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의선(觀察義禪)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人法의 無我와 모든 법의 無性을 觀하고 점차적으로 그 밖의 義理를 관하는 것을 말함.
참고
이무아(二無我) : 人無我와 法無我를 가리킴.
인무아(人無我) : 衆生無我·生空·人空·我空이라고도 한다. 實體로의 我가 존재하지 않는 것. 인간의 개인 존재는 五蘊이 한 방편으로 화합된 것으로 하나의 主宰로서 實我가 아니라는 것.
법무아(法無我) : 萬有의 實다운 體性이 없음을 말함.
무아(無我) : 非我라 번역하기도 한다. 我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常), 독립적으로 自存하며(一), 핵심적인 所有, 곧 주인공으로서(主), 지배적 능력이 있는 주체(宰)로 생각되는 영혼적 또는 本體的 實體를 의미한다. 모든 物體에는 이런 我가 없고 我가 아니라고 설하는 것을 諸法無我라고 하며 無我를 觀하는 것을 無我觀이라 한다. 無我는 불교의 근본교리로서 三法印의 하나인 無我印에 해당된다. 이 諸法無我印에서의 我의 뜻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我의 뜻과는 구별해야 할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인도에서는 고래로 brahman교의 교설에 의해 atman(我) 사상이 젖어 있었기 때문에 釋尊은 일차적으로는 그런 의미의 我의 관념을 부인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석존은 我가 될 수 없는 것, 我가 있지 않은 것, 我라는 집착에서 떨어질 것, 我가 아닌 것을 我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으며, 我라는 관념,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배제하는 사고방식, 我는 존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었다. 팔리어 聖典에서의 無我의 원어는 anattan이다. 그 뜻은 「我가 아니다」라는 의미와 「내가 있지 않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초기 佛敎에선 결코 「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없었다고 한다. 원래는 「我에 대한 집착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Upanisad 철학에서는 我를 實體視하는 것에 비해서 佛敎에서는 이런 見解를 거부한 것이다. 이것은 我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고 客體的, 기능적인 我를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반대한 것이다. 我의 存在 · 不存在라고 하는 形而上學的 문제에 대한 대답은 석존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참다운 나의 문제는 존재적 존재가 아닌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므로 존재 · 非存在의 관념적 · 논리적 차원을 초월한 영역이기 때문에 석존은 일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석존은 다만 곧 「나의 것」이라는 觀念을 버리라고 가르쳤다. 원시불교에서는「五蘊의 하나하나가 苦이므로 非我이다」라는 敎說, 또「無常이므로 無我이다」라는 敎說(雜阿含經 卷三)이 있다. 이것은 我가 아닌 것을 我, 곧 我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특히 身體를 나의 것, 我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라는 觀念」을 排除하고자 했다. 說一切有部에서는 人無我를 말하며 아를 부정하였으나 諸法을 實有라 하고 法無我는 말하지 않았다. 뒤에 와서 차차 「我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의 無我說이 확립되었으며, 이런 입장은 說一切有部, 초기 大乘佛敎에도 계승된다. 이렇게 하여 無我에는 人法二無我의 說이 있게 됐다. 有情(살아 있는 것들 : 衆生) 은 五取蘊(凡夫의 생존을 이루는 物心의 다섯가지 요소(五蘊))의 假和合的 존재이므로 이런 五蘊的 假和合體를 實體的인 생명의 주체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人無我라고 칭한다. 또 모든 것은 因緣(結果를 내는 親因은 因, 結果를 내는데 보조되는 것은 緣)에 따라 나타난 것(假로 성립되는 것)이므로 그것에는 원래 고유한 獨自的 本性(自性)이 없다고 하는 것을 法無我라고 한다.
① 阿含에는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하며, 이에 따라 변천하고 사라져 가는 無常한 것이며, 마음대로 되지 않는 苦이므로 無我라고 한다.
② 有部에서는 我空法有라 하여 人無我를 說하고 있지만,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는 각각 自性이 있다고 보아 法無我를 설하지 않는다.
③ 成實論에서는 五蘊안에 참된 自我가 없다고 보고 人無我를 觀하는 것을 空觀, 五蘊의 法이 다 無常이어서 참된 自性이 없다고 보아 法無我를 觀하는 것을 無我觀이라고 한다.
