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業)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범어 karman의 번역. 羯磨라 音譯한다. 造作의 뜻. 行爲 · 所作 · 意志에 의한 身心의 활동, 意志에 의한 身心의 생활을 의미한다.
① 일반으로 業을 身 · 語 · 意의 三業으로 나눈다. 有部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이러한 것을 하려고 하는 뜻이 意業이고, 그 의지를 신체적 행동과 言語的 表現으로 나타낸 것이 身業과 語業(口業이라고도 한다)이라고 한다. 또 業을 意志의 활동인 思業과 思業이 끝나고서 행하는 思已業의 二業으로 나누는데 이 경우, 思業은 意業이고, 思已業은 身 · 語 二業이다. 三業으로서의 작용의 本體(業體 · 業性)에 대해서, 有部등에서는 意業은 思(意志), 身 · 語業은 色法(物質的인 것)이라고 하고, 經量部나 大乘에서는 모두 思(意志)라고 한다. 불교 본래의 입장은 후자라고 생각된다.
② 有部에서는 物質的인 것을 本體로 하는 業(色業) 곧 身業과 語業으로, 表(作 · 敎)와 無表(無作 · 無敎)가 있다고 한다. 이것들은 또 表業 · 無表業이라고도 한다. 表業은 밖으로 표현되어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것, 無表業은 타인에 보일 수 없는 것이다. 無表業은 無表色이라 이름 지어지는 일종의 色法(보통의 물질과 같이 粗雜하지 않다)을 本體로 하고, 강한 善惡의 業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그 業은 身表業과 語表業과 및 定등이다. 이 無表業에 3종이 있다. 受戒와 定(어느 것이나 다 善)에 의해서 일어난 律儀와, 습관적이고 특히 강한 결단을 가지고 한 惡業에 의해서 일어난 바의 不律儀와, 그 이외의, 때에 따라 선악의 업에 의해서 일어난 非律儀非不律儀(處中의 無表)의 3종이 그것이다. 律儀無表는 戒를 버리고 定에서 나오기까지 계속되고, 그 밖에 無表는 특별한 障害가 없는 한 일생동안 계속된다. 이들 無表 중에서 善한 無表에는 惡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고, 惡한 無表에는 善을 방해하는 작용이 있어서, 각기 그 사람의 後天的 성격을 형성한다고 한다. 또 身 · 語의 각기 表業 및 無表業에 意業을 더하여 五業이라고 한다.
③ 선악의 업을 지으면, 그것에 의해서 그에 상응한 고락의 갚음(果報 · 異熟)이 생긴다. 이것을 業因에 의해서 業果가 생긴다고 한다. 非善非惡의 無記業은 果를 끄는 힘이 없다. 이 業因과 業果의 관계를, 有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業 그것은 三世에 實在하는 것으로서, 업이 현재에 있을 때 이것이 因이 되어서 어떠한 未來의 果를 끌것인가가 결정되고(이것을 取果라고 한다), 업이 지나가 버림으로부터 果에 힘을 주어서 果를 현재에 이끌어 낸다(이것을 興果라고 한다). 또한 經量部에서는, 業은 순간에 없어져 버리는데, 그 業은 果를 생하는 종자를 識위에 심어 주어, 그 종자가 果를 끌어 일으킨다고 한다. 이 종자의 思想은 有部의 無表業說과 같은 것이다.
④ 業을 여러가지로 분류한다. 總體로서의 일생의 果報(갚음)를 이끄는 業, 곧 人間界라든가 畜生界 등에 태어나게 하는 강한 힘이 있는 業을 引業(牽引業 · 總報業· 引因)이라 하고, 人間界 등에 태어난 자에 대해서 개개의 구별을 주어서 개체를 완성시키는 業을 滿業(圓滿業 · 別報業)이라고 한다. 引業의 갚음을 總報, 滿業의 갚음을 別報라고 하여, 이 二業을 總別二業이라고 한다. 더욱 有部에서는 하나의 引業에 의해서 一回의 生을 받아 다시 그 위에 많은 滿業에 의해서 이 生이 완성된다고 說하고, 多業이 일생을 이끌거나, 一業이 多生을 끌거나 하는 것은 없다고 한다. 또 業에는, 山河大地(器世間)와 같은, 많은 生物에 공통하는 果報를 끌어 일으키는 共業과, 개개의 生物의 신체와 같은, 개개의 生物에 固有한 果報를 引起하는 不共業이 있다.
