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

반야경과 禪

근와(槿瓦) 2015. 9. 29. 01:29

반야경과 禪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선현아, 모든 생각이 공(空)하다고 하는 것은 둘이 없음이며, 모든 것이 둘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있지 않다(無有)고 하는 것이며, 모두가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나고(生) 죽음(滅)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나고 죽음이 없으면 生 · 老 · 病 · 死 · 憂 · 恨歎 · 苦痛 · 煩惱함을 벗어나느니라.」

 

위의 글은 반야경의 변학도품에서 아무렇게나 인용해 낸 것이다. 이 글에서도 보이고 있듯이 반야경은 空思想을 말하고 있다. 반야경의 공사상은 그 저변에 반야의 直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깔려 있다. 또 선종에서 반야경을 수지독송하는 까닭은 이 반야의 직관과 禪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반야의 직관이 선에 있어서 어떠한 의지로 나타나 있는가를 아는 것으로 중국의 法眼和尙과 首山스님의 대화를 들 수 있다.

 

법 「毫釐도 差)가 있어 天地懸隔하다고 古人은 말하는데 너는 어떤가?」

수 「毫釐도 有差면 天地懸隔」

 

법 「만약 네가 毫釐를 통째로 삼키고서 그러한 곳에서 한 걸음도 나와 있지 않다면 너는 글렀다.」이에 수산은 골을 내고 물었다.

수 「그렇다면 화상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법 「毫釐도 有差면 天地懸隔」

 

묻고 답하고 다시 물어서 답하는 문답의 내용은 같은 말이 되풀이 되고 있어 얼핏 보기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知的解釋이나 分別意識의 배격이다.

 

앞에서 인용한 반야경에서「(空)하다고 하는 것이 둘이 아니라」고 한 점을 상기하면 된다.

 

사물의 근원에 사무치는 반야직관은 <둘> 즉 상대적인 것, 분별하여 대상으로서의 사물에 대한 이해를 배격한다. 흔히 반야직관과 理性을 혼동하는 경우를 보는데 이러한 점에서 兩者가 현격하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른 선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德韶선사에게 雲水가 물었다.

雲 「듣건대 古人의 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보면 곧 반야에 결박 당한다고 했습니다.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보면 곧 반야에 결박되고 만약 사람이 반야를 보지 않으면 역시 반야에 결박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반야를 본 사람이 어찌하여 반야에게 도리어 결박을 당하는 것입니까?」

師 「너는 반야를 본다던가 안본다고 말하는데 도대체 반야를 본다는 것이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 나에게 말할 수 있겠느냐?」

 

雲 「반야를 보지 않는 사람 역시 반야에 묶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師 「너는 반야를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반야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보지 않는 것인가?」선사 곧 이어서 다시 말한다.

 

師 「만약 반야를 보면 이미 그것은 반야라고 이름할 수 없다. 또 만약 반야를 보지 않는다고 하면 그도 역시 반야라고 할 수 없다. 어찌하여 반야를 <본다><보지 않는다>하는가. 그러므로 고인의 말에, 만약 一法을 缺하면 法身은 성취되지 않는다. 또 만약 一法을 남겨 <剩>도 법신을 성취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말한다. 만약 一法 있으면 法身不成이며 無一法이어도 法身不成이다.」-대장경 雲七四一-A-

 

여기에 반야<직관>의 진리가 남김없이 나타나 있다.

 

덕소선사의 一法은 구체적 존재이며 法身은 보편적 실재를 말한다고 하겠다. 그의 말을 되풀이해서 읽어보면 똑같은 말의 되풀이 같다. 그러나 一法과 法身에 얽매이지 말고- 마치 雲水는 법신과 일법에 얽매어 있다- 「모든 생각이 <공>하다고 보는 것」까지도 <공>하면 덕소선사를 이해할 것이다. 지적해석이나 분별식을 가지고 아무리 되풀이 해 읽어도 도움은 안될 것이다.

 

禪師들의 대화에는 지적분별에 의한 분별적 사고의 교환이 없다. 사물을 분별적 사고의 倫理로만 이해하는 사람에게 禪問答은 非論理的이고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린다. 六백부 반야경의 서술방법은 禪의 대화에서와 같다. 다만 論理性을 배제하고 그 진수에 直入한다. 즉 경험적인 事物, 어떤 결과로서 나타난 사물, 상관적인 사물의 비존재성 <공>에 肉迫한다.

 

반야는 결코 분별식과 같은 차원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반야는 분별식을 초월한다. 때문에 반야경의 서술은,

「선현아,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無明이 있고, 그것을 버리는 수행이 있다고 생각하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아니다.」고 한다.

 

무엇이 <있다>고 하는 생각은 분별식이다. <없다>고 하는 비존재를 전제로 한다. <있다> <없다>와 <본다> <보지 않는다>는 같은 분별식의 표현이다. 선문답은 그러한 <생각>을 철저히 배격해 버리므로 비논리적이다.

 

덕소선사가 깨달음에 이른 경위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덕소는 법안화상의 후계다. 화엄철학과 선의 선지식이었으나 그가 반야에 투철하기 까지에는 수많은 선지식을 찾아 다녀야 했다. 그는 만나는 선지식과 동료에게 자기는 叅學을 마쳤다고 자랑했다. 어느 때, 덕소는 龍矛화상을 만났다.

