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스님(백일법문 下)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마조(馬祖道一)스님은 지금부터 1200여년 전 당(唐) 정원(貞元) 4년(AD.788) 80세에 입적하였는데 육조스님 제자되는 남악 회양선사의 제자입니다. 마조스님이 법을 깨치게 되는 기연(得法機緣)은 잘 알려진 것이지만 이것을 보면 선(禪)이란 활동하는 원동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 것과 같이 한군데 체재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마치 죽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낙오되기 마련이고 도태됩니다. 농사 짓는 사람은 논과 밭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시장바닥에서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합니다.
수행(修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단히 정진하는 사람은 향상의 분(分)이 있거니와 정진하지 않고 방일하는 사람은 결국 전에 닦았던 경계조차도 迷하고 맙니다. 모든 것은 쉬지 않고 변천하기 때문에 우리도 이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쉬임없이 움직여야 합니다. 선(禪)은 활동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참선을 한다는 것은 좌선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은데 좌선만이 참선(參禪)이 아닙니다. 참선은 곧 선을 참구하는 것인 만큼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 오로지 마음을 순일히 하여 자기가 의심하는 화두(話頭)에 몰두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마조스님의 득법기연인 남악선사와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선의 진의(眞意)를 알 수 있습니다.
남악스님이 숭산(嵩山)의 전법원(傳法院)에서 수도하는 도일스님의 법기(法器)를 알고 도일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바로 방문 앞으로 갔습니다.
“대덕(大德)은 무엇 할려고 좌선을 하십니까.”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하루는 남악스님이 기와장을 가져와서 스님이 좌선하고 있는 방문 바로 앞에서 기와장을 숫돌에 갈고 있었다.
“큰스님은 무얼 하시려고 기와장을 갈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갈고 있습니다.”
“기와장을 갈아서 어찌 거울을 만들려고 합니까.”
“그러면 좌선을 해서 어찌 부처를 이룰려고 합니까.”
이 한마디에 도일은 큰스님이 기와장을 갈고 있는 진의(眞意)를 알았습니다. 다시 남악스님이 물었습니다.
“우마차가 가지 않을 때 소를 때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
“부처를 찾는 데에 있어 좌선만 고집하면 설사 만 겁을 지내도 깨치지 못한다.”
도일스님은 남악스님의 말씀을 듣고 이내 마음을 깨쳐서 뒷날 남악스님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경덕전등록 남악회양장(南嶽懷讓章)에 나오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은 강서성(江西省)을 중심으로 교화를 하셨기 때문에 강서마조(江西馬祖)라고도 불리우며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교화를 한 석두 희천(石頭希遷)과 더불어 당시 선계(禪界)의 쌍벽이라 불리웠습니다. 마조스님 밑에 139명의 대선지식이 있고, 그 중에서 뛰어난 이가 88명인데 이 88명이 천하에 흩어져서 육조 조계선을 천하에 유포시켰습니다. 선종을 천하에 유포시켜서 알게 한 것은 마조스님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조스님 밑에서 임제종(臨濟宗) 위앙종(潙仰宗)이 나고 조동종(曹洞宗)도 이와 관련이 많습니다. 마조스님의 성품은 인자하며 얼굴이 특이하고 소걸음에 호랑이 눈길이었으며 혀를 내밀면 코를 덮고 발바닥에는 두 개의 고리 문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조스님은 종문(宗門)의 걸출로써 천하에 선을 유포시킨 제일의 공로자라고 평하는 동시에 큰제자를 많이 두기로 마조스님 만한 이가 없다고도 평합니다. 그래서 마조스님의 법문이라고 하면 종문의 표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법문이 많이 없고 마조어록(馬祖語錄)이라고 하는 간단한 것이 있습니다.
만약 도(道)를 알려고 할진대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이다. 평상심이란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범성(凡聖)이 없고 단상(斷常)이 없다. 경에 말씀하시길 범부행(凡夫行)이 아니며 현성행(賢聖行)도 아닌 것이 보살행이라 하니라. 단지 지금과 같이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할 때 전체가 다 도(道)이다. 도(道)이대로가 법계(法界)이니 내지 항하사 같은 묘한 작용이 법계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진댄 어찌 이것을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하며 무진등(無盡燈)이라 할 것인가. 일체만법이 다 심법(心法)이요 모든 이름이 심명(心名)이니 만법이 마음을 따라서 일어난다. 마음이란 만법의 근본이다. 경에 말씀하셨다. 마음을 알아 본원(本源)에 통달하는 까닭에 사문(沙門)이라 한다.
