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두백해두흑(藏頭白海頭黑)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禪宗의 화두. 禪客이 馬祖에게 물었다. 「四句도 여의고 百非도 끊고 저에게 祖師西來意를 가르쳐 주십시오.」
馬祖「내 오늘 몸이 고단해서 말하기 귀찮으니 智藏에게 가서 물어 보라.」
이에 그 學人이 智藏에게 가서 앞에서와 같이 물었다.
智藏「和尙께 가서 問法하지 않고 왜 나에게 와서 묻는가?」
禪客「和尙께서는 몸이 고달프심에 스님께 물으라 하십니다.」
智藏「내가 오늘 머리가 아파 말할 수 없으니 海兄에게 가서 물어 보게.」
다시 懷海에게 가서 앞에서와 같이 물으니
懷海「나는 그것을 아는 바가 없네.」했다.
學人이 다시 馬祖에게 가서 경과를 말하니
馬祖「智藏의 머리는 희고 百丈(懷海)의 머리는 검구나(藏頭白海頭黑)」이라고 했다.
참고
마조(馬祖) : 속성이 마씨라 하여 마조라 부름. 南嶽懷讓에게서 法을 받고 禪風을 크게 드날리다. 唐나라 江西의 道一禪師를 말한다.
백장(百丈) : 중국 당나라 스님으로서 江南省 南昌府의 大雄山 일명 百丈山에 살았던 懷海선사를 말한다. 특히 그는 百丈淸規를 制定한 것으로 유명하며, 禪門의 직책에서부터 식사에 이르기까지 선종 종단의 규율은 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것도 역시 百丈이다. 이 말은 백장선사가 90세가 되어서도 다른 사람들처럼 일을 하므로 둘레에서 어느 날 그의 農具를 감추었더니 단식을 하며 그때「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西來祖師意라고도 하며 약하여 西來意라고도 한다. 禪宗의 初祖 菩提達磨가 西쪽 인도로부터 중국에 들어 와서 禪法을 傳해 준 眞意가 무엇인가? 하고 反省 또는 疑問하는 것. 그 意義를 究明하는 것은 佛祖悟道의 근본정신을 확실히 깨우치는 것으로서 禪宗에서는 古來로 깨달음의 機緣되는 말로, 參究할 問題. 곧 話頭 公案으로 삼아 왔다.
화두(話頭) : 또는 公案·古則이라 함. 선종의 조사들이 정한 법문을 화두 또는 공안이라 했다. 즉 모든 사람이 다 통하는 不易의 법문으로서 때에 응하고 機에 觸하여 자유자재로 제시하는 公法이다. 그래서 일명 則이라고도 함. 참선자들을 위한 公定의 법칙, 즉 古德들이 인정한 理法이란 의미에서 公이고, 그 理法에 따라 정진하면 반드시 禪旨에 이를 수 있다는 뜻에서, 다시 말해 스승과 제자간에 문답에 따라 수행하면 반드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데서 案이라고 했다. 공안에는 천 칠백여 화두가 있으나 우선 趙州의 無字가 가장 유명하여 누구에게든지 처음 보이는 것이 無字 화두다. 천 칠백 화두 중에서 처음에 이 無字를 보이는 것은 이유가 있으나 이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만 參學者가 스스로 體認해서라야만 과연 그렇구나 할 따름이다. 이 無字의 화두는 無門關이란 48칙으로 엮어진 古德들의 言句 중 제1칙에 쓰여 있다. 즉 그것은 어느 때 조주선사에게 僧이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이때 조주가 대답하기를 「없다(無)」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상 없다는 말은 無字를 풀이한 말이다. 조주선사는 풀이로 말한 것이 아니라 「無!」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화두를 볼 때 해석이나 또는 이론으로는 되지 않는다. 화엄경에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 덕상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열반경에도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모두 불성이 있다는 것을 들고 나와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다. 조주선사는 「無」라고 대답했다. 이 無字는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지만, 조주의 無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여기를 뚫어내는 문제가 화두이다. 話라 하면 매우 가벼워 보이지만, 선종에서는 단순한 「말」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宗旨를 표현하기 위한 말밖의 말이므로 보통 사용하는 말과는 그 뜻이 다르다. 즉 조주스님의 栢樹子의 話라든가, 丹霞화상의 燒佛의 話 등은 話 한자로써 화두의 뜻을 지닌다. 頭字에는 큰 의미가 없다.