④ 대승불교에서는 이 無我說이 空觀과 관련되어 無我란 사물에서 나(영원불멸의 本體, 고정적 실체)가 없다. 곧 無自性의 뜻이 있다고 論하여(中論 卷二二 · 二三) 無我(人無我와 法無我 我法二空) 를 설했다. 〔二種無我相謂人無我及法無我 楞伽經卷一〕특히 唯識宗에서는 三性說에 따라 三無我를 세우고 또 阿賴耶識과 관련시켜 無我를 고찰하여서 阿賴耶識의 本性은 空이므로, 諸法은 阿賴耶識중의 種子의 顯現에 불과함으로 無我라고 論하고 있다. 實我實法은 情有理無로 참된 我의 相이 없으므로 無相無我, 依他起의 似我似法은 如幻假有로서 집착된 我의 相과는 다르므로 異相無我, 圓成實은 識의 實性으로 無我의 상태에서 나타난 眞如를 自相이라고 하므로 自相無我라고 한다.
법(法) : 범어 dharma의 번역. 達磨 · 䭾摩 · 曇摩 · 曇無 · 曇은 그 음역이다. 任持(또는 能持)自性 · 軌生物解의 두 뜻을 갖는다고 한다. 곧 그 자체의 自性(獨自의 本性)을 간직하여 改變하지 않고 軌範이 되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일정한 事物의 이해를 낳게 하는 근거로 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法은 任持自性의 의미로 본다면 自性으로 존재하고 있는 일체의「存在」를 가리키고, 軌生物解의 의미에서 말하면 認識의 표준이 되는 규범 · 法 · 方則 · 道理 · 敎理 · 敎說 · 眞理 · 善(行)을 가리키는 것으로 된다. ① 色法 · 心法 · 一切諸法 · 萬法 등이라고 하는 法은 모든 존재를 의미한다. 또 諸法을 有爲 · 無爲, 色 · 心, 染 · 淨 등의 二法으로 나누고, 혹은 三法 · 四法 등으로 나누는 경우의 法語도 존재를 의미한다. ② 佛의 가르침을 佛法 · 敎法 · 正法이라고 하고, 外道의 가르침을 邪法이라 일컫는 것처럼 法語는 행위의 규범, 교설의 의미이다. 무릇 진리라고 하는 것은 불변하는 보편의 道理이므로 法이라 부르는 것이 어울리는데, 그 眞理를 說하는 것이 佛의 敎說이기 때문이다. 또 佛法을 들으므로서 얻어지는 기쁨을 法喜 · 法悅, 佛法의 진리의 맛에 접하는 것을 法味, 法味를 좋아하고 사랑하여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法樂(佛神앞에, 大乘의 經論을 읽고 講하고 또 法會 끝에 伎樂을 연주하여 本尊을 공양하는 것을 法樂이라고 한다), 佛法을 총괄해서 모은 것을 法聚 · 法蘊, 佛法의 義理를 法義, 佛法의 계통이 같은 것을(세상의 親類眷屬에 비유해서) 法類 · 法眷이라 한다. 佛法을 說한 經論 등의 문구를 法文, 佛法의 위력, 正法의 힘을 法力이라 한다. 佛法은 涅槃에의 門戶이기 때문에 法門, 번뇌의 魔軍을 調伏시키므로 法劒이라 한다. 佛이 남긴 가르침을 遺法, 佛法을 闇夜(암야)의 燈火에 비유하여 法燈 · 法光 · 法炬, 모든 생물에게 혜택을 주는 慈雨에 비유해서 法雨라고 한다. 기타 法海 · 法聲 · 法道 · 法筵 · 法衣 · 法師 등 여러 종류의 숙어가 있다. 이와 같은 法의 의미에서 변하여, 佛陀의 가르침을 說하여 보인 구체적인 경전까지도 法이라고 하고 또 도덕적 軌範의 의미로서 善行도 法이라고 칭한다. ③ 성질 · 속성의 의미. 因明(論理學)에 있어서는 宗(論證해야 할 주장)의 賓辭를 法이라고 하고 主辭를 有法이라 한다. 賓辭에 의해서 主辭를 표시한 물체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 표시되기 때문이다.
무성(無性) : 諸法은 인연의 화합에 의하여 생기고 自性이 아니라는 말.
관(觀) : 범어 vipasyana의 번역. 毘鉢舍那, 毘婆舍那, 毘波奢那로 음역하며, 觀察이라고도 한다. 또, 智慧로 객관의 對境을 照見한다는 뜻인데, 觀念과 同義로 쓰일 때도 있다.
