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하-유마경-12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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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지금 풍기는 향기는 예전에 맡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향기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는 저 중향국 보살들의 털구멍에서 나는 향기이다."
그 때에 사리불이 아난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의 털구멍에서도 이 향기가 풍기고 있소."
아난이 말하였다.
"이 향기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이것은 장자 유마힐이 중향국에서 그 나라 부처님께서 잡수시고 남은 음식을 가져와서, 유마힐의 집에서 그것을 먹은 사람의 모든 털구멍에서 이 같은 향기를 풍기는 것이오."
아난은 유마힐에게 물었다.
"이 향기는 얼마나 오랫동안 납니까?"
유마힐이 답하였다.
"이 음식이 소화되기까지 갑니다."
아난이 말하였다.
"이 음식은 얼마나 있으면 소화됩니까?"
유마힐이 답하였다.
"이 음식의 기운은 7일까지 가고, 그 후에 소화되게 되어 있소. 또 아난이여, 만약 성문인(聲聞人)으로서 아직 정위(正位)에 이르지 못했을 때 이 음식을 먹으면 정위에 이른 다음에야 소화되고, 이미 정위에 이른 사람이 이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心解脫]된 다음에야 소화가 되지요. 또 만약 아직 대승의 뜻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 이 음식을 먹은 사람은 그 뜻을 일으킨 다음에야 소화가 되고, 이미 대승의 뜻을 일으킨 다음에 이 음식을 먹은 사람은 무생법인[無生忍]을 얻은 다음에야 소화되고, 이미 무생법인을 얻은 다음에 이 음식을 먹은 사람은 일생보처(一生補處, ekajtipratibaddha)가 된 다음에야 소화가 됩니다. 비유하자면 마치 상미(上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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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부르는 약이 있는데, 이것을 복용한 사람은 몸 안의 모든 독이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약 기운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음식도 이와 같아서 일체의 모든 번뇌의 독이 완전히 없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소화가 됩니다."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참으로 미증유(未曾有)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같이 향기로운 음식[香飯]이 불사(佛事)를 이룩할 수 있다니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와 같으니라. 아난이여, 어떤 불국토에서는 부처님의 광명으로써 불사를 이룩하기도 하며, 어떤 곳에서는 여러 보살들로써 불사를 이룩하기도 하며, 어떤 곳에서는 부처님께서 만드신 화인(化人)으로써 불사가 이루어지기도 하며, 어떤 곳에서는 보리수(菩提樹)로써 불사를 이룩하기도 하며, 어떤 곳에서는 부처님의 옷과 침구로써 불사를 이룩하며, 어떤 곳에서는 음식으로써 불사를 이루기도 하며, 어떤 곳에서는 동산과 숲과 높은 누각으로써 불사를 이룩하기도 하며, 어떤 곳에서는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로써 불사를 이룩하기도 하며, 어떤 곳에서는 부처님의 몸으로써 불사를 이룩하기도 하며, 어떤 곳에서는 허공으로써 불사를 이룩하기도 하며, 중생이 마땅히 이러한 인연으로써 계율이 바른 수행[律行]에 들 수가 있느니라.
또 어떤 곳에서는 꿈 · 환상 · 그림자 · 메아리 · 거울 속의 그림자 · 물 속에 비친 달 · 더울 때의 아지랑이 등 이 같은 비유로써도 불사를 이룩하며, 어떤 경우는 음성 · 언어 · 문자로써도 불사를 이룩하며, 어떤 경우에는 청정한 부처님 나라가 적막하여 말이 없으며[無言], 설함도 없고[無說], 보여지지도 않고[無示], 식별됨도 없고[無識], 무작(無作) · 무위(無爲)로써 불사를 이룩하기도 한다. 아난이여, 이같이 제불의 위의(威儀)와 행동거지[進止]와 그 밖에 모든 베푸는 일들이 불사 아님이 없느니라. 아난이여, 이 세상에는 네 가지 마군[四魔]과 (그로부터 생긴) 8만 4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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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문(煩惱門)이 있어서 중생은 이들로부터 괴로움을 받고 있으나 제불은 이 (번뇌를 통한) 법으로써 불사를 하고 있느니라. 이같이 교화하는 것을 모든 부처님의 법문에 든다[入一切諸佛法門]고 한다. 보살로서 이 법문에 들어가는 자는 아무리 청정하고 아름다운 부처님 나라를 본다 하더라도 기뻐하는 일이 없고, 탐내지도 뽐내지도 않으며, 또 아무리 더러운 부처님의 나라를 보아도 슬퍼하는 일이 없으며, 마음에 걸려 하지도 않고 침울해 하지도 않는다. 오직 모든 부처님에 대하여 청정한 마음을 일으키고 기뻐하고 공경하며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여길 뿐이다. 제불여래는 공덕이 평등하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나라가 차별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신다.