고칙(古則) : 公案·話頭와 같은 말. 또는 一則이라고도 한다. 一字를 약해서 則이라고도 하며 이를 一定不變의 법칙이라는 의미로 古人들이 남겨 놓은 법칙. 儀則이라는 데서부터 古則이라고 한 것이다. 즉 옛 조사들이 여러 가지 문답을 통해 宗旨를 드러낸 원칙으로서 정해진 법문이라는 뜻이다. 또 話則이라고도 하고 다만 話라고도 한다. 話라 하면 매우 가벼워 보이지만, 禪宗에서는 단순한 <말>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宗旨를 표현하기 위한 말 밖의 말이므로 보통 사용하는 말과는 그 뜻이 다르다. 즉 趙州和尙의 栢樹子의 話라든가, 丹霞화상의 燒佛의 話 등은 話한자로서 古則의 뜻을 지닌다. 그리고 흔히는 話頭라고도 하는데, 頭자에는 큰 의미가 없다. 또 問話라고도 한다. 五燈會元에 있는 말인데, 문답의 話란 뜻일지도 모른다. 또한 古則을 法窟의 瓜牙·奪命의 神符·向上의 一着·一着子라고도 한다. 그리고 文字의 葛藤이란 말도 있다. 272則으로 엮은 宗門葛藤集에 의하면, 칡이나 등나무가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면서 어디가 어느쪽의 가지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얽혀져 있는 것과 같이 古則이란 대개가 錯雜하여 紛糾롭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즉 古則에 써 있는 文字言句에 구애되면 宗旨의 근원을 알아낼 수 없게 되어 있다. 한 예를 들면, 조주화상은 개에게도 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는 물음에, 어느 때는 無라고도 하고 또 어느 때는 有라고도 했다. 이 때 言句에 걸리면 그 古則의 참다운 뜻을 알아낼 수 없다. 또 古則을 祖師의 關, 또는 祖關이라고도 한다. 대체 不立文字인 宗旨에, 古則이란 말 하나가 이렇게 많은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천 가지 만 가지 말로 쓰이건 말건 그것은 신경쓸 필요가 없다. 그 말이 바다 속의 모래알 만큼 수가 많아도 결국은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禪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古則의 言句에 끌려서는 宗旨를 알 수 없다.
공안(公案) : 公府案牘의 약칭. 선종에서 修學人에게 깨달음을 열어주기 위해 주는 문제. 곧 예로부터 祖師가 보여온 언어 또는 그 행위의 宗要를 모아 참선하는 사람들에게 공부의 과제로 주었다. 부처와 조사가 그 깨달음을 열어 진리를 나타내 보여준 古則은 수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존엄한 것이므로 公案이라 한다. 禪宗의 宗師가 心地를 밝게 깨달은 機緣 또는 學人을 인도하던 사실을 가지고 후세의 공부하는 규범으로 삼았다. 공안이란 古德禪師의 言句이다. 그의 言句에는 일종의 殺氣가 있어서 參學者들은 그와 악전고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공안은 일종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을 풀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身命을 내놓고 공부해도 되거나 말거나 하기 때문에 殺氣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信根에 따라서는 直下에 성취할 수도 있는, 다만 그 사람의 근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 信根이란 맹세코 꼭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큰 결심을 말한다. 공안에는 千七百則의 화두가 있으나 우선 趙州의 無字가 가장 유명하다. 이 千七百則의 원리는 모두 같으므로 굳이 前後 순서를 가릴 것 없겠으나 처음에 이 無字를 보이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다만 參學者가 스스로 체득하고 인식해야만 알 수 있을 따름이다. 이 無字의 공안은 無門關이란 四十八則으로 엮어진 古德들의 言句중 제 1칙에 쓰여 있다. 즉 그것은 어느 때 조주선사에게 僧이 묻기를 「개에게도 佛性이 있습니까? 없읍니까?」이때 조주가 대답하기를 「없다(無)」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상 없다는 말은 無字를 풀이한 말이다. 조주선사는 풀이로 말한 것이 아니라 「無!」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공안을 볼 때 해석이나 또는 이론으로는 되지 않는다. 화엄경에 「일체 중생이 모두 여래의 지혜 덕상을 가지고 있다.」고 설했고, 열반경에도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했다. 