① 九想觀이나 日想觀처럼 종종의 想을 마음에 떠올려서 觀하는 初步的인 觀을 觀想이라 한다. 天台宗에서 말하는 觀은 一念三千 一心三觀처럼 자기의 心의 本性을 觀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觀心이라고 한다. 觀은 悟境에 통하는 道이므로 法相宗 · 華嚴宗에서는 이것을 觀道라고 한다. 觀의 對境을 觀境, 觀하는 智慧를 觀智, 觀하는 방법을 觀門 · 觀法이라 한다. 또 觀은 止(범어 samatha. 奢摩他 心을 하나의 對境에 집중시켜 생각을 쉬게 하는 것)에 상대되는 말이다. 그러나 中道觀 등의 觀은 止와 觀이 잘 조화된 상태(止觀均行)를 나타내는 捨(범어 upeksa)의 의미와 附合한다. 또 觀에는 禪定(범어 dhyana)의 의미도 있으므로 禪定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出觀· 出定이라고 한다.
② 觀의 내용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諸法을 分析하여 空한 것으로 觀하는 小乘 및 成實宗의 觀法을 析空觀(析色入空觀·生滅觀)이라 하며, 이에 대해 大乘의 觀法은 因緣을 따라 일어난 諸法의 當體에 卽一해서 現象界 그대로 空한 것으로 體達하는 觀이므로 이것을 體空觀(體色入空觀)이라고 한다. 요컨대 觀은 心을 하나로 專心하여 智慧로써 佛과 法의 일정한 대상을 觀察하고 念思하여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다. 眞言宗에서는 悉曇五十字母의 첫째 字인 阿자에는 本初의 뜻과 不生의 뜻이 있다고 하며, 이 阿字 위에 우주·인생을 該攝總括시켜 그 本不生의 理를 觀하는 것을 阿字觀이라고 했다. 往生要集에는 佛의 相好光明을 총괄적으로 觀하는 것을 總相觀이라 하고 華座를 비롯해서 白毫 등 佛身의 하나하나의 相好를 별개적으로 觀하는 것을 別相觀이라 했다. 三論宗에서는 八不中道의 觀은 空에도 有에도 집착하지 않는 無所得中道의 正觀이란 뜻으로 無得正觀이라 한다. 眞如의 理를 觀함에 있어 名字의 相, 心念의 相, 곧 名相을 여의어 眞如의 경계에 冥合하는 觀法을 理觀 또는 無相離念이라 하며, 이와 반대로 佛이나 淨土를 觀함에 있어 差別的이고 具體的인 相을 세워서 여기에 마음을 두고 觀想하는 것을 事觀·立相住心이라 한다. 占察經에서는 唯識觀과 實相觀을 二종의 觀法으로 든다. 十二因緣의 理를 觀하는데 淺深의 구별이 있으니, 聲聞의 觀은 가장 低劣한 觀이므로 下智觀, 緣覺의 그것은 中智觀, 菩薩의 그것은 上智觀, 佛의 觀은 가장 殊勝하므로 上上智觀이라 일컬었으며 이것을 四乘의 觀智라고 했다. 懺悔滅罪의 방법으로서 (1) 生死(迷惑의 世界)에 流轉하는 것은 자신의 罪障의 因緣 때문이라고 觀하고 (2) 그 인연에 따라서 生死에 流轉하는 자신의 不淨한 果報를 觀하며, (3) 佛性을 開顯해야 할 자신임을 觀하며, (4) 如來의 몸에 具足하고 있는 利他哀愍의 德을 觀하는 것을 四種觀行이라고 한다.
의리(義理) : ① 이유. 도리. 사항의 절차. ② 경전이 설명하는 의의·도리·이유.
선(禪) : 범어 dhyana의 音略. 禪那 · 馱衍那(타연나) ․ 持阿那 등이라 음역하고, 靜慮 · 思惟修習 · 棄惡 · 功德總林 등으로 번역한다.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專注해서 자세히 思惟하는 것을 말하고, 定과 慧가 均等한 것을 말한다. 禪은 大乘 · 小乘 · 外道 · 凡夫의 전체에 걸쳐서 닦게 되는데 그 목적이나 思惟의 대상은 각기 다르다. 禪 및 기타 定을 넓은 의미로 禪定이라고 하고, 혹은 禪은 定의 1종이기 때문에 禪을 닦아서 沈思하는 것을 禪思라고 한다.
① 아함이나 部派불교 등에서 禪을 尋 · 伺 · 喜 · 樂 등의 有無에 의해서 4종으로 나누어 四禪이라 한다.