⑤ 善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善業(安穩業)과, 惡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不善業(惡業 · 不安穩業)과, 善惡 어떤 것도 아닌 無記心에 의해서 일어나는 無記業의 셋을 三性業이라고 한다. 惡業은 罰하지 않으면 안되는 業이기 때문에 罰業 · 罰이라 하고, 身 · 口· 意의 三罰業 또는 三罰이 있다. 中阿含經권三十二에는, 身 · 口· 意의 三業중에서 意業이 가장 중하다고 說하여, 불교가 動機論에 입각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 자이나敎에서는 身 · 口· 意의 三罰중 身罰을 가장 重하다고 하여, 結果論에 빠져 있다. 또 熟慮한 뒤에 決斷하여 일부러 한 故思業(故作業)과 그렇지 않고 뜻밖에(無意識的) 잘못한 不故思業은 그것만으로는 갚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故思業중에 적극적으로 한 강하고 중대한 業을 增長業이라 하고, 소극적으로 한 약하고 가벼운 故思業은 不增長業이라고 한다. 점점 강하게 되는 業을 增上業 혹은 增長業이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造作業이라 한다. 欲界의 惡業과 같이, 眼 · 耳 · 鼻 · 舌 · 身의 五識으로 받는 苦만을 受의 果報로 가져오는 業을 身受業, 色界 · 無色界(初禪天을 제함)의 善業과 같이 제六意識으로 받는 樂만을 受果報로 가져오는 業을 心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二受業이라고 한다. 또 苦受와 樂受와 捨受(不苦不樂受)의 果報는 각기 欲界의 惡業과 欲界에서 色界 제三禪까지의 善業과, 色界 제四禪 이상의 善業에 의해서 오기 때문에, 이 세 業을 각기 順苦受業 · 順樂受業 · 順不苦不樂受業이라 하고, 합하여 三受業이라고 한다. 또 欲界의 善業은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福樂, 欲界의 惡業은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에 非福業, 色界 · 無色界의 善業은 그 禪定의 힘에 의해서 갚음(報)이 정해져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不動業이라 하고, 합하여 福등의 三業(또는 三行)이라고 한다. 또 惡業은 黑業, 善業은 白業이라고도 하고, 여기에 異熟의 좋아함직(白)한 것과, 좋아하지 않는 것(黑)에 배당하면, 欲界의 不善業은 성질이 不善하여 異熟도 좋아하지 않는 黑黑異熟業, 色界 · 無色界의 善業은 성질은 善하고 異熟도 좋아하기 때문에 白白異熟業, 欲界의 善業은 성질도 異熟도 黑白相雜하여 있기 때문에 黑白黑白異熟業, 번뇌와의 관계가 斷切된 無漏業은 상대적인 黑白을 초월하여 異熟을 招來하지 않기 때문에 非黑非白無異熟業이라 하고, 이것들을 합하여 四業이라 한다. 四業중에 앞의 3은 有漏業으로, 이것들은 최후의 無漏業에서 斷滅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內心을 남 모르게 감추고 아첨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業을 曲業이라고 하고, 또한 성냄에 의해서 일어나는 業을 예업(穢業) 한다. 탐냄으로 의해서 일어나는 業을 濁業이라고 하고, 이것들을 합하여 曲穢濁의 三業이라고 한다. 八聖道의 제四支는 正業으로, 그 반대는 邪業이다.