아난이여, 그대가 제불의 국토를 보니 땅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허공은 약간의 차이도 없지 않는가. 이와 같이 제불의 몸[色身]을 보니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제불의 그 어디에도 걸림없는 지혜[無碍智]에는 차이가 없지 않는가. 아난이여, 제불의 몸[色身], 위엄 있는 모습[威相], 마음의 성품[種性]과 계(戒) · 정(定) ·혜[智慧] · 해탈(解脫) · 해탈지견(解脫智見) (등 다섯 가지 공덕과) 10력(力) · 4무소외(無所畏) · 18불공법[不共之法]과 대자 · 대비 · 위의가 바른 행위[威儀所行], 그 밖에 수명(壽命), 교화(敎化), 중생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고[成就衆生], 부처님의 나라를 청정하게 하며[淨佛國土], 다른 부처님의 가르침도 몸에 지니는 것, 그것은 모든 부처님께 한결같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라고 부르기도 하며, 여래[多陀阿伽度, 如來]라고 부르기도 하며, 불타(佛陀)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아난이여, 만약 내가 이 3구(句)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네가 무한한[劫壽] 생명을 가지고 들어도 다 들을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찬 중생이 모두 아난과 같이 다문제일(多聞第一)이고, 모든 것을 다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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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할 수 있는 총지의 힘을 가진다 하여도, 이 모든 사람들 또한 무한한 생명을 가지고 들어도 또한 전부를 들을 수는 없다. 아난이여, 이같이 제불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하고, 지혜와 변재(辯才)는 불가사의한 것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지금부터 감히 제 스스로 다문제일[多聞]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였다.
"그런 물러서는 마음을 먹지 말아라. 왜냐 하면 내가 그대를 성문들 가운데 다문제일이라고 말한 것이지, 보살들 가운데에서도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난이여, (보통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모든 보살(의 지혜)을 헤아릴 수는 없다. 모든 바다의 깊이는 설령 어디고 측량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보살의 선정과 지혜 · 총지 · 변재 등 일체의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아난이여, 그대들은 보살의 (영역에 속하는) 행위[菩薩所行]에 대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 유마힐이 한순간 보여준 신통력은 모든 성문과 벽지불이 백천(百千) 겁 동안 온 힘을 다해 변화해 보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그 때 중향국에서 온 보살이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이 사바세계를 처음 보았을 때 보잘것없고 비천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뉘우치고 그러한 생각을 버렸습니다. 왜냐 하면, 제불의 훌륭한 방편은 불가사의한 것으로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 필요에 따라 온갖 불국토를 나타내는 데 차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적은 가르침이라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본국에 돌아가 마땅히 여래를 늘 기억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제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다함이 있고[盡], 다함이 없는[無盡] 해탈법문(解脫法門)이 있으니, 그대들은 이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무엇을 