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佛陀,부처님)

부처의 삼신(三身) (153)

근와(槿瓦) 2015. 10. 14. 00:55

부처의 삼신(三身) (153)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세존이 삼 개월 후에 멸도에 들어갈 것이라고 고하신 것을 들은 왕사성 태생의 묘당이라 불리는 보살은 놀라 세존의 좌하에 나아가 물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은 어찌하여 겨우 80세도 되지 않는 수명을 갖는 것이옵니까? 일찍이 세존께서 설하신 바에 의하면 그 수명을 얻는데는 두 가지 인연이 있다 하셨습니다. 하나는 생물의 생명을 훼손하지 말 것. 또 하나는 남에게 음식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세존은 한없이 먼 옛날부터 남의 생명을 해치는 일이 없었을 뿐 아니라 항상 선을 행하고 굶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고 때로는 그 피와 살조차 주셨던 것이 아니옵니까? 그런데 어째서 세존의 수명은 이다지도 짧은 것이옵니까?”

 

세존은 이것을 기회 삼아 불신(佛身)에 관하여 범부가 알기 어려운 심오한 내력을 설하셨다.

“선남자여, 분명히 들어라. 듣고 잘 생각함이 좋다. 모름지기 부처란 세 가지의 몸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이것을 갖추어야 비로소 무상의 득도를 했다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내력을 깊이 알 수 있다면 신속히 망집을 여읠 수가 있으리라.

 

선남자여, 세 가지 불신이란 화신과 응신(應身)과 법신인 것이다. 화신이란 부처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가령 인세에 태어나서 도를 구하는 모습을 나타내어 갖가지의 법을 궁구하여 각을 열고, 이어서 능히 사람들의 근기(根機)를 알고 때를 알고 처소를 알고, 그것에 알맞게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눈에 비춰진, 각자가 아는 부처는 모두 이 화신 부처인 것이며, 그것은 사람에 따라 보는 바를 달리하고 있었던 터이다. 다음에 응신이라 함은 부처가 구하는 사람을 위하여 즉시 진제(眞諦)를 설시(說示)하여 방편의 법을 쓰지 않고, 그저 육체에 사로잡혀서 기뻐하고 혹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취지로 하여 한없는 불법의 대본(大本)이 되어 있는 것으로, 이것은 사물 그대로의 이치와 그것을 깨닫는 지혜에서 생기는 본원의 힘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응신인 것이다. 끝으로 법신이라는 것은 법 그 자체를 몸으로 삼는 것으로, 부처의 몸의 대본은 이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이치와 그것을 아는 지혜와의 일체가 되는 법에 있다. 앞의 두 몸뚱이는 가신(假身)이며 이 법신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불법 역시 이 속에서 다스려져야 하는 것이다.

 

또 부처는 본원의 힘에 의하여 사물 그대로의 이치를 사물 그대로 득도하고 있으므로 새삼스럽게 행하려고 하는 생각이 없으며, 그리고 자재로 모든 사업을 이루어 나간다. 비유컨대 해나 달은 아무런 생각이 없고 거울과 빛에도 생각이 없으나, 그렇지만 이 세 가지가 스스로 화합하여 그림자를 낳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의 진여는 해나 달, 그것을 깨닫는 지혜는 빛, 본원의 힘은 거울인데, 이 세 가지는 각각 일부러 신경 쓸 바는 아니나 능히 자재로 중생들을 위하여 응신(應身), 화신(化身)의 그림자인 몸을 나타내는 것이다.

 