중생이라고 했으니 生을 가진 것에 한한 것처럼 생각되나, 부처님께서는 삼라만상 어떤 물체를 막론하고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모두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었다. 조주는 無라고 대답했다. 이 無라는 글자는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지만, 조주의 無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여기를 뚫어내야 한다. 또 어느 때 어떤 僧이 조주선사에게 똑같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읍니까?」이때는 「有」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똑같은 물음에 한쪽에는 無라고 대답하고 다른 한쪽에는 有라고 대답했으니, 이것은 문제의 해답으로는 큰 모순이 있다고 생각된다. 가령 이것을 풀이로 대답한 것이라면, 無라고도 하고 有라고도 하여 兩舌을 내 휘두른 조주는 정신빠진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으로 보아 「無」「有」하는 兩端의 차별 문제가 아니다. 이 無字가 결코 有無의 상대의 無字가 아니라는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古來로 수많은 祖師와 영웅호걸들이 모두 이 無字를 터득하느라고 진땀을 흘렸던 것이다. 결코 학문적 이론이나 분별지식으로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들이 오늘날까지 배운 지식을 가지고 생각해서 해결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된다. 도리어 머리 속을 텅 비워야 하며, 우리들이 배워온 지식을 모두 버려야 한다. 가장 주의할 것은 모든 것 즉 생사를 초월해야 하는데, 이것을 절대 멀리서 구하지 말고, 가까이 가까이 또 가까이 끄집어 내라. 사실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어렵다. 한치 두치의 거리에 있다면 도리어 쉬울 것인데 머리털 하나 사이 보다도 더 가깝고 너무 가깝기 때문에 도리어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속 눈썹이 눈에 제일 가깝지만 이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공안이란 公府의 案牘이란 뜻이다. 안독은 정부가 정한 법도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라도 굽힐 수 없고 그 정한대로 준수해야 하며, 만일 이를 범하면 처벌하는 것이 공부의 안독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로부터 禪宗의 조사들이 정한 법문을 공안이라 했다. 즉 만인이 다 통하는 不易의 법문으로서 때에 응하고 機에 觸하여 자유자재로 제시하는 公法이다. 그래서 일명 則이라고도 한다. 참선자들을 위한 公定의 법칙, 즉 古德들이 인정한 理法이란 의미에서 公이고, 그 理法에 따라 정진하면 반드시 禪旨에 이를 수 있다는 뜻에서 다시 말하면 師弟間의 문답(공안)에 따라 수행하면 반드시 禪의 심경에 이를 수 있다는 데서 案이라고 했다. 〈圭峰廣錄山房夜話〉에 「公이란 古德이 도를 행한 흔적으로서 천하의 道를 보이는 至理이고, 案이란 古德이 보인 진리를 기록한 正文이다」고 했다. 公案은 석존 때부터 시작된 것은 아니다. 후대에 와서 「世尊拈花」란 공안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은 달마때부터 쓰인 것이다. 곧 달마가 526년에 東土 양무제와 나눈 문답이 공안으로 채택되고 있으며, 2조 慧可와 달마사이의 문답도 역시 공안으로 쓰인다. 그러나 公認되기는 黃檗선사 때로 보고 있다. 禪은 黙照禪과 看話禪으로 구별한다. 묵조선이 전혀 공안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간화선처럼 전용하지 않는 점에서 논쟁도 있었고 피차간 비난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결국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므로 수단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공안은 문답을 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 문답이라야 지적인 것도 아니고 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설명도 아니고 해석도 아니고 교훈도 아니다. 禪은 靜慮, 思惟修, 禪那라고도 한다. 이 말은 고요히 생각한다는 뜻인데 무엇을 고요히 생각하느냐 하면 공안을 가지고 그 공안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공안을 가지고 그것을 일심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안이란 말을 붙이게 된 것이다. 