다함이 있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유위법(有爲法)을 말하는 것이고, 무엇이 다함이 없는 것[無盡]이라고 하는가 하면, 무위법(無爲法)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은 유위법도 버려서는 안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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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법에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유위법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대자(大慈)를 떠나지 않고, 대비(大悲)를 버리지 않으며, 깊이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켜 한순간도 잊지 않으며, 중생을 교화하는 일에 싫증을 내거나 피곤해 하지 않고, 늘 4섭법(攝法)을 항상 지니고 그에 따라 행하는 것이며, 또 정법을 굳게 지키고 신명까지도 아끼지 않으며, 온갖 선근을 심되 피곤해 하거나 싫증내지 않으며, 마음은 항상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과 공덕을 남에게 돌려서 베푸는[廻向] 데 머무르며, 법을 구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진실을 설하는 일에 인색하지 않으며, 부지런히 제불께 공양을 올리며, 일부러 생사윤회(生死輪廻)에 들어가되 두려움을 갖는 일이 없으며, 온갖 영욕(榮辱)을 당해도 근심하거나 기뻐하지 않으며,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未學]이라 하여 업신여기지 않고 배운 사람을 부처님처럼 존경하며, 번뇌에 떨어진 사람에게는 바른 생각을 일으키게 하며, (세간을) 멀리 떠나는 즐거움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으며, 자신의 즐거움만을 집착하지 않고 남의 즐거움을 기뻐하며, 갖가지 선정에 머물러 있는 것을 지옥과 같이 생각하고, 생사윤회에 있는 것을 정원을 관상하듯 즐겨 하고, 가르침을 구하여 찾아온 사람을 훌륭한 스승으로 생각하며, 또 온갖 자기 것은 모두 보시하는 것을 일체 지혜를 구족한다 생각하며, 계율을 깨뜨리는 사람을 보면 구하여 보호해 주고 싶어 하며, 모든 바라밀(波羅蜜)을 부모라고 생각하며, 37도품[道品之法]을 권속이라 생각하며, 선근을 일으켜 행하되 제한이 있게 하지 않으며, 온갖 정토[淨國]의 훌륭하게 장식된 것을 가져다가 자신의 불국토를 세우고, 한없는 보시로써 상호를 갖추고, 모든 악을 없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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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身) · 구(口) · 의(意) 3업을 청정하게 하며, 생사윤회를 무수겁(無數劫) 동안 한다 해도 마음속에는 굳은 용기를 지니고, 부처님께 무량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음을 듣고서 스스로 그 뜻은 지치는 일이 없으며, 또 지혜의 칼로써 번뇌의 도적을 물리치고, 5온[陰] · 18계(界) · 12입처[入]에서 벗어나 중생을 업고 나와 영원히 해탈시키고, 대정진(大精進)으로 마군의 군대를 물리쳐 항복시키고, 항상 무념(無念)으로 진실한 모습[實相]의 지혜를 구하며, 세간법을 행하는 데 있어서 조금만 욕심내고 만족할 줄 알고, 출세간을 구함에도 싫증내지 않지만 세간법을 버리지 않으며, 위의법(威儀法)을 무너뜨리지 않지만 세속을 따라 행할 줄 알며, 신통력과 지혜를 일으켜 중생을 인도하고, 총지를 염해 들은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중생의 근기를 판별하여 중생의 의심을 끊어 버리고, 명료하게 바른 이치를 설[樂說辯]하며 걸림이 없다. 10선도(善道)를 청정하게 닦아서 천상과 인간의 복덕을 받고, 4무량(無量)을 닦아 범천의 길을 열고, 부처님께 가르침을 설하여 주시도록 권청하여 마음으로부터 기뻐하며 찬탄하고, 부처님의 음성과 신 · 구 · 의 3업의 선을 얻고, 부처님의 위의(威儀)를 얻어 선한 법을 깊이 닦고, 하는 일이 더욱더 뛰어나서 대승의 가르침으로 보살의 승가[菩薩僧]를 이룩하고, 마음에 방일함이 없어서 모든 선을 잃지 않는 이 같은 법을 보살의 다하지 않는 유위법이라고 하느니라.