色界의 四禪天은 四禪을 닦는 자가 나는 곳이라고 하고, 사선천에 나기 위하여 닦는 四禪을 定靜慮, 태어나서 선천적으로 四禪을 얻는 것을 生靜慮라고 한다. 또 유루와 무루의 정려를 섞어서 닦는 것을 雜修靜慮라 하고, 구사론 권이십사에는, 아라한 또는 不還果의 성자에 한해서 닦는다고 한다.
② 大乘에서는 六波羅蜜 혹은 十바라밀의 하나로 禪波羅蜜(선정바라밀 ․ 靜慮바라밀)을 들고, 보살이 반야의 實智를 얻어 또 신통을 얻기 위해서 닦는다고 한다. 보살 地持經 권 六이나 유가론 권43 등에는 禪波羅蜜에는,
(1) 自性禪. 自性靜慮라고 하고, 정려의 자성, 곧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멈추게 하는 바의 心一境性을 말함. 또 마음의 자성을 觀하는 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禪.
(2) 一切禪. 一切靜慮라고도 하고, 自行化他의 모든 법을 다 攝收하는 禪의 뜻.
(3) 難禪. 難行靜慮라고도 하고, 닦기 어려운 禪의 뜻으로, 중생을 위한 좋은 계략과 혜택을 주기 위해서 선정의 즐거움을 버리고 욕계에 태어나고 또한 이 禪에 의해서 가지가지의 삼매를 불러 일으켜, 無上菩提를 깨닫는다.
(4) 一切門禪. 一切門靜慮라고도 하고, 門이라 함은 출입의 뜻으로, 모든 선정이 이 四禪을 門으로 하여 여기에서 나가고, 여기에 들어오는 것을 말한다.
(5) 善人禪. 善士靜慮라고도 하고, 선정의 즐거움에 애착하지 않고, 사무량심과 같이 일으키는 禪. 뛰어난 善根의 중생이 닦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6) 一切行禪. 一切種靜慮라고도 하고, 대승의 모든 행을 攝收하고 있기 때문에 一切行이라 한다. 여기에 善禪 · 無記化化禪 · 止分禪 · 觀分禪 · 自他利禪 · 正念禪 · 出生神通力功德禪 · 名緣禪 · 義緣禪 · 止相緣禪 · 擧相緣禪 · 捨相緣禪 · 現法樂住第一義禪의 13종이 있다.
(7) 除煩惱禪. 遂求靜慮라고도 하고, 중생의 여러 가지 고뇌를 없애는 禪.
(8) 次世他世樂禪. 次世他世樂靜慮라고도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현재 · 미래의 모든 즐거움을 얻게 하는 禪.
(9) 淸淨淨禪(청정정려라고도 하고, 모든 惑 · 業을 다 끊고, 大菩提의 果를 얻기 때문에 淸淨이라 하고, 이것을 世間淸淨不味不染汚禪, 내지 煩惱智障斷淸淨의 10종으로 나눈다)의 9종의 相이 있다고 하며, 이것은 보살만이 닦는 훌륭한 禪이기 때문에 9종大禪이라 한다. 법화현의 권四 上에는 世間禪 · 出世間禪 · 出世間上上禪의 3종禪을 설하고, 그 가운데 출세간상상선을 9종으로 나눈 것을 9종大禪이라 하고, 여기에 대해서 출세간선을 觀禪境의 相을 觀하는 禪으로 九想 등) · 練禪(유루의 禪을 鍛鍊해서 청정하게 하는 바의 무루선으로 九次第定을 말함) · 熏禪(모든 禪을 熏熟해서 다 通達無 轉變自在하게 하는 師子奮迅三昧를 말함) · 修禪(順逆自在로 超入超出하는 超越三昧를 말하는 것으로 頂禪이라고도 한다)의 4종(略해서 觀練熏修라고 한다)으로 나누어서 뒤에 것 만큼 우수하다고 한다. 또 같은 곳에 根本舊禪 · 練禪 · 熏禪 · 修禪 · 九大禪을 乳 또는 醍醐의 五味에 비유하여, 四禪 · 四無量 · 四無色의 3종의 禪定을 12門禪이라 한다). 이 12門禪은 世間禪 중의 根本味禪으로서, 여기에 대해서 천태종에서는 六妙門 · 16特勝 · 通明禪(通明觀, 通明觀禪이라고도 하고, 息 · 色 · 心의 셋을 通觀하여 明淨하게 되며, 또 六通과 三明을 얻는 바의 四禪 · 四無色 · 滅盡定의 9)을 世間의 根本淨禪이라고 한다. 또 大乘入楞伽經 권三에는, 禪을,
(1) 聲聞이 人無我의 이치를 알아서 닦는 愚夫所行禪,
(2) 보살이 法無我의 이치까지도 알아 그 의미를 생각하는 觀察義禪,
(3) 思慮나 분별을 넘어, 마음의 작용을 일으키지 않고 곧바로 있는 그대로 진여를 깨닫는 攀緣眞如禪,
(4) 여래의 깨달음에 들어가서 중생을 위하여 不思議한 작용을 나타내는 諸如來禪의 四種禪으로 나누고, 또 宗密의 禪源諸詮集都序 권上에는 外道禪 · 凡夫禪 · 小乘禪 · 大乘禪 · 最上上禪의 5종으로 나눈다.