선남자여, 거울이 빛에 의하여 허공 속에 그림자를 나타내고 갖가지 모습을 나타내듯이 교화를 받는 많은 제자들도 공의 법신 속에 나타난 그림자를 보고 구원된다. 부처가 본원의 힘에 의하여 응화 이신의 갖가지로 모습을 나타내지만, 법신의 경계에는 조금도 변하는 것이 없다. 이 삼신이 있으므로 부처는 공적한 것이며 열반 가운데 머무르지 않는다고 일컫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의 이 신은 일시의 것, 자주 나타나는 고정된 것이 아니므로, 열반이 있더라도 후의 법신은 응화의 몸이 되어 나타나는 것과 법신으로서 머무르는 것과 둘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열반 속에 머무른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결국 법신은 셋이면서 하나, 하나이면서 셋이며, 변화를 시현해도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면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선남자여, 모든 범부는 세 가지 상(相)에 묶여 장애를 받는다. 첫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 둘째는 의타기성(依他起性), 셋째는 성취상(成就相)인 것이다. 변계소집상이란 암야에 새끼를 보고 뱀으로 잘못 보듯이 범부는 마음내키는대로 물(物)을 보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의타기성이란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여 모든 물(物)은 인연에 상관되어 일어나는 것이므로 모든 물은 일시적으로 맺어진 것임을 아는 것, 즉 새끼를 보고 그 성(性)이 삼(麻)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성취상이란 모든 물은 가상(假相)임에는 틀림없으나 진실한 상도 이치도 그 가상을 떠나서는 있지 않다고 알며, 가세(假世)에서 진세(眞世)를 보는 일인 것이다. 화신은 변계소집하는 범부를 교화하기 위한 몸인 것이며, 법신은 진법을 궁구하여 가세에 성취의 상을 보는 득도의 사람에게만 보여지는 법신인 것이다. 때문에 가신인 응화 이신에 멸도가 있는 일은 부득이하지만, 사람들에게 이 세 가지 상을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부처는 열반의 구름 속에 숨어 버리는 것처럼 놀라고 슬퍼하는 일이 되는 이치이다.

 

선남자여, 또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마음이 있어서 부처의 삼신을 깨달을 수가 없다. 첫째로는 기사심(起事心)으로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식(六識)인데, 밖의 것을 판별하면 그것에 집착하여 망집을 일으키는 일인 것이다. 둘째로는 의본심(依本心)으로 마음의 근본에 의해 함부로 작용하여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셋째로는 근본심으로 마음의 대원인 것이다. 사람이 만약 모든 법의 이치를 보는 지혜를 닦고 미망을 끊으면 화신을 우러러볼 수가 있고, 번뇌를 멸하면 응신을 알고 무상의 도를 닦아 마음의 대원(大源)을 없애면 법신불을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선남자여, 모든 부처는 제 1의 화신(化身)에서는 각각 사업을 다같이 하고 제 2의 응신에서는 각각 뜻을 다같이 하고 제 3의 법신에서는 각각 몸을 다같이 한다. 화신은 원래 사람들의 여러 가지 뜻에 따라 갖가지의 상을 나타내는 것이므로「다(多)」로 설해지고, 응신은 한뜻이 된 제자를 위한 것이므로 하나의 상으로 나타나서「화신」으로 설해진다. 그리고 법신은 모든 상을 초월하여 상을 갖고서는 붙들 수 없는 경계에 있으므로「화신」임도 아니고「응신」임도 아니라고 설해진다.

 

선남자여, 화신은 응신에 의해 나타나고 응신은 또 법신에 의해 나타난다. 그리고 이 법신은 진실한 존재인 것이며 의거처가 없다.

 

선남자여, 이 삼신(三身)은 각기 나타내는 의미에 의하여「항상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일컬으며, 또「변천하는 것」이라고도 설한다. 화신은 항상 법을 설하고 연에 따라 그 방편이 끊어지는 일이 없으므로「상(常)」이라고도 설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또 근본임도 아니며 커다란 작용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므로「무상」이라고도 설한다. 다음의 응신은 시작이 없는 예부터 잇따라 끊어지는 일이 없이 부처에게만 있는 법을 지니고 사람들이 다하지 않는 한 그 용(用)도 다하는 일이 없으므로「상」이라 설한다. 그렇지만 역시 근본은 아니고 용(用)이 갖추어져 나타나 있지 않으므로「무상」이라고 설한다. 법신은 원래부터 변천하는 법이 아니고 달리 상도 갖지 않으며, 또한 근본의 불신이므로 예컨대 허공과 같은 것이다. 이리하여 다만「상」이라고 설해지는 것이다.

 

선남자여, 무념(無念)의 지혜를 떠나서 달리 뛰어난 지혜는 없다. 법의 진여를 떠나서 뛰어난 경계는 없다. 이 법과 진여와 지혜는 하나도 아니요, 또 다르지도 않다. 그리고 법신은 번뇌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지혜와 깨끗한 적멸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자신도 또 청정하고 번뇌에 물드는 일도 없다.

 

또 법신은 있는 것이라고도, 없는 것이라고도, 하나라고도, 하나가 아니라고도, 셀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도, 수의 생각을 갖고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도, 또한 밝은 것이라고도, 어두운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전혀 범부의 헤아림으로는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것이며, 그 온갖 법이 있는 그대로의 상에 합당한 진여의 지혜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정해진 상에서나 이치에서 완전히 떠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법신의 인연, 경계, 처소, 과(果)등은 사량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만약 이 의(義)를 깨닫는다면 도에서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얻어지며 부처가 되는 위계, 금강심, 불심 등 한없는 묘법을 나타낼 수가 있다.