무엇을 보살이 무위법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공을 수행하지만 공으로써 깨달음을 삼지 않으며, 차별이 없고[無相], 무작(無作)을 수행하지만, 무상과 무작으로써 깨달음을 삼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인연이 없으면 생하지 않음[無起]을 수행하지만, 인연이 없으면 생하지 않음으로써 깨달음을 삼지 않는다. 또 무상(無常)을 보면서도 그렇다고 선의 근본을 싫어하지 않으며, 세간의 괴로움을 관하면서도 생사를 미워하지 않으며, 무아(無我)를 관하지만 사람들을 교화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으며, 깨달음의 경계[寂滅]를 관하지만 영원히 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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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경계에 머물지 않고, 염리(厭離)를 관하면서도 몸과 마음으로 선을 닦고, 돌아갈 곳이 없음[無所歸을 관하면서도 선법(善法)으로 나아가 돌아가 의지하고, 생하는 것이 아님[無生]을 관하면서도 생멸하는 법으로써 모든 (중생의) 것을 짐지며, 번뇌가 없는 경계[無漏]를 관하면서도 온갖 번뇌[諸漏]를 끊어 버리지 않으며, 행해야 할 것이 없음[無所行]을 관하면서도 행법(行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며, 공이며 무(無)라고 관하면서도 대비를 버리지 않으며, 깨달음의 경계[正法位]를 관하면서도 소승을 따르지 않으며, 제법은 허망하고 견고함도 없으며[無牢], 실제로는 인(人)도, 실체로서의 주체[主]도, 그 모습[相]도 없음을 관하고, 본원(本願)이 아직 완성되어 있지 않았지만 복덕과 선정과 지혜가 텅 비어 있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을 닦는 것을 보살이 무위(無爲)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또 (보살은) 복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무위법에도 머무르지 않고,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에 유위법을 없애지 않으며, 대자비가 있기 때문에 무위법에도 머무르지 않고, 본원(本願)을 이루었기 때문에 유위법을 버리지 않는다. 진리의 약(藥)을 얻기 위해서 유위법에 머무르지 않으며, 필요에 따라서 진리의 약을 쓰기 위하여 유위법을 버리지 않으며, 중생의 병을 알기 때문에 무위법에 머무르지 않으며, 중생의 병을 없애기 위해서 유위법을 버리지 않으며, 모든 보살[正士菩薩]들은 이 같은 법을 닦음으로써 유위법을 버리지 않고 무위법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이것을 다함이 있고, 다함이 없는 해탈의 법문이라고 이름한다. 그대들은 이를 배워야만 할 것이다." 그 때 저 중향국의 보살들은 이 가르침을 듣고서 모두 다 크게 기뻐하여 온갖 아름다운 꽃 속에서, 갖가지 색깔과 향기가 풍기는 꽃으로 삼천대천세계에 두루 흩뿌리고, 부처님과 이 경의 법과 아울러 여러 보살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나서 부처님의 발에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찬탄하였다.
"석가모니부처님이야말로 이렇게 훌륭한 방편을 행하실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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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끝내자마자 곧 모습을 감추어 그들의 나라로 되돌아갔다.
12. 견아촉불품(見阿佛品)
그 때 부처님께서 유마힐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여래를 만나고자 하는데 어떻게 여래를 보는가?"
유마힐은 대답하였다.
