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다 장자(質多長者)-139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마치카산다의 질다 장자는 안바다카의 숲에 사는 제자들을 자주 그 집에 초대했다. 어느 날 제자들을 초대하여 상좌에게 묻기를,
“존자여,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이설(異說)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간은 상주(常住)든가 덧없는 것이라든가 한(限)이 있다든가 한이 없다든가 중생들은 죽어 뒤가 있다든가 없다든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든가, 혹은 영혼과 육체는 하나라든가 다른 것이라든가 여러 가지의 이설이 있고, 세존은 62종의 견해를 모두 범망경(梵網經)에 제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이설은 어째서 생기는 것이옵니까? 무엇에 기인되는 것이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상좌의 제자는 잠자코 있었다. 두 번 세 번 같은 질문을 해도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그 제자 중 연소한 이시닷다가 나아가 상좌의 허락을 받고 대답했다.
“장자여, 그것은 몸에 집착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서 그 신견(身見)만 없다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대덕이여, 그 신견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장자여, 그것은 이 신체를 이루고 있는 몸과 마음에 대해「아(我)」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가르침에 어두운 범인이 일으키는 생각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에 익숙하고 부처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닦는 자는 몸과 마음에「아(我)」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대덕이여, 당신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나는 아반치국(阿盤底國)에서 왔습니다.”
“대덕이여, 아반치에는 나의 낯설은 벗이기는 하지만 이시닷다라는 사람이 출가했습니다. 대덕은 그를 만나신 일이 있습니까?”
“장자여, 나는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 존자는 지금 어디에 주(住)하십니까?”
이렇게 질문을 받자 이시닷다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덕이여, 당신이 이시닷다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대덕이여, 부디 마치카산다의 즐거운 이 숲에 오래 머물러 주십시오. 저는 부족하나마 대덕의 의식, 좌구, 탕약을 주선하겠습니다.”
“장자여, 말씀은 기쁘게 받겠습니다.”
질다는 이시닷다의 말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제자들에게 음식을 공양했다. 숲에 돌아온 뒤 제자들은 이시닷다의 노고를 칭찬했지만 그는 좌구(坐具)를 거두고 바리때를 갖고는 어디론지 떠난 후 다시 마치카산다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형 외도인 가섭은 집에 있을 때 질다(質多)하고는 붕우(朋友)였었다. 가섭이 마치카산다에 왔다는 말을 듣고 질다는 가섭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난 뒤, 집을 떠난지 몇 년이 되느냐고 물었다.
“거사여, 벌써 30년이 됩니다.”
“대덕이여, 이 30년간에 무엇인가 남달리 수승한 법을 얻고 수승한 지견(知見)을 얻고 평안한 신경을 얻으셨습니까?”
“거사여, 30년이 지났지만 나체와 독두(禿頭)와의 논쟁에 교묘해졌을 뿐 아무 것도 달라진 일이 없습니다.”
“대덕이여, 30년이나 출가자로 있으면서 나체와 독두와의 논의에 교묘해졌을 뿐이라니, 대덕의 법은 참으로 진기한 것입니다.”
“거사여, 당신은 부처님의 신자가 되고 나서 몇 년이 되십니까?”
“30년이 됩니다.”
“그 30년에 무언가 초인(超人)의 법을 얻고 수승하고 성스러운 지견을 얻어 평안한 신경(神境)을 얻으셨습니까?”
“대덕이여, 얻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선정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또 제가 세존보다 빨리 죽는다면 세존은 저를 가리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는 번뇌가 없어진 자라고 설명해 주시겠지요.”
“거사여, 재가의 몸으로 그와 같은 수승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법일까요. 나도 그 가르침 아래 제자가 될 수 있을까요?”
질다는 가섭을 데리고 불제자들의 처소에 가서 가르침을 듣고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때 세존은 우준냐국 칸나카타라의 녹야원에 계셨다. 나형 외도인 가섭은 세존을 찾아 뵙고 아뢰옵기를,
“존자여, 당신은 온갖 고행(苦行)을 싫어하고 고행자를 비방하신다고 저는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까?”
