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싸나 수행법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싯닷타 태자는 수행자 시절에 알라라카마라와 웃다카라마풋타라는 두 선인으로부터 이들 선정 가운데 가장 드높은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을 배워 성취했다. 따라서 싯닷타 태자는 그 때 중생계에서 가장 높은 하늘인 무소유처천, 또는 비상비비상처천에 날(生) 수 있는 경지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고도의 선정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싯닷타 태자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 까닭은 선정에 들었을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번뇌가 선정에서 나오면 미묘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 선정은 중생계를 초월하는 열반 · 해탈의 경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싯닷타 태자는 새로운 법을 찾아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오랜 고행 끝에야 새로운 수행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이 정념의 또 다른 한 법인 위빠싸나였다. 그리고 이 위빠싸나를 통하여 태자는 삼계를 초월하는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위빠싸나 수행법인 사마타 수행법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정지견의 가장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가 힌두교(브라만교)와 어떻게 다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따라서 부처님께서 왜 전통 브라만교를 인정하시지 않은 채 당신만의 독자적인 진리 체계를 선포하셨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불교가 왜 그토록 지혜를 강조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지혜를 성취하는 혜학은 위빠싸나로써 통달하게 되거니와 불교는 여타 종교와 달리 계학과 정학을 거쳐 혜학에서 완성되는 특이한 체계이다. 이에 비해 기독교 등의 종교에는 계학은 있으나 정학이 없고, 힌두교 등에는 정학까지는 있으나 혜학이 없다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위빠싸나가 어떤 수행법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는 지면의 제한 때문에 위빠싸나를 간명하게밖에 다룰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위빠싸나를 소개하는 훌륭한 책들을 고루 접하면서 이해를 심화시켜 나가기 바란다.
아울러 대승불교의 개론서로 찬탄되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도 소승 수행법이라고 폄하되기도 하는 이 수행법이 사마타 수행법과 함께 권장되고 있음을 기억하자.
아함경에서는 위빠싸나 수행법을 사념처(四念處) 수행법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 수행법이 삼십칠도의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음은 삼십칠도를 소개할 때 보인 바와 같다. 이 수행법은 남전의 장부(長部) 대념처경(大念處經)에 자세히 가르쳐져 있고, 중아함경에서는 염처경(念處經)이라는 이름 아래 보다 상세하게 가르쳐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 남전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은 부처님께서 최후의 입멸을 앞두고 “자기에게 귀의하고 다른 사람에게 귀의하지 말며, 법에 귀의하고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는 유명한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를 설하신 뒤에, “그렇다면 비구가 자귀의하고 법귀의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하고 스스로 반문하신 뒤에 사념처를 닦는 것이 그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또한 대념처경 첫머리는 “이것은 중생을 청정케 하는, 슬픔을 건너게 하는, 괴로움을 소멸케 하는, 진리의 길을 걷게 하는 단 하나의 길이다”라고 선언되어 있기도 하다. 그밖에도 사념처 수행의 중요성은 아함경의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사념처 수행 즉, 위빠싸나는 “지금 현재에 있어서 자기의 몸과 마음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현상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것의 변화를 따라가면서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의에서 필자가 ‘자기의 몸과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을 부처님께서는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 등 넷으로 나누어 설명하셨기 때문에 네 가지 주의집중할 곳, 즉 사념처라는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위빠싸나 수행자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한다. 위빠싸나 수행자는 몸이 움직이고 있으면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몸에서 가려움이나 통증 따위가 일어날 때에도 그 현상을 알아차려 나가야 한다. 또한 좋거나 싫은 느낌이 일어날 때에도 그 느낌을 알아차려 관찰하여야 하며, 사정은 마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몸과 마음에서는 한 순간에도 많은 현상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그 현상이 끝나거나 보다 더 관심이 끌리는 현상이 생겨나면 그 쪽으로 옮겨 가 관찰하면 된다.
실제로 위빠싸나 수행을 해 보면 가려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통증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 아니, 섬세하게 관찰할 경우 통증마다 같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고 보면 통증의 종류만 해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니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종류야 얼마나 많겠는가.
또한 그 현상들은 끊임없이 변해 간다. 가려움이든 통증이든, 짜증이든 희열이든 한 번 일어난 현상이 영원토록 멈춰 있는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위빠싸나 수행자는 그 변화를 뒤따라가면서 끈기 있게 관찰하게 된다.
한편 위빠싸나 수행자는 집중과 알아차림이라는 두 가지 힘을 사용한다. 이 가운데 집중은 마음을 관찰할 주제에 모으는 것을 가리키고, 알아차림은 그 현상의 내용을 알아채는(아는, 관찰하는, 보는)것을 가리킨다. 가려움을 한 예로 들자면 가려움이 생겨나 여러 모양으로 퍼지는 것, 가려운 곳이 이리저리 옮겨 가는 것, 가려움이 강해졌다가 약해지는 따위로 변해 가는 것 등을 일일이 아는 것이 알아차림이다.