③ 중국에서는, 各宗이 각각의 교리에 바탕하여 禪定을 닦았는데, 이것과는 별도로 菩提達磨가 전한 禪이 행해졌다. 이 禪은 楞伽經등의 사상에 의하여 發源한 것 같은데, 敎外別傳 不立文字 곧 經典이외에 석존이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법이라고 하여, 경전의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坐禪이나 棒 · 喝(할) 등의 방법을 써서 중생의 본래의 면목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唐代에는 牛頭禪 · 北宗禪 · 南宗禪 등의 流派가 있었고, 뒤에는 남종선만 성하고 臨濟 · 曹洞 등의 宗이 각기 독자적인 宗風을 가졌는데, 宗密은 唐代의 禪宗을 셋으로 나누어,
(1) 息妄修心宗(밖의 대상과 안의 마음을 나누어, 대상을 등지고 마음을 觀하여 妄念을 없애려고 하는 宗),
(2) 泯絶無寄宗(범부 등의 모든 법은 夢幻과 같고, 無에 達하는 지혜도 不可得이기 때문에, 마음에 붙일 곳이 없고 本來無라고 體達하는 宗),
(3) 直顯心性宗(모든 현상적인 相은 空도 有도 다 眞如의 本性에 不外하다고 體得하는 宗) 이라 했다. 또 宗密은, 敎禪一致의 입장에서 菩提達磨의 禪을 最上上禪, 혹은 如來淸淨禪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교외별전의 입장을 力說하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달마가 전한 禪을 如來禪이라고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는 說이 나돌아 中唐이후 달마가 전한 禪을 祖師에서 祖師로 전한 禪이라고 하는 뜻으로 祖師禪, 또 純粹한 禪이라고 하는 뜻으로, 一味禪이라고도 부르고, 宗密의 입장을 깎아서 如來禪 · 五味禪이라 했다. 더욱이 祖師禪의 무리는 諸善萬行을 다 有相이라고 물리쳤는데, 그 反動으로 하여 事理雙修 禪淨共行의 입장이 생겨 禪과 같이 淨土敎의 염불을 닦는 사람도 나왔다.
④ 禪宗에서는 서로 그 宗風을 비평하는 수가 있고, 臨濟의 大慧宗杲는 曹洞의 天童宏智의 禪風을 평하여 黙念不動으로 固著해서 潑刺하고도 날카로운 기능을 缺한 黙照禪이라고 하고, 거꾸로 宏智는 宗杲의 禪風을 평하여 公案의 工夫에 머무르는 看話禪이라고 하였다. 또 宋末에는 깨달음을 기대해서 좌선하는 待悟禪의 風이 유행하였는데, 宏智나 道元은 이 풍습을 경계하여, 坐禪 그 자체가 佛行이며, 第一義라고 하였다. 또 말뚝(木杭)과 같이 부질없이 空을 탐하여 坐禪하는 것을 癡禪, 癡室이라고 評하는 경우도 있다.
⑤ 律에는, 禪定을 닦는 때에 靜止를 편안하게 하고, 腹部를 차지 않게 하기 위하여 허리에 감는 禪帶나 졸음을 쫓기 위하여 나무 조각을 끈으로 묶어서 이마에 매어두는 禪鎭 등의 규정이 있다.
범소유상(凡所有相) : 대저 온갖 모양은,
개시허망(皆是虛妄) : 모두 허망한 것이니,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모양이 모양 아닌 줄을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 바로 여래를 보리라.
출전 : 불교학대사전
-나무 관 세 음 보 살-
“욕심을 가능한한 적게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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