“가섭이여, 그것은 나의 의견이 아니다. 또 나를 바르게 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가섭이여, 나는 천안으로써 고행자가 죽은 뒤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보고 천계에 태어나는 것도 본다. 또 약간 고행을 한 자가 죽어 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천계에 태어나는 것도 본다. 이렇듯 고행자의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 어찌 한결같이 고행을 싫어하고 고행자를 비방할 수 있겠는가?”
가섭이 아뢰옵기를,
“존자여, 나체로 있다든가 공양의 음식을 받지 않는다든가 반달씩 식사를 끊는다든가 쇠똥을 끼니로 삼는다든가 나무껍질이나 짐승의 가죽을 옷으로 입는다든가 항상 서 있는 행을 지킨다든가 밤에 세 번 목욕을 한다든가 하는 고행은 출가자에게 상응하는 것, 바라문에게 상응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가섭이여, 비록 이 같은 고행을 하고 있더라도 그 사람에게 계와 선정과 지혜의 마음가짐이 없으면 참된 출가자, 바라문이 되는 일과는 멀리 동떨어져 있다. 노여움이 없고 해코자 하는 마음이 없고 자심(慈心)을 닦아 번뇌를 다하는 그대로 깨달았다면 그것이야말로 출가자, 바라문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존자여, 출가자가 되고 바라문이 된다고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가섭이여, 그 어렵다고 하는 것은 고행을 닦는 것이 아니다. 고행이라면 물통을 등으로 나르는 하녀라도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노여움이 없고 해코자 하는 마음이 없고 자심(慈心)을 닦아 번뇌를 다하고 있는 그대로 깨닫는다고 하는 일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존자여, 그렇다면 출가자이며 바라문임을 아는 일이 어렵습니까?”
“가섭이여, 그 안다는 곤란도 고행에 의해 출가자와 바라문임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행이라면 물통을 등으로 나르는 하녀도 못할 게 없는 것이다. 노여움이 없고 해코자 하는 마음이 없고 자심을 닦아 번뇌를 다하고 있는 그대로 깨닫는 일에 관하여 출가자, 바라문임을 인식하는 일이 어려운 것이다.”
“존자여, 그럼 그 계와 선정과 지혜의 마음가짐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가섭이여, 계를 지니는 것은 부처가 이 세간에 나타나 스스로 깨닫고 남을 가르친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그 가르침을 듣고 신심을 일으켜 집을 버리고, 계를 좇아 몸을 지키고 바른 지혜를 갖추어 살생을 금하고 인(仁)을 지니고 도둑질을 않고 마음을 청정히 하여 음행을 버리고 거짓말을 않고 난폭한 말을 하지 않고 바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선정을 닦는 것은 눈으로써 물(物)을 볼 경우에도 그 오관을 잘 지켜 상(相)에 얽매이지 않고 가고 오고 머무르고 눕는데도 마음의 눈을 밝게 뜨고서 마음도 염(念)도 바르게 갖고 새가 몸에 붙은 날개밖에 아무 것도 갖지 않고도 날으듯이 몸을 감출만한 옷과 배를 채울만한 음식으로 만족하고 나무뿌리, 동굴, 숲, 광야, 무덤 등 한적한 곳을 택하며 조용히 앉아 탐욕과 진에와 혼면(惛眠)과 도회(悼悔)와 의(疑)를 여의고 건전한 사람, 자유로운 사람, 안전한 사람이 되고 기쁨과 즐거움(樂)을 얻어 선정에 드는 것이다.
지혜를 얻음이란 이 선정에 의해 고요하고 청정하고 티 없는 마음이 되어 그 무엇에도 번거로움을 받지 않는 마음으로써 이 몸이 무상하고 무아임을 알고 다섯 가지의 신통을 얻고 사성제의 도리를 알아 번뇌를 멸하여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해탈했다는 밝은 자각을 낳는 일이다.