그렇게 모든 현상을 일일이 관찰할 때 수행자는 어떤 선입견이나 개념관념도 거기에 덧붙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있는 그대로, 일어나는 그대로, 진행되고 사라져 가는 그대로 순수하게, 사실적으로 보이는 바대로만 보아야 한다. 거기에 어떤 경전의 가르침이나 개념을 끼워 넣어서도 안 되고, 어떤 기대나 욕망을 투사해서도 안 된다.
이 때문에 필자는 위빠싸나 수행법을 가리킬 때 전통적인 번역어인 관(觀)이라는 말 대신 견(見)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관’이라는 말에는 어떤 선입견이 포함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견’은 일체의 색안경을 다 벗어 버린, 있는 그대로의 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사마타 수행자는 서른여덟 가지 주제 중의 하나인 부처님을 선택하여 거기에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염불(念佛)법의 원형이거니와 이 때 수행자는 부처님의 모습이나 덕성에 마음을 집중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부처님의 모습이든 덕성이든 간에 그것은 하나의 개념이지 사실 자체는 아니다. 수행자가 그려 내는 부처님의 모습은 실제의 부처님이 아니라 그가 떠올리는 이미지에 불과하고, 부처님의 덕성이라 할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에 비해 위빠싸나 수행자가 자기의 몸이나 마음을 관찰할 때의 수행 주제는 관념이 아닌 실제인 것이다.따라서 도리어 사마타야말로 관(觀)의 수행법이며 위빠싸나는 견(見)의 수행법이다. 같은 이치에서 사물이 무상(無常)하다고 관한다(개념지어 본다)든가, 자아가 없다고 관하는 따위의 관법(觀法)은 사마타의 일종이지 위빠싸나 수행이 아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선(禪)에서도 성품을 관한다고 하지 않고 본다(見)고 할 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 설명한 바 사마타와 위빠싸나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사마타 수행법은 집중력만으로써 수행되지만 위빠싸나 수행법은 집중력과 함께 알아차림의 능력을 사용한다.
(2) 사마타 수행법의 주제는 자신 밖에 있지만 위빠싸나 수행법의 주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쉽게 말하면 자기 자신이다.
(3) 사마타 수행법의 주제는 하나인 경우가 많지만 위빠싸나 수행법의 주제는 여럿이다.
(4) 사마타 수행법의 주제는 정지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위빠싸나 수행법의 주제는 진행태이다.
(5) 사마타 수행법의 주제는 관념적인 경우가 많지만 위빠싸나 수행법의 주제는 실제적이다.
이상 몇 가지 차이점들 때문에 위빠싸나 수행자는 사마타 수행자와 같은 고도의 집중을 통한 몰입을 얻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위빠싸나는 사마타와는 달리 여러 가지 수행 주제를 대상으로 하는 데다가 그 주제들은 멈춰 있지 않고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여러 가지 주제보다는 한 가지 주제에, 진행되고 있는 주제보다는 멈춰 있는 주제에 마음이 더 쉽게 몰입되리라는 것은 재론을 요하지 않는다.
또한 위빠싸나 수행은 집중력과 함께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에 이를 수 없다. 집중을 통한 몰입이란 결국 자신을 잊어버리는 상태이거니와 알아차림이 유지되고 있는 한 자신을 잊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하여 관념적인 주제가 실제적인 주제보다 더 잘 집중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음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처럼 집중몰입에서는 고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는 대신 위빠싸나 수행법은 수행자에게 깨달음이라는 최고, 최대의 선물로써 보상한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하나보다는 여럿에서, 멈춰 있는 주제보다는 진행되고 있는 주제에서만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지혜란 곧 앎이며, 앎이란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예컨대 붉은 색과 파란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색맹자는 그를 구별할 수 있는 정상인보다 지혜가 적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어제의 날씨와 오늘의 날씨가 다른 것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지혜는 하나보다는 여럿을, 정지해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것을 봄으로써 생겨난다. 나아가 지혜는 알아차림이 있을 때만 일어날 수 있다. 망아와 몰아가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망아의 상태에서는 지혜가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으로서는 지혜를 얻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진정한 지혜는 자신에 대한 지혜라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문제의 출발점이 자기 자신임을 누누이 확인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알아야만 하는데, 자신에 대해 알려면 자신을 알아차려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에는“너 자신을 알라”든가 “자기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흔히 쓰이고 있지만 막상 자기를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를 아는 길임을 가르치는 현자도 보기 어렵다. 그러나 자기를 알려면 오직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 들여다보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그것밖에는 다른 지름길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위빠싸나 수행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랭법이기 때문에 자기를 아는, 가장 중요하고 참다우며 이익이 있고 가치가 있는 앎을 얻기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그 앎은 신이 있다거나 없다는 따위, 나는 이러저러할 것이라는 따위의 그 어떤 선입견도 허용치 않는, 있는 그대로의 봄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믿음의 길로서가 아닌 앎의 길로서 얻어진 지혜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믿느니 의심하느니 하는 문제가 원인 무효가 되는 궁극적인 앎이 되기에 이른다.
