스님, 무얼하십니까?」「나는 이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마조가 하도 어이 없어서 「스님, 노망 나시지 않았습니까? 기왓장을 아무리 곱게 갈아야 그것이 거울이 될 수는 없지 않겠어요?」「이에 나는 그렇다 하더라도 네가 아무리 앉아서 좌선 한답시고 해도 부처는 못되리라.」이 얘기는 앉기만 하면 좌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복부(氣海丹田)에 힘을 듬뿍 주고 잡념 망상을 두지 말고 물 샐 틈 없이 쭉 앉아야 말이지, 그렇지 못하다면 고요한 장소를 골라서 몇해를 앉아 봤자 별 신통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은근히 경고한 말이다. 그러니까 건들거리며 십겁 아니라 백겁을 앉아봤자 별 수 없다. 한치 앉으면 한치 부처고, 두치 앉으면 두치 부처란 말이 있다. 단 한치라도 똑똑히만 앉으면 그 자리에서 깨친다.

 

중이 다시 묻기를 「이미 부처인데 십겁이나 앉아도 부처가 못된다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흥양양스님 대답하기를 「그대가 성불 못했기 때문이라」고. 깨치지 못하면 별의별 소리 다 하는 법이다. 이미 부처란 말을 한것으로 보면 이 중도 어지간히 공부한 것 같으나 아직은 모자라는 데가 있다. 공부가 모자라면 어떻게 하든 알아 내려고 갖은 수작을 다하는 법이다. 염불도 해보고, 절도 해보고, 어느 곳에 깨침이 있을까 갈팡질팡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뿐이 아니다. 좀 안다는 사람은 모조리 찾아 다니며 이 말 물어보고, 또는 이책 저책을 뒤적거려 보고 갖은 수단을 해본다. 그러나 그러한데서 불법을 구하지는 못한다. 다만 지그시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서히 한 걸음 한 걸음 걷되 토끼걸음을 하지 말고 황소걸음으로 끈기있게 해나가면 언제인가 터지는 날이 있다. 그리고 촌가(寸暇)라도 쉬지 말라. 쉬면 제자리 걸음된다. 우물의 물을 푸듯이 한바가지 두바가지 꾸준히 푸면 밑바닥이 난다. 잠시라도 쉬면 물은 본래대로 괴고 만다. 그래서 禪에서는 순숙이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과일을 제나무에서 익힌다는 말과 같다. 제 나무에서 천천히 익혀야 제 맛이 나지 채 익지도 않은 것을 따서 온돌에서 이불 덮어 급작스레 익히면 제 맛이 나지를 않는다. 최근 채소들을 온실속에서 속성 재배하는데, 이것이 제 맛이 나지 않는다. 또 근자에 벼락부자가 많이 생기고 벼락감투도 많이 생기는데 어쩐지 부자답게 보이질 않고, 감투가 무게 있게 보이질 않는 것과 같다. 이들은 역시 순숙(順熟)못한 탓이 아닌가 본다. 더우기 인격도야인 禪의 수행에 있어서는 서서히 익을대로 무르익어야 한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고 함도 이런 의미에서 한 말일 것이다. 

 

 

유마경에 직심시도량이란 귀절이 있다. 곧은 마음 즉 정한 마음이 도량이라고 했다. 우리가 알기는 도량이라고 치면 부처님을 모시고 깨끗이 정돈하고 술, 담배 피우지 않는 곳을 도량이라고 아는 것이 보통이나 식모는 부엌이 도량이고 교사는 교단이 도량이고 장사꾼은 장터가 도량이고 관리는 관청이 도량이고 사무원은 회사가 도량인 것이다. 그리고 「직심」이라고 한 말은 그 직장에서 자기 맡은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선에서 말하는  「직」이란 어떤 특정인의 독점된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우리들 일상생활 전체가 「도」에 이르고 보면 이렇게 보편화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자승자박으로 부자유하여 이에 걸리고 저에 얽매어 꼼짝 달싹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이래서 범부라고 일컬었다. 수레를 끄는 소가 잘 끌지 않을 때 소에 매질하느냐 수레에 매질하느냐 하는 말이 있다. 소에 매를 주어야 말이지 수레에 매질해서 무슨 소용 있겠는가? 제대로 앉지 않으면 십겁이 아니라 백겁을 앉은들 별수 없을 것이다. 즉 외형만의 좌선을 해서는 평생 해도 깨치지 못할 것인즉. 「靜中之工夫」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 말이다. 그래서 「動중지공부」라는 방법이 있다. 이는 정중지 공부가 싫증날 때 동중지공부로 전환한다. 동중지공부나 정중지공부나 공부에는 조금도 다름 없다. 어떤 선객(禪客)들은 동중지공부를 꺼려하는 것 같으나 이는 선의 참 뜻을 모르는 공부라고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요는 선(禪)은 사물과 일체되는 훈련이기 때문에 정중지공부보다 도리혀 동중지공부가 훨씬 효과적이라고 옛 어른들도 말했다. 즉 동중지공부가 정중지공부에 천만배 낫다고 일컬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정중지공부는 고요한 곳에서 즉 인적(人跡)을 피해서 신심을 단련하는 것을 말한다면 동중지공부는 천군만마속에서 청룡도를 휘두르는 것이 그것이 활기(活氣)가 있다는 것이다. 禪에서는 「활구」靜中之工夫말을 흔히 쓴다. 이말은 선(禪)의 힘 그것을 일상생활에 전용한다는 뜻이다. 선(禪)을 닦은 그힘을 일상생활에 활용 못한다면 그 선(禪)은 사선(死禪)으로 자기 혼자만이 독점하는 것밖에 안된다. 소위 나한선(羅漢禪)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불교에 이타(利他)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기가 깨쳤으면 그를 남에게도 깨치도록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것을 대승선이라고 일컫는다. 시대가 시대니 만큼 소승적으로 자기 혼자만이 소유하여서는 불 본래의 뜻에 어긋날 것이다. 적어도 대중화로 일상생활에 반영되어 보편화 되지 않아서는 아니 되겠다. 그래서  「高高」히 깨쳐서 「低低」히 행하라는 말이 있다. 이말은 둘 없는 단 하나인 진리를 깨쳤으면 이것을 어린애 에게도 미치도록 하라는 뜻일 것이다. 깨쳤다고 높은 자리에만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어린애 발 아래에도 절할줄 아는 겸허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래서 「運水」란 말이 있다. 나무도 하고 물도 긷고 청소도 하고 채소도 가꾸고 하는 것이 모두 선의 입장인 것이다. 소동파의 오도송에 「到得歸來無別思 廬山雨浙江潮」라는 싯귀(詩句)가 있다. 즉 깨치고 봐야 여산(廬山)은 예전과 같이 안개가 자욱하고 절강(浙江)은 여전히 조수가 밀리더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구태여 애쓰고 공부할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 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깨친 뒤의 여산의 안개가 보통 때의 안개가 아니고 절강의 조수가 평시의 조수가 아닐 것이다. 즉 그 안개 파도가 시적으로 더욱 아름답고 탐스러워서 말로나 글로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경지(境地)는 깨치지 않고는 맛 볼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禪에서는  「교외별전」이란 말을 쓴다.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 다만 자기 자신이 스스로 체험해서만 맛 볼 수 있는 것이다.

 

출처 : 무문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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