 

德 「저는 雄雄尊者는 가까이 할 수 없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어떨까요?」

龍 「불과 불같은 것이야!」

德 「그렇다면 갑자기 물을 만나면 어찌 됩니까?」

龍 「너는 알고 있지 않은가?」라고 할뿐 아무 말도 없었다.

 

덕소는 자기가 叅學을 마쳤으므로 모르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덕소는 출가전에 모든 經書에 달통했었다. 그러나 용모화상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이 무엇을 아는가 회의하게 되었다.

 

德 「하늘도 덮지 않고 싣지 않고라 하는데 그 이치는 어떠합니까?」

龍 「그건 그렇다!」

 

덕소는 전혀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물었다. 이에,

 

龍 「道라는 것은 말이야, 앞으로 언젠가 네 자신이 스스로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그래서 덕소는 기가 죽었다. 뒤에 疎山화상을 만나 물었다. 콧대 높은 그는,

 

德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소산 즉석에서,

疎 「不說.」

 

알 수 없는 덕소 콧대가 꺾여 다시 물었다.

 

德 「어찌하여 說하지 않습니까?」

疎 「존재, 비존재의 범주는 여기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德 「老師, 당신은 지금 훌륭히 說하시지 않았습니까?」

疎 「········」

 

덕소는 54인의 선지식을 歷訪했지만 끝내는 반야를 체득할 수가 없었다. 그 까닭을 후대의 어느 선사는「不說」을「說한다」에 대한 <說하지 않음>인 분별식으로 알았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덕소는 늘 그랬다. 기가 꺾인 덕소가 할 일 없이 淨慧화상의 會上에 가 있었다. 정혜는 一見하여 덕소가 자질이 높은 雲水임을 알아 보았다. 그러나 덕소는 정혜화상에게 實參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중의 맨 끝 자리에 앉아 묵묵할 뿐이었다.

 

어느 날, 한 중이 일어나 화상에게 물었다.

 

僧 「如何是曹源一滴水」

淨 「是曹源一滴水」

 

물론 중은 어이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치 덕소가 경험했던 壁을 중은 느낀 것이다. 이 자리에 동석한 덕소는 이제 불법의 대의를 깨닫고 싶을 욕망도 배우고 싶은 관심도 없었는데 돌연 뜻밖에도 반야직관의 진리에 눈을 뜬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해온 학문적 소산과 理性分別의 소산이 그의 진리를 가두어 두었던 분별식의 둑이 무너지자 어름이 녹듯 氷釋하는 것을 느꼈다. 이 종교적 체험 뒤에 덕소는 실로 반야의 巨匠이 되었다. 반야직관은 분별적인 것이 아니며 抽象을 싫어한다. 반야직관은 모든 존재의 根底가 되는 진실을 남김없이 示現한다.

 

반야경 2백61권 多問不二品 11을 보면,

「선현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모든 법의 제 모양이 공함을 관찰하는 까닭에 배운다. 그러므로 선현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色(물질) · 行(변화)이 있다거나 없다고 하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受 · 想 · 行 · 識에도 변화나 분별이 없는 것이다.」고 하는 것은 덕소가 분별을 떠났을 때의 깨달음을 입증한다.

 

반야경의 서술은 모두 그러하다. 그리고 반야경에서 말해지고 있는 관찰과 반야직관의 禪的인 방법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선현은 부처님에게 이렇게 그 방법을 묻고 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모든 법의 제 모양이 공함을 어떻게 관찰하므로써 배우나이까.」

「선현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색은 물질의 모양이 空함을 관찰하므로써 배우고, 수 · 상 · 행 · 식의 모양이 空함을 관찰하므로써 배운다. ···· 선현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에 눈의 곳(眼處)은 눈의 곳의 모양이 空함을 관찰하므로써 배우고·····」하는 서술에서 우리는 반야경이 사물자체에 직입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은 눈의> <코는 코의> <귀는 귀의> 空함을 관찰하므로써 배운다. 이러한 방법은 헉슬리의 이야기에 따르면 禪이 事物의 根源에 直入하여 悟道하는 방법과 같은 것이다.

 

반야는 구경의 진리 자체이며 반야직관이라고 하는 것은 반야가 자기자신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는 靜的이 아니라 動的인 것이다. 단순한 能動的 感覺이 아니라 能動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경은「行은 行相이 空함을 알아」行의 根底에 사무쳐야 한다고 說한다. 따라서「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無明은 무명의 모양이 空함을 관찰하므로써 배우고······」라고 하는 것이다.

 

또 반야경은 禪의 否定的인 방법에 대해서도 이렇게 說하고 있다.

「선현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네가지 선정은 네가지 선정의 모양이 空함을 관찰하므로써 배운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반야경은 부정적 방법으로 선이 반야직관에 의한 사물의 근저에 歸一하는 것임을 설한다.

 

그리고 禪과 般若經은 모든 것이 평등함을 강조한다. 그 모든 것이 평등한 까닭은 간단하다. 그것은「모든 法이 空함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출처 : 동국역경원 월보[이운허,필자(幽燦),1969.03.30]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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