"제 자신이 이 몸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實相]을 보듯이 부처님을 보는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저는 여래를 다음과 같이 봅니다. 여래는 과거로부터 오신 것도 아니고, 미래로 가시는 것도 아니며, 따라서 현재에 머물러 계신 것도 아닙니다. (저는 여래를) 색(色)이라고도 보지 않고, 색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色如]이라고도, 색의 자성[色性]이라고도 보지 않습니다.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라고도 보지 않으며, 식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識如]이라고도, 식의 자성이라고도 보지 않으며, 4대(大)로부터 생긴 것도 아니며, 흡사 허공과 같다고 봅니다. 6입(入)이 쌓인 것도 아니며, 눈 · 귀 · 코 · 혀 · 몸 · 마음을 이미 초월하였으며, 삼계(三界)에 있지도 않고, 세 가지 번뇌[三垢)를 이미 떠났고, 3해탈문[三脫門]에 따르고, 3명(明)을 모두 갖추고서도 무명(無明)과 같습니다. 공통된 모습[一相]도 아니고, 다양한 다른 모습[異相]도 아니며,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自相]도 아니고, 타자의 모습[他相]도 아니며, 모습이 없는 것[無相]도, 모습을 갖는 것[取相]도 아니며, 차안(此岸)에 있는 것도, 피안(彼岸)에 있는 것도, 그 중간[中流]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계십니다. 적멸(寂滅)을 관하면서도 영원히 멸한 것은 아니며, 이곳[此]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곳[彼]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이것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것도 아니고 저것으로 하는 것도 아니며, 지혜로써 알 수 있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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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고 인식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어둠[晦]도 없고 밝음[明]도 없으며, 이름[名]도 없고 형상[相]도 없으며, 강함[强]도 없고 약함[弱]도 없으며, 깨끗함[淨]도 아니고 더러움[穢]도 아니며, 어떤 장소에 있는 것[在方]도 아니고 또 어떤 장소를 떠나 있는 것[離方]도 아니며, 유위(有爲)도 아니고 무위(無爲)도 아니며, 보여지는 것도 아니고 설해지는 것도 아니며, 보시[施]도 아니고 아낌[慳]도 아니며, 지계[戒]도 아니고 파계[犯]도 아니며, 인욕[忍]도 아니고 성냄[恚]도 아니며, 정진[進]도 아니고 게으름[怠]도 아니며, 선정[定]도 아니고 산란함[亂]도 아니며, 지혜[智]도 아니고 우둔함[愚]도 아니며, 진실함[誠]도 아니고 거짓[欺]도 아니며, 오는 것[來]도 아니고 가는 것[去]도 아니며, 나가는 것[出]도 아니고 들어오는 것[入]도 아니며, 일체의 말로는 표현해 낼 수 없는 것[言語道斷]입니다. 복덕을 낳는 밭[福田]도 아니요, 복덕을 낳는 밭 아닌 것도 아니며, 공양을 받을 만한 대상도 아니고 공양을 받지 못할 대상도 아니며, 취하는 것[取]도 아니고 버리는 것[捨]도 아니며, 형상[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며, 진제(眞際)와 동등하며 법성(法性)과도 평등합니다. 잴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서 모든 재고 헤아리는 한량을 넘어서 있으며, 큰 것[大]도 아니고 작은 것[小]도 아니며, 볼 수[見]도 없고 들을 수[聞]도 없으며, 느낄 수[覺]도 알 수[知]도 없으며, 온갖 번뇌를 끓어 버렸으며, 모든 지혜와 평등하고, 중생과 동등하고, 제법에 대하여 분별함이 없으며, 일체에 전혀 잃는 일도 없고, 더럽혀질 일도 없고, 괴로워할 일도 없으며, 지음[作]도, 생기게 하는 일[起]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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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생하는 일[生]도 없고, 멸하는 일[滅]도 없으며, 두려워하는 일도 없고, 근심하는 일도 없으며, 기뻐하는 일도 없고 싫어하는 일도 없으며, 집착함도 없으며, 이전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앞으로 있을 것도 아니고, 지금 있는 것도 아니며, 어떠한 언어[言說]로도 분별하여 밝혀 낼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몸[如來身]은 이와 같아서 이같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같이 보는 것을 바른 정관(正觀)이라고 하며, 만약 이 밖에 다르게 관하면 사관(邪觀)이라고 합니다."
그 때 사리불이 유마힐에게 물었다.
"당신은 어디에서 죽어서[沒] 이 세계로 와서 태어났습니까?"
유마힐이 말하였다.
"그대가 얻은 법(法)은 죽고 태어나는 것이 있습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죽고 태어나는 것이 없습니다."
(유마힐이 말하였다.)
"만약 어떠한 법도 죽어 멸하거나 태어나는 일이 없다면, 그대는 어찌해서 나에게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죽어서 이곳에 태어났느냐?'고 묻습니까? 그대 생각은 어떻습니까? 비유하자면, 요술쟁이[幻師]가 허깨비의 남자나 여자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어떻게 죽고 태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죽고 태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유마힐이 말하였다.
"그대는 부처님께서 제법은 허깨비와 같은 모습[如幻相]이라고 설하신 것을 듣지 않았습니까?"
사리불이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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