 

또 법신은 그 자체상으로는「상(常)」과「아(我)」가 있는 것이라고 일컬으며, 선정상(禪定上)으로는「즐거움」으로 설하고 지혜상으로는「정(淨)」으로 설해진다. 그러기에 법신의 몸(體)은 항상 변치 않으며 자재, 안락, 청정한 것이다. 그 선정으로부터 모든 선정, 신통, 대자비를 낳고 그 지혜로부터 모든 힘과 변재와 의논할 수 없는 신묘한 법을 나타낸다. 마치 여래주에서 헤아릴 수 없는 진보(珍寶)를 낳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선남자여, 이리하여 법신의 선정과 지혜는 모든 상(相)을 초월하여 상에 집착하는 일이 없으므로 무슨 일을 하는데도 일부러 이루어 보자는 생각이 없다.「상(常)」인 것도 단(斷, 끊어지는 것)도 아니므로 중도(中道)라고 이름 붙여지며, 생한다든지 죽는다든지 하는 약속을 초월해 있으므로, 세상의 평범한 수행에 의해서 다다를 수가 없는 곳이며, 바로 부처와 보살이 주하는 곳이다.

 

선남자여, 부처의 경계는 번뇌와 괴로움과 상(相)이 청정한 곳이므로「청정의 극」이라고 불린다.

 

비유컨대 정련된 황금에 때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황금의 성은 본래 정갈한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광중(鑛中)에 있더라도 그 성은 정갈하다고 불려지지만, 황금은 새로이 된 것도 아니고 또 광석일 때에 그 성을 잃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법신은 본래 그 성이 정갈하므로 설령 번뇌에 섞여 응화의 2신이 나타나 있다 하여도 그것 때문에 법신의 청정을 잃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모든 부처의 경계는 청정하다고 일컫는다. 또 비유컨대 꿈에 큰 강을 떠돌면서 손을 놀리고 발을 움직여 흐름을 건너, 겨우 저쪽 언덕에 건너가서 꿈을 깨고 보면 이젠 그곳에 흐름도 언덕도 없는 것처럼, 망집이 다하면 생사의 흐름도 각도 망집의 언덕도 없다. 그렇지만 꿈에서 깨어나고 보면 마음은 원래 그대로인 것과 같이, 망집이 다하면 모든 것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각마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없어지고 허공과 같은 청정함이 그대로 각인 것이며, 때문에 부처의 경계는 청정하다고 일컫는다.

 

선남자여, 법신은 미혹의 장애를 청정케 하여 응신(應身)을 나타내고, 업의 장애를 청정케 하여 화신을 나타내고, 지혜의 장애를 없애고 청정케 하여 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유컨대 공중에서 번개를 치게 하고, 번개에 의해 빛을 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법신의 나타남은 지혜를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화신이 나타남은 선정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삼신의 청정함은 모든 물의 진여를 위한 것이며, 그 진여는 또 일미(一味)의 것이며, 모든 번뇌의 망집으로부터 해탈되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모든 물(物)의 구경(究竟)으로, 이것을 얻고 있는 모든 부처의 몸 또한 다만 하나이지 다른 것은 없다고 일컫는다.

 

선남자여, 만약 믿는 남자나 또는 여자가 있어서 ‘부처님은 우리 대사(大師)이다’라고 하는 신심을 일으킨다면, 이 사람은 불신에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깊이 마음에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 되거나 일어나기 쉬운 바르지 않은 사유는 모조리 제거되는 것이다. 곧 법에는 두 상은 없다. 또 분별이 없음을 알아야 번뇌에 물들지 않고 성스럽게 닦아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법의 진여와 진여에 응한 지혜가 청정해지고 모든 장애가 제거되어, 모든 것을 자재로 다스릴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진여의 정지(正智), 진실의 상이라고 이름하며 또 이와 같이 보는 것을 성스러운 견해라고도 하고 진실로 부처를 보는 것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이 교화를 입고 사람들은 모두 부처의 몸의 기이한 내력에 크게 놀라고, 길이 존재하실 법신을 원하는 마음을 일으켜 부처님의 멸도하신 사실의 슬픔과 의문을 풀 수가 있었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