도(道)란 평상심(平常心)을 말합니다.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고 하니까 평상심이란 일상 보통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옷 입고 밥 먹고 성내고 좋아하는 마음 그대로의 활동이 도라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마조스님이 말씀하시는 평상심(平常心)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도 없고 취사도 없고 범부와 성인과 단멸과 상주가 없는 마음이라고 했으니, 이것은 곧 양변을 여읜 중도가 평상심이라는 말입니다. 생멸심을 가리켜 평상심이라고 한 것은 아닌 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기틀에 대응하고 물건을 접촉함(應機接物)이 모두 도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업식망견(業識妄見)을 말하는 생멸심이 아니고 진여대용(眞如大用)을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마조스님이 말씀한 도란 생멸견해라고 잘못 오해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나 그것은 양변을 여읜 중도(中道)를 도라고 한 마조스님의 뜻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도 이대로가 법계라 하였습니다. 법계란 연기를 말하는 것이고 연기는 중도입니다. 일체법이 마음법이라고 하는 이 마음이란 자성이라 해도 진여라 해도 뭐라 이름 붙여도 괜찮은데 양변을 여읜 중도 즉 불성(佛性)입니다. 그래서 천태종에서 주장하는 한 개의 색, 한 개의 향이 중도아님이 없다(一色一香無非中道)는 것과 같은 말이며, 진진찰찰(塵塵刹刹)이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이니, 이 마음이라는 것이 중도불성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 본원에 도달한 사람, 즉 중도를 정등각한 사람이 사문의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즉 출가한 사람은 누구든지 평상심, 말하자면 양변을 여읜 중도를 깨쳐야지 이것을 깨치기 전에는 사문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道)라 한다고 생멸의 변견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자기의 망견이요 곡해지 마조스님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규봉스님이 4종복기를 비판할 때에도 생멸견해에서 마조스님을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그 뒤에 홍각범(洪覺範)스님이 ‘규봉은 절대로 마조스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고 했고, 영원 청(靈源淸)스님도 ‘규봉이 생멸 · 변견적인 해석을 한 망견이지 마조스님의 뜻은 모른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주좌와(行住坐臥)와 응기접물(應機接物)이 모두 다 도라 하는 것은 양변을 여읜 중도에 입각한 평상심의 진여대용이지 생멸망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능인(能仁)이니 지혜가 있고 기정(機情)을 잘 하여 능히 일체중생의 의심그물을 부수어서 유(有) 무(無) 등의 속박을 벗어나며 범 · 성(凡聖)의 망정이 다 없어져서 인(人)과 법(法)이 모두 공(空)하다. 최상 법륜을 굴리어 범위를 벗어나니 짓는 바가 걸림이 없어 사(事)와 이(理)가 함께 통달하니라.
하늘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홀연히 있다가 돌연이 없어지며 종적이 없으니 비유하면 물에 글씨를 쓰는 것과 같다. 불생불멸은 대적별(大寂滅)이니 속박 속에 있으면 여래장(如來藏)이라 이름하고 모든 속박을 벗어났을 때를 대법신(大法身)이라 한다. 법신(法身)은 다함이 없어서 체(體)는 증감이 없고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능히 모가 나고 능히 원만하여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타내니 물속의 달과 같다.
도도히 운용하여 뿌리를 세우지 않아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고 무위(無爲)를 취하지 않는다. 유위(有爲)는 무위(無爲)집의 용(用)이고 무위는 유위집에 의지하나 의지하는 데 머물지 않는 까닭에 저 허공같이 의지하는 바가 없다고 한다.
능인(能仁)이란 석가(釋迦)를 의역한 것이고, 기정(機情)을 잘한다고 함은 중생제도를 함에 있어서 부처님은 응기접물(應機接物)외 수단이 묘하여 능히 일체중생의 의심그물을 부수고 유 · 무에 묶인 변견을 벗어나게 합니다. 결국 중도를 가지고 일체중생을 제도한다는 말입니다. 유 · 무의 속박을 벗어나서 중도를 성취할 것 같으면 범성(凡聖)의 정(情)이 없어져서 법공(法空) 아공(我空)이 됩니다. 진여대용의 무애자재한 법을 쓰게 되면 쌍차쌍조해서 무장무애한 법계가 현전하게 되어 범주를 완전히 떠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사(事)와 이(理)가 서로 함께 통하여 이사무애 사사무애의 무장애법계가 됩니다. 이것이 불법의 진수입니다. 중생이든지 보살이든지 아직 대법(大法)을 성취하지 못한 때를 여래장(如來藏)이라 하는데 아직 유 · 무 양변을 해탈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속박을 벗어나 해탈을 성취한 것을 대법신(大法身)이라 합니다. 법신(法身)은 무궁하여 다함이 없고 체(體)는 증감이 없어서 대소(大小)가 완전히 원융자재하게 됩니다. 체에 증감이 없다 함은 양변을 여읜 쌍차(雙遮)를 말하는 것이고 능소능대(能小能大)란 쌍조(雙照)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법신은 주처(住處)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위(有爲)를 다하지 않고 무위(無爲)에 주하지 아니하며 유위를 버리지 않고 무위를 취하지 않습니다. 유위는 무위집의 작용이고 무위는 유위집에 의지합니다. 하지만 의지하는 데 머물지 않는 까닭에 저 허공같이 의지하는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중도라는 것은 원융자재해서 머무는 곳이 없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밖에 다른 마음이 없다. 선(善)도 취하지 아니하고 악(惡)도 버리지 아니하여,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양변과 함께 의지하지 아니하여, 생각생각에 죄성이 공함을 얻어 볼려고 해도 얻어볼 수 없음을 통달한다. 자성(自性)이 없는 까닭에 삼계(三界)가 유심(唯心)이다. 삼라만상이 한 법의 인(印)이니라. 무릇 색을 보는 이것이 모두 마음을 보는 것이니, 마음은 스스로 마음이 아니요 색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다.