또 한 가지 위빠싸나 수행법이 사마타 수행법에 비해 좋은 점은 조화성에 있다. 사마타 수행자는 집중 수행을 멈추고 일상 생활을 할 때에는 수행 주제를 챙기기 어렵다. 그렇지만 위빠싸나 수행자는 일상 생활을 할 때에도 일상 생활하는 자신을 알아차리면 되기 때문에 선정 시간과 생활 시간을 조화시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빠싸나 수행자는 계학이 필요할 때에는 계학으로써 몸을 다스리고, 정학이 필요할 때에는 정학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며, 혜학이 필요할 때에는 얻어진 지혜(정지견)로써 정사를 잘 운용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계정혜 삼학을 조화하여 잘 운용함으로써 자신에게 평정을 주고, 세상과도 다투지 않는 평화를 얻게 되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법의 장점인 것이다.
참고
사념처(四念處) : 아 래
-백골로 돌아갈 육신(中阿含 念處經)-
부처님이 쿠루수의 서울 캄마싯담마에 계실 때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지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곧 사념처법(四念處法)이다. 과거 모든 여래도 이 법에 의해 최상의 열반을 얻었고, 현재와 미래의 여래도 이 법으로 열반을 얻을 것이다. 비구는 그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 이 네 가지에 대해 똑바로 관찰하고 끊임없이 정진하여 바른 생각과 지혜로써 세상의 허욕과 번뇌를 끊어 버려야 한다.
어떤 것이 몸을 바로 관찰하는 법인가, 비구가 숲속이나 나무밑 혹은 고요한 곳에서 몸을 바로하고 앉아 오로지 한 생각으로 호흡을 조절하되, 길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길다는 것을 알고, 짧게 들이쉬고 내쉴 때에는 그 짧다는 것을 알아라. 온 몸으로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 마음을 다른 데로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이 몸을 관찰하되 몸이 어디 갈 때에는 가는 줄 알고 머물 때에는 머무는 줄 알며, 앉고 누울 때에는 앉고 누웠다는 상태를 바로 알아 생각이 그 몸의 동작 밖에 흩어지지 않게 하여라. 어떤 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다만 이 몸 관찰하는 데에 머물게 하여라. 이와 같이 이 몸의 굴신과 동작의 상태를 사실대로 관찰하여 한 생각도 흩어지지 않게 되면, 몸에 대한 형상이 눈앞에 드러나 바른 지혜가 나타나며, 이 세상 어떤 환경에도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이 몸이 애초에 무엇으로써 이루어졌는지 사실대로 관찰해야 한다. 이 몸은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요소가 한데 어울려 된 것임을 밝게 보아야 한다. 솜씨 있는 백정이 소를 잡아 사지를 떼어 펼쳐 놓듯이 비구도 이 몸을 네 요소로 갈라 눈앞에 드러내 놓아야 한다.
숲속에 버려진 시체가 하루 이틀 지나면 부어 터지고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이 이 몸은 그렇게 되고 말리라고 알아야 한다. 그 형상이 눈앞에 역력하면 모든 허망한 경계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숲속에 버려진 시체의 백골, 한두 해 지나 무더기로 쌓인 백골, 다 삭아 가루가 된 해골을 보는 것과 같이 비구들도 그 몸을 주시하되, 이 몸도 저 꼴을 면치 못하리라고 관찰하면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구는 몸에 대해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때와 장소를 따라 그 느끼는 작용에 대해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괴로움을 느끼는 작용, 즐거움을 느끼는 작용,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느끼는 작용이다. 즐거움을 누릴 때는 즐거운 줄 알고, 괴로움을 당할 때는 괴로운 줄 알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을 때는 또한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자기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그 느낌이 눈앞에 나타난다. 느낌이 시시로 변해 고정된 괴로움이나 즐거움, 고정된 불고(不苦) 불락(不樂)이 없음을 알아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구가 느낌에 대해 관찰하는 법이다.
또 어떤 것이 마음을 관찰하는 법인가. 마음에 탐심이 일어나면「이것이 탐심이구나」라고 알고, 탐심을 버리면 버린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뒤바뀐 마음, 넓은 마음, 좁은 마음, 고요한 마음, 산란한 마음, 해탈한 마음,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스스로 낱낱이 안팎으로 살피고,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과 사라지는 것을 관(觀)하여 눈앞에 대하듯 하면 세상의 어떤 집착이라도 놓아 버리게 된다. 이것이 마음을 바로 관찰하는 법이다.
끝으로 어떤 것이 관찰하는 것인가. 안으로 탐욕이 있으면 있는 줄 알고 없으면 없는 줄 알며, 또 탐욕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일어난 것으로 관하고, 일어났을 때에는 없어진 것으로 관하며, 이미 없어진 것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내는 마음, 졸음, 산란한 마음, 의혹 등도 안팎으로 관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하여, 그것이 뚜렷하게 눈앞에 드러날 때에는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게 될 것이다.
비구들, 누구든지 이 사념처관을 단 한달만이라도 법대로 닦으면 탐욕과 불선법(不善法)을 떠나 성인의 길에 들게 될 것이다. 이 사념처관은 중생의 마음을 깨끗이하고 걱정과 두려움에서 건져내며, 고뇌와 슬픔을 없애고 바른 법을 얻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비구들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다들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출전 : 근본불교의 가르침(불광)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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