⑥ 業에 의해서 그 갚음을 받는 시기에 다름(異)이 있기 때문에, 順現業(順現法受業) · 順生業(順次生受業) · 順後業(順後次受業)의 三時業을 나누어, 각각 이 세상에서 지은 業에 응해서, 그 갚음을 이 세상에서 받는 것, 다음 태어난 세상에서 받는 것, 제 3生 이후에 받는 것으로 구분한다. 이 三時業은 갚음을 받는 시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定業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不定業(順不定受業)이라 하고, 거기에 三時業을 더하여 四業이라고 한다. 또 不定業을 갚음의 내용(異熟)의 定 · 不定에 의해서 時不定異熟定業과 時不定異熟不定業의 둘로 나누고, 여기에 三時業을 더하여 五業으로 하며 또 三時業을 각기 時定異熟定과 時定異熟不定으로 나누어 6으로 하고 둘의 不定業을 더하여 八業이라고도 한다.
⑦ 業이 작용할 또는 의지할 곳이 되는 것, 혹은 有情을 苦樂의 과보(갚음)에 인도하는 通路가 되는 것을, 業道(根本業道)라 하는데, 여기에 十善業道와 十惡業道가 있다. 有部에서는, 十善 · 十惡에는 業인 것과 業이 아닌 것(無貪 · 無瞋 · 正見, 貪 · 瞋 · 邪見)이 있는데, 어느 것이나 意志(思)가 거기에 작용하는 바의 의지할 곳이 되기 때문에 業道라 한다고 했다. 經量部나 大乘에서는, 十善 · 十惡은 모두 業이어서 意志(思)를 體로 하는데, 처음의 七業道에 있어서는 身 · 口를 發動하는 意志(思)가, 思惟하여 결정하는 意志(思)의 작용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業道라 하고, 또 그 發動의 생각에 의해서 생긴 생각의 종자도 業道라 한다. 뒤의 셋 곧 貪 · 瞋 · 癡등은 順次로, 또 交互로 생기기 때문에, 앞의 것은 뒤의 것 때문에 業의 道가 되고, 또 有情을 지옥등의 惡趣등에 인도되는 道가 되기 때문에 業道라고 說함. 또 業에는, 준비적 行爲(加行)와 목적을 수행하는 그 순간의 행위(根本)와 完遂한 뒤의 從屬的인 행위(後起)가 있는데, 이 가운데 근본만을 業道라고 한다.
⑧ 煩惱道 · 業道 · 苦道(三道).
⑨ 業은 갚음(果報, 異熟)을 내는 因이 되기 때문에 業因 · 因業이라 하고, 業에 의한 갚음을 業果, 業報라 한다. 또 業因에는 業을 일으키는 원인(번뇌등)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고, 因業에는 因과 業(主因과 助緣)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다. 業果를 끌어 당기는 힘을 業力, 業에 의한 괴로운 갚음, 또는 業과 그 苦인 갚음을 業苦라고 한다. 惡業과 번뇌를 아울러서 業結· 業惱라고 한다. 惡業때문에 생긴 가리움, 障害를 業障· 業累라고 한다. 業에 의해서 갚음을 받는 것은 業感, 過去世(前生 · 前世)에 지은 業은 宿業 또는 前業. 宿業에 의해서 받은 壽命은 業壽· 業受. 宿業에 의한 벗을 수 없는 중한 병은 業病. 宿業에 의한 재앙은 業厄이라고 한다. 業이 갚음을 生하는 도리는 天道와 같이 必然이기 때문에 業天, 業은 그림자와 같이 몸을 따라다니기 때문에 業影, 業은 중생을 迷界에 묶어 놓기 때문에 業繫(繫業이라고 하여도 거의 같다) · 業羂(업견) · 業縛 · 業繩이라 한다. 業은 그물과 같이 사람을 붙잡아서 迷界에 머물게 하므로 業網, 惡業은 때나 먼지와 같이 몸을 더럽히기 때문에 業垢 · 業塵이라고 한다. 또 惡業의 작용을 火 · 魔 · 賊에 비유해서 業火· 業魔(十魔의 1) · 業賊등이라 하고, 지옥에는 중생의 선악의 業을 비추어 내고 재고 기록하는 業鏡· 業秤 · 業簿등이 있다고 한다. 惡業의 힘을 바람에 비유해서 業風이라고 하는데, 또 惡業에 의해서 招來된 猛風(지옥등의)도 業風이라고 한다. 宿業에 의한 神通力으로서 業通(報通)이 있다.