너희가 때를 따라 말로써 설명하되 사(事)에 즉하고 이(理)에 즉하여 모두 조금도 막히는 바가 없으니 보리도과(菩提道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마음에서 나는 바를 색(色)이라 이름하고 색(色)이 공함을 아는 까닭에 생(生)이 즉 불생(不生)이다.(中略) 게송을 들어보아라.
심지법문을 때에 따라 설하니
보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사(事)와 이(理)가 다 거리낌이 없어
생(生)이 즉 불생(不生)이니라.
마음 밖에 부처가 따로 없고 부처 밖에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부처이고 부처가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취사(取捨)를 하게 되면 변견에 떨어지게 되기 때문에 선악을 다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양변에 함께 의지하지 아니하여 죄의 본성이 공함을 통달하여 생각생각에 죄성이 공함을 얻어 볼려고 해도 얻어볼 수 없습니다.
왜 죄의 본성이 공함(罪性空)을 말하느냐 하면 보통 자성청정(自性淸淨)을 말하면 알기 쉬운데 죄라 하면 다른 줄로 알고 있습니다. 자성청정이나 죄성청정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魔)와 불(佛)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중생이 모르고 변견으로 볼 때는 마군은 나쁘고 부처는 좋고 선은 좋은 것이고 죄는 나쁘다고 보지만 죄성이 본래 청정하여 공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성청정이나 죄성본공(罪性本空)이라는 것을 확철히 깨칠 것 같으면 이것이 부처이고 이것이 도(道)입니다.
자성이 공했기 때문에 삼계가 유심입니다. 삼계유심이란 자성청정심을 말하는 것인데 일체만법이 다 공하여 쌍차쌍조하며 진공(眞空)이 묘유(妙有)한 것인데 이것을 마음이라 하고 중도라 합니다. 앞에서 선도 취하지 않고 깨끗하고 더러움의 양변을 버린 것을 마음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삼라만상이 모두 쌍차쌍조해서 차조(遮照)가 동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이 일법지소인(一法之所印)으로 중도와 자성청정 내놓고는 하나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법(一法)이란 마음 · 법계 · 연기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결국 마군이라고 해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모든 것이 융통자재하기 때문에 무슨 말로 표현하든 흠이 되지 않습니다. 왜 흠이 되지 않느냐하면 쌍차한 쌍조, 즉 원융자재한 곳에서 말하기 때문에 중생의 변견과는 틀리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색을 보는 이것이 모두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색 다르고 심(心)이 따로 없습니다. 색이 즉 심이고 심이 즉 색입니다. 색이 즉 공이고 공이 즉 색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원융무애합니다. 전부가 하나입니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입니다. 따라서 색이 즉 심이고, 심이 즉 색이며, 색이 즉 공이고, 중생이 즉 불이고, 불이 즉 중생입니다. 그래서 색을 바로 보면 마음을 보는 것이고 중생을 바로 보면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중생을 변견으로 보게 되면 영원히 중생으로 되고 말지만 중도정견으로 중생을 바로 보게 되면 이것이 부처를 보는 것입니다. 마음은 스스로 마음이 아니요, 색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있습니다. 너희가 때를 따라 연설할 때 사(事)에 즉하고 이(理)에 즉하여 조금도 막힌 바가 없으니 우리의 대법(大法)도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막힌 데가 없이 무애해서 조금도 안 통하는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서 나는 바를 색이라 이름하고 색은 공함을 아는 까닭에 생(生)은 불생(不生)입니다. 마음이 즉 색이고 색이 즉 마음입니다. 마음이 공한 동시에 색이 공했고 색이 공한 동시에 마음이 공했다는 말입니다. 색이 공했기 때문에 아무리 색이 생하고 마음이 생한다고 해도 생(生)을 내놓고 불생(不生)이 따로 없고 불생(不生)을 내놓고 생(生)이 따로 없습니다. 생과 불생이 언제든지 원융무애합니다. 생(生)이란 쌍조(雙照)를, 불생(不生)이란 쌍차(雙遮)를 말하는 것인데 언제든지 서로 통한 것으로 보아야지 서로서로 막힌 것으로 보면 불법(佛法)이 아닙니다. 게송으로 말하기를 양변을 여윈 중도에서 법을 설하면 사(事)와 이(理)에 걸림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제까지 마조스님의 어록을 살펴보았는데 이 설법의 중심사상도 양변을 여읜 중도의 입장에서 설한 것이지 원융무애한 중도를 떠나서는 한번도 설법을 한 일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선(禪)이라고 해도 불법 가운데 말하는 것이지 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설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출전 : 백일법문 下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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