禪宗의 宗旨는 실지로 수행하는 것이다. 부질없는 이론, 어떤 철학적 이야기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지로 수행하여 자기의 자성을 硏明하는 宗旨다. 그러므로 공안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라기 보다 도리어 본뜻과 어긋나는 일이다. 공안은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깨침」을 열려면 그 공안을 써서 직접 수행을 진행해 나가야 하는데, 그 공안에는 1,701의 공안이 있다. 그 숫자는 景德傳燈錄에 1,701인의 行履를 수록했기 때문에 그 숫자에서 나온 말인듯 하다. 사실 공안은 우리 일상생활의 전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안은 곧 의문인데, 우리들 생활은 전부가 의문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無字 · 是甚麽 · 麻三斤 등이 초보자에게 쓰이는 공안인데, 쉽게 말하면 모두 일종의 문제인 것이다. 공안을 쓰는 것은 悟道를 열자는 것이 그 목적이다. 〈깨치기〉위해 공안을 쓰고, 공안을 써서 〈깨침〉을 열자는 것이므로 이를 公案禪이라고도 하고, 또는 〈깨침〉을 豫期하여 수행하므로 이를 待悟禪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공안은 일명 話頭라고도 한다. 화두라는 말은 〈말머리〉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안이란 말보다도 話頭로 통하고 있다. 공안은 쉬운 것으로부터 어려운데 이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梯子禪이라고도 하고, 雁木悟라고도 한다. 마치 기러기가 줄지어 나는 것처럼 다음 순서를 쫓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趙州의 無字라든가, 庭前栢樹子라든가, 麻三斤등은 간단한 공안 중의 하나이지만, 그 전개되는 줄거리가 장황하고 등장인물도 수백수천의 사람을 헤아리는 공안이 많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리켜 文字禪이라고 한다. 사실은 그 줄거리가 아무리 길어도 보는 곳은 하나다. 그래서 話頭라고 말한 것이다. 화두란 말은 〈실마리〉라는 뜻이니, 결국 執念하는 곳은 하나다. 선가구감에도 「대체 수행인은 모름지기 活句에 參하고 死句에 參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말은 수백 句 수천 言으로 엮어졌다 해도 그의 觀點은 하나라는 것을 뜻한 것이다. 한 공안 즉 조주의 無字 하나를 깨치면 물론 견성한 것인데, 그 후에 1,700여 공안을 본다는 것은 그 조사 그 조사들의 行履를 본받는 것이며, 이것을 깨친 후의 수행이라고 한다. 즉 趙州無字 하나로 깨쳤다면 이것은 뼈가 되고, 깨친 후의 수행은 살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모든 스님들이 선지식을 찾아 行脚했다는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公案이라면 다만 선종의 조사스님네가 〈깨우치기〉위해 수행자에게 주어서 공부하게 하는 한 문제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공안으로서 중요한 것은 碧巖錄의 百則, 從容錄의 百則, 葛藤集上下의 272則, 無門關의 48則 외에 臨濟錄 등이 있다. 선종의 어록에 나타나 있는 佛祖의 機緣問答商量이 근본 공안으로서, 그를 그대로 써서 修禪者가 참구하는 것으로만 알 것이 아니라, 그 보다도 더 깊은 의미가 있다. 1,700則의 공안 모두가 一心의 異名이다. 어떤 때는 體를 가리키고, 어떤 때는 用을 쓰고 또는 相을 보이고, 어떤 때는 體用을 一句에 표현한다. 이처럼 무량무변하다. 그러나 그 가르치는 바는 하나다. 이를 本地의 風光이라고도 하고, 本來의 面目이라고도 한다. 一心이란 우리들 개개인의 한 마음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우주간의 광대무변한 一心을 말한다. 1,700 공안은 盡虛空에 遍塞하여 間髮의 여지가 없고, 萬里一條라고 識得하여 迷悟得失과 관계없는 본래 있는 一物이니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1,700 공안마다 진리가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원리원칙은 하나다. 다만 時 · 用 · 相 · 用相에 있어서 이름이 서로 다를 뿐이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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