⑩ 無間地獄의 갚음을 부르는 業을 無間業, 有情을 欲界등의 三界에 매어두는 業을 三界繫業이라고 한다. 번뇌는 業을 일으켜서 有情을 가지가지의 세계에 태어나게 한다. 곧 生을 윤택하게 하고, 이 미래의 生을 부르는 業을 潤業 · 潤生業이라고 한다. 또 자기의 지은 業의 갚음을 자기가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自業自得이라고 한다.
⑪ 十二緣起의 제十支인 有를 해석하는데, 후대에 와서는(阿毘達磨에서는) 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것을 業有라고 한다.
⑫ 觀無量壽經에는 施 · 戒 · 行의 三福은 淨土에 往生하기 위한 正因으로, 淨業(淸淨業)이라고 說해져 있다. 일반으로 염불해서 彌陀의 淨土에 往生하고자 원하는것을 淨業이라 한다.
(用語解說)
有部 : 설일체유부의 약칭. 소승종의 일파. 유위 · 무위의 일체법이 모두 실유에서 세웠기 때문에 설일체유
부라고 말한 것이다. 불멸후 300년 초에 상좌부에서 분립된 것임.
思已業(사이법) : 마음 속으로 분별 · 사유하는 사고가 밖으로 나타나, 언어와 동작 등의 발동이 되는 것이
다. 여기에 身業과 語業이 있으며, 義業을 합하여 3업이라고 한다.
經量部 : 경부라고도 한다. 상좌부 · 소승 20부의 하나. 여기에 根本部와 枝末部(지말부)가 있으니, 불멸 후,
1세기 경의 鳩摩羅駄(근본부)와 室利羅多(지말부)가 그 시조이다.
無表業 : 표업에 따라 熏發되고, 다음에 결과를 받을 원인이 되는 업이란 뜻이다.
身表業 : 곧 몸으로 짓는 온갖 동작을 일컬음.
語表業 : 사람의 언어는 자기의 일종의 의사를 남에게 나타내는 作業(행위)이므로 어표업이라 한 것.
異熟 : 과보라고도 번역하고, 선 또는 악의 업인에 의해서 이것과 성질이 다른 無記인 결과를 産出하는 것.
또 그 결과를 말함.
取果 : 어떤 事物의 因的인 요소가 현재에 미래의 결과를 取하는 因이 되어서 그 각각의 果를 取할 수 있도
록 정해진 것을 取果라 하고, 因이 그 果를 현재에 실제로 果로서 냄으로서 현실화하는 것을 興果라
고 한다.
滿業 : 2업의 하나로 別報業이라고도 한다. 別報의 果體를 끌어오는 업이다. 別報라 함은 總報위에 나타나
는 제각기 다른 과보를 말한다. 예컨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總報, 사람 가운데서 男女 · 貴賤 · 賢
愚 · 美醜 등의 차별이 있는 것을 別報라 하고, 이 별보를 받게 되는 업을 滿業이라 한다. 多業能圓滿
이라 하여 前生의 수많은 業에 따라 이 差別의 과보를 圓滿케 하는 것을 뜻함.
共業 : 二業의 하나. 제각기 공동으로 善 · 惡의 業을 짓고, 各人이 공동으로 苦樂의 果報를 받는 것.
有情 : 衆生이라고도 번역한다. 生存하는 자란 뜻. 有情이라 함은 마음(情識)을 갖는 살아 있는 것을 말하
고, 여기에 대해서 草木 · 山川 · 大地 등은 非情이라고 한다. 그러나 成唯識論述記 卷一에는, 중생이
라 함은 有情 · 無情을 아울러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출처 : 불교학대사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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