가섭이여, 이보다 수승한 수양에 이르는 방법은 없다. 계와 고행과 염리와 지혜와 해탈을 찬탄하는 출가자나 바라문이 있다. 그러나 나만큼 청정하고 높은 계와 고행과 염리와 지혜와 해탈을 갖춘 자는 없다. 그들의 가장 위에 도달한 자가 나이다.
가섭이여, 나의 이 설하는 것에 관해 어떤 자는 말할지도 모른다. ‘교답마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짖어대지만 그 말하는 바는 신념으로써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은 그 설하는 바를 듣고서 질문을 하지 않는다. 질문을 받아도 대답하지를 못한다. 설사 대답할 수가 있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기쁘게 하고 믿게 하지를 못한다’고. 가섭이여, 이와 같이 생각해선 안 된다. 나는 군중 앞에서 바른 법을 부르짖고 신념으로써 도를 설한다. 대중들의 질문에 대답하여 기쁘게 만들고 능히 믿게 한다. 가섭이여, 일찍이 영취산에서 그대와 같은 고행자 니구로다는 염리의 가장 높은 형식에 관해 나에게 묻고 나의 설명을 듣고서 더없이 기뻐한 일이 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설명을 듣고서 더할 데 없이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을까요. 저도 지금 다시 없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삼보에 귀의하여 세존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가섭이여, 전에 다른 교파에 속해 있었던 자가 나의 가르침의 제자가 되고자 교단에 들어오고 싶다고 원하면, 넉달 동안 별거를 하고 넉달을 지나고서 교단에 참여시키기로 하고 있다. 물론 특별한 경우도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규칙이다.”
“세존이시여, 넉달의 별거가 규칙이라고 한다면, 저는 넉달 동안 별거를 하겠습니다. 부디 넉달 뒤에는 저를 교단에 가입시켜 주십시오.”
가섭은 이리하여 제자가 되고 교단에 가입하여 얼마 뒤 열성과 정려에 의하여 깨달음을 얻기에 이르렀다.
또 어느 날 불제자인 카마부는 질다 장자에게 초대되어 그 집에 가서 말하기를,
“장자여, 더러움 없는 흰 천개(天蓋)가 있되 바퀴통(輻) 하나로써 가는 수레, 애류(愛流)를 끊되 계박하지 않고 고뇌 없이 가는 것을 보라. 고 하는 게의 의미를 알고 계신가?”
“대덕이여, 그것은 세존의 게이옵니까?”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생각해 보겠습니다.”
장자는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대덕이여, 더러움이 없다 함이란 계를 이름하며, 흰 천개라 함은 해탈을 이름하며 수레바퀴 하나란 정념(正念)을 이름하며 수레란 이 몸을, 애류를 끊음이란 갈애를 여의어 번뇌가 없는 것. 계박하지 않음이란 탐욕, 진에, 우치의 속박을 여의는 것. 고뇌가 없음이란 번뇌의 번거로움이 없는 것. 간다고 함이란 목적을 이룬 깨달음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착하도다, 장자여, 장자의 혜안은 깊이 부처의 말씀을 깨닫고 계시다.”
장자가 죽을 병으로 누워 있을 때 숲속의 나무 신이 나타나,
“장자여, 미래에는 전륜 성왕이 되도록 발원하라.”고 전했다.
“그것도 덧없는 일, 무너지는 것이니, 버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장자는 대답했다. 베갯머리에 있던 친척이나 벗들이 이 말을 듣고서,
“장자시여, 정신을 차리십시오.”하고 말했다.
“대중들이여, 나를 미치광이 취급하지 말아 달라. 방금 숲속의 나무 신이 나타나 미래에는 전륜 성왕이 되라고 권했기 때문에 그것도 덧없는 것, 무너지는 것이다. 버리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대답하는 것이다. 여러분이여, 그대들은 부처의 법과 승가에 무너지지 않는 신심을 가지고 어떠한 공양도 계를 지니는 바른 마음, 평등한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자는 이렇듯 사람들에게 삼보의 신심과 보시의 마음을 베풀고 죽었던 것이다.